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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예레 1,1.4-10
복 음 : 마태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형제님이 종합검진을 받고 나서 자기에게 갑상샘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암 치료가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암 자체가 심각한 병이기에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친한 친구를 만나서 자기 걱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갑상샘암은 거북이 암이라며? 별것 아니래. 괜찮아.”
형제님께서는 과연 친구의 이 말에 위로받았을까요?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 형제님 본인은 괜찮지 않았습니다.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결국 ‘나’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후에,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울먹이면서 아내가 갑상샘암에 걸렸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다급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예전 자기에게 했던 말이 떠올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별것 아니라고 말해주려고 했지만,
자기가 전혀 위로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괜찮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일이 될 때는 별것 아닌 일이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말했어도 상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와 같지 않음을 우선 인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온전하게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판단하지 않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분명 그에게 큰 힘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중요함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이야기해 주십니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땅에 생명을 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담는 땅의 상태에 따라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전혀 열매를 맺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새들이 쉽게 쪼아 먹을 수 있는 길, 흙이 많지 않은 돌밭,
또 제대로 숨쉬기 힘든 가시덤불에서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은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땅은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겸손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간직하고 있으면
오히려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상태의 마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더 크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마음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수고와 땀의 열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이상기후로 걱정이 많습니다. 적당한 햇빛과 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장맛비라고 하기엔 너무 길어서, 우기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랍니다.
음성 감곡의 특산품은 복숭아인데 당도가 높고 맛이 있어 인기가 좋습니다.
과수원에 가보면, 어느 나무 밑에는 풀이 베어져 있고, 어느 밭에는 제초제로 풀을 죽였습니다.
여기서부터 튼실한 열매, 제맛을 낼 수 있는 복숭아가 구별됩니다.
수고와 땀을 쏟은 정성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으로는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 미사참례, 성체조배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튼실해야 하고 땅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맞은 기후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제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씨앗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졌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좋은 씨앗이 아니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맞은 기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필요합니다. 김매기를 하는 인간의 협력입니다.
좋은 땅이 아니라면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어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또한 좋은 씨앗을 구하려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후를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관리하고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있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씨앗인 말씀이 있어도 무관심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인 마음이 있어도 전해주는 말씀이 없으면 또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면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푀멘).
그리고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에 접하게 되고 서운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실은 내 생각대로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변의 풀은 우리가 뽑아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4. 뿌린 씨 전부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5. 뿌린 것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7. 종자는 남겨두어야 한다.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살게 하소서!”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태오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둘째는 ‘뿌려진 씨’에 대한 이야기, 곧 열매인 ‘결실’에 대한 이야기요,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이야기, 곧 ‘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첫째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서,
밭을 구별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며,
둘째로는 그 씨앗은 열매를 맺고 실현되고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며(이사 55,11),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밭을 잘 가꾸어야 할 하느님 자녀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8)
그렇다면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게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내가 좋은 땅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씨앗이 뿌려지기 전의 땅의 상태보다,
씨앗이 뿌려진 후에 땅을 갈고 가꾸는 것에 의해 그 땅의 성질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의 씨를 가꾸는 농사법’은 먼저 밭을 잘 쟁기질한 다음에 씨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땅이든 상관없이 먼저 씨가 뿌려진 다음에 그 밭이 쟁기질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쓸모없는 땅일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밭에 씨앗이 선사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의 존재와 가치를 깨닫는 일이요,
베풀어진 그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그러니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진 채 여전히 묻혀 있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며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 열매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보다 타인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4)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일구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씨앗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시고,
당신 말씀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리랑을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랑의 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분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는 어릴 때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한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선율이 무척 아름다웠고, 서정적이었습니다.
그 뒤로 북한의 악단이 연주한 ‘아리랑’도 들었습니다.
선율이 장엄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인터넷 검색에서 아리랑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아리랑에 대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아리랑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그런데 혹시 ‘아리랑’의 참뜻을 알고 계신지요?
우리는 ‘아리랑’의 뜻에 대해 외국인이 물으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뜻과 의미를 제대로 답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알고 숙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무슨 뜻일까요?
‘아리랑’은 작가 미상의 우리나라 민요로써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알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아리랑’을 흔히 사랑에 버림받은 어느 한 맺힌 여인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로
대충 그리 알고 생각하는데, ‘아리랑’이라는 민요 속에는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 참뜻은 <참 나를 깨달아 인간 완성에 이르는 기쁨을 노래한 깨달음의 노래>입니다.
‘아’(我)는 참된 나(眞我)를 의미합니다.
‘리’(理)는 알다, 다스리다, 통한다는 뜻입니다.
‘랑’(朗)은 즐겁다, 다스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리랑(我理朗)은 참<된 나(眞我)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나를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고,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피안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의 뜻은
진리를 외면하는 자는 얼마 못 가서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진리를 외면하고 오욕락(五慾樂)을 쫓아 생활하는 자는
그 과보로 얼마 못 가서 고통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아리랑’의 이치(理致)와 도리(道理)를 알고 나면
‘아리랑’은 '한(限)의 노래'나 저급한 노래가 아님은 물론이요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아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지만,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 때가 있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이의 비유”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먼저 깨달은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세례자 요한도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었던 것처럼 말씀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들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자갈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여 마음이 움직였지만,
세상의 것들에 곧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마음입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지만, 성당을 나서면 곧 세상 사람들의 마음처럼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가시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평소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로 변화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했던 바오로 사도의 마음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진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의 마음입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의 마음입니다.
좋은 땅은 직책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좋은 땅은 신분과 재산이 아닙니다.
좋은 땅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갈망입니다.
좋은 땅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헌신입니다.
좋은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저는 아이입니다.’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린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절)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 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절)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신앙인은 가치관이 올바로 서 있어야 한다.
이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제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을 살 수 있다.
사이비와 이단, 그리고 정통은 이렇게 구분하시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잘 알 듯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열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길과 돌밭과 가시밭과 같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잉태하시고
광야에 나아가 40일 동안 세속-육신-마귀의 욕망과 싸우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받을 때 받은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길과 같아서 말씀이 떨어져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겨
십일조를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육신은 그러한 강론을 들을 때 잠깐 할 생각을 하지만, 막상 내려고 하면 아까워서 내지 못합니다.
세속은 가시밭처럼 돈에 대한 걱정으로 몇 번 내고 있던 십일조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은 사이비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단과 무엇이 다른지,
또 정통 종교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이비는 우선 종교가 아닙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이를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구원’에 있습니다.
구원은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사랑의 수준’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독사가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수준은 어떻게 증가할까요? ‘믿음’으로 증가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자랄 수 있도록 ‘은총과 진리’를 내어줍니다.
이 은총과 진리로 아이는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고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전의 자신은 ‘생존 욕구’에 지배당하며 모기와 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 성장의 과정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숫자 ‘40’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평생이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비는 항상 성적인 부분의 행동(정명석)과 폭력적인 성향(오대양),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적 행동이 보입니다(다미 선교회).
그런데 그런 사이비의 성향이 밖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열매를 맺는 목적보다는
세속-육신-마귀의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입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범죄를 다룹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실로 밝혀졌고 이는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사제가 되어 동성애를 즐기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와 신학교가 폐쇄된 일도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제가 고해성사를 빌미로 성추행하려고 한다면 그 사제는 사이비입니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모르고 세속-육신-마귀를 이용해 종교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예 말씀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단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한번은 개신교의 가이드가 바티칸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랑스럽게 바티칸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 보이는 큰 성당이 바티칸 대성당입니다.
면죄부를 팔아서 지은 성당이죠. 교회의 타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장은 마치 수레바퀴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교회가 이방신인 태양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인들의 종교에서 쓰던 것인데 남자의 성기를 상징합니다.
이것들을 보면 천주교가 얼마나 이교들과의 혼합주의가 심한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히 성체를 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이비는 삼구를 섬기는 이들이라면, 이단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줄 수 없다고 여겨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거부합니다.
부모도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고 어떤 잘못도 덮어주는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실 정도로 자비롭지 못하실까요?
그런데 가톨릭 내에서도 제가 인간이 성모님처럼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가 되고
곧 하느님이 된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교리서에서도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도록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있는데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단적인 생각을 지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은 사이비와 이단들입니다.
이들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 우리 교회도 끊임없이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려다볼 곳은 오직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너무 가혹하다 싶은 부르심을 받고 두려워해 본 적이 있는지요?
너무나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은 주님의 초대 앞에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던 적은요?
때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그는 볼이 발그레한 미소년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 그리고 자신감이 없었던지 예레미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그러나 주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한번 정했으면 그만이다. 일단 한번 가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 7-8)
그렇게 해서 요즘으로 치면 중학생 나이의 소년 예레미야의 고달픈 예언자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린 예언의 내용이었습니다.
“가서 유다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에게 말하라.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축복하셔서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
같은 듣기 좋은 말을 전하라고 하면 저라도 흔쾌히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해야 할 예언의 내용은 유다 민족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이 사라진 빈껍데기 같은 이스라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음이 완고한 이 백성, 이 땅은 철저하게 유린되고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얼굴을 돌려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예레미야 예언자가 유다 고관대작들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 내리신 예언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뭐 이런 애송이가 와서 헛소리?’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 가서 외치니 반응은 더 심각했습니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마저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치도 무리로부터 쫓겨난 한 마리 들개처럼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광야를 떠돌던 슬픈 예언자였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쓴소리를 자꾸 내뱉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두고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예레 18,18)
예언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혹독했던지 나중에는 자신이 태어남까지 저주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이렇게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의 생애 내내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 앞에 서있었습니다.
오로지 올려다볼 곳은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민족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지, 친구들도 그를 멀리했지, 사방이 원수요 적군이지,
그가 바라보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주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그가 온종일 하는 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주님께 자신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했고,
‘어떻게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실 수 있냐?’며 그분께 따졌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울부짖고 기도하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선은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족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심각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는 훨씬 크다는 진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욱 힘차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의 씨앗과 마음의 밭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만약 우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약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생애를 놓고 각각 한 권의 책을 집필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0명이 책을 썼다고 해서 그 10권의 책이 결코 모두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료들을 모아야 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자료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들이 되겠고,
그 밖에도 사도행전이나 서간들, 필요하다면 구약성서와 위경들을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아들인 모든 자료들을 토대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저자가 10명이라면 10명이 쓴 10권의 책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저자마다 자료들을 분석, 종합, 해석, 편집하는 방법이 다르고,
사용하는 문체나 문장의 표현과 유형이 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가장 가까운 시기에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과 행적에 대하여
기록한 책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한다.
복음서가 4개인 이유는 4명의 저자가 서로 다르게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4개의 복음서에 붙여진 각각의 이름들이
그 복음서를 실제로 집필한 저자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복음서들이 적어도 예수님의 직제자인 마태오와 요한, 그리고 직제자의 제자인
마르코와 루카라는 사람의 사도적 권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한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통상 마르코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서
기원후 50년경에 수집된 예수 어록을 근거로 기원후 70년경에 집필되었고,
그다음에 예수어록집과 마르코복음을 토대로
빨라도 80년 이후에 마태오복음서와 루카 복음서가 기록되었으며,
90년 이후에서 100년 사이에 비교적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요한 복음서가 집필되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라 불리는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서는 그 분량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상 비교적 대동소이한 양상을 띠고 있으며,
전체적 사건 자체와 저자 개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넷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서는 개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한층 가미되어 돋보이는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각의 복음서를 대할 때, 이런 관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줄곧 마태오복음을 평일 미사의 복음으로 들어왔으며,
연중 제 21주간 토요일까지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카복음을 평일 미사의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참고로 연중 제1주간부터 제9주간까지는 마르코복음을 듣는다.
주지하다시피 연중시기는 다른 시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일상 가르침과 행적을 묵상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활철학과 그 정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수난, 죽음, 부활사건을 뺀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대략 대여섯 개의 군락으로 엮었다.
이를 크게는 다섯 개의 설교집성문과 한 개의 기적사화집성문으로 나눌 수 있다.
마태오는 우선 굵직한 10가지 기적사화를 8-9장에 모아 놓았고,
① 5-7장에는 산상설교를, ② 10장에는 파견설교를 ③ 13장에는 비유설교를,
④ 18장에는 공동체설교를, ⑤ 24-25장에는 종말심판설교를 모아 엮어 놓았다.
오늘 복음은 세 번째 설교집성문인 비유설교에 해당된다.
비유설교에는 전부 7개의 비유와 그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데,
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② 가라지의 비유, ③ 겨자씨의 비유, ④ 누룩의 비유,
⑤ 보물의 비유, ⑥ 진주의 비유, ⑦ 그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유를 통한 가르침의 대상을 본다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오가 집성한 비유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의 모두 하느님 나라와 그 신비에 관한 것이다.
비유설교에 등장하는 7가지 비유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주면서
하느님 나라의 지상 宣布者요 具現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란 말 그대로 神祕(mysterium)이다.
신비란 인간의 이성적 이론과 인식을 초월하는 불가사의하고 영묘한 비밀을 일컫는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밝혀주려 하신다.
그러나 신비 자체가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말도 지식도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깨우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자.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 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이는 복음이 선포되는 환경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 항상 좋은 조건에 뿌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씨가 뿌려진 장소와 그 결과를 비교한다면 비유자체는 쉽게 이해된다.
즉, ‘길바닥 → 새의 밥, 돌밭 → 말라죽음, 가시덤불 → 숨막혀 죽음,
좋은 땅 → 100백, 60백,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결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렇게 비유란 표현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보조관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면에 나타나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은 비유 뒤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원관념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비유는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그 지혜는 다른 어떤 지식이나, 슬기로움이라기보다는
바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알아들을 귀’(9절)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귀 기울여 듣고 머리로 깨달아 마음에 심는다면 복음은 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 밭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간악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온갖 환난과 박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기대치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조건, 즉 알아들을 귀가 있는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그 씨앗이 담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백배 이상의 열매를 가져오는 법이다.
하나의 낟알이 뿌려져 100개의 낟알을 열매 맺는다는 것은 분명히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과장되었기에 하나의, 복음의 씨앗이 가져오는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 땅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씨앗이기 때문이며,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보아 주고 가꾸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