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7월 25일 목요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 2코린 4,7-15
복 음 : 마태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심리학자 에론슨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유쾌한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퀴즈왕을 뽑는 대회인 척 퀴즈쇼 장면을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쇼 장면의 음성 파일을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누구를 퀴즈왕으로 선발할지 투표하게 했습니다.
음성 파일에는 네 명의 참가자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 참가자는 문제를 대부분 맞췄고, 두 번째 참가자는 반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참가자는 첫 번째 참가자처럼 문제를 대부분 맞췄고,
네 번째 참가자는 두 번째 참가자와 같은 정답률을 보였습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그리고 두 번째와 네 번째 참가자가 똑같은 것 같지만,
여기서 다른 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참가자에게는 퀴즈 도중
옷에 커피가 쏟아지는 돌발 상황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에론슨은 대학생들에게 네 사람 중에서 가장 호감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예외 없이 모두 세 번째 참가자를 지목했습니다.
즉, 정답을 모두 맞혔지만, 커피를 옷에 쏟은 참가자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실수 효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빈틈없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에게 빈틈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는 빈틈없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나의 모습은 완벽한 자기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힘을 쏟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겸손하라고 강조하신 것은 쓸데없는 힘이 아닌,
중요한 곳에 힘을 쏟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에 온 힘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양옆에 앉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을 올립니다. 치맛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그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도망치고 맙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이런 청을 올렸다고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삶에 있어서 흑역사를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복음에 등장시켜서 부끄럽고 부족한 자기의 모습을 세세 대대 알립니다.
그들의 영웅적인 모습만 남겨도 될 것을, 왜 이런 모습을 남겼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빈틈 많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느냐입니다.
과거의 부족한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랑하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보여주세요.
반영억 라파엘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주신 가난과 평화, 겸손과 봉사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고자 교황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로 선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추기경단 앞에서 순명 서약을 받으셨는데
교황좌에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라 추기경들이 서 있는 자리로 내려와
선 채로 순명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 앞에 나타나 고개 숙여 인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황금색 망토를 걸치지 않으셨고, 빨간 구두를 새로 마련하지도 않으시고
평상시 신던 검은색 구두를 신으셨고, 방탄차를 타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서로가 소통하려면 가림막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방문 중에도 한국에서 만든 경차를 타셨고,
인간적으로 출세하신 그분은 세상 것을 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고자 애쓰십니다.
그 삶이 끝까지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10년을 못갑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지금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을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에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주님 섬기기’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곧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복음의 능력으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입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란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2코린 4,8-10)
오늘 복음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열정과 투신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지나치리만큼 대단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강렬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마시게 될 잔을 같이 마시겠다고 선뜻 나섭니다.
그들의 어머니 역시 대단한 열망을 가졌습니다.
자식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망은 다른 이들에게 눈총이 될 만큼 차고 넘쳤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망과 투신을 나무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화를 내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놓고서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고, 종이 되는 사람이 으뜸이 된다.’는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섬기지 않기 때문에 높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으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아니 우리의 발을 씻기시고, '먼저'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끝내는 당신께서 섬기신 제자들에게 배반당하고도 그들을 죽기까지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처럼, 섬기셨습니다.
그러니 섬김을 받기보다 마땅히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누군가를 희생으로 도와주고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기만 낮아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나아가 상대방을 받아들여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부러진 갈대도, 꺼져가는 심지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곧 섬기면서 섬기는 그분이 되어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내 곁에 있는 내 형제를 섬김으로써 '주님 섬기기'를 배워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요,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피워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걷는 걸 좋아합니다.
어린이 날 선물을 받겠다고, 한강 다리를 건너서 남산까지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2시간가량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매일 걷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길’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하는 목적지를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내비게이션은 원하는 목적지까지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합니다.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알려줍니다. 방향이 틀렸으면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목적지를 안내하는 도구입니다.
다른 하나는 길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올레길’이 있습니다.
이제 길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목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지나온 날을 생각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입니다.
어부였던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산티아고에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였던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데
그 위에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 발음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까지 가서, 선교를 하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헤롯 아그리파 왕에 의해 44년에 순교했습니다.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수습해 스페인으로 향했지만,
풍랑 때문에 배가 난파돼 유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814년 펠라지우스 수도자가
갈라시아 지방의 벌판에서 한밤중에 별빛이 강렬하게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그 장소를 콤포스텔라(Compostela)라고 불렀습니다. ‘별이 비추는 들판’이란 뜻 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야고보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하고 있습니다.
길게는 800킬로가 넘은 길을 걷기도 합니다. 짧게는 100킬로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은 그 먼 곳까지 가서 순례의 길을 걸을까요?
불편한 잠자리를 기꺼이 감수하고, 벌레에게 물리면서까지 순례의 길을 걸을까요?
도시에서는 채울 수 없는 위로와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빠른 속도와 편리함으로는 채울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자본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적인 충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22절)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셨다.
죽음의 시련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겠는가?
수난의 괴로움은 아주 큰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23절)
그렇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였고(사도 12,2 참조), 요한은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다.
이렇게 그들은 잔을 마셨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3절)
하늘나라는 주는 이의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것이다.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청을 했으며,
동시에 불쾌해했던 다른 제자들도 아직은 세속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세속적인 첫 자리를 찾는 것은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의 모습이지,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신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욕망으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이런 욕심은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제자들 가운데는 꼴찌, 즉 섬기는 사람이 첫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증거를 보고 있다. 그분은 가르치는 대로 행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우리는 그분과 같이 보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겸손한 분이시다. 자랑거리를 쫓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다.
스승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절)
우리는 아무리 낮아져도 주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낮아지지 못한다.
그분이 낮아지심으로써 우리가 모두 올라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큰 영광, 즉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야고보 사도가 처음에는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처음에는 주님께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분을 위해 순교하셨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성장하려면 제대로 분노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 야고보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있지만, 오늘의 야고보는 요한과 함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야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들의 어머니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그만큼 고생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시게 될 잔이 온유함과 겸손의 잔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야고보는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순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어디서 나올까요?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려 멸망 시켜버리려고 분노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사실 열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모든 성취는 바로 ‘분노’에서 시작됩니다.
1948년 가난한 어촌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가발공장, 식당 등에서 일하였고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폭력이 심한 남편을 피해
단돈 10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식모살이를 떠난 여자.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일하며 대학을 다녔고, 76년 미 육군에 들어가 소령으로 예편,
50세가 넘은 나이에 하버드 박사과정에 다니는 여자, 서진규.
그녀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서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항심과 복수심, 곧 분노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 합니다.
서진규 씨는 정말 남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았을까요?
물론 그들로부터 당연히 무시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수심은 결국 자기를 향해야 했습니다.
참다운 복수는 자신이 그러한 처지로 살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 누군가에게 - 아마 부모 중 적어도 한 명 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사랑받았습니다.
사랑 안에는 ‘기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왜 우리 몸의 회충이나 모기를 사랑하지 못할까요?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기생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태아를 사랑합니다.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못 미칠 때 분노하는 것입니다.
만약 타인이나 세상만 탓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타인의 탓을 하며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분노는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데 나는 물 위로 뛰어내릴 용기조차 내고 있지 못하다면
분노가 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박차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 용기가 바로 분노에서 나옵니다.
분노는 나를 사랑해 준 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솟아나는 나를 변화시킬 유일한 힘입니다.
‘그릿(GRIT)’의 저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아버지로부터
“네가 아무리 내 딸이긴 하지만, 머리가 나쁘니 성공하긴 어려울 거다.
재능이 없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기 힘들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 말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뭐랄까, 단순히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기보다는,
재능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내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성공에 관한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10년이 넘어가는 연구에 다들 시간 낭비라고 했지만,
그녀가 43세 되던 해 전 세계 단 20명의 천재만 받는다는 맥아더 상을 받게 됩니다.
분노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살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 내야 합니다.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을 기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완료하는 습관”을 만들어보라고 말합니다.
거창할 필요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지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신에 정한 계획은 ‘무조건’ 끝까지 완료해야만 합니다.
끝까지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지금 드는 힘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난 여기까지야.’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야고보는 이러한 분노로 그리스도를 닮아갔던 사도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께서 주시는 잔을 마실 수 없을까요?
저는 특별히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제 자신에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 나의 죄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께 계속 아픔만 드리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저를 발전시켰고 그 길을 바로잡아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은 『하.사.시.』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내 안에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것이 나를 분명 그리스도의 삶과 닮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고배를 마셔야 축배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자들 가운데 저만 그리된 것이 아니겠지만
주님,
제가 당신의 첫 제자가 된 것은 저의 선택이 아니라
당신 선택이고 당신에게 홀려 당신을 따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진짜 당신에게 홀렸습니다.
이것저것 재어 보고 당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도깨비에게 홀리듯 홀려서 당신을 따라갔습니다.
처자식이 있고 그래서 벌어먹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저에게 와서
느닷없이 “나를 따르라!”라고만 했는데 그냥 따라갔으니 홀린 것이지요.
그런데 저뿐 아니라 제 동생도 그리고 베드로와 안드레아도 그랬으니
저의 문제만이 아니고 당신에게 끄는 힘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따라다닐 때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면
당신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으며 그것은 영적인 권위였기에
악령들도 그 말씀에 꼼짝하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호수도 잠잠해졌기에
당신을 따라나선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저와 아우 그리고 베드로의 형제를 특별히 사랑해주셨지요.
죽은 소녀를 살리는 대단한 기적과 타볼 산의 변모를 저희에게만 보여주셨잖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에 거의 다다랐을 때 저희는 다른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화낼 줄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당신께 청했습니다.
당신이 왕이 되면 그 왼편과 오른편에 저와 아우가 앉게 해달라고.
그때 당신은 저희에게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시겠느냐?”고 물으셨고,
저희는 호기롭게 그 잔을 마시겠다고 하였고 주님도 그렇게 될 거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당신이 겟세마니에 저희 넷만 또 따로 데리고 가셨을 때
그 뜻이 무엇인지 그때라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그때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셨는데
저희는 그 잔을 같이 마시지 않고 쿨쿨 잠만 자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저희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것이었습니다.
당신마저 마시고 싶지 않았던 그 쓰디쓴 고배를
당신의 대관식 때 마실 축배의 샴페인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축배의 샴페인은 고배를 마신 다음임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목마르다!” 하시며 돌아가셨고
축배를 마시려던 우리는 그래서 더 쓰디쓴 고배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같이 마시자던 잔이 수난의 잔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을 받고 나서야 그 잔을 같이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지상 왕국의 첫 자리를 주십사 한 저는 너무 죄송한 나머지
순교의 첫 자리를 주십사 청하였고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고배를 마셔야지만 진정 축배도 마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야고보가 되어 짧게 써본 회상기인데
이런 회상기를 쓰게 된 것은 어제 경험 때문입니다.
너무 덥기에 일찍 행진을 출발한 저희는 한낮에 진부령을 넘고 있었습니다.
평지를 걸어도 지치고 입이 탈 지경인데, 막바지에 고개를 넘으니 그야말로
입이 바짝바짝 타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을 때 마침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가지고 오신 겁니다.
그때 제 입에서 이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지옥이 있었기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고배를 마셔야지 축배도 있는 겁니다!
참된 제자의 도 : 겸손과 섬김의 삶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은 12사도 중의 하나이며, 성 요한 사도의 형인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는데,
12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디 요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다입니다.(마르 3,13-19; 마태 10,1-4; 요한 1,35-51 참조)
여기서 우리는 오늘 축일을 맞는 야고보성인과
5월 3일이 축일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성인을 구별하기 위하여
전자를 성 야고보(대), 후자를 성 야고보(소)로 구별합니다.
그는 베싸이다 태생으로 어부였던 아버지 제베대오와 어머니 살로메의 아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제자로 삼으신 직후,
아버지 제베대오와 더불어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제자로 삼았습니다.(마태 4,18-22)
야고보는 44년경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됨으로써 12사도 중 첫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으며,
전승에 의하면 성인의 시신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안장되었고,
오늘날 여기에 대성전이 서 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야고보 사도는 애제자로 통하는
자기 동생 요한과 수제자인 베드로와 함께 셋이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께서 이 세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생각이 각별했던 모양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럽게 변한 모습을 이들에게만 보여주셨고
(마태 17,1-8; 마르 9,2-8; 루카 9,28-3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예수께서는
이 세 사람과 그의 부모만 따로 데리고 방에 들어가 아이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마르 5,21-43; 마태 9,18-26; 루카 8,40-56)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려가시어 게쎄마니 동산에서
고통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며 보내신 마지막 시간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르 14,32-42; 마태 26,36-46; 루카 22,39-46)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하는데(마르 3,17),
그 이유는 루카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이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묵어가기 위하여 선발대를 보냈으나 거절당하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하고 묻습니다.(루카 9,51-54)
물론 두 사람은 예수님께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는데(루카 9,55),
그 꾸지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늘 복음에도 거듭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의 원전(마르 10,35-45)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딱 한 군데만 고쳤습니다.
즉 마르코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께 와서 도래할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각각 주시기를 청했다고 하지만,
마태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와서는 어머니가 예수께 청을 드리는 것으로 고쳤습니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예수님 수난사를 종합하면 이 어머니의 이름은 살로메인데(마르 15,40; 마태 27,50)
왜 마태오는 느닷없이 죄 없는 어머니를 이 장면에 끌어넣었을까요?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마태오는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야고보와 요한의 체면을 생각하였고,
사도단 가운데서 그들이 차지하는 명예를 지켜주려 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타 섞인 말씀은 어머니를 건너 뛰어 두 제자에게 향합니다.(22-23절)
또한 다른 열 두 제자들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화를 냅니다.(24절)
그렇다면 나머지 열 제자들이 화를 낸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문제의 발단은 사실상 앞서간 복음에 있는데,
우선 “부자 청년과 난타와 바늘귀”(마태 19,16-26)의 대목을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를 묻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하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9,27-28)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백 배의 상과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들떠 있었고 뿌듯했겠습니까?
열 두 제자들은 제각기 속으로 주님의 좌우 자리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태가 이쯤 되면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20,17-19)도 그들에겐 들리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모두를 불러놓고 참된 제자상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제자란, 봉사하는 자이며, 종 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옥좌의 자리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야고보 사도처럼 순교로 목숨을 내어놓은 후에 받게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참된 제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그저 종으로서 봉사해야 하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