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을 돌이켜보는 것은 아픈 과거가 아니라면 꽤 즐거운 상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현자들은 혼자있을 때 쓸데없는 상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경계하여
삼가하라고 하지만, 나는 무슨 대단한 위인이나 인물도 아니고 또한 정치가
, 학자, 선생님 등등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 인사도 아니기 때문에
가끔 멍한 상태로 공상에 나래를 펴고 시간 죽이기를 하곤 한다.
그런 킬링타임 시에 중요한 부분이 과거의 답습인데, 특히 어린시절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 곤 한다.
그것은 또한 너무 많이 지워져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부분이 많으므로
여러 각도에서 각기 다른 상황설정을 해 놓고 나름대로 가장 확실한
기억들은 글로 옴겨 적어서 다시는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긴가 민가하는 것은 어머님 또는
아버님께 여쭤 보기도 한다.
전혀 기억이나지 않는 일인데 부모님 이나 친지분 들이 그것을 되찾아
주실 때도있다.
" 내가 네살 때쯤 우리집은 학성 초등학교 뒷편 문화촌에 살고 있었는데,
그시절 원주시내의 각 가정집 빨래는 거의 봉천내에서 처리했다.
(봉천내의 어린시절 회상은 다음에 계속 써볼 생각임)
뭐 수질보호니 생활폐수니 하는 말은 생기지도 않을 때였다.
즉, 봉천내는 마을의 공동 빨래터이자 공동 목욕탕, 공동 수영장,
공동 놀이터의 다기능 복합 레저타운이었다.
따라서 어머니께서도 늘상 이 공동 빨래터를 이용하셨는데, 문제의
그날도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빨래하러 봉천내로 향했다.
늘상 다니던 길이라 어머니께서는 나 스스로도 능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 하시고 자꾸 놀아 달라고 보채는 나를 집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그날 온동네 사람들이 밤잠을 설치는 큰 사건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랬다. 그길로 나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마침내 나를 잃어버린걸 아시고는
기절초풍의 심정으로 온동네를 누비셨고, 퇴근 후 집에오신 아버지께서는
아예 동네 통장님 이하 전 동네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나를 찾으셨다.
그러나, 통금시간까지도 나를 찾지 못한 동네 사람들은 포기하고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시고, 나의 부모님은 뜬 눈으로 밤을
지세우셨단다.
이튼날 날이 밝고, 아버님은 출근도 거부하신 채로 이웃동네는 물론
봉천내 건너편 태장동 일대까지도 샅샅히 나를 찾으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