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류무사-101 첨부파일 :
연중에 대해 다시한번 사과드리며 이제부턴 독수리라도, 직접 치는 한이
있더라도 매일 올리겠습니다!(불끈!)...... 참고로 이번편 제가 쳐서
올린겁니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정혜란은 통이 크다. 얼마나 크냐고? 화산내 에서만 최
고인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양양에서도 그녀를 따를 이가 없어보였다. 뭐,
통 큰게 그리 나쁜 일일까 만은 그 정도가 거의 독보의 수준이라는데 문제
가 있었다. 독보적인 통 크기...
통이 큰 사람들이 으례히 그러하듯 정혜란은 손이 크다. 얼마나 크냐고? 같
은 말을 반복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겠지만 당사자에
겐 단지 그만둘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지금 같은 경우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고 라라거리며 부엌에 들어설
때 까지도 그녀의 아침은 여느때처럼 평온한 것이었다. 시원한 완탕으로 아
침을 만들려고 식료품을 쟁여놓은 찬장을 열기 전 까지도 그 기분은 별 변
화가 없었다. 그런데!
와르르르........
“꽥!”
이제야 문을 열어준걸 항의라도 하듯 기운차게 뛰쳐나오는 식료품들의 행렬
은 흡사 정부의 폭압에 항거하여 난을 일으킨 민중의 그것처럼 노도와 같아
서 통 크고 손 큰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바보 같은 비명을 만들어내었다.
한참을 쏟아지고서야 할말 다했다는 듯 점잖게 굴러 떨어진 양파 한 다발로
마지막 외침을 끝낸 찬장이 마지못해 침묵을 지키자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정혜란의 어께가 푸들푸들 떨려왔다.
“뭐, 뭐야 이거! 누가 이렇게 미련한 짓을 한거야! 이걸 다 어쩌라... 엥?”
허걱!
재빨리 주위를 경계하는 그녀의 눈은 방금 전 일어나서 흐리멍텅함을 자랑
하던 그것이 아니었다. 사실 들을 사람도 없지만. 어쨌든 창피함은 그럭저
럭 면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지만 바닥에서
나뒹구는 냉엄한 현실이 그녀를 다시 한번 고뇌의 숲으로 인도했다.
“에구, 이걸 어쩐다냐? 이 많은 걸 다 어떻게 해!”
바닥을 배회하는 수많은 식료품들이 ‘자 이제 우릴 어쩔건데?’ 라고 하는
듯 볼품없는 모습으로 정혜란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양이 장난이 아니었
다. 장정 열명이 먹어도 충분할 정도였다! 두고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어
림도 없는 소리다. 채소는 시집살이 십년만에 청춘의 미모를 다 잃은 중년
아낙마냥 윤기를 잃었고 나물류는 행여 누가 볼까 두려워 얼굴붉힌 색시처
럼 끝 부분이 변색되어있다. 오늘 안에, 그것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조
리하지 않으면 내다 버려야 할 판이다.
“아아... 나란 애는 왜 이 모양이지?”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탄식을 토해냈지만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몽땅 싸서 쥐도새도 모르게 내다버릴까?’
말도 안된다. 사부님이 아신다면 쫓겨날 것이다. 그녀역시 고아였기에 음식
물의 소중함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절대 그럴 순 없다.
힘없이 나물들을 쓰다듬던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기운차게 칼질을 시
작한 이유는 알기 어려웠다. 힘만 되찾은 게 아니라는 듯 정혜란의 입에선
노래 소리 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낭랑했던지 자고
있던 장유열까지 깨웠으니까.
“오늘 혜란이가 기분이 썩 좋은가보군.”
* * *
“그럴거 없다! 표국에서 주는 식사도 꽤나 먹을만해!”
“에이, 아녜요. 아무리 표국에서 나오는 밥이 괜찮다고 해도 일반 가정집
에서 만든것과 비교가 되겠어요?”
“수고스럽게 뭐하러 그러느냐? 난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대인!”
정혜란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기세는 실로 놀라운 것이라 뜨거운 완탕
을 조심스레 목구멍으로 넘기던 장유열이 하마터면 혓바닥을 델 뻔했다.
“대인께선 절 시비 이상으로 안보고 계셨군요? 하기야... 시비 주제에 버
릇없이 주인마님께서 일하시는 근무처에 출입을 한다면 누가 봐도 흉이겠지
요. 거기다 점심까지 싸서 간다면 말이예요. 건방진 말씀 올려서 죄송합니
다.”
“얘, 얘야... 난 그런 의도가 아니라...”
“아니에요 시. 비. 주제에 시. 비. 답지 않은 행동을 보여서 송구스럽습니
다. 그럼 천천히 그세요. 시. 비. 는 이만 물러갑니다.”
“이녀석아!”
이번에는 장유열이 언성을 높였다. 그녀가 한자씩 씹어뱉은 시비의 위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라 그 음절 하나하나가 장유열의 가슴을 후벼 팠다.
“네가 고생스러울까봐 그런 거야!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가
미안하구나. 그럼 오늘은 점심도 호강을 좀 해볼까나?”
“예!”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약속이나 한 듯 웃었다. 그런데 문득 정혜란의 눈가
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건 왜일까?
“아... 그럼 대인께선 마저 식사를 하세요. 전 주방에 볼일이 좀 있어서...”
소매로 눈가를 가리며 주방으로 뛰쳐나간 그녀가 야채를 볶으며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결코 아픔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 *
“그게 다 뭐냐?”
“음식이요.”
너무 당당한 정혜란의 말에 당연한 놀라움을 표시한 장유열이 오히려 바보
가 된 듯 했다. 그렇지만 이건 많아도 너무 많다. 그녀의 양손을 가득체우
고 남음이 있는 보따리들에 모두 음식이 담겨져 있다면 이걸 누가 다 먹는
단 말인가!
“그, 그걸... 묻는 게 아니잖느냐? 그거... 어떻게 처리하려고...”
“좀 많나요?”
“이게 어디 좀 많은 거냐? 혜란아... 어휴!”
나무 등걸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기다리던 장유열의 앞에 불쑥 나타난 정혜
란의 모습은 흡사 피난민과 같았다. 이고 지고 품에 안고 가져온 보따리들
에서 은은한 내음으로 미루어 그것이 옷가지 따위가 아니란건 알겠지만 전
부 음식이라면 항우장사라도 다 먹을 수 없을 거다.
“아하하... 너무 많구나... 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보며 기가 막혀 하던 장유열의 입가에도 어느
새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정헤란을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오늘의 상황이
대충 짐작되었던 것이다.
‘어쩐지 이녀석이 점심을 싸온다고 했더니, 또 식료품이 남았던 게로군.’
그의 생각과 다르게 여전히 의뭉을 떠는 정혜란은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연
기에 몰입해 있었다. 이럴땐 그저 맞장구가 최고다.
“호오~ 이걸 어떻게 할꼬? 버릴순 없고, 그렇다고 내가 다 먹을 양은 아니
고...”
“죄송해요. 이놈의 손이 웬수지! 또 음식을 낭비하게 됐잖아... 아!”
자기 손을 때리며 자책하던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 손바닥을 부딛쳤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장가가께서 근무하시는 실주회수조 분들에게 음식
을 나눠 드리는 게 어떨까요? 아직 점심시간도 아니니 식전일 테고 사람수
도 얼추 맞을 것 같네요! 아, 이거 내가 생각해낸 거지만 괜찮은걸!”
하고 슬그머니 장유열을 곁눈질해서 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뻔하고 귀여
워서 웃음을 터트릴 뻔 했으나 어디까지나 맞춰주기 위해서 그가 냉큼 호응
했다.
‘갑자기라...’
“오! 그거 훌륭한 생각이구나! 추산이의 첫 직장 사람들에게 변변한 인사
한번 하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네가 나보다 낫다!”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우며 칭찬하자 그녀의 입이 쫙 벌어졌다.
“그쵸? 괜찮죠?”
“노야께서도 식전이실 테니 어서 가 보거라. 음식은 식으면 맛이 없는 법
이다. 어서!”
“그래도 대인께서 드시는 거 보고...”
웃으며 장유열이 고개짓을 했다. 그는 지금의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
으니까 말이다. 더 이상 정헤란을 보고 있으면 죽은 아내와 먼저 간 큰아들
, 소식조차 끊긴 둘째, 그리고 강호로 나간 추삼이가 생각나 목이 메일것
만 같았다. 야속한 녀석들...
“아니다, 아니야... 나는 늘 같이 식사하는 표사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을
테니 음식이 식기 전에 실회조원들에게 가 보거라.”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장유열의 뒤에서 걸걸한 음성과 함께 늙으수레한
표사들 두엇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어이, 형님! 식사 안하세요?”
“해가 중천입니다, 중천!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때를 거르면 안되요!
어? 이아가씨는 누구에요? 그때 들인다던 시빕니까?”
“시비라니!”
짐짓 노한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선 장유열이 표사들에게 엄하게 한마디 했
다. 얼굴 표정엔 장난이 가득했지만 흘러나오는 말은 훈훈한 자부심이 어려
있어서 그 진위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이 애는 내 수양딸이야, 수양딸! 시비 같은 게 아니라구! 앞으로 이 아이
를 보면 내 자식이려니 하고 대하라고! 알아들 들었어?”
“수양딸이요?”
“그래!”
어안이 벙벙해있던 표사들이 ‘에이’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그 얼굴을
풀어야 했다. 장유열의 눈빛엔 진심이 가득했고, 이십여년을 한솥밥 먹은
처지인데 그정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 없었다.
“이, 이거 실례가 많았네. 난 자네 부친의 지기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으로 시작된 왁자지껄한 인사를 시작으로 정혜란은 잠시 자리에서 뜰 수 없
었다. 그중 하나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중신 서겠다고 했을 때도 그녀의 입
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장유열의 제촉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도 두 번 세 번 뒤를 돌아보는 정혜란의 눈망울엔 초로의 중노인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배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보잘것없고 힘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녀에겐 마음속의 아버지였다.
투표결과 : 투표참가자 총 명
찬 성 명 %
반 대 명 %
윗 글 [연재] 마동옥녀(魔童玉女) 68
아래글 [연재] 요도(妖刀)전설 (137) 주워 담지 못할 물을 위하여
게시자 정보게시자 정보
17. 창작연재 [담당자 - 박근우(ADAGIO)]
[14579] [연재] 삼류무사-102 첨부파일 :
좋은 기분은 실회조원들을 만나러가는 길에서도 이어졌다. 일반 표사들과
유리되어 있는 십삽조 대기전은 야트막한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야 했지만
힘 좋은 그녀에게 이 정도는 산책길에 불과했고 적당히 불어주는 산들바람
과 산새들의 지저귐은 축복처럼 다가왔다.
다소 썰렁한 실회조의 대기전도 정혜란에겐 오히려 화산을 생각나게 해주어
반가웠고, 조원들의 얼빵한 반응들도 재미있었다.
“언니!”
문을 열자마자 공기놀이 하듯 암기를 만지작거리던 당소소를 바라보고 반가
운 마음에 큰소리치자 눈이 똥그래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 하
는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장공자 집에서...”
“맞아요. 저에요, 저!”
이름이 뭐더라, 하는 반응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름 따위야 뭐 어떠랴.
졸고 있던 고담이 부스스한 눈으로 당소소와 정혜란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떤
말을 기대했다.
“이분 소저는 첨 뵙는 것 같은데?”
“혜란이가 여긴 어쩐일이냐?”
고담의 말을 막기라도 하듯 한구석에서 좌정하고 있던 지청완이 넉넉한 음
성으로 그녀를 반겨주었다.
“어머, 노야!”
“나같은 늙은이는 보이지도 않는가 보구나. 하기야, 이렇게 볼품없고 별
볼일 없는 노인이 신경 쓰일 리가 없겠지.”
정혜란의 혓바닥이 쏘옥 나왔다.
“안들려~ 안들려~. 귀가 이상해 졌나봐.”
“예끼, 이녀석!”
“헤헤헤헤헤...”
“어머. 그나저나 어디서 이렇게 고소한 내음이 진동하는거지? 내 코가 이
상해진 건가?”
“그러고보니 배가 고프군.”
당소소와 고담이 노골적으로 정혜란의 보따리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자 지
청완이 맞장구 쳤다. 이 둘은 잘 모르겠지만 저 키 크고 선머슴아 같은 처
녀가 만드는 음식은 매우 맛이 좋으며 사람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기에 저
절로 다셔지는 입맛을 탓해서는 안된다.
그녀가 풀어놓은 음식보따리는 지청완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었고 고
담의 감탄사는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사온 거 아니에요?”
나물 한 젓갈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당소소가 깜짝 놀라며 또 다른 반합
들을 모조리 열고는 박수를 쳤다.
“아하하하… 괜히 칭찬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냥 드실 만 하면 되는데.”
“그 무슨 소리!”
이것저것을 입속으로 밀어 넣던 고담이 제대로 반응조차 되지 않는 입으로
반박을 했다. 근자에 들어 먹어본 음식 중에 이만큼 그를 즐겁게 해준 것은
결단코 없었다.
“이게 먹을만한 정도면 복룡표국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돼지 여물이야, 그
럼 우린 돼지란 말인가!”
지청완과 당소소가 크게 웃었고 정혜란도 유쾌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 어?”
대기전을 들어서며 툴툴거리던 적괴가 정혜란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 차림새를 보아하니 신입은 아닌 것 같은데.
“자네도 이리 오게. 장추삼이 집에서 지내는 정혜란소저가 아주 맛난 음식
을 준비해 왔어. 이건 정말 맛있군.”
완자튀김을 한꺼번에 세 개나 입에 처넣고 고담이 손짓을 했으나 적괴는 침
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난 됐시다. 많이들 드슈.”
“그러지 말고 이리 오게. 정말 맛이 있어.”
“됐다니까요.”
지청완이 부르자 몸까지 뒹굴 돌리며 거부하는 적괴의 속내를 그 누가 알겠
는가. 지금 음식을 오물거리며 함박웃음을 짓는 당소소는 너무 아름다워서
감히 마주 보지 못할 것 같다.
‘저 자리에 어찌 동석하겠는가!’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엥?”
정혜란이 다소 불만스러운 눈빛이 되어 적괴를 슥 쓸어보았다.
‘감히 내 음식을 거부해?’
벌떡 일어선 그녀가 누어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같이 좀 드세요.”
“됐소이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들어요. 꼴은 저래도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다 구요.”
“귀찮으니까 그냥 가시오.”
“싸온 사람 성의가 있잖아요.”
“귀찮다고 하지 않았소!”
웃으며 말을 시작했던 정혜란의 목소리가 조금씩 딱딱해지고 적괴의 목소리
에 노골적인 불만이 더해져갔다. 이 기묘한 대치에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
던 세 사람도 하던 일을 멈추고 상황을 주시했는데 표정을 보자니 ‘어떻게
될까’ 하는 흥미진진함이 역력했다.
“조금만 먹어보라고 했잖아요!”
“싫다니까 그러내!”
“먹어 봐욧!”
적괴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움푹 들어간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 살광
이 번뜩이는 눈동자, 파리한 안색에 부스스한 머리까지 합쳐진 그의 얼굴을
직시할 사람은 별로 없다.
웬만큼 간이 크다고 하는 남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한번 노려보면 꼬리를 말
고, 눈을 내리 까는 게 일반적이다. 하물며 여자임에야.
이런 얼굴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바꿔 입는 옷도 아닌
데 어찌하겠는가? 그가 살아온 질곡된 삶이 반영된 표정 또한 의지와는 무
관이다. 멀쩡히 지나가던 어린아이들이 괜히 울음을 터뜨리고 여인네들이
슬금슬금 피하는 것도 이제는 면역이 되었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그도
사람이기에 당연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현실은 냉정했고 단 한번의
오차도 허용된 적이 없었다.
적괴가 얼굴을 들자 굳어있던 정혜란이 깜짝 놀랐다.
‘이제야 좀 편해지겠군.’
언제나와 같은 반응. 비틀린 듯한 미소와 함께 다시 누으려는 적괴였는데
그의 귀에 다소 엉뚱한 대꾸가 들려왔다.
“흐음. 이 아저씨도 자세히 뜯어보니 그런대로 남자답게 생겼는데? 첨엔
그냥 인상파로만 보였는데 그게 아니로군. 어쨌거나...”
텁!
어리둥절한 그의 팔목을 움켜쥐고 정혜란이 반쯤 감긴 눈으로 하품을 했다.
그녀는 원래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였고, 이렇게 재미없는 대화를 길게
끄는 건 질색이었다.
“와서 먹어요. 맛 자랑 하자는 건 아니지만 입에 대지도 않고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글세... 됐다니... 어?”
팔목을 뿌리치려고 손을 털자 묵직한 감촉이 왔다. 이건 여자의 힘이 아니다.
‘뭐야?’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봐도 요지부동이란 이런 것 인양 그녀의 팔목은 한 치
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대한 힘이 밀려들어와 아플 지경이다. 공
력? 공력 같은 걸 운기 했다면 화도나지 않았을 거다. 이건 순수한 힘이다.
힘으로 여자에게 눌릴 때 남자라면 분명히 자존심이 상할 것 이다. 그런데
적괴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이게 여자야?’
한번 더 힘을 가하자 팔목이 끊어질 것 같은 힘이 밀려들어왔다. 실로 엄청
난 악력(握力)이라 내공이라도 일으키지 않으면 울 판이다.
“아, 알았소. 알았으니까 이거 놓고 말 합시다. 놓고 말 하자고!”
“헹! 놓으면 또 벌렁 누을려고요? 어림없지. 빨랑 오기나해요.”
코웃음 치며 팔목을 휙 당기자 팔과 몸체가 분리되는 것 같은 아픔에 적괴
가 자유로운 한쪽 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매에는 장사 없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나보다.
“가겠소. 갈테니 이 손 좀 놔주시오!”
그제서야 팔을 놓고 정혜란이 씩 웃었다. 그 가식 없는 미소를 보노라니 방
금 전에 무지막지한 힘이 다 어디서 나왔나 싶었지만 묻기도 그래서 허탈하
게 고개 짓을 한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저기 있다...’
바로 눈앞에 있어도, 손만 내밀면 닿을 듯 한 거리이건만 도저히 좁힐 수
없었는데 지금 우습지도 않은 상황으로 그녀에게 가고 있다.
모두들 잘 모르지만 사실 적괴처럼 순진한 남자가 어디 있을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건만 자신이 세운 틀에 사로잡혀서 접근조차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며 행복할 수 있는 남자가 그였다. 여자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당
소소를 만난 이후로 단 한번도 여자를 사거나 하지 않았다. 낭인무사들 중
에 이런 사람은 없다. 고자라면 모를까?
“자, 자, 이리로 앉게. 음식 맛이 아주 일품이야. 돈 주고도 이렇게 한상
받기 어렵다구! 내가 전국각지를 돌아 다녔지만 서두...”
너스레를 떨며 자라를 권하는 고담의 친절이 기꺼웠지만 하필 당소소의 옆
자리라 어정쩡하게 서서 젓가락을 받아든 적괴가 그녀를 한번 힐끔거리고
고기완자를 한개 입에 넣었다.
‘맛있다!’
그는 원래 입이 짧다. 입이 짧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싫어한다. 정헤란의 음식은 놀랄 만큼 담백했기에 그의 입맛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다. 도가 생활을 십 오년 가까이 한 그녀이기에 자연 자극적
인 맛은 피하게 된 것인데 거기에 특유의 손맛까지 더해지자 적괴의 입에서
씹히는 음식에서 어떤 노랫소리라도 나오는 듯 했다.
턱!
“어때요. 먹을 만은 하죠?”
“켁... 쿨럭, 쿨럭!”
느닷없는 일격. 정혜란이 적괴의 등을 가볍게 치며 제딴엔 이물없이 웃었는
데 멍해있던 상태에서의 암습이었고, 그 위력 또한 결코 가벼운 게 아니라
서 살에 들린 적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에구, 괜찮아요?”
당황한 정혜란에게 손사래를 치며 목을 부여잡았지만 한번 터진 기침은 멎
을 줄 몰랐다.
“괘, 괜찮... 쿨럭”
“들어요.”
아득한 방향(芳香)과 함께 쳐들려진 손 하나. 그 손에 쥐어진 건 물잔.
순간적으로 적괴와 당소소의 시선이 얽혔다. 언제나 그윽하고 초롱하여 감
히 마주 대하지 못했던 눈망울이건만 이리도 가까이에서 대하자 기쁨보다
설움이 앞서는 건 왜일까? 뺏듯 잔을 건내 받고 단숨에 물을 들이킨 적괴가
잰걸음으로 대기전을 나섰다.
“음식도, 물도 잘 먹었소이다.”
“이봐요, 아저씨! 한 젓갈 밖에 안했잖아욧!”
“충분히 먹었소이다.”
멀리서 그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충분히 행복하게 보여서 정혜란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른 이유가 저건가?”
당소소가 웃으며 반합을 내밀었다.
“그 사람은 원래 낯을 가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이거나 뒤편 공터에 가져
다 줘요.”
“예?”
“사마대가하고 사민이 아직 내려오지 않는 걸로 봐서 오늘 검술훈련은 좀
엄격한 것 같네요. 시장들 할테니 음식 보면 좋아할 거 에요.”
“아, 맞다!”
무언가 허전하다고 생각 했는데 점창 출신 둘을 빼 놨구나, 속으로 생각하
며 반합을 받아든 정혜란이 대기전을 나서자 암말 없이 지켜보던 지청완이
빙그레 웃었다.
“여장부야, 여장부.”
“전 여태까지 염라수 이기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내참.”
투표결과 : 투표참가자 총 명
찬 성 명 %
반 대 명 %
윗 글 [연재] 아비혈(:칼의 눈물)9장 네가 무림을 아느냐#041
아래글 [연재] 궁귀검신(弓鬼劍神)제38장 회자정리(會者定離)-3
17. 창작연재 [담당자 - 박근우(ADAGIO)]
[15179] [연재] 삼류무사-103
"후욱, 후욱...”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을 생각도 없는 듯 단사민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중천에 떠있는 태양 만큼 이나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
자는 오랜만에 검도의 길을 만끽하는 즐거움과 희망에 가득 차 있었기에 따
가운 양광 정도는 무시해도 좋았다. 아예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대저 검도든, 선도든 간에 도(道)라 명명된 정신의 수양은 머리를 싸매고
갈등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해답을 주는 게 아니다. 몇 년을 고심하고 고심
해서 얻으려는 심득이 - 다가오지 않기에 종종 얼음물에 구덩이를 뚫고 목
만 내밀고 있거나, 폭포수 가운데서 가부좌를 틀고 몇날이고 참오하는 등
별 짓을 다해본다 - 용변을 보다가 배설의 쾌감 같은 어찌 보면 지극히 시
시한 감정이 토대가 되어 깃들기도 한다.
이틀 전에 할일도 없고 해서 어슬렁거리던 그가 하급 표사 둘의 멱살잡이를
본 것도 그런 식의 우연일 것이다.
‘저 나이들에 뭐하는 거람.’ 하며 심드렁하게 구경하던 단사민에게 두 표사의
지극히 동물적인, 그래서 야만적 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싸움이었건만
곰 두 마리가 으르릉 거리듯 맞붙은 둘을 보며 졸린 듯 감겨있던 그의 두 눈이
어느 순간 만개했다.
‘이상하네? 저런 바보 같은 짓거리가 왜 이리 흥겹지?’
실로 원초적인 싸움, 초식이니 공력 따위 없이 무조건 맞붙어서 낭자하게
피를 뿌리며 치고받는 하등적 싸움일 뿐인데 차츰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한바탕 어우러지고 싶은 건 왜일까?
‘야, 이거 재미있잖아?’
흥겨웠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재미있었다. 왜냐고 물으면 할말은 없었
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피의 양과 가빠진 숨소리가 귓가까지 들릴 무
렵부터 그의 고개가 우측으로 조금 기울었다.
‘죽일 만큼 큰 이유도 없는데 대충하고 말지들...’
쪼그려 앉아있던 단사민이 엉덩이를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막
옮기려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듯 했다.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뭐지?’
무시하고 가려해도 여전히 무언가가 그를 잡고 무언의 강요를 하는 듯 했다.
...... 돌아봐! 넌 지금 꼭 봐야할 걸 놓치고 있어!
그것 참, 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멍청하던 그의 눈은 한군데를 응시하게
되었고 발끝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한줄기의 어떤 감흥에 양 어께가 부르르
떨려왔다. 그건 두 표사들의 눈 이었다.
절대로 꺾이지 않겠노라 스스로 다짐하듯 지친 육신을 다그치고 있는 굴강
한 눈동자!
한점의 후회도, 두려움도 없이 앞만을 향해 전진하겠다는 듯 말없이 번들거
리고 있는 눈을 보자니 무인의 혼(魂)이 어쩌구 떠들던 자신이 왠지 초라해
지는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뭐지? 무엇이 저들을 이렇게 타오르게 하는 거지? 이건 그저 친구들간의
말싸움이 전이된 주먹질일 뿐이잖아?’
그럴까? 단지 그것뿐일까? 그렇다면 이 떨림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자랑은 아니지만 나이에 어울리는 순박하고 여린 삶을 산건 아니다. 아니,
그 나이로 치자면 누구와도 비교해도 좋으리만큼 험하고 거친 것을 보았다
고 자부한다.
살인도... 해보았다.
그런데 왜 저따위 막싸움꾼들의 눈동자를 직시하지 못할까? 왜?
설마...
‘내가 저 무식한 삼류표사들의 투기(鬪氣)에 눌리고 있다는 건가?’
기가 막히지 않은가! 비록 파문당했다고는 하나 아홉 개의 큰 문파중 하나
라는 점창파에서 십년이 넘게 검을 닦았고 마음 또한 단련했다. 지금이야
초라한 신세라지만 한때 촉망받는 후기지수라는 말도 종종 들었었다.
‘이게 말이 돼?’
거참, 을 연발하며 대기전에 와서도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길 한참이었고 수
련시간에도 그 눈동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음! 오늘 너의 검세는 그 어느날보다 힘과 기세가 충만하구나! 이제야 조
잡한 형식미에서 탈피하는 듯하니 다행이다.”
“예?”
“하하하하...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네가 만약 억지로 힘을 실었다
면 그 또한 억지스러웠을 터. 마음 저편에서 부르는 대로 검을 쳐냈기에 이
러한 결과가 온 것이야.”
“아, 아니 저는 도통 무슨 말씀인지...”
“억지로 이해할 것 없다. 그냥 지금처럼 만 하면 돼.”
세상에, 칭찬을 들었다! 그것도 매일 혼나던 부분에 관해서 말이다. 쌍무지
개 뜨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사마검군의 칭찬이 그 눈동자와 연관이 있다
면 이건 숙고해볼 문제가 아닌가?
‘도대체 뭐가 나아졌다는 걸까? 원시적인 투기? 그 정도로 칭찬할 분은 아
니고... 에잇, 모르겠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신이 나면 힘든 줄도 모르는 게 사람이다. 두시진 내내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점심도 거르고 있는데 힘들고 배고프긴 커녕 휘파람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좀 더 노력하면 잊고 싶은 과거의 잔재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멋지게 공중으로 몸을 띄우고 전방을 향해 섬전과도 같은 칼질을 하려는 무
렵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보폭과 소리로 보아 사마검군은 아니
였기에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왠 시비 차림새의 여자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
었는데 그 큰 키와 딱벌어진 어께는 여느 장정 못지않아서 상대적으로 체구
가 외소한 단사민이 깜짝 놀랐다.
'뭐야? 저런 몸으로 시비를 하긴 아깝다!'
내가 저 키면,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으나 한참 초식이 진행중이라 잡
생각을 걷고 검의 길에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아주 작은 오차로도 기혈과
정신간의 유기적 결합이 어긋나는 법이므로 상승 무공을 펼쳐날땐 무엇보다
몰입이 중요하다. 한참 신명날때 더 조심해야 한다.
"차아압!"
생각을 다잡으려는 듯, 한소리 기합성으로 자신을 일깨우고 검이 부르는대
로 길을 달려갔으나 그 자신은 모르지만 단사민의 검끝은 아까처럼 예리하
지 않았고 동작은 불필요하게 커졌다. 이건 워낙에 습관적인 현상인지라 그
가 인지하지 못하는건 너무도 당연했지만 기골이 장대한 시비차림의 처녀에
겐 확연히 드러났기에 소리쳐서 앳띤 검수를 부르려하던 그녀는 눈을 빛내
며 근처의 평평한 돌에 앉는걸 택했다. 밥이나 나르고 있지만 사실 이 아가
씨 만큼 무공을 좋아하는 사람을 중원천지에서 몇이나 찾을수 있을까?
예리하게 단사민의 검을 쫓던 그녀의 눈은 곧 의혹으로 바뀌었고 고개마져
옆으로 비스듬히 제껴진건 그의 검법이 절정을 치닫을 무렵이었다.
'아까의 파공성과 너무도 다른 검세. 지친거야, 뭐야?'
단사민의 검은 광장히 이쁘고 화려한 모양새와 각도를 그리며 허공에서 노
닐고 있었다. 이제 막 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또는 무학에
관해 막연한 동경만 가진 이라면 찬탄을 금치 못할 만큼 근사해 보이겠으나
그녀에겐 지루, 혹은 따분이었다.
'아아... 재미없... 앗! 저건!'
갑자기 그녀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눈까지 감고 스스로의 세계에서 허덕이던 단사민은 그가 그토록 떨쳐내고
싶었던 예전의 몸짓을 재현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단 한명의 관객이
지만 모르는 사람이 지켜본다는것 만으로도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화식(花式).
청혼하듯 종수식을 밟으며 검을 거두어 들이고 감은 눔을 서서히 뜬 단사민
이 시영단 특유의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의례히 쏟
아지던 멍한 눈빛과 어쩔줄 몰라하며 질러대던 괴성...
'어...'
기골이 장대한 처녀는 그의 생각대로 벌떡 일어서 있었다. 단지 바라보는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 뿐. 거긴 고양이 한마리가 잔뜩 움츠린채 사나운 눈초
리로 그녀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평범한 체구의 노란줄무늬 고양이 답지
않은 도도함이 엿보였다.
'으읔...!'
단지 고양이 한마리랑 놀기위해 자신의 검무에서 눈을 뗐단 말인가?
자존심이 상한 단사민은 그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시무단 시절의 행동양
식을 쫓고있다는걸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의례히, 당연히, 늘, 언제나, 반드시 그들이 춘 검무뒤에 돌아온 찬사와 비
명과 선망의 눈빛이 눈에 익기에 탈피하려해도 습관처럼 기다려지는 반응일
지도 모른다.
떨치고 싶지만 은연중에 다가와서 어느새 등뒤에 올라탄 아이처럼 악습은
그렇게 천진난만한 골칫거리일지도...
'에라... 시골처녀가 언제 이런 광경을 상상이나 했겠누! 정신이 없다보니
지나가는 고양이 한테 눈길이 간게지.'
좀 더 쉬운초식으로 갈걸 그랬나, 따위의 생각으로 자위하던 그가 문득 배
가 고파진 건 보자기에서 나는 냄새 때문만은 아닐것이다. 그는 아침부터
먹으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정혜란에게 단사민, 아니 모든 것
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녀의 눈과 머리는 오직 하나... 고양이 모양새
의 저 동물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식순이 생활에 쩔어있다고 해도 내 기세가 고양이 한마리를 어쩌지
못한다는거야? 폭풍이 아니라 산들바람이다, 산들바람.'
고양이는 처음의 사납던 기세가 눈에 띠게 위축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도도
한 품위만은 잃지않고 전방을 향해 에리한 눈길을 내쏘았다. 그런데 그녀의
한탄은 분명 일리가 있는것이 일개 고양이가 폭풍검 정혜란의 기세를 받아
내면서 여전히 대항하고 있다고 하면 화산 내의 그 누가 믿을까? 시간이 지
나면서 그녀의 이마에 가는 힘줄 하나가 불뚝 솟아 올랐다. 자존심이 상했
으리라.
멀뚱히 웃긴대치를 지켜보던 단사민은 고소한 내음에 끌려 한발 앞으로 나
섰다. 배고픈데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저기... 누구세... 헉!"
아무 생각없이 말을 붙이려 딛은 한걸음, 그러나 그의 앞엔 고양이와 노는
시비 따위는 없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기세, 낯익은 모습...
'당누님!?'
멍하니 서있는 단사민을 사이에두고 대치중이던 일인일묘(一人一猫)는 고양
이 쪽에서 귀를 낯춤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정혜란이 던져준 고기완자 두
어개를 입에 물고 터벅터벅 자리를 뜨는 녀석의 모습은 절대 패배자의 그것
이 아니었다. 만약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떨었다면 이렇게 유쾌한 기분으로
나누어 줬을리 없다.
"그놈 참 마음에 드네... 집 고양이는 아닌듯 싶고. 고양이 맞긴 맞아?"
"저기요..."
흐믓한 표정으로 주절거리는 정혜란에게 조심스레 단사민이 말을 붙였다.
방금전의 그 표정에 기가 팍 죽었기에 말꼬리마져 가늘게 떨려왔지만 의식
조차 하지 못했다.
"아!"
딴일에 정신이 팔려 팽개쳤던 아이를 다시 보았을때의 표정처럼 깜짝 놀란
그녀가 털털하게 웃으며 단사민의 손을 잡았다.
"아하하하... 엉뚱한 녀석 땜에 정신이 없었네. 배고프지요? 이리와서 음식
좀 들어요. 아, 사양할것 없어요. 사내란 모름지기 힘을 쏟은 후에 충분히
먹어둬야 하는거에요. 얼른 앉아요."
"에,에..."
냉차(冷茶) 한잔으로 시작된 보따리의 음식은 매우 맛이좋았기에 그녀가 누
군지, 왜 이런 음식을 주는지, 심지어는 사마검군이 어디갔는지 조차 잊고
정신없이 먹어대던 단사민이 문득 '누구세요' 하자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정혜란이 말문을 열었다.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솔직 담백한 화법이
기에 편했고 - 옷차림새와 시비 라는게 편했을지도 모르지만 - 가끔보여주
는 미소또한 넉넉하여 둘의 대화는 그런대로 잘 흘러가는 듯 했다.
"그런데..."
"말해요."
"단공자의 검법 말야. 내가 올라올때만 해도 멋있었는데 곧이어 지쳤는지
힘과 박력이 떨어지는거 같더라. 아침을 걸러서 그런걸거야. 때되면 끼니는
꼭 챙겨먹으라고. 젊을때 몸관리를 잘해두지 못하면 늙어서 고생한대."
빠직-
음식 맛잇고 사람 좋아 보여서 이얘기 저얘기 했다기로서니 어디 시비가 검
법 운운 한다는건가!
아까의 기세같은건 까맣게 잊은 단사민이 고개를 모로 틀며 콧방귀를 꼈다.
"후우~ 그래요. 아직도 뒷심이 딸리긴하죠. 그래도 이런게 밥이나 짓는 아
줌마의 눈에 보일 정도라면 정말 문제구나..."
빠직-
밥이나 짓고있다, 뭐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넘어갈수 있다. 그런데 아줌
마라고?
"그래요. 아줌마가 본 단공자의 검식을 얘기해줄까?"
벌떡 일어선 정혜란이 나무가지 하나를 꺽어들었다. 화산시절의 폭풍검이였
다면 흥분해서 바로 노도와같은 검식을 쏟아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차분
한 마음은 둘째 치고라도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어딜 지적해주어야
하는지 거짓말처럼 눈에 들어온다. 아줌마란 말 만큼은 용서가 안되지만.
17. 창작연재 [담당자 - 박근우(ADAGIO)]
[15481] [연재] 삼류무사-104
"묻겠어요. 왜 검을 들었지요? 맨손보다 좋아서 겠지요?"
아직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혜란이 단사민을 내려보며 말
했다. 원체 장신인데다가 일어서기까지 하자 목을 뒤로 젖혀서 봐야할 정도
로 둘의 눈높이는 차이가 있었지만 둘이 바라보는 검의 길은 더 큰 의 강
이 놓여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설마 부엌칼하고 무인들이 사용하는 그것이 다
같은 종류의 물건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냐? 아아... 이런말이나 들어줘야 하
는 신세라니, 정말 처량하구나.'
그의 내심을 짐작이라도 한 듯 정혜란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워
낙 미미해서 눈치채기 어려웠지만.
피교육자의 집중도가 이정도로 떨어져 있을때는 압도적인 무위를 한번 펼쳐
보임으로서 분위기의 반전을 꾀함이 가장 좋다. 시선을 잡아끄는 효과도 있
고 무엇보다 교육자와 피교육자간 힘의 차이를 인식시켜서 억지로나마 신리
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정혜란 역시 이점을 잘 알고 실행해왔던 터였다. 생각해보라, 명문정파에
발을 딛은 패기만만한 청년들앞에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여자가 나서서 검술
을 지도한다고 분위기를 잡으면 과연 몇이나 충실하게 따를것인지...
'화산 내 였으면 벌써 땅바닥을 기게 해주련만... 정말 성질 많이 죽었구나!'
잠시 고개를 숙이고 왼주먹을 부르르 떤 후에 참착함을 겨우 회복한 정혜란
이 빙긋 웃었다. 웃지 않으면 어쩔거야, 하며.
"자, 여기 고기 덩어리가 있어요. 요리를 하기 위해선 이걸 썰어야 겠지요?
그런데 고기 처럼 안썰리는게 없어요. 꽝꽝 얼어있다면 상관없지만 그런걸
구할수는 없고... 이럴때는 칼질을 이렇게 한답니다."
피슛-
그녀가 나뭇가지를 빠르게 아래로 내리 그었다.
'후아암... 아줌마가 되게 심심하가보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나는
요리사 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눈물까지 찔끔이며 하품하는 단사민 이건만 개의치 않겠다는 듯 여전한 목
소리로 정혜란의 강의는 계속 되었다.
"썰은 고기를 야채와 함께 다져야 완자를 만들수 있지요? 그럼 다질때 칼질
이 아까와 같을까요? 아니죠. 그건 정말 비생산적인 일이겠죠.고기를 자를
때 같은 힘도 속도도 필요없어요. 그저 부드럽게 쓰다듬듯 해주면 돼요."
핏핏핏-
정말 고기를 다지듯 그녀의 나뭇가지가 빠르게 움직였다. 누가 보아도 소꿉
놀이와 같은 손놀림.
'미안하지만 이쯤에서 관두라고 해야겠군. 사마 대가가 보시면 경을 칠 일이야.'
눈가를 쓱 한번 흠치고 단사민이 천천히 일어나서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저기요. 이만..."
"종(縱)으로 움직인 검은 물론 횡(橫)이나 사(斜), 기타 여러각도로 변형이
가능하겠지요? 이렇게 말이죠."
그의 말을 여지없이 끊어버리고 정헤란이 나뭇가지를 짧게 옆으로 그었다.
피슛-
"충분히 알았거든요. 근대 좀있다 대형이 오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피슛-
그녀가 사선으로 나뭇가지를 내리 그을때 단사민의 이마엔 주름이 패였다.
'보자보자하니 이 아줌마가 뭐하는거야? 내가 그리 만만해 보이나?'
입밖에 냈다면 정혜란은 서슴없이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어'라고.
그녀 역시 단사민의 상태가 짐작이 간다는 듯 옆으로 힐끔 돌아보고 나뭇가
지를 중단으로 세운 채 가만히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높고 푸르렀기에 정혜란은 저도 모르게 어께가 한번 움츠러 들
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단호했다.
"고기를 써는 방식은 이래요. 누구든 고기를 썰면서 기교를 부리지 않겠지
요. 하지만 고기 써는 칼도 때론 사람을 벨수 있답니다. 방식은 아까와 같
으면 될 터이고."
그녀의 자세는 처음과 완연히 차이가 났으나 선입견에 사로잡힌 단사민에게
보일 정도까지는 아니였다. 공력을 운기하지도 않았고 기세를 불러 일으킨
것도 아니요, 고절한 검식의 기식을 취하지도 않았으니 얼마든지 흘릴수 있
으리라.
"에, 예, 잘 알았어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도무주지 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단사민이 몸을 돌려 연무장을 벗어나려 했
다. 아녀자를 윽박지를수야 없지않은가? 차라리 자신이 피하고 말지.
"어디 가요? 말하고 있잖아요!"
"바쁘다고 했잖아요!"
"연장자가 말하는데 끝나기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건 예의가 아니지요. 이
리와요."
"바쁘다니까요!"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단사민의 몸짓이 정혜란에게 먹힐리 없었다. 그는
지금 화산내에서 최고로 무서운 무술교두의 코털을 뽑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 이나 알 도리가 없고, 솔직히 말해 무슨 죄가 있으랴! 아무리 좋은것 시
켜준다고 해도 자신이 싫다는데 누가 뭐라 하랴. 문제는 상대가 폭풍검 정
혜란이란것 뿐.
'누가 구파 출신 아니랄까봐 자존심만 천하 제일 수준 이군. 그렇지만 이몸
앞에선 어림도 없지.'
텁!
전혀 구파 출신 아닌것같은 생각을 하며 정혜란이 단사민의 팔목을 덥썩 잡
았다.
"에이 진짜! 이거 왜 이래요!"
이 시비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몇마디 상대해줬다고 자신이 무슨 무림인
인줄 착각하는거 같다. 이럴땐 단호한 몸짓으로 사내의 기상을 보여주면 정
신을 차리리라. 싸늘한 눈빛으로 정혜란을 한번 본 그가 힘차게 팔을 떨치
려 했다.
'뭐, 뭐야?'
요지부동!
그이 팔은 어께에 들어간 힘을 전달받지 못했다는듯 여하한의 움직임을 보
이지 않았고.
'아욱!'
팔목이 끊어질것처럼 가중되는 압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이 아줌마 뭐야?'
떡대 좋은 아줌마는 힘도 무지막지 한지 안깐힘을 쓰는 자신과는 달리 입가
에 옅은 미소까지 짓고 있다.
그녀의 미소는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서슬퍼런 무엇이되어 단사민의 전신을
옥죄었다. 이제야 기억이난다. 그녀는 동네 시비같은거랑은 달랐다. 뭐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지만.
"똑바로 들어. 단공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안봐도 잘 알지만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것 처럼 천박한건 없어. 명문 정파 출신이라고 사람을 내려
보고 싶다면 산속에서 아예 내려오지 않으면돼. 일단 산문을 나섰다면 품고
있는 자부심을 갈무리 하는건 좋지만 가지고있는 자존심 같은건 버려. 비록
내가 시비고 들고있는 칼로 사마외도를 상대하는게 아니라 야채와 고기 따
위를 썰지만 칼이 말하고싶은 바는 공자 보다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해. 아
무리 뛰어난 검식에 천하 명검을 들고 있더라도 '검의 소리' 를 이해하지
못하면 지닌 힘의 절반도 끌어내지 못해!"
머엉-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그녀의 얘기가 이어졌다.
"검법이 뭘까? 검이 가진 기능을 극한까지 올리려는 시도에서 나온것일까?
원론적으로 본다면 맞을지 모르지만 사실 정답은 아니지. 검법은 어디까지
나 검의 길을 보기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아. 검법은 수단이지, 전체가
아니란거야. 종종 어린 무인들은 천고의 비급 하나만 얻으면 천하제일인이
될수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하지. 다시한번 묻겠어.내가 지금 화산의 절기라
는 창궁우전검서를 준다면 단공자는 몇할이나 이해할것이며 얼마나 자기것
으로 만들수 있겠어?"
정혜란이 검지손가락을 우뚝 세워보였다. 작은 동작이지만 거기에 담긴 기
세는 천하를 오시할 만큼 강렬한지라 단사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
야했다.
"일할? 내가 일할을 얘기할것 같아? 아니 난 이렇게 말해주려 해. 단공자는
우전검의 일푼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한가지 초식도 펼칠수 없어."
"이익..."
"왜? 내가 하는 말이 분한가? 시비 따위에게 이런 말 들으니 억울하고 원통
해? 그깟 시비 보다도 검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볼 생각 같은건
들지도 않지?"
"다, 당신이 무슨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냐고?"
단사민의 말을 끊고 정혜란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검을 들었을때는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검이 부르는
대로 움직여야해. 점창에서는 그런것도 안 가르쳤나? 자기자신의 감정을 개
입시킬수 있는 사람은 강호에 단 두 부류만이 있다는걸."
"검선의 경지에 이르른 고수이거나 겉멋에 절은 검경 초입생... 맞는 대답
인지 모르겠소."
난데없는 소리에 단사민이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오르며 정혜란의 말을 받
은 이는 다름아닌 사마검군 이었는데 그의 기척을 눈치 챘는지 모르지만 그
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하늘을 다시한번 천천히 바라보고 정혜란이
몸을 틀어 사마검군을 똑바로 마주 대하자 주위의 분위기는 공기가 다 빠져
나간듯 일순간에 정적으로 뒤덮였다.
"훗, 점창의 검수들은 남의 얘기를 엿듣는게 취미인가 보군요?"
"소저처럼 목소리가 큰 경우라면 엿듣지 않아도 다 들릴것이오. 아무튼 본
인을 대신하여 겉만만 잔뜩 둔 점창의 애숭이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내려주
신것 충심으로 감사드리오."
정중한 그의 포권에 정혜란도 검을 땅으로 향하고 포권의 예를 취하는 동작
으로 화답하였으나 안절부절 못하는 단사민을 보지 않더라도 둘사이에 흐르
는 공기가 그리 화기애애하진 않음은 누구도 느낄수 있으리만치 어색했다.
깊숙한 포권을 끝내고 내리감았던 두눈을 천천히 뜬 사마검군의 입에서 흘
러나온 묵직한 저음은 정혜란의 나뭇가지가 다시 위로 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점창의 선조들께서는 검에 감정을 담는 부류에대해 말씀해주시지
않았지만 한가지 사실만큼은 제자들의 가슴속까지 각인시켜 놓으셨다오."
'난 안돼! 참았어야 하는데 입이 방정이라 또한번 곤욕을 치르게 생겼구나!
다른건 몰라도 사문 만큼은 절대로 언급해서 안되는 건데... 이제와서 무
르자고 할수도 없고, 그냥 없었던 일로 넘어가자고 할수도 없고!'
그녀역시 한 문파의 제자로서 사문이 모욕을 받는다면 대번에 화를 낼 것이
다. 하물며 고지식함이 풀풀 풍기는 눈앞의 사내라면 목숨을 주는 한이 있
더라도 그것만큼은 참을수 없으리라. 그의 다음말을 뻔히 알면서도 뭐라고
대꾸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기보다 사태의 수습이 우선이다.
말로 해결보긴 어렵겠지만.
"사문의 모욕은 천배, 만배로 갚아주라는 사실을 말이오!"
'하아~.'
"신분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검의 소리에 관해 알고있는 소저라면 적어도 아
녀자를 핍박했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터, 준비하시오."
"줏어들은 풍월이에요."
맥빠진 정혜란의 대꾸 따위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검을 끌
러 그녀의 앞에 던진 사마검군이 단사민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대, 대가 굳이 지, 진검승부까지 필요하..."
"너는 나를 몇번이나 실망시켜야 만족하겠느냐."
단호한 그의 한마디에 정혜란을 몇번 힐끗거리던 단사민이 울상이되어 검을
건냈다. 눈 앞의 여인네가 검을 좀 아는지 모른다쳐도 사마검군이란 이름
은 차원이 다르다. '사천일검' 이란 외호가 말해주듯 검 한자루로 사천성
일대에선 전설처럼 칭송받았던 검수였고, 표사일을 하는 지금 마음의 수양
까지 깊어졌다. 검풍의 기운만으로 사람을 살상할 지경에 이르른 그의 진검
은 추측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무릎을 꿇고 빌어요! 이분이 누군지 알기나해요? 점창 최고의 후기지수였
던 사마검군 대가라구요! 어줍잖은 검법 가지곤 크게 경을 치를거에요! 진
심으로 뉘우친다면 큰소리 한번으로 끝날수도 있으니 어서 눈물로 호소하세요!")
빠직-
'뭐? 무릎을꿇고 눈물로 호소해? 이 꼬마가 날 뭘로보고!'
단사민의 친절한 전음은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미안함을 일거에 날려보낼만
한 내용인지라 그가 자신을 모르는게 당연하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생각마져
도 잊게해주었다. 사건의 발단같은건 아무래도 좋았다!
"피할 형편이 아닌듯 하군요."
("아줌마!")
전음을 무시하며 땅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자 묘한 감흥에 오른손이 짜르르
떨려왔다.
'오랫만이로구나.'
한달이 넘게 만져보지 못했었거늘 여전한 울림으로 그녀를 맞이하니 더없이
정겹다.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하지만 힘들고 외로울
때면 어김없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사랑하는이의 두손을 만지듯 검신을 쓰다듬으며 정혜란의 짓는 그녀의 미소
가 왠지 낯익은 듯 하여 사마검군의 안색이 변했다. 언젠가 저런 느낌을 받
은 기억이 있는데...
잡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한번 흔들고 그가 다시한번 정중히 포권
을 했다.
"사천의 사마검군이라 하오. 점창에서 검을 닦고 지금은 파문중이나 사문의
검식은 잊지 않아도 되는 배려로 가르침대로 상대를 하겠소. 비무에 응해
주어 감사드리오."
"정혜란이라고 합니다. 이름 이외엔 밝히기 어려운 처지니 이해해 주시길."
한동안 그녀를 응시하던 사마검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도고수의
기운을 풍기는 여인이 남의 집에서 밥이나 짓고 있다면 분명 이유가 있으리
라. 그리고 그런건 알려주기 어려운 법이다. 담백한 그의 응대에 정혜란도
화답을 했다.
"그럼 시작할까요?"
삼류무사
[8] 삼류무사-105
[연재] 삼류무사-105
마치 정하기라도 한듯 둘의 거리는 비부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거리로 벌어
져 있었고 지청술을 시전한 결과 반경 삼장내로 인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자신을 욕했다면 여인네에게 칼을 뽑아들 사마검군이 아니다. 뺨을 맞더라
도 웃으면서 자리를 피했을것이고 침을 뱉더라도 닦아내면 그만이다. 그러
나 사문을 모욕하는 이에게 여하한의 타협은 없다.
'사실 이 여인은 두가지 죄를 범했다. 사조님들을 능멸했으며 사문의 무공
을 비꼬았다. 그 의도가 어쨌든간에 댓가는 받아내야 하는법. 그래, 당신이
듣는다는 검의 소리를 내게도 울려보라.'
사마검군이 칼을 움켜쥐며 결의를 다지고 있을때 정혜란은 지극히 담담했다
, 아니 평화롭기까지 했다. 오랫만에 해보는 진검비무고 상대로는 더없이
흡족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다. 적당한 투쟁심이 있기에 맥빠진 대타가 아니
란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하늘이 너무 아름답잖아!'
건내받은 검을 검집에서 조용히 빼내었다.
스르릉-
세상엔 여러가지 소리가 있다. 수도 셀수 없으리만치 많은 그것들은, 제각
기의 특질이 있고 받아들이는 사람마다의 차이가 명확히 구분되기에 소리
하나하나를 정의내린다는건 무리이리라. 정혜란이 좋아하는 소리라면 무엇
보다도 검질에서 빠져나오면서 토해내는 검의 심호흡과도 같은 일성(一聲)
이다. 장추삼이 목을 꺽으며 발생되는 뼈부딛치는 소리를 즐기는것과 비슷
하다고 할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마검군이 검례(劍禮)의 표시로 가슴에 검을
대었고 정혜란도 마주 예를 표함으로 기본적인 절차가 끝나자 둘의 얼굴은
천천히 경직되었다.
예의 뒤에 찾아오는 검날이란 모순, 무림인이란 위치 자체가 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듯 그들은 서로를 향해 천천히 검을 겨누었다.
파라락~
공력을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사마검군의 장포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생사
결이 아니기에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따르고는 있지만 긴장도
는 여느 결투 못지않게 진중한 분위기였고 어정쩡하게 서있던 단사민은 전
음 한마디 날리는게 고작이었다.
("죽을죄를 지은것도 아니고, 여인이란 것을 감한하여 손속에 사정을 부탁
합니다, 대가!")
"오시오! 먼저 손을 쓰기 싫은건 남정네의 치졸한 자존심이라 치부해도 좋소."
정혜란이 들고있던 검을 옆으로 한번 쳐내는 시늉을 하였다.
'이 여인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다시 반대편 옆으로 한번 쳐낸검은 이번엔 수직으로 곱게 떨어져 내렸다.
공격을 해오지 않기에 우두커니 서있던 사마검군이 참지못하겠다는듯 큰기
침 한번으로 그녀를 일깨웠다. 그러나 정혜란은 지금 넋을 놓고있지도 않았
고 장난따위를 치는건 더더욱 아니였다. 마지막으로 쳐내린 검을 다시 올리
는 것으로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 순서대로 가겠어요."
' ? '
' ? '
순간적으로 사마검군과 단사민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순서대
로 가겠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설마?'
곧 말의 의미를 알아챈 사마검군이 노골적으로 불쾌한빛을 얼굴에 지을때
그의 어린 사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여자는 너무 광오하지 않은가!
"감히 사천제일검 앞에서 검적(劍跡)을 일러주는건 무슨 만용인거요? 당신
이 무슨 절대오존쯤 되는 줄 아시오! 살다보니 별 어이가 없는일도 다 있군!"
"허허허..."
어이가 없었던지 고개를 모로 꼬고 헛웃음을 날리던 사마검군이 낮게 말했
다. 원래 저음인데다 목소리에 힘까지 실리자 그것은 압박감이 되어 장내를
지배할만큼 무게가 실렸다.
"오시오."
스르륵-
한발을 딛으며 예고한대로 정혜란의 검이 사선 방향에서 그에게로 다가섰다.
느리다면 느릴수있는 검세, 사마검군같은 쾌검수(快劍手)라면 대번에 윽박지르듯
일섬광(一閃光)의 검을 쳐내어 공세 자체가 오기전에 상황을 종료시킬수있으리라.
'허.'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검을 들이밀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워낙에 느리고
선기(先氣)를 주었기에, 아니면 우연으로 방위 자체를 점유했을수 있었으리라.
느리다고 생각했던 검세건만 어느새 코앞까지 닥쳐있어서 일단 막는것이
급선무다. 쾌검식 하나를 쓸수 없다는 말이지 사천일검이 이정도의 임기
응변도 없다면 외호를 버려야 할 것이다. 그의 검은 순간적으로 수비식을
위한 중단의 형태로 되 돌아가 천천히 다가오는 검세에 대비하는 일방 반격
을 위한 각도의 변환에도 힘을 실어 놓았다.
명가의 전환식이라 아니할수 없으리만치 유려한 변화, 독아를 숨기고 현재를
대비하기에 부끄럼없는 훌륭한 방비라고 하겠다. 만약 예고한대로 검적을
그린다면 기다렸다는듯 전광석화도 같은 쾌검이 출수되리라.
스륵-
정혜란의 검이 반대방향으로 변화를 꾀했다. 그야말로 아까 보인 그대로의
전환, 아무리 공력을 운기하지않은 비무라고는 해도 이건 만용에 가까운 일
이다. 상대를 무시한 처사라고 봐도 별달리 할말이 없으니 당사자인 사마검
군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린건 당연했다. 그는 건방진 인물을 가장 싫어하니까.
'매운맛을 보여줘야 정신 차리겠나!'
그 매운맛을 보여주기 위해 사마검군의 어께가 느슨히 풀렸다. 쾌검을 전개
하기 직전에 보이는 신체변화. 그리고 그는 또다시 검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번 역시 선기와 방위 모든 면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고 무인의 본능상 이
건 아니라는 직감이 사마검군의 뇌리에 맴돌았다. 억지로라도 검을 꽂아넣
을순 있겠지만 뒷감당이 어려울듯 하다.
'거참!'
왠지 바보가 된 느낌. 망망대해에서 떨어트린 바늘을 찾아보려는 시도와같
이 그의 검은 제할일과 무관하게 겉돌았고 또다시 수비나하며 다음수를 기
다려야할 처지가 되었다. 평범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검세를 맞이하기위해
사마검군이 안정적 형태의 수비식을 취하려 검극을 이동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쿠쿠쿠쿠-
정혜란의 제2식(?)은 첫번째 검세보다 훨씬 무겁고 장중했기에 손님 맞이하
듯 편안하게 응대할 성질의 검세가 아니었다. 느긋하던 그의 마음은 일순간
에 초긴장의 상태로 바뀌었고 여유롭던 손놀림과 보법도 생사대적을 마주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제대로된 전투형태로의 이완이라고
할까?
'이거 오늘 제대로 개안(開眼)을 하는구나. 어느정도 검의 뜻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여인의 무위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이지 않은
가! 경솔했다, 사마검군.'
훈계를 내리는 입장이라고 먹었던 마음을 거둔 그의 기세는 과연 아까와 차
원이 다른 모습이었기에 그녀도 사천일검이 호사가들의 말에서만 존재하는
허언만은 아니란걸 인정해야했다. 그는 단순히 쾌검이나 펼치는 일반검수가
아니었다.
'그래. 이제야 제대로 한번 어우러져 보겠군. 진작에 이랬어야지.'
촘촘히 펼쳐지는 수비식에서 한발 빼듯 검을 틀고 기묘한 각도로 검극을 이
동한 정혜란이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직단(直斷)의 기세로 힘을 실으며 검
을 내리그었다.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검의 기운은 변화와 힘을 가지려하나 자유로우려
하나. 형식을 파괴하는 것과 형식을 지키는 것은 어디에 가치기준을 둬야
하나. 그 모든 기준은 또 어디에서 찾아야하나......
"차앗!!"
고오오오-
공력이 실리지 않았거늘 검의 기세는 바람을 부르고 땅을 가를듯 도도하여
일진광풍이 연무장을 한바탕 쓸고가듯 무섭게 사마검군을 몰아부쳤다. 이런
기세를 어중간한 형식 같은걸로 맞섰다간 대번에 나동그라질 것이다.
파파팟-
그의 검이 순식간에 하단에서 상단까지 몇번을 이동하며 검세의 운무(雲霧)
를 층층히 형성하며 정혜란이 불러온 검의 바람을 막아섰다. 노도와 같은
진군도 여러번 걸러지듯 구름에 가려지자 어느덧 그 힘과 기세가 둔화되어
처음처럼 매섭지도 폭팔적이지도 않았다. 이대로 끝난다면 그녀의 검은 마
지막 변화를 준비해야할 것이다.
츅!
순간 마자막 숨결을 몰아쉬듯 또 하나의 검풍이 밀려들어와 운무를 산산히
깨트렸다. 상식선에서 가능하지 않을성싶은 변화, 이렇게 대처하리란걸 예
측이라도 했다는 듯 기습적이면서도 적절한 시기와 기세였기에 속수무책처
럼 뚫려버린 검막(劍幕)은 도리어 사마검군의 검로를 방해하는 격이되어 그
가 부른 힘의 관성때문에 검형(劍形)을 유지하는것 조차 어려웠지만 이대로
당할수만은 없기에 억지로나마 길을 열었다.
파캉!
임기응변이라 보기어려울만큼 자연스럽고 힘있는 검세가 정혜란의 마지막
변화를 해소시키며 그녀의 수비마져 제한범위에 묶어두는 효과를 보였다.
일견 사마검군의 우위로 비쳐질수 있는 광경이지만 일그러진 그의 입매를
본다면 이 한수를 위해 얼마나 무리했는지 짐작할수 있었다. 그에비해 수세
에 몰린듯한 정혜란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검을 걷어올리며 그녀의 마지
막 변화를 보였다. 한번 빼앗긴 선기는 마지막까지 사마검군의 몫이 아니였
고 스스로의 변화에 지쳐버린 검은 무뎌질대로 무뎌져있었기에 그녀의 마지
막 공세가 어떤 형태이든 힘겨울수 밖에 없었다.
멈칫!
순간적으로 정혜란의 검이 진로를 잃은 배마냥 흔들리더니 떨어지는 낙옆처
럼 가만히 내려앉았다. 그 모양새가 너무도 고요하여 폭풍뒤에 찾아온 적막
과도 같이 연무장은 고요함속에 두 무인의 가쁜 숨결만 탁하게 메아리쳤다.
"힘이 부쳐서 더이상의 전개가 어렵군요. 승패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사문
을 언급한 저의 경솔함은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너그러히 용서하시길...
에고, 다리가 아파서 더이상은 서있지 못하겠네."
정중한 사과를 올리고 전신이 풀린것처럼 자리에 주저앉는 그녀의 모습을
보노라면 언제 그와같은 검세를 말했나 싶을 정도였기에 맥이 다 빠지는 사
마검군이었다. 영락없는 동네 아낙과도 같은 털털함.
'아아... 겨우 비긴것 밖에 되지 않는구나.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가 많다지
만 이런곳에서 또한번 놀라는구나.'
멍하니 서있던 그가 정혜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긴 한숨과함께 연무장을
벗어났다. 둘을 번갈아보던 단사민도 급하게 사마검군을 쫓았고 발자국소
리가 멀어질무렵 정혜란의 시선은 풀숲 어딘가를 쫓았다.
("고마와하실 필욘 없어요. 저도 어차피 벅찼었으니까 말이에요.")
("정동생은 내가 암기나 날린다고 그정도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해? 후우~
사마대가의 검은 동생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건 내가 아니더라도 알수
있었을거야. 아무튼 고마워. 한번 더 좌절을 겪는다면 저분의 정신은 부셔
질지도 몰라. 그건...")
당소소의 전음이 멀어져갈때 정혜란은 '한번 더' 에 담긴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었다. 무인에게의 좌절이라면 패배일테고 사마검군같은 인물이
스스로의 나약함이나 패배의 아픔따위를 주저리주저리 읊고 다닐리 없다.
그렇다면 그의 패배에 어떤식으로든 당소소가 관여했다는건데...
'최소한 패배의 순간을 지켜보았을거야. 그래서 그가 당언니를 멀리하는걸
지도.'
당소소가 사마검군을 좋아하는데 그가 피한다고 장추삼이 말했을때 정혜란
은 코웃음을 쳤었다. 굴러들어온 복을 차도 유분수지, 무림삼화의 수좌라는
여인의 마음을 거부한다는게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지금은 이해가 되었다. 사마검군은 사내이기 이전에 무인이었고 가
장 큰 수치를 목격한 여인이라면 아무래도 껄끄러우리라.
'사랑이랑 이렇게도 엇갈릴수 있나보구나. 죽도록 좋아해도 안될수 있고 피
하려고 해도 인연이란 질긴끈에 의해 맺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인생은 마음
먹은대로 흐르지 않는것인가.'
절반 정도가 빈 반합만이 쓸쓸한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입을 벌리고
하늘을 응시하는 오후, 떠가는 구름 사이로 간간히 내비치는 햇살이 어떤이
의 보기힘든 미소마냥 싱그러웠기에 정혜란은 저도 모르게 미소지을수 있었
다. 그래, 그런거다. 억지로 잡으려 한다고 손에 들어오는건 없는지도 모른
다. 할수있는 최선의 노력후에 결과를 기다리는것만이 사람의 몫일것이다.
'이거... 가져다줘야 하나?'
그녀의 손엔 아직도 사마검군의 검이 들려져 있었다. 무인이 검을 방임한다
는건 있을수없는 일이지만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연무장을
벗어나고 싶었으리라.
'마주하기 영 껄끄러운데... 아니다, 성격상 대기전에 있을 아저씨가 아니지.'
끙차, 하고 노인네처럼 일어선 정혜란이 검집에 검을 꼽고는 총총히 계단을
내려왔다.
첫댓글 ㅠㅠ
그냥
복사해서 올리셔도 좋은데요.
ㅠㅠ
당소소ㅡ 사마검군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