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소고
박 정 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섣달 그믐날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저녁 해는 아파트에 가려져 일몰 하는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하게 생겼다. 내일은 음력 초하루 설날이다. 명절이라도 제사 지내려 큰댁에 가지를 못하니 아들네 가족들이 일찍 왔다. 음식 준비도 며느리와 서둘러서 하니 일찌감치 끝냈다.
지난해보다는 좀 나은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코로나는 오히려 더 극성을 부리며 물러설 줄 모르고 감염된 확진자수가 급속도로 늘어가니 즐거운 명절인데 온 국민의 맘을 옥죄어 놓는다. 가정적으로도 크고 작은 문제가 풀릴 줄 알았지만 조금도 진척이 없다. 내년이면 괜찮겠지 하던 희망은 세월이 갈수록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잦은 병원 출입이 노인임을 증명해 준다.
푸쉬킨의 시귀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누구나 지나간 세월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조부모님,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삼 남매, 살림은 크게 넉넉지는 않았지만 객지에 보내어 딸아이 공부시킬 형편은 되었으니 시골에서 중상 형편은 되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인자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금슬이 좋았던 아버지 어머니, 딸처럼 어머니를 사랑해주셨던 할머니, 항상 가족끼리 서로 위하며 살아왔기에 그 화목함은 집집마다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시면서 부모님께서 조심하며 서로 불평 않고 사신듯하다. 동네 소문 날 정도로 가정이 화목했던 우리 집 결혼하고 보니 약간에 부부 싸움도 보고 자라는 것도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잣집 딸을 데리고 와서 고생시키는 아버지의 미안함, 어머니는 아버지 고운 성품이 처가에서 기를 못 펴는 아버지 모습이 그렇게 가슴이 아파 싫은 소리 못하고 한 평생을 살았다고 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 평생 미안함을 안고 간다는 말씀을 듣고 어머니는 두고두고 남편에게 후회 없도록 잘 하라는 말씀을 딸들에게 하셨다. 어릴 때 받았던 사랑이 가슴이 아리도록 그립다. 지금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부모고 시어미 일까?
70여 년 전 함께 공부했던 초등학교 동창들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하나같이 그때가 그립다고 한다. 동기회 모임에는 입학은 했지만 졸업은 함께 하지 않았던 고향 친구들은 동기회에 나온다. 6학년 2학기 때 그 당시 부잣집 아들이 대구로 전학을 간다고 했다. 공부도 잘하고 마음씨 착한 부잣집 남학생이 전학을 간다기에 말은 못 하고 너무 서운했다. 방과 후에 과외 수업을 받던 여학생 3명이 돈을 모아 눈깔사탕을 사서 그 남학생 책상에 넣어 놓았다. 그렇게 해놓은 3명은 우리가 사놓았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말자고 약속을 했다. 남학생은 이상한지 자꾸 남자 친구들 보고 누가 사탕을 넣었느냐고 궁금해 하지만 우리는 약속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 친구가 오랜 세월이 흘러 교수님이 되어 동창회에 참석했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 사탕은 어느 여학생이 그랬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 여학생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처음 동창회 나와 40년 만에 심경을 고백했다. 틀림없이 너희 셋 중에 있지 싶다면 누구냐고 물었다. 셋이 깔깔 웃으며 아득한 옛일을 고백했다.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친구가 전학을 간다기에 너무 서운해 셋이 돈을 모아 눈깔사탕을 사서 책상 안에 넣어두었다고 했다. 어렴풋이 그런 줄을 느꼈지만 나이가 들수록 너무도 아름답고 순수한 시절 함께했던 의문의 여자 친구를 그리워했다고 했다. 여전히 어릴 때 착한 모습을 보이면서 역시나 생각한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아름다운 추억은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많이도 변한 섣달 그믐날의 세시풍습, 더구나 작년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가족끼리 만남도 교대식으로 부모를 찾아온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흘러 나 또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보니 그 옛날에 할아버지 할머니께 드렸던 묵은해 과세를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에게 받았다. 지금 내 손주들로부터 세배를 받으니 옛날로 돌아간 듯하다. 백 살을 산다고 해도 22번 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들이다. 양력을 보냈고 음력도 한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마음은 그 옛날 고향에서 뛰놀고 있다. 서산에 걸려있는 인생 80을 누려오면서 맞이하는 해보다 보내는 해가 더 아쉬워진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노인 친구끼리 서로 하는 인사말은 “ 올해도 지난해처럼 보내시길 바랍니다.” 라고 하는 인사가 올해도 생존하시기를 바란다는 뜻의 인사란다. 조금은 부족한 듯한 살림살이 조금은 빠진 듯한 용모가 조금은 남에게 떨어진 듯한 지식이 겸손을 가르친다고 했다. 모든 것이 채워져 있으면, 교만해진다는 교훈인가? 코로나로 모두를 잃어버린 듯 혼자 집에 있을 때가 많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 채워가면서 더 채워지기를 바랐던 젊은 날의 삶의 모습, 아이들을 떠나보낸 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저울질 해본다.
첫댓글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세월이 흐르고 나니 눈깔 사탕같이 달콤하던 어린 시절이 새삼 그리워지는가 봅니다.
옛날을 회상하고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