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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98
그것도 그럴 것이 ‘이규재래’라 불리 우는 비발쌍부는 원재혁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오라버니가 그렇게 바꾸었답니다. 원한을 잊지 않겠다면서... 단리란 성
을 쓰는 것은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랬었나...”
비발쌍부 원재혁은 사실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두 자루의 도끼를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멋지게 구사하여 수호지의 백팔영웅중 도끼의 신이라
는 이규를 보는 듯하여 ‘이규재래’란 별칭까지 얻었고 강호 50대 고수 중
도끼를 사용하는 유일한 인물로 등재되어 있는 특이한 무인이었던 것이다.
“근데 비발쌍부의 소식을 요 근래에 들은 기억이 없구나. 어찌된 일이냐?
설마...”
뒷얘기는 하지 못했다. 천지간에 오라비 하나와 서로를 의지하며 힘겹게 일
보일보를 딛고 있는 것 같은데 차마 그 말만은 꺼내기 어려웠다. 나이 젊고
,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던 무인이 갑자기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재기불능의 부상이나...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단리혜의 입에서는 다른 대답이 나왔다.
“오라버니는 몇 년째 연락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남궁선유의 노안이 흐려졌다. 엎어 치나 메치나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하
나밖에 없는 누이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는 처지라면 거동을 못할 상태인
것이다. 목숨이 붙어있건 안 붙어있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정도라면 무인
으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리
혜로는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 애틋한 마음을 어찌 짐작하지 못하랴.
“연락이 안 된다... 허어, 걱정이구나.”
실종은 답이 없다. 영원한 기다림의 지루한 반목이지만 바꾸어 말한다면 완
전히 끝난 건 아니라는 믿음과 기다림이 있기에 미결(未決)인 채로 사람들
은 종종 남겨두고 싶을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졌다. 축축해지는 공기가 아니더라도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처
럼 오연히 세상에 군림하고 있었고 이시간이 되면 둥지로 돌아가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단리혜의 가련한 인생이 눈에 밟히지만 그건 무인의 길을
걷는 사람, 혹은 무인세가의 일원 중 패배자가 되었다는 경우의 수에 채택
되었다는 것뿐이고 그건 누구라도 해당가능한 일이기에 격려 이외에는 해줄
방법이 없다. 뭐, 어둠의 율법자 문제라면 다르겠지만 이것 역시 현재로는
밝혀진 사실이 너무 적다. 그리고 실체가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맡
을 수 있는 역할은 지극히 미미한 것이다. 솔직히 그들의 능력이 사실이라
면 그녀뿐 아니라 전 무림인이 나서도 추릴 사람은 손가락에 꼽아야 할 판
이기에 단리혜를 바라보는 남궁선유의 눈빛이 착잡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최종적으로 연락된 게 언제였더냐?”
위로의 말로 던진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다른 대답이었다
.
“오라버니의 종적이 끊긴 곳은 하남이었습니다.”
‘꽤 오래되었나 보군. 기간을 말하기 싫어하는 걸 보니.’
장추삼은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먹다 남긴 술은 애당초 마시지 않은 것
만 못할 정도로 미미한 양이어서 뱃속의 주충들이 오만상을 쓰며 항의를 하
고 과도한 힘을 몰아 썼기에 몸도 노곤한 것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 술을 마시면 한 시진은 족히 앉아 있을 것 같은데 또 잠자리에
든다치면 세상모르고 퍼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아우, 난 이런 분위기 싫어! 적응이 안된다구.’
목청껏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기에 더 힘들다. 그가 보기에도 단리혜
라는 처녀는 딱하다. 가련하다 못해 보호해주고 싶을 만큼 처연하지만 이렇
게 무게 잡고 탁상공론하며 신세한탄 들어주는 식은 정말이지 몸도 마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슬슬 고개도 돌려보고 목을 꺾어가며 소리 한번 내보고 발밑의 돌멩
이들을 툭툭 차보고 있지만 관심 두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정말 젠장이다!
‘이런 고문이 몇 시진 계속된다면 기밀이고 뭐고 모조리 불어 버릴 거야.
정말 무서운 상황설정이군.’
그런 인간은 자기밖에 없다는 걸 모르는 듯 또 하나의 고문법을 착상해낸
머리에 스스로 감탄하며 나름대로 그 방법과 시기에 관해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곳에 탁월한 위력을 발하는 잔머
리라고 하겠다.
‘일단 시각은 저녁이 좋겠어. 음, 밥을 잔뜩 먹여놓고 나른해질 무렵 느닷
없이, 또는 불시에 신세타령을 하는 사람을 들여보내는 거야. 음음... 기가
막힌 순간포착이로다! 그리고 피고문자에겐 단 한마디의 발언기회도 주어
지지 않아야겠지. 그래야 안타까움과 짜증이 배가 될 테니까. 그런 다음 무
게 잡는 놈 하나, 그냥 영감, 그래 영감 하나는 반드시 필요해. 여인네의
푸념을 남김없이 들어줘야 하거든. 캬- 뉘 집 자식인지 모르지만 두뇌회전
하나는 예술이구나. 에, 또... 뭐가 빠졌나..’
그가 객소리를 마음속에서 짖고 있든 말든 조손 같은 남궁선유와 단리혜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가 있어서 남궁선유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던가. 일과의 대부분을 장
로들과 한담이나 하면서 보내고 기껏해야 찾아오는 명숙들의 인사를 받는
게 전부여서, 그게 싫어서 모두가 잠든 밤이면 홀로 일어나 검을 휘두르다
가도 ‘내가 왜 이러지’ 하며 망연히 달을 올려보는 게 전부였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호기까지 수그러든 건 아니다. 기상만큼은 젊은 신진들에
게도 뒤져 본적은 없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그였다.
“누구와 생사결 이라도 치른다는, 아님 어떤 분쟁에 개입되었다는 연락은
없었던 것 같구나. 너 역시도 이유를 모르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노선배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의 근거 같은 게 있었다면 소녀,
이렇게 넋 놓고만 있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라버니께서 보낸
마지막 서신이 마음에 걸려서...”
“마지막 서신?”
“예.”
“뭐라고 써 있더냐?”
갑자기 남궁선유의 피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무언가가 그를 기다리
고 있는 것 같다!
“그건...”
품속으로 손을 가져간 그녀가 작게 접힌 종이조각을 남궁선유에게 건넸다.
크기로 보아하여 이들 오누이는 전서구를 통신수단으로 이용했었나 보다.
세월의 흔적을 반증이라도 하듯 빛바랜 종이. 안타까움과 기다림에 지쳐 서
서히 타들어간 그녀의 마음처럼 낡은 종이의 때깔은 쓸쓸했다.
“흐음, 어디보자... 검을 잘 닦고 있느냐. 오라비는 여전히 건강하다. 얼
마 전 방문했던 무룡숙. 재미있더구나. 또 연락하자... 이게 다인가?”
다소 실망스럽게 종이를 건네주고 남궁선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징적인
문구라고는 어디에도 없다. 기껏해야 등장한다는 무룡숙이란 이름은 강호
인들 사이에서는 경원의 대상이었고 신경쓸만한 부분은 눈꼽만큼도 없는 것
이니까.
움찔.
하운이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여지껏 담담하게 이들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었던 그였는데 남궁선유가 쪽지를 읽는 순간, 정확히 말해서 쪽지의 중간
을 읽을 때 반응을 보였다.
“무룡숙이라 하셨습니까?”
“들은 대로 일세.”
하고 단리혜에게 고개를 돌린 남궁선유는 하운의 기묘한 분위기에 흠칫했다
. 공교로움과 분노가 교차되는 감정 따윈 없을 텐데 하운의 얼굴에선 두 가
지의 생각이 서로 충돌하여 합쳐져 있지 않은가? 놀라서 치뜬 눈, 어금니를
앙 다물어서 입주위에는 옅은 주름이 맺혀있고 두 주먹은 불끈 쥐어 당장
이라도 출수(出手)할 기세다.
- 무룡숙이란 단체에 주목하기 시작한건 너의 실종 직후였다. 네가 행방을
감춘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기에 별의 별 추측이 다 나왔으나 딱히 잡히는
것은 없었고 기껏 생각해낸 것이 지루함에 못 견뎌 도피한 게 아닌가였으
니 이제와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오지만 당시로는 꽤 타당성 있게 와 닿았기
에 제자에 소홀했다면서 가슴을 치는 구양장문의 탄식은 옆에서 듣기에도
안스러운 것 이였다. 그래서 화산을 비우고 너를 찾아 떠나는 장문의 발을
잡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일파의 우두머리가 제자하나 찾자고 자리를 비우
는 것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나 만약 우리가 말렸다면 밥숟가
락까지 놓겠다고 할 판이었으니 어쩌겠느냐...
무림의 평온을 그대로 화산의 평온으로 이어져 지난 삼백년간 화산파에서
벌어졌던 큰일이라곤 고작해야 칠년 전에 벌어졌던 대제자 하운의 실종사건
이 전부였다. 그리고 하운의 실종은 사실 ‘큰일’ 이라고 불릴만했다. 어
느 문파든 대제자라 함은 제자들 가운데의 구심점이자 웃어른들 에게는 희
망의 상징일 테니까.
아무리 화산 삼장로가 문파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하더라도, 구양승의 사백
이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힘이라고 하더라도, 어엿한 화산의 장문인은 구
양승이었고 그의 슬픔과 한탄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기에 장문의 신분으
로 강호행을 감행하는 걸 막지 못했다. 내심 하운을 찾아오기 바랬는지도
모른다. 석 달 뒤에 빈손으로 돌아온 구양승이 기묘한 말을 하지 않았더라
면 무룡숙의 일 같은 건 무림 구대문파라는 찬란한 위명의 화산에서 논의조
차 되지 않는 사안이었을 것이다.
“너무 심려치마시게. 하운은 박명의 상이 아니니 얼마 후면 웃으며 산문을
들어설 것이야. 우린 오히려 장문의 건강이 염려되네. 그려.”
“저도 삼개월간 강호를 떠돌면서 많은 생각과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살아
있다면 화산을 버릴 아이가 아니고, 죽었다면 꿈에서라도 사부를 한번쯤은
찾아오겠지요. 그런데...”
“ ? ”
“이런 얘기를 갑작스레 아뢰어서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사백님들께서는 혹여
무룡숙이라는 단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룡숙?”
“거기... 뭐... 그냥 노는 곳 이라고 들었네만?“
“예, 모두들 그리 알고 저 역시도 그런 인상이 너무도 뚜렷하여 혹시 이
녀석이 잠시 쉰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틀어박혀 있나 해서 방문해 보았습니
다.”
삼류무사-99
구양승이 무룡숙을 방문한건 어디까지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 발버둥 치는 것’ 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신상태 하에서였다.
누구나 코웃음을 치고 어찌 보면 멸시에 가까운 조소를 듣고 있는 단체이
기에 평소의 그였다면 신경조차 쓰지도 않았을 테고 마음에 담을 이유가 없
었지만 지근은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고 또 아는가? 따분한 생활에
지친 젊은이가 현실도피적인 마음으로 온갖 놈팡이들이 모여서 논다는 곳에
발을 들였다가 재미를 붙여서 ‘내일은...내일은...’ 하면서도 쉽사리 벗
어나지 못하는 경우인지.
중이 고기 맛 들이면 절간에 벼룩하나 남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운이 이
런저런 강호경험을 지닌 상태였다면 모르나 그는 화산문하에 여덟 살 이란
어린 들어와서 십오 년을 단 한번도 외부세계와 접촉 없이 보낸, 한마디로
무림미숙아라고도 할 수 있다.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또 한번 자탄하며 구양승이 무룡숙에 배첩을 보
낸 게 하운의 실종 여섯달 후의 일이였다. 지금부터 칠년 전 하고도 꼬박
열달 전이니 꽤 오래전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화산파의 장문인이 보낸 배첩...
말할 필요 없이 현재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는 문파를 꼽으라면 소림과 무당
을 젖히고 ‘화산’ 이라는 두 글자를 강호인들은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데
칠년 전 이라고 해도 그 사정은 별 차이가 없는 것 이여서 무룡숙에서도 굉
장한 반응을 보인건 무림에 몸담고 있는 단체의 특성상 지극히 당연한 일
일게다... 그게 환대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장문사형, 이곳을 꼭 가셔야겠습니까? 아무리 생각 해봐도 시간낭비일 것
같은데요.”
구양승의 오른편에 서 있는 오십대의 장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전풍광수(電風光手) 온규협, 화산에서 가장 빠르게 검을 쳐낼 수 있다는 절
정의 검객이자 검정오존중 한명이다. 그의 검이 얼마나 쾌속한지 번개가 치
는 순간 전풍의 검이 날면 천둥이 치기도 전에 번개가 부끄러워 다시 하늘
로 올라간다고 했을까?
“온사제의 말이 맞습니다. 그냥 사천이나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구양승과 비슷한 연배의 중노인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그러자 뒤에서 암말
도 않고 걸음을 옮기던 두 명도 긍정의 몸짓으로 생각을 대신했고 화산을
이끌면서 한번도 망설임 없이 일을 처리했던 산화수의 안색도 갈등의 빛이
역력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의 옆에서 발길을 옮기고 있는 네 사람은 매
화사수였으니까.
매화사수(梅花四手).
화산 삼장로가 대화산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화산
의 실체적인 위력이라고 하겠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구양승의 사제들로 개
개인의 실력은 능히 강호를 오시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산문을 벗어나는 일
이 거의 없는 검객들이지만 이들의 검집에서 칼이 뽑히는 날엔 무림이 한번
뒤집어진다고 했다.
구대문파중 최강의 성세를 자랑하는 화산의 장문인이 강호출행을 하는데 수
행원이 넷 밖에 없다면 의아해 하겠지만 그들이 매화사수라고 한다면 누구
라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도 지금의 내 마음을 잘 모르겠으니 사제들은 암말 말고 따라주기 바라
네.”
구양승의 음울한 말에 매화사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문인 이기보다
존경하고 따르는 사형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우둔하지는 않기에.
무룡숙을 보고 이들 다섯 사형제는 무척이나 놀랐다. 찬란한 위명(?)을 날
리는 것에 비해 건물과 부지가 어마어마 했으니까.
“아니, 이곳이 무룡숙이 맞습니까? 이건 거의 명문정파 수준이로군요?”
“천명은 숙식을 하면 무공을 닦아도 되겠구먼. 누가 있어 이렇게 돈이 썩
어나는 거야?”
자칭 총관이라는 비염극의 안내를 받으며 이들의 놀라움은 황당함으로 바뀌
었다. 서른 개가 넘는 별채, 오백 명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식당. 여
섯 개의 연무장을 돌아올 때 구양승의 입에서 탄식마저 흘러내린 건 한 문
파의 수장으로서 당연했을지도 몰랐다.
현재 수용인원이 백 명도 안 된다는 걸 들으며 매화사수가 낭비니 어쩌구
떠들었고 구양승은 너털웃음을 지었으나 무룡숙 전체를 구석구석 살피면서
황당함이란 감정은 또 다른 이름의 것으로 자리를 바꾸기 시작했으나 그리
커다란 크기가 아니었기에 무시하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엔 대제자 하운의
걱정이 너무도 깊고 거대한 모양새로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여타의 사고
가 굴러갈 여자가 없었다.
하루 유하고 가라는 무룡숙 총관 비염극의 말을 거절하며 사천으로 행보를
옮길 때도, 매화사수들이 낭비타령으로 말 위에서 여로의 무료함을 달랠 때
에도 그 거대하고 얼토당토 않는 집단에 대해 단 한줄의 물음표 정도로 치
부하고 넘어갔었다.
“그래, 뭐가 그리 이상하셨다는 겐가? 세상에는 주체할 수 없으리만치 많
은 돈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많다네.”
“물론입니다. 무룡숙을 만들었다는 이가 소문대로 단순한 갑부라서 강호를
동경하고 숭양하지만 지닌바 재주가 미천하여 그런 식 으로나마 무림에 일
조를 하려고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웃어넘겼을 것입니다. 희극적 이지
만 사매님들 말씀처럼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
요. 그런데 말입니다!”
“?”
“?”
“?”
“죄송합니다. 갑자기 흥분을 했더니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용서해 주십시
오.”
“오랫만에 장문의 큰소리를 들으니 잠깐 놀랐을 뿐이네 신경 쓰지 말고 말
씀하시게.”
“늙은이들은 무시하고 하던 말이나 계속하라구. 그러잖아도 세월이 여류함
에 따라 사형들이 가는귀가 ....에잇, 알았소. 가만있으면 될 거 아니오.
농담 한마디 가지고 그런 식 으로 사람을 노려보고 그러오!”
“...”
“저녀석은 언제나 철이 들려나...장로란 직함이 아깝구먼.”
“내가 뭐 어쨌다고 그러오! 사형들은 고고한 척이고 난 밥만 축내는 뚱땡
이라 이거요? 이리 설움 받으며 살 바에야 죽어버리는 게 나을 거야. 뭐
내가 죽는다고 신경 쓸 이 하나 없겠지만...서럽구나, 서러워!”
“자자...농담들은 그만하고 정문의 뒷말을 경청함세. 늙은이들이 재롱부리
는 것도 아니고, 허허헛!”
“예, 말씀 올리겠습니다. 방금 전에 언급했듯이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무룡숙을 다르게 바라본 건 아닙니다. 지나치자면 사소한 일 일 테고 무림
이라는 거대하고도 알 수 없는 곳에서 그 정도 일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지
요. 그런데 사천성과 섬서, 그리고 귀주를 오면서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
습니다.”
“?”
“무룡숙에서 무술을 배우겠다고 집을 나선 청년들이 생각보다 매우 많았습
니다. 아아...사백님들, 생각해 보셨습니까? 뒷배경 없고 가진 돈도 없는
빈농의 자식들이나 고아들이 무공 한수 익히려면 얼마나 고생하는지 말입니
다. 그들을 받아주고 양성시킨 기관은 무림 어디에도 없습니다. 구파일방,
예. 솔직히 저희 화산에서 조차도 소개장이 없다면 입문자격심사 조차 없이
수많은 청년들을 돌려보내는 게 현실입니다.”
“그건 몰려드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닌가? 근본조차 알 수 없
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루에도 십 수명씩 몰려드는 게 현실이거늘 그런 녀
석들의 과거와 집안을 보고, 재질을 평가하고, 거기다 품성까지 가늠 한다
는 게 쉽지만은 않다네.”
“맞는 말이지. 제자 추릴려고 화산에 일을 아예 접을 순 없다구.”
“압니다. 그걸 뭐라고 하자는 건 아닙니다. 어떤 목적으로 산문을 들어서
는지, 배워서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제자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선택받은 소수만이 명문거파에 발을 딛는 것 역시 소수
입니다. 그런데 무룡숙이란 곳은 아무런 제한 없이 사람을 받아들인다고 했
고 단 한 푼의 은자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기부란 명목으로 거액을 받는 곳
이나 소개장의 유무로 사람을 판별하는 곳이 아니기에 그런 소외받은 청년
들 사이에서 꽤 높은 인지도가 있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렇게 집을 떠난 청년들 중에 집으로 돌아온 이가 없다고 합니다.”
쿠쿵!
“그게 무슨 소린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놀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식선에서 이해가 안되겠지만 그건 사실입
니다. 왜 이런 일이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
“사회적인 최약자층, 관에서 조차 신경 쓰지 않는 이들, 그 숫자
마저 파악되지 않는 어둠의 존재들이기에 그들의 실종에 관심을 두거나 귀
기울일 사람은 아마도 없는 것입니다. 몇군데의 지방에서 그런 소식을 듣고
, 예 , 저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무룡숙에서 느꼈던 감정과
섞이니 그것은 하나의 단어로 귀결되더군요.”
“그게 뭔가?”
“의혹... 우선 무룡숙은 지나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가르
치는 무공은 기껏해야 삼류박투술이 전부입니다. 제가 방문 했을 때도 이름
만 거창한 구천마벽(九天魔劈)이라는 발차기를 연습하는 수련생들이 전부였
지요. 거의가 좀 산다는 집 자식들인 듯 화려한 복색에 연신 낄낄거리며 장
난처럼 발을 내밀고들 있었는데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오백 명 이상을 수용한다는 식당에서 느낀 첫 번
째 의혹은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
“몇 백 벌의 식기가 십년도 넘게 한번도 사용된 흔적이 없더군요. 창설할
때 사람 수 계산을 실수해서 어쩌다보니 그리될 수 있을까요? 몇 백 명씩이
나 말입니다.”
“으음...”
“대저 총관까지 있다는 문파를 세운 겁니다. 그 정도도 내다보지 않고 무
모한 정도로 돈을 투자했다는 건...거기까지도 그냥 넘어가라면 넘어가지요
. 그런데 세워져있는 전각들의 위치에서 의혹은 실체화 되었습니다.”
“...”
“삼재의 틀을 철저히 따르며 역 오행을 그리는 완벽한 건축구도, 이건 일
류의 무인들도 눈치 채기 어려운 최고의 위치선정입니다. 이런 설계가 단순
히 우연일까요? 우연이 아니면 이정도의 고수가 관여한 조직에서 기껏해야
구천마벽 따위의 삼류권각술을 가르치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십니까? 마지
막으로 그렇게 많이 있다던 청년들은 죄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강호상에
무룡숙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무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럴수가...”
“하도 같잖아서 무시했더니...가만! 이거 같잖음을 유도한거 아냐?”
“생각이 일치하시는 군요. 그저 저도 그렇게 봅니다. 거창한 편액과 약장
수들의 무공, 이를곳 없이 거대한 전각과 생동감 없는 수련생들... 이 모두
가 하나의 전시효과 였다면 무룡숙을 이끄는 자는 실로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지요.”
삼류무사-100
구양승장문의 설명이 지나간 자리에 깊은 정적과 암울함이 남은 건 물론이
었다. 그래도 무림의 정신적 기둥이라는 구파일방에서 당당하게 자리 하나
를 차지하고 있다는 대화산인데 이런 심각한 사안에 대해 십년이 넘도록 무
관심할 수 있었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노릇이었고 무슨 소리를
해도 변명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원래부터 농담을 즐기지 않는 이
사제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삼 사제가 심각한 표정을 일 각 이상이나 유지한
다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라서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계양
사제의 건강을 염려했을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일반문도들에게는 극비로 했다. 일단은 심증뿐이고 밝혀진
물증이 하나도 없기에 - 잘못 언급했다간 역풍을 맞을 게 뻔하지 않느냐,
가뜩이나 우리 화산을 시기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이었거늘 - 신중을 기
하는 건 당연했고 또한 장문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룡숙에 관여된 인물들의
심기가 보통은 넘음을 알 수 있으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야 없지 않느
냐?
무룡숙에 관련된 일은 화산삼장로와 구양승만이 아는 걸로 했다. 장문인의
사제들이자 화산의 실제적인 힘이라 불리는 매화사수에게 조차도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는 건 무룡숙이란 사안에 대해 얼마나 무거운 시선을 던졌
는지 잘 알게 되는 부분이다.
일단은 실체적 조사가 필요했다. 과연 무룡숙으로 떠난 청년들 중에 귀향하
지 않은 자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화산 같은 명문거파의 위대함은 본 문에 의해 비축된 힘이 강대해서만은 아
니다. 전국 각 처, 각 위치에 넓고도 골고루 퍼져있는 속가제자의 힘!
속가제자란 명문거파에 존재하는 제도로서 제자 입문을 거치고 무공을 배우
는 건 일반문도와 다를 바 없으나 본 파에서 어떠한 지위에도 오를 수 없고
신분상이나 기타의 이유로 문파와 어느 정도 등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지위를 포기한다는 건 아무리 입문이 빠르고 재질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일대제자가 될 수 없음이니 문파 내의 커다란 일에 발언권은 있을지언
정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얘기다. 일대제자도
될 수 없고 영향력도 없으니 이들이 문파에 애정이 없을까?
그건 천만에 말씀이다. 속가제자들은 개인의 특성상 지위와 영향력을 포기한
것이고 그들 나름대로 사회에서의 신분이 있는지라 어쩔 도리 없이 문파와의
거리를 두고 있을 뿐 자신이 소속된 문파에 대한 자긍심은 일반문도 못지않게
높다.
오죽하면 자금성 내 신하들 중에서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문파의 속
가제자 둘이서 자신의 문파자랑을 하다가 서로 격분했으나 차마 손을 섞지
못하고 - 그러기엔 각자의 지위가 너무 높았다 - 육 개월 간이나 소 닭 보
듯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을까? 서로 경원시 하는 것 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이들이 맡고 있는 지위가 실로 대단한 것이었고 상호유기적인 위치에서 정
사를 돌보아야 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무제로까지
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행정의 공백상태로까지 이어졌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쯤 되니 곁에서 지켜보던 동료들도 진화에 나서서 어떻게든 둘 사
이를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돌아오는 건 차가운 냉소와 콧방귀가 전부였고
상대방을 언급한다면 중재자와도 말을 나누지 않겠다는 반응까지 나왔으니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얼마나 차가웠는지는 별다른 묘사 없이도 설명 가
능하리라. 양 파의 장문이 친히 나서서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을 때
까지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을 거라고 나중에 동료 대신들이 쓴웃음을
지은 것도 그저 빈말만은 아닐 것이다.
무룡숙에 관련된 사안을 조사하는데 대화산의 장로나 장문이 나선다면 무림
전체가 주시할 건 뻔하고 아무리 무공이 높다하여도 이들 역시 사람인 이
상 지역 하나를 맡아서 관리하기도 어렵다. 거기다 대제자가 실종된 상태에
서 문파를 총괄하고 수호한다는 이들이 산문을 벗어난다는 것도 무리가 따
른다. 이럴 때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마음 편히 손을 빌릴 곳이 있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일 것이다.
다행히 화산의 속가제자들은 중원 뿐 아니라 전국 각 처에 산재하여 나름대
로의 직업에 충실하고 있었고 그 수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문파에 대
한 애정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 장문의 신분으로 보낸 서찰에 대한 신속
한 답변은 삼 장로조차 놀랄 수준이었다.
처음에 받은 보고서로는 종잡기 어려웠다. 속가제자들에게 속내를 드러내놓
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리저리 빙빙 돌려서 무룡숙이란 단어를 묻
히게끔 한 후에 그 지방에서 무학에 뜻을 두고 떠난 청년의 수와 귀환하거
나 생사가 확인된 수를 갑자기 알아봐달라는 문장을 써내려 가는 건 꽤나
성가신 일이었고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 수도 없는지라 속가제자들
이 보인 의아함은 지극히 당연했다. 답변 역시 원론적인 수준으로 매년 일
정 수의 청년이 금의환향을 꿈꾸며 고향을 등지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고 이
런저런 이유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당도한 보고서 가지고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그만큼의 보고서는 쌓여갔다…
두 해가 흘렀을 때는 몰랐다. 삼 장로와 구양승이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닐
까하고 생각이 들만큼 보고서의 내용은 변화가 없었다. 거의 비슷한 사람
수(數)가 나오고 또 들어오고… 삼 년 째가 되고 사 년 째가 되던 해에 처
음으로 즉선검인이 반응을 보였다.
“분명 이상한 점이 있기는 있구나. 이걸 보게.”
어디서 준비했는지 중원전도를 펼친 즉선검인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자, 보시게. 이게 무룡숙이 위치한 하남이고…”
붓을 꺼내 든 그가 커다란 지도에 각 파의 이름을 써넣기 시작했다. 소림,
무당, 화산…
“이곳이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는 십 오개 대파들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일세. 모두들 잘 알고 있겠지만.”
구양승과 두 장로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무시하고 즉선검인이 다시 한 번
붓을 들었다.
그는 각 성도에 여러 가지 숫자를 써 넣기 시작했는데 십 단위부터 백 단위
까지 천차만별이어서 그 의도를 가늠키 어려웠다. 차곡차곡 빈칸을 메워놓
은 즉선검인이 모두가 잘 보이도록 지도의 우치를 바꿀 때까지도 아무런 반
응이 없었다. 잠시 후에 소요가 있었다.
“이것 봐라?”
계양의 장난끼 어린 의문이 시발점이었는지 백무량의 두 눈썹도 역팔자를
그리며 훑듯이 지도 전반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구양승의 입에서 낮은 탄식
이 흘러나온 건 조금 지나서였다.
“숫자의 의미는 파악이 되었나보군.”
지도에서 고개를 든 백무량과 계양이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 뒷말을 기다린
다는 듯 즉선검인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날 빤히 볼 거 없네. 써 놓은 그대로고 자네들이 생각하는 게 맞을 테니…”
“사형의 말씀은…”
“간단한 거야. 숫자가 적시하는 그대로인 게지.”
백무량의 말을 끊고 즉선검인이 구양승에게 올라온 보고서 더미를 건네주었다.
“무림에 구대문파가 있어서 그 이름 드높다고 하나 실상 우리 구대문파는
감숙성 공동파를 제외한다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국이라네. 가장 가깝게
이곳 섬서성만 보더라도 종남산에 종남파가 있고 우리 화산이 있네. 섬서성
옆으로 봐도 붙어있는 하남 땅에 소림과 곤륜이 있지. 뿐인가 사천엔 점창
과 아미, 그리고 청성파가 모여 있어. 호북성도 그리 멀지 않아. 또한 사천
에 당문이 있고 하남에는 흑월회라는 사파 조직이 있다네. 이쯤 되면 무림
에서 힘 께나 쓴다는 문파가 알고 보면 대륙의 중앙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
겠지?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듯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한 번 더 눈이 가
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자연 관심도 끊어진다네. 강호인들의 생각도 그렇고
우리 구파일방의 생각에도 무림에 꽤 커다란 영향력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
하고 있다지만 그건 중앙 무림의 일이고 사실 운남이나 광동, 절강 등지에
우리가 관심을 보인 적은 별로 없는 게 현실이네. 물론 그런 지방무림에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 적은 없다지만 말이야. 그것이 지금 써 있는 숫자에
서 그대로 드러나는 게지.”
즉선검인의 꼼꼼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지도에 적혀 이는 각 성도 하단에 적
힌 숫자들의 편차는 워낙 도드라지는 것이라 세 사람의 안색을 무겁게 했다
. 중앙무림과 지방의 차이는 거의 백 명 이상이고 많게는 삼사 백을 헤아리
는 곳도 있었으니까.
“이것이… 귀향하지 않은 자들의…”
“고장을 떠나고 오 년이 넘게 소식이 끊긴 사람들의 평균 숫자야. 물론 무
에 뜻을 두고 길을 나선 자들의 수 뿐이고 이주나 기타의 사유는 기록되지
않은 걸세. 알려진 사람이 이 정도라면 파악되지 않은 수까지를 가정해 보세.”
“최하 두 배 이상은 오르겠지요.”
구양승이 무겁게 말을 받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지난 몇 년 간 무
림에서 시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소리 소문 없이 말이다.
“이 숫자가 무룡숙과 연계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네. 그래서 장문인
이 속가제자를 통해 알아보는 동안 나 역시 또 다른 경로로 한 가지의 사건
만 추적해 보았다네.”
즉선검인의 눈은 언제 보아도 신비로웠다. 음울한 보랏빛이 일렁이면서도
어떤 사안이 닥쳤을 때 마다 혜광으로 충만한 맑은 청색의 울림으로 화산
전체를 조율해주고 있다. 어느 것이 그의 진심이고 어느 것이 억지로 만들
어 낸 모습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역시도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그런데 그의 가면
은 특이한 것이다. 대개의 가면은 자신을 과다하게 포장하거나 약한 면을
감추어 상대방을 기만하려는 성질이다.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에게 무언가
얻어내려 한다는 게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거다.
그러나… 그의 가면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기 위해 스스로 뒤집어 쓴 고행
의 족쇄란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 족쇄를 풀 수 있는 날이 올까?
무심한 상념의 휘파람이 즉선검인의 뇌리를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구
양승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으며 그는 현실세계로 다시 발을 딛었다.
“잠시 딴 생각을 했다네. 음… 나는 우선 무림맹 하남성 지부에 사람을 대
어 현재 무룡숙의 개략적인 인원을 은밀히 조사시켰네. 물론 드러난 숫자만
말이야.”
“별 변동이 없을 듯합니다?”
“그래, 그래. 장문의 말대로 한 사십 명 가량 늘었더군. 거기다 일문들과
무룡숙의 살림을 맡아보고 무공을 가르친다는 교두까지 합쳐봐야 이백 명이
채 되지 않더군. 아무리 잡아도 이백 명이 안 된단 말이지.”
‘이백 명’에 집착하는 즉선검인이 의아스러워서 계양이 툴툴거렸다.
“아니, 대사형께선 이백에 무슨 한이라도 있소? 아님 주선이 생각이라도
난 거요?. 대사형께서 주선(酒仙)의 시를 애송하는 건 알겠지만 두 이(二)
와 오얏 리(李)는 엄연히 다르단 말이오. 오호라… 이제보니 세수가 백하고
도 이십이 넘어가시니까 슬슬 이백 살이 보이신다는 거요. 무림 최고 장수
노인의 기록을 갈아 치우고 싶은 게로군. 응, 좋지. 자고로 포부는 높을수
록 좋다고 했소. 그랬구나. 그랬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계양에게 구양승이 물었다. 과장되게 고개를 끄
덕이는, 그래서 본래 푸들거리는 턱살이 더없이 출렁이는 삼사백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야 별로 영양가 없을 게 뻔하지만 그 몸짓은 ‘물어봐 주지
않으면 울어버릴 거야!’ 라는 듯 격렬해서 별 도리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오! 그게…”
냉큼 대답하는 계양이었으나 담긴 얘기는 역사나였다.
“자네의 대사백께서 이백이란 숫자에 저리도 집착하시는 속내가 짐작이 가
서 그러네. 현재 우리 화산에서 검으로 천하를 오시하는 둘째 사형이 있고
무림 최고의 재간꾼인 내가 있고…”
“네가 언제부터 무림 최고의 재간꾼이었냐? 강호 최고의 근수에 도전한다
면 이해하겠지만 말이다.”
어이없어 하는 즉선검인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게양이 말을 이었다. 물론
즉선검인을 잡아 먹을 듯 꼬아보는 건 잊지 않으면서.
“하여간 그런데 이제 대사형께서 무림 최고령에 도전하신다니 이 어찌 경
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나! 이백(二百)? 백오십만 넘어도 능히 기록을 갈아치
울 수 있을 게요. 내 이제부터 만사 제쳐두고 화산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닐
테니 대사형께서는 힘든 일 하지 마시고 머리도 그만 쓰시오. 석 달만 고생
하면 천년하수오는 몰라도 백 년 묵은 지네 한 마리는 잡을 수 있고. 그놈
을 푹 고아서… 흐흐흐.”
눈까지 빛내는 계양이었지만 즉선검인과 구양승의 표정은 허탈 그 자체였다.
백무량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질 때 쯤 계양의 야릇한 웃음이 잦아들었다.
“저놈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을꼬…”
한탄하듯 말을 던지고 즉선검인이 자세를 바로 했다. 한 번 더 쓸데없는 소
리하면 알아서 하라는 백무량의 따끔한 일갈에 풀이 죽은 계양이 마루바닥
을 긁으며 투덜거렸으나 나직한 즉선검인의 얘기는 모두의 귀를 사로잡을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백이라는 수자를 파악하고 나서 두 번 째로 알아본 것은 무룡숙에 반입
되는 식료품의 양이었다.”
꽝!
그렇다.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어떤 사람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특히나 무공을 익히는 한참 때의 청춘들은 왕
성한 식욕을 보이는 것이고 몇백 명이 살아가는 무도관에서 삼 일 치 이상
의 식료품을 저장하고 있는다는 건 무리다. 고로 어떤 식으로든 음식물을
조달해야만 하고 그 양을 계산해 보면…
질문이 쏟아질 법도 한데 좌중은 기묘한 정적을 유지했다. 말 잘 듣는 학동
들이 훈장님의 한마디를 기다리듯이 미동조차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고 눈
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의 용의주도함이 여실히 드러나더군. 한군데에서 대량 매입을 하는
게 아니라 각 점포마다 조금씩 사들이고 시차를 나누어 반입하기에 통계를
내는데 애를 먹었다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무룡숙 근처의 상인들을 모조리
만나보는 수고를 대신한 속가제자도 있었고 개방의 힘도 빌었다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식료품의 소비와 무학 증진과의 관계를 알아본다는 얼토
당토 않은 이유를 달면서 고소를 금치 못했다네. 그렇게 일 년이 넘게 통계
를 내보니 답이 나오더군.”
꿀꺽!
누구의 목젖인지 모르지만 크게 한번 울렸으나 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뒷말이 나오기만을 간절히 기대했기에 부차적인 건 신경 쓰는 이가 없
었다. 즉선검인의 분위기에서 사실 대답은 들으나마나 한 것이고 어쩌면 싱
거운 기다림인지도 모르지만 사림이란 알 수 없는 동물이라 이럴 때 종종
더 긴장되고 더 초조함을 느끼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볼 때… 무룡숙에서 매입하는 식료품은 장정 하루에 사백오십
인 분이 조금 넘었다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쌀과 기타 육류의 소비만큼은
감출 수 없는 노릇이었고 일 년 동안 음지에서 고생해준 속가제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겠지. 또한 무룡숙에서 버린 음식의 양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어. 아무리 대식가가 많다고 해도 이백 명이 안 되는 식구들이 사
백오십 인 분의 식료품을 소화해 낸다는 건 어불성설일 테고… 그럼 뭘까?”
“어디선가 소화해내는 장소가 있다는 것 아니겠소?”
계양이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는 아까 몸무게 얘기를 아직도 잊지 않
고 있었기에 삐져나는 입 만큼은 집어넣지 안고 있었다.
“바로 그거야. 그런데 어디에고 물품을 보낸 흔적이 없거든. 그럼 그 안에
서 전부 소비한다는 건데 사람 수가 턱없이 모자라.”
“짚이는 게 있구려.”
백무량의 날카로운 눈이 반짝 빛났다. 그가 알고 있는 사형은 이런 식으로
시시하게 문제 제기나 늘어놓을 사람이 결코 아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생
각을 정립시키고 한 번 더 숙고한 연후에 어떤 길이 보일 때가 되어서야 비
로소 말문을 열 사람이다.
“자네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군.”
즉선검인이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백무량은 여전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생각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겠나. 그런 것보단 물증 하나가 아쉬운 판국
이야. 그렇다고 섣불리 나서서 타초경사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네. 다
시 한 번 말하거니와 만약 이들이 우리가 가정하는 대로의 인물들이라면 몇
번을 조심해도 모자를 판이고 당장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걸세.”
“혹시…”
계양이 또 나섰다.
“이놈들이 전설에서나 등장한다는 철골강시나 실혼인을 제조하는 거 아냐?
그 왜 있잖아… 배교의 비본이라는 잠마주술이란 책에 쓰여 있다는… 에잇
, 알았소! 입 닥치고 가만있으면 될 거 아니오. 이 사형은 내가 말만하면
노려보고 그러오?”
“니가 멍청한 말만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 요즘 강시와 실혼인은 삼시
세 끼 밥에 고기까지 챙겨먹는다고 하더냐?”
“그러니까 가정 아니오!”
“뭘 잘했다고 큰소리냐. 저놈은 언제 철이 들꼬…”
사제들의 옥신각신을 말없이 지켜보던 즉선검인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강시와 실혼인…”
둘의 언성이 워낙 높았고 상황이 재미있었기에 구양승마저 이들을 바라보며
미소짓느라 그의 독백을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인간 강시, 멀쩡한 실혼인… 무림이란 참으로 흉험한
곳이니까.”
…하여 지난 일 년 동안 조사해 놓은 게 거기 수록되어 있다. 그들은 용의
주도하여 단 한 개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는 관여하지 못하는지라 여기저기서 문제의 부분들의 노출되었다.
문제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인데 우리 화산이 물증도 없이 사건을 확대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에 하나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문파
에 치명적인 손실이 옴은 물론 이들은 더 깊이 잠복할 것이다 그러나 두고
보기에도 시일이 너무 많이 흘렀음이니… 너는 화산의 대제자란 신분을 버
림은 물론 화산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남기지 말고 무룡숙에 관계된 모든 것
을 알아내야만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나 너는 화산의 어떤 무공도
사용하지 않고도 네 한 몸을 지킬 수 있으니 가장 우려되는 점은 피하게 되
는구나. 동료들의 도움을 얻은 것은 상관치 않겠다. 그들은 구파와 어떤 연
이 닿아있지 않고 또한 백 사제의 말대로라면 성품 역시 문제될 것이 없다
고 하였으니.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이 순간부터 너는 낭인 하운이다. 그러나 너의 양
어깨에 우리가 있고 화산 영령께서 걸터앉아 계시며 어쩌면…
즉선검인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떠올려보고 무룡숙에 대해 다시 한 번 결의
를 다지는 하운의 모습이 모두에게 의아스러웠다. 원래 차분한 사람이 한번
감정을 드러내면 크게 티가 나는 법이다. 하물며 그는 주먹까지 불끈 움켜
쥐고 있었으니.
“하 형, 왜 그래? 무룡숙 출신이라더니 거기서 구박 받은 일 있어? 에이,
하 형 식력이면 까부는 놈들 쯤 혼내주는 건 쉬웠을 텐데…”
분위기 파악하고 장추삼이 조심스레 위로했으나 하문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미안하오. 기분이 좀 언짢구려.”
평소라면 억지로라도 웃어 보이는 그 일진데 전에 없이 딱딱하게 대답이 돌
아오니 농을 붙였던 장추삼도 찔끔할 밖에.
“미, 미안할 거 없어요, 뭐. 사람이 살다보면 기분 나쁠 때도 있고 그렇죠
, 뭐. 에구…”
머리를 긁으며 그가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자 남궁선유가 하운에게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이 선한 청년은 화가 나 있고 이런 사람이 화를 낸다는 건
반드시 타당성 있는 목적이 숨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시기가 매우 절묘
하지 않은가?
“무룡숙에 그렇게 반응을 보인 이유를 들어도 되겠는가?”
단리혜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아니더라도 하운은 할말이 있었다. 북경에서
의 일이 대충 마무리 진 듯하기에 일행과 더불어 하남 땅을 밟아야만 한다.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거늘.
“들으신 대로 저도 무룡숙에 한 몇 년 기거했었습니다.”
기거하긴 뭘 기거했는가? 무지 찔렸지만 해놓은 말이 있었고 얘기를 자연스
레 연결하자니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됐으나 처음 말을 시작하며 떨리
는 음성은 감추기 어려웠다. 그ㄹ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나 흥분했기에 말
까지 떨까?’하고 이해하는 중인들의 반응이었다.
“제가 기거하면서 그곳에서 가졌던 크고 작은 의문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
그 뒤부터는 즉선검인의 말을 적당히 섞어서 그가 듣고 본 것처럼 진행시켰
다. 한번 말문이 트이자 언제 떨었냐는 듯 숨술 나오는 거짓말에 스스로 감
탄하며 얘기를 풀어갔고 사안의 실체를 들어가면서 모든 이의 안색 - 특히
남궁선유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놀라고 있었다 - 이 변해갔다.
“…해서 생각을 저리하던 중 단리 소저의 오라버니인 비발쌍부대협이 실종
되었다고 하니 당연히 놀라고 분노한 것입니다. 이제는 주위만 맴돌 수준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이럴, 이럴 수가! 오늘 내가 날을 만났구먼.”
벌떡 일어섰던 남궁선유가 다시 바위에 주저앉았다.
“하남 땅 가야 돼?”
장추삼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남을 가면 소림이 있고 소림에서 감자바위를
먹인 걸 생각하면 사부가 떠오른다.
사부… 빌어먹을 사부!
‘왜 그렇게 일찍 간 거야!’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친다. 남들은 백 년도 넘게 잘들 산다는데 이놈의
영감은 뭐가 그리 바빠서 팔십을 겨우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건가! 그것
도 같이 지낸 기간이라야 기껏해서 이 년이고 그나마 골골거린 게 대부분이
었다. 처음 보았던 그 미소는 이후에 한번도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간 것이
다.
‘빌어먹을…….’
한 방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번쯤은 더 웃어줘도 됐잖아!’
눈물을 소매로 쓱 닦고 그가 흰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그래, 가지 뭐! 까짓것 하남이면 어떻고 소림이면 어때!”
? * ? * ? *
그날 저녁 북궁단야는 적설산장에 보낼 편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천산까지
인편을 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안의 중요성도 있는지라 전서구를 이용
해야 하기에 내요의 대부분은 흑화로 작성해야만 했다. 물론 편지의 부피
때문이다.
-삼가 조손이 할아버님께 글월을 올립니다. 현재까지 어둠의 율법자에 대해
정확히 드러난 건 하나도 없으나 월광살무라는 괴 초식이 백여 년 전에 존
재했다는 걸 알아냈다는 건 그나마의 수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드러난
사실만 우선적으로 올리겠습니다.
무림십좌, 삼선삼목사왕 중 여덟 명의 이유 없는 실종 중에 두 명은 월광살
무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호목 조용인 - 북경 태생, 당시 삼목에 들었던 최고수 중 하나로서 가전무
공인 자전도를 극성으로 익혔음. 별첨한 월광살무라를 괴 초식의 목격자.
백소유의 사부로서… 후략.
태을검선 단리고학 - 하남 태생. 몰락한 전진교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져 있
으며 추월오식이란 전진의 검식을 익힘. 삼선의 반열에 올랐으나 월광살무
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후손들이 주장함.
광도 이한모 - 북경 태생, 배교의 환술을 익힌 것으로 추정되는 괴도. 왕성
한 활동 중에 갑자기 실종. 이유는 밝혀지지 않음.
마창 염환귀 - 북경 태생, 점창에서 파문당한 이후 창법을 극한까지 깨우쳐
창 하나로 북경 전체를 울렸던 인물. 실종 원인은 밝혀지지 않음.
귀염장 조치민 - 산동 태생, 어릴 때 북경으로 와서 관에 이문. 황궁 무공
을 나름대로 정립하여 스스로의 장법 체계를 세운 후 강호 출도. 한때 무림
십좌를 위협한다는 평가도 많았으나 역시 실종됨.
번천수 사마인 - 북경 태생, 유서 깊은 사마세가의 당대 가주로 가문도법인
번천검법을 가장 완벽히 소화해내었다고 평가받았으나 갑자기 실종. 이후
사마세가는 내리막길을 걷게 됨.
전서구를 날린 뒤 밤하늘을 바라보며 북궁단야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데… 뭔가를…….’
동이 틀 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었으나 끝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놓지
못했기에 그의 새벽은 더 쓸쓸했을지도 몰랐다.
‘분명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
첫댓글 무룡숙.
즐감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