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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기록에 없음
2. 계사년 2월 (15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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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2월은 대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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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1일 (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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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만호(황정록) ∙ 여도권관(김인영) ∙ 순천부사(권준)이 와서 모였다. 발포진무 최이(崔已)가 두 번이나 군법을 어기었으므로 군률로써 처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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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2일 (정해) 늦게야 개었다. [양력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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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가장 ∙ 사도첨사(김완) ∙ 흥양현감(배흥립) 등의 배가 왔다. 낙안군수(신호)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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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3일 (무자) 맑다. [양력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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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군수(김득광)이 미쳐 오지 못했다. 동쪽 상방으로 나가 앉아 순천부사 ∙ 낙안군수 ∙ 광양현 감과 한참 동안 의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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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경상도에서 옮겨온 공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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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金水男) 등이 명부에 올린 수군 여든 여 명이 도망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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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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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뇌물을 많이 받고 잡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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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므로, 군관 이봉수(李鳳壽) ∙ 정사립(鄭思立) 등을 몰래 파견하여 일흔 여 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어 주고, 김호걸(金浩乞) ∙ 김수남(金水男) 등을 그날로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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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덟 시쯤부터 비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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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4일 (기축) 늦게야 개었다. [양력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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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동쪽이 아홉 발이나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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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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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셧 시쯤부터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바람조차 몹시 사납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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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5일 (경인) 비가 억수같이 내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양력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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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날이라 둑제(대장기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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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을 먹은 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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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수(김득광)는 이슥한 밤에 육지를 거쳐 달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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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아래에 붙잡아 놓고 기일을 어긴 죄를 문초하며 그 대장(代將)에게 따졌다. 그랬더니 순찰사 등이 명나라 군사에게 음식을 이바지하는 차사원으로서 강진 ∙ 해남 등지의 고을로 왔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역시 공무이므로 그 대장과 도훈도 및 아전들을 처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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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이언형이 작별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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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6일 (신묘)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양력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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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세시에 첫나발을 불고 동틀 무렵에 둘째나발과 세째나발을 불었다. 배를 풀고 돛을 올렸으나, 정오 때에 맞바람(샛바람)이 불어 저물어서야 사량에 이르러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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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임진) 맑다. [양력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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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떠나 곧장 견내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이미 먼저 와있었다. 그와 함께 서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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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흠(奇叔欽)도 와서 보고, 이영남(李英男) ∙ 이여염(李汝恬)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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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8일 (계사) 맑다. [양력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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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에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어긴 잘못을 몹시 탓하고는 지금 먼저 떠나자고 했다. 나는 애써 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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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기다려 봅시다. 오늘 안으로 도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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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언약을 하였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와서 모이니, 바라보는 사람마 다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으며 기뻐 날뛰었다. 온 것을 보니 거느리고 온 것이 마흔 척 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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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날 오후 네시쯤에 출항하여 초저녁에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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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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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9일 (갑오) [양력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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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나발을 불고 둘째나발을 불고 나서 다시 날씨를 보니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출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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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그대로 머물러 출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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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10일 (을미)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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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여섯 시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 웅포에 이르니, 적선이 줄지어 정박했는데, 두 번이나 유인했으나, 진작부터 우리 수군을 겁 내어 나올 듯하다가도 돌아가 버리므로, 끝내 잡아 없애지 못하였다. 참으로 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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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쯤에 도로 영등포뒤의 소진포(장목면 송진포)에 이르러 배를 대고서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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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병신일(11일) 아침에 순천탐후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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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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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병신) 흐렸다. [양력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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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를 쉬게 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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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정유) 아침엔 흐리다가 저녁나절에는 개었다. [양력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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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의 군사가 일제히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 ∙ 웅포에 이르니, 왜적들은 어제와 같다. 나아갔다 물러갔다하며 유인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뒤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하니, 어찌할꼬! 너무도 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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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저녁에 도사가 우후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것은 명나라 장수에게 줄 군용 물품을 배정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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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칠천도에 이르자,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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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무술) 비가 창대 같이 내렸다. [양력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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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쯤에야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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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토벌에 관해 의논할 일로 순천부사(권준) ∙ 광양현감(어영담) ∙ 방답첨사를 불러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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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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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장이와 화살장이 대방(大邦) ∙ 옥지(玉只) 등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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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기해) 맑다. [양력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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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의 제삿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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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왔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수사(원균)는 병으로 모이지 않고, 전라좌우도의 장수들만이 모여 약속하는데, 다만 우후가 술에 취하여 마구 지껄이며 떠드니, 그 기막힌 꼴을 어찌 다 말하랴. 어란포만호(정담수) ∙ 남도포만호 강응표(姜應彪)도 역시 그러하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무찌르는 일로 모이는 자리에 술이나 만취되어 이렇게까지 되니, 그 인물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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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헤어져서 진 친 곳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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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첨사 전응린(田應 )이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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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경자)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양력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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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따뜻하고 바람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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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을 걸고 활을 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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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왔다. 사량만호 ∙ 소비포권관 ∙ 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도 같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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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에서 또 수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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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순찰사 영의 아전이 보낸 고목에는 명나라 군사가 2월 초1일에 에 들어가 왜적들이 모두 섬멸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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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녁에 원균(元均)이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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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신축) 맑다. [양력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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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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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영의정 정철이 사은사가 되어 북경에 간다고 했다. 그래서 노비단자를 정원명에게로 부치면서 그것을 가져다가 행차하는 일행에게 전하라고 일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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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보고 함께 밥을 먹고서 갔다. 순천부사 ∙ 방답첨사도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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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쯤에 신환(愼環) 과 김대복(金大福)이 교서 두 장과 부찰사의 공문을 가져 왔는데 보니,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송도(松都)를 치고, 이 달 초6 일에는 마땅히 서울에 있는 왜적을 함몰시키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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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임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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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샛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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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제히 이영남(李英男) ∙ 허정은(許廷誾) ∙ 정담수(鄭聃壽) ∙ 강응표(姜應彪) 등이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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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우수사(이억기)에게 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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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온 진도군수 성언길(成彦吉)을 봤다. 우수사와 함께 영남우수사(원균)의 배에 갔다가 선전관이 임금님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는 소문을 듣고, 저물어 돌아 갈 즈음에 길에서 선전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노를 바삐 저어 진으로 돌아올 때에 선전 표신(表信)을 만났으므로 배위로 맞아 들여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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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적의 퇴로를 끊고 도망하는 적을 몰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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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었다. 즉시 받았다는 답서를 써 부치고 나니, 밤이 벌써 두 시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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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계묘) 맑다. [양력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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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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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첨사(김완)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 ∙ 녹도가장 ∙ 좌우 별도장 ∙ 좌우돌격장 ∙ 광양이선 ∙ 흥양대장 ∙ 방답이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진해시 웅천2동)에 복병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유인케 하니, 과연 적선 열 여 척이 뒤따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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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복병선 다섯 척이 재빨리 나가 쫓을 때, 나머지 복병선들이 일제히 적선들을 에워싸고 여러 무기들을 쏘아대니, 왜적의 죽은 자의 수효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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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어져 다시는 나와서 항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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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어서 사화랑(진해시 웅천2동)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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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갑진) 맑다. [양력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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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를 띄울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무르고 출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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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현령에게 붓과 먹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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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남해현령이 와서 봤다. 고여우(高汝友)와 이효가(李孝可)도 와서 봤다. 그대로 사화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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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을사) 맑다. [양력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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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출항하자 샛바람이 약간 불더니, 적과 교전할 때에는 바람이 세게 불어 배들이 서로 부딪치고 깨어질 지경이다. 거의 배를 감당할 수 조차 없다. 곧 호각을 불게 하고 초요기(지휘기)를 올려 싸움을 중지시키니, 여러 배들이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양의 한 척, 방답의 한 척, 순천의 한 척, 본영의 한 척이 서로 들이 받아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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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기 전에 소진포로 돌아와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93
이 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아났는데, 순천부사(권준)가 노루 한 마리를 잡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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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병오)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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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남(李英男) ∙ 이여염(李汝恬)이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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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사 원균(元均)과 순천부사 ∙ 광양현감도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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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자정이 되서야 그쳤다.
98
2월 22일 (정미)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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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하여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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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바람이 멎는 듯하므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삼혜와 의능 두 승장과 의병 성응지(成應祉)를 제포(진해시 웅천2동)로 보내어 곧 상륙을 하는 체 하게 하고,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들은 변변찮은 배들을 골라서 동쪽으로 보내어 이들도 상륙하는 체 하게 했더니, 왜적들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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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틈을 타서 모든 배를 몰아 일시에 무찔렀더니, 적들은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였는데, 발포의 두 배와 가리포의 두 배가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돌입하다가 그만 얕은 곳에 얹혀(좌초), 적에게 습격받은 것은 참으로 통분하여 가슴이 정말로 찢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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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니, 진도의 지휘선 한 척도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하게 되지 못하게 될 즈음에 우후가 곧장 달려가 구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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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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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통분하다. 이것을 경상도 우수사에게 파 물었다. 한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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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통분함을 어찌 다 말하랴. 모두 경상우수사(원균)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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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을 달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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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에서 뇌와 분의 편지가 웅천 진중에 왔고, 어머니 편지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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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무신)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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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봤다.
110
식사를 한 뒤에 원균(元均) 수사가 오고, 천부사 ∙ 광양현감 ∙ 가덕첨사 ∙ 방답첨사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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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는 소비포권관 ∙ 영등포만호 ∙ 와량첨사 등이 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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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하는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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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보가 양화진(고흥군 영남면 양화리)에서 와서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또 조도어사의 편지와 공문을 전했다.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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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기유) 맑다. [양력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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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아산 ∙ 온양 편지와 집안 편지를 아울러 써서 보냈다.
116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니, 비가 몹시 퍼부어 곧장 다다를 수 없으므로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117
비가 그치자,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영감 ∙ 순천부사 ∙ 가리포첨사 ∙ 진도군수 성언길(成彦吉)과, 노는 계집을 빼놓고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118
초저녁에 배 만드는 기구를 들여 보내는 일로 패자(牌字: 계급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보내는 글)와 흥양에 갈 공문을 써 보냈다. 양식에 쓸 쌀 아흔 되를 자염과 바꾸어 보냈다.
119
2월 25일 (경술) 맑다. [양력 3월 27일]
120
풍세가 불순하므로 그대로 칠천량에 머물렀다.
121
2월 26일 (신해)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8일]
122
종일 머물렀다.
123
2월 27일 (임자)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9일]
124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125
2월 28일 (계축) 맑으며 바람조차 없다. [양력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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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출항하여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적들은 기가 죽어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127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목(禿沙伊項: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달려가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군관의 배와 가덕첨사의 사후선(척후선) 등 두 척이 섬에서 들락날락 하는데, 그 짓거리가 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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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를 잡아 매어 경상수사 원균에게 보냈던 바, 수사(원균)가 크게 성을 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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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그 본의는 군관을 보내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130
초저녁에 아들 염(苒)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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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랑에서 잤다.
132
2월 29일 (갑인) 흐리다. [양력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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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몹시 불까 염려되어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134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와서 봤다.
135
순천부사 ∙ 광양현감도 왔다.
136
경상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137
2월 30일 (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1일]
138
봉창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