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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106
* * *
오랫만에 격렬한 운동을 하면 긴장도가 풀리며 노곤해지고 수면을 원하는건
사람이라면 어쩔수없이 겪게되는 신진대사이리라. 장 보는것 이외에 가장
긴거리의 외출이었고 당소소를 만난다는 기대감과 단사민에게 행했던 일장
연설에다가 사마검군과의 원치 않았던 비무까지 겹치자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도가 정혜란의 전신을 덮쳐왔기에 밤 운동도 재끼고 잠자리에 든 그녀
는 세상모르고 꿈나라를 누비고 있었다.
"쩝쩝... "
입맛까지 다시며 만끽하는 달콤한 잠자리, 꿈속에서 얼음 꺽다리가 잠깐이
라도 얼굴을 비쳐준다면 그 이상 바랄것이없다! 새우처럼 몸을말고 잠결에
서도 싱글거리는 그녀의 하몸(夏夢)은 불행히도 오래 유지될 운명이 아니였다.
번뜩!
칼날처럼 세워지는 무인의 본능! 누군가가 내려다 보고있다!
파라락-
이불울 젖힘과 동시에 장속에 넣어둔 검을 뽑아드는 동작은 워낙에 순식간
적으로 이루어져서 애당초 칼을 품고 잔듯한 착각마져 불러 일으켰다. 몸을
한바퀴 회전하며 빼어든 그녀의 검이 이르른 곳에서 작은 소리 하나가 들렸다.
"미야옹~"
"꽥!"
그녀의 입에서 이상한 감탄사를 유도해낸 대상은 낯에 보았던 도둑고양이였
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야밤에 고양이의 두눈이 얼마나 요사스럽게 빛
나는지, 또 그 움직임은 얼마나 은밀한지 말이다. 그래서 도둑고양이란 말
은 있어도 도둑개란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들이댄 검을 거둘 생각도 못하고 눈만 멀뚱멀뚱 굴리던 정혜란이 피식 실소
를 터트리며 녀석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보통 크기의 노랑 얼룩 고양이. 전
형적인 집고양이 이건만 왠지 정이 가는 녀석이다.
"너 아주 물건이구나! 이런 야밤에 숙녀의 침실에 숨어들어... 엥, 너도 숙
녀였어? 깔깔깔!"
이 도도한 암코양이는 데롱데롱 들린 채로도 침착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
하고 있었는데 한밤중이고 놀라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정혜란같은 상승
의 무인에게 기척을 숨기고 접근하는건 제아무리 날쎈 고양이라도 불가능하다.
"아무리봐도 내가 마음에 드는것 같은데 의외로 눈이 높구나. 나도 니가 좋
아. 자... 악수."
가만히 고양이의 앞발을 잡고 짤짤 흔들자 다시한번 녀석이 낮게 울었다.
자신도 좋다는 뜻일까?
푹신한 고양이털의 촉감이 맘에들어 품에 안고 목을 쓰다듬어주자 이내 골
골거리며 눈을 감는 폼은 영락없는 집고양이였다.
"고양아, 얼마나 갈곳이 없었으면 나한테로 왔니? 먹을건 어떻게든 챙겨줄
수 있지만 돌바준다고는 보장 못한단다. 이래뵈도 할일이 꽤 많은 몸이거든."
그녀의 낮은 독백은 고양이의 목울음처럼 편안하게 계속되었다.
"난 말이야, 화산의 일대제자이기도 하지만 검의 길을 쫓는 무인이야. 여염
집 아낙이 아니란 말이지. 여기 온 것도 사문의 명을 받은거란다. 원래는
산문(山門)에서 검이나 휘두르고 있은게 정상인거지. 그런데 웃기는건 말이
야, 오늘 사천일검인지 뭐시긴지하고 비무를 해봤더니 무공이 비약적으로
늘었더라. 어이 없지 않니? 한달이 넘게 밥이나 짓고 빨래만 했는데 산문에
서 몇달을 허비하며 추구 했던 길이 자연스레 열리는거야. 하기야, 집착한
다고 얻어진다면 욕심쟁이들만 빛을 보는 세상이 되겠지. 그래도 이건 좀
황당해. 알고자 그리 노력했던걸 잊고 살았더니 어느새 '알아져' 있다는게
말이야. 꼭 금덩어리를 줏은 기분이랄까?"
스스로도 재미있었는지 키득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던 그녀
가 눈을 빛내며 마음에 담긴 생각의 단상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대
상이 없는 독백이지만 속에 있던 생각을 털어내는것 만으로도 사람들은 종
종 후련함을 느끼곤 한다. 기분이 안좋을때 슬픈 이야기를 듣고 펑펑 울면
가슴에 맺혀있던 무엇이 확 쓸려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화산의 일대제자고, 일류를 상회하는 무위를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스
물여섯살의 여성으로 감내하고 혼자서 정리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
녀의 정신은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처음 검을 잡으면서는 천하제일인 같은건 바라지도 않았어. 그저 남에게
업신여김만 당하지 않을 위치에만 섰으면 했지."
고아로 열살까지 살았던 정혜란이기에 멸시받는 삶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터였다.
"그럭저럭 자질이 있는지 얼마후부터 교두님들이 바뀌고 하더니 어느새 난
창궁우전검을 익힐수있는 지위에 올라있더군. 혈육하나 없는 고아 여자아이
로는 상상도 못할 출세지. 그런데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것이 거기까지 이
르르니까 또 욕심이 생기는거야. 당시 무림을 쩌렁쩌렁 울리던 만화선녀의
소문에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매일밤을 설쳤지뭐니. 무시만 받지않으
면 행복할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나라고 여중제일인, 아니 절대오존
의 반열에 이르지 말란법은 없잖아 생각했지. 그때부터 정말 독하게 검을
휘둘렀어. 대사형이 실종 되었을때도 그렇고 이사저의 괭이질 역시 내 목표
에 걸림돌이 돨순 없었어."
이제 고양이는 잠이 들었는지 고르륵거리는 소리마져 내지 않았기에 그녀의
혼잣말만이 아련한 기억의 구체화로 방안을 떠돌았다.
하운이 실종되고나서 화산이 뒤집힌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 칠년동안
화산내 후기지수중 가장 검을 잘쓰는이가 정혜란이 되었다는건 몇몇 빼고
는 모른다. 그녀만의 피나는 노력이 우선시 되었겠으나 삼장로들의 전폭적
인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으리라. 그들도 무언가 몰입할것이 필요했었
고 외로웠기 때문일것이다.
"이곳에 시비로 오라는 말은 날벼락 이었지. 세상에... 일대제자더러 시비
라니 말이돼? 그런데 사람일 이란게 정말 묘하단다. 난 말야, 여기 오지 않
았더라면 평생 바보같은 아집속에서 해매고 살았을거란걸 문득 느낄때마다
묘한 감흥에 사로잡히곤 해.
이제 알수있어. 처음 장가가가 내게 했던 말의 의미를. 지위란 아무것도 아
니야. 그건 그저 허상일뿐.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에 충실한 삶이 얼마나 값
진거란걸... 이젠 알수 있어."
기분좋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염화시중의 그것처럼 맑게 빛나는
미소속에 한단계 성숙한 자신이 있다는걸 정혜란은 알고있을까? 노력하지
않은자가 노력한 사람보다 얻는데 많다면 잘못된 일이지만 무조건 노력만한
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게 있다. 그걸 사람들은 깨달음이라 부른다.
죽어라고 검을 쳐내어도 얻지못한걸 밥짓고 설거지하며 깨달았으니 인간사
란게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나 그리 단순하게 볼것도 아닌 이유가 있으니,
그건 정혜란이 깨달은 요지가 '자유로움' 이라는 형식미의 파괴에 있다는
것이다.
시비일을 하러 온 이 집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과 사람을 만나게 되고
기존관념의 회의속에 어느정도 자기 부정을 겪게되었다. 문화충격 이라고
해야할까? 그 와중에 검식과 이상에만 목메고있던 그녀의 자아는 또다른
세계에 자연스레 눈뜨고 발을 딛게 되었던 것이니 우연이라기 보다 필연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어라? 너 자냐? 혼자서 바보짓 했군. 그래, 오늘은 나랑같이 자..."
휘릭-
미약한 파공성이지만 완전히 잠에서 깬 그녀의 귀를 속일순 없었다.
'뭐지?'
휘릭-
여러 옷들이 부딛칠때 나는 소리... 사람이다!
야심한 밤에 남의 집을 넘는이 치고 좋은 목적일리 만무한 법. 거기다 경공
과 은잠의 기법으로 접근한다면 무인이란 말일터. 다수의 강호인이 이렇게
보잘것없는 집을 털려고 왔다는건 말이 안된다.
'드디어 시작인가.'
뜻모를 한마디를 가슴속에 품으며 가만히 고양이를 내려놓고 우뚝 일어선
정혜란이 방문을 열었다.
삐걱-
산새들도 잠을 청하는 한밤중이기에 슬며신 연 문소리가 천둥치듯 크게 들렸다.
민가와 외떨어진 장추삼의 집이고 뒤로 야산까지 있어서 더 그럴지도
"숨어있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는게 어때요. 보아하니 도둑질이 목적은 아닌
듯 한데 이런 밤에 무슨 용무로 남의 집에 들어온건가요?"
흡사 아무도 없는곳에 혼자 중얼거리는것 같지만 그녀의 오감으로 열세명의
기운이 감지되었기에 정혜란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열세명이라면 절대
로 적은수가 아니다. 아직 기도를 가늠하지 못할 형편이지만 이정도의 신법
과 은잠술 이라면 호락호락한 상대 일리없다.
부스럭-
알아챘기 때문일까, 기척을 숨길 생각이 없는것처럼 풀숲에서 한사람이 걸
어나왔다. 달빛이라 색의 구분이 쉽지 않았지만 보라색으로 여겨지는 복면
에 가로지를듯 새겨진 번개가 인상적인 사내.
"실례일줄 알면서 이렇게 찾아온것 사과드리오. 소저께는 볼일이 없으니 들
어가서 잠을 다시 청하셔도 되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소."
정혜란이 피식 웃었다. 그럼 뻔하지 않은가. 이들은 장유열에게 볼일이 있
단 얘기다.
"장대인 어른은 지금 주무시고 계시니 밝은날 다시 찾아오도록 해요. 물론
보기싫은 복면도 벗고 말이죠."
삐그덕-
소란스러움에 잠이깼는지 장유열이 눈을 비비며 걸어나왔다. 연방 하품을
하며 털레털레 걸음을 옮기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것만 같아서 정혜란이 얼
른 부축해야 했다.
"아 괜찮다. 왜이리 시끄러... 누, 누구냐!"
그제서야 자색복면인을 보고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정혜란을 막아서는 일방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는 장유열에게 무기가 될만한것이 눈에 띠지 않았다.
어금니를 갈아부치며 오른팔을 숭숭 걷고 한발 나서는 그의 모습은 시골
장터에서 많이 볼수 있는 촌노의 그것이었으나 당사자로는 최고의 호기였다.
"내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복면을 쓰고 난입했더란 말이냐! 양양의 신견
용쟁이 이몸이시다! 좋은말 할때 썩 꺼지지 않는다면 크게 경을 칠것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정혜란을 돌아보며 장유열이 안심시키려는 듯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너는 걱정할것 없다. 이까짓 도둑놈 쯤은 열수레를 가져다 줘도 문제가 아
니야! 그러니 겁먹지마라."
과장되게 오른쪽 눈을 한번 찡긋이는것 으로 말을 맺고는 빙글 돌아선 그가
또 한차례 목청을 높였다.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 오냐, 네놈이 매운맛을 봐야..."
털썩.
기운차게 자색 복면인을 몰아세우던 장유열이 축 늘어졌다. 뒤에 있던 그녀
가 수혈을 짚었으리라.
"봐요. 이렇게 놀라시니 무슨 대화가 되겠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오도록
해요."
"그럴 형편이었다면 이런 수고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소저와는 아무 상
관 없는 일이니 어서 그사람을 넘겨주시오."
"뭘 하려는 거지요?"
"그건 소저가 알 필요없소."
차가운 정혜란의 콧방귀가 어두운 달빛을 갈라놓았다. 만용일지도 모르지만
기가 꺽여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 거기다 이편은 지켜야할 사람마져 있
는 형편 아닌가.
"이제보니 억지를 부리려고 왔군요?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수 없지."
장유열은 자신의 방에 밀어넣고 돌아선 그녀의 손엔 어느새 칼이 뽑혀져 있
었다. 월광을 벗삼아 파르라니 빛나는 검극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할 무엇이
있었다.
"이분을 어쩌려거든 나를 넘어야 할 것이에요. 만만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
앞을 지나가기는 그리 쉽지 않을테고."
"누가있어 화산의 폭풍검을 만만하게 여기겠소?"
쿠쿵!
이점을 가장 염려했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여부 마져도 염두해두고 침입
했다는 거다. 바꿔 말하면 필승의 자신이 있다는 것이고...
스르륵-
이어 등장한 열 두명의 인물들은 그녀의 예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거운 기
도를 흘리고 있었다. 잘 단련된 무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
"나 하나야 소저의 상대가 될수 없겠지만 우리들 전체라면 얘기가 달라질것
같소만?"
'오늘은 길(吉)보다 흉(凶)이 많겠구나!'
절반 정도는 어찌할수 있겠으나 전체를 상대로 장유열을 지킨다는건 무리였
다. 그렇다고 도망갈 정혜란인가!
"승부란 끝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겠지요. 보아하니 더이상 말을 나누는게
무의미한 상황인듯 하군요."
"답답하구려."
자색 복면인이 침울하게 한숨을 내뱉았다.
"소저가 손을 쓴다면 우리들도 많은 피해가 예상되지만 종국에 쓰러지는건
누구일것 같소? 정해진 결과를 시험할것 없잖소? 그러니..."
"정해진 승부라?"
느닷없이 끼어든 한마디. 모두의 시선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승부란 끝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겠지요. 보다시피..."
어둠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을 보고 정혜란은 하마터면 소리지를
뻔했다.
'얼음덩어리?'
그러나 곧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빛아래 서있는 사람은 북궁단야와
많이 닮긴 했으나 또한 전혀달랐으니까.
"너는 누구냐?"
자색 복면인이 으르렁 거리듯 물었다. 다된밥에 코를 빠트려도 유분수지,
어디서 이런 변수가 등장한건가!
"그런 당신은 누구요?"
빈정거리며 정혜란의 얖에선 그가 고개를 살짝 꼬며 다시 물었다.
"대답을 못하는걸 보니 떳떳한 사람은 아니로군. 자, 다시한번 말해보시오.
이래도 정해진 결과라고 자신할수 있겠소?"
자색 복면인이 얼른 대답을 못한것은 문사 차림의 사내가 지닌 아름다움 때
문이었다. 선계에서나 볼수있는 얼굴이랄까? 어리벙벙하게 그의 얼굴에만
취해잇던 그는 곧 자신의 실태를 깨달아야했다. 그는 비단 아름다왔으며 뿜
어내는 기운역시 일류를 한참은 상회하는 무엇이 있었다. 말 그대로 판은
새로 짜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순 없다.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다 낭패보는 인간들이 종종 있지."
"남의 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안다고 그러지?"
말로 이길 상대가 아니다. 사실 말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지만. 자색 복면인,
자전(紫電)이라 불리우는 남자는 뒤의 열두명에게 말없는 신호를 보냈다.
[15573] [연재] 삼류무사-107
스스슥-
한마디 말을 나누지 않았는데도 자전의 뜻을 전해들은 사람들처럼 열두명의
검수들은 일사분란하게 자리 이동을 시작했다. 모든 싸움의 기본은 기선의
제압에 있고, 그러기 위해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요처를 점유해야함은
다수가 소수를 상대하는 전투의 기본이리라. 수가 많아봐야 공격의 방위가
한정되어 버리면 다수의 묘(妙)를 살리지 못함은 물론 나아가서 아군이 오
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합격을 염두해둔 탓인지 처음부터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각자의 자리를 찾아서 이동을 했는데 한번에 움직였으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전문적인 합격수들이구나. 벌써부터 방위의 선점에서 오는 압력이 느껴질
정도라니!'
문을 막아서며 눈을 빛낸 정혜란에게 이들의 기도는 감기듯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닷없이 나타난 원군은 통성명조차 없이 예리한 눈으로 전
방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악의는 품고있
지 않은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바퀴벌레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형국에
이것저것 가릴때가 아니기도 했지만.
"화산의 이름으로 우릴 막을 생각이었다면 오산이지. 그대들이 자초한일 후
회는 마시오."
슈슈슈-
짧은 침묵을 일거에 무너트리듯 열두명의 검수들은 방위를 유지하며 둘에게
쇄도해왔다. 유생차림의 조력자가 손에서 묘한 발광을 시작한것도 그때였다.
파방!
"큭!"
"헉!"
그가 손에 맺힌 기운을 바닥에 던지자 작은 폭음과 함께 검진 자체가 무너
지며 답답한 신음성속에 선두의 검수들이 물러섰다.
'저건 무슨 무공인가? 들어본적이 없구나.'
어리둥절해서 주춤거리는 정혜란의 귀로 날카로운 전음성이 파고들었다.
("뭐해요! 선기를 놓칠 샘인가요!")
선기란 말을 듣는 순간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우건의 입에서 과연이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들은 바 대로라면 검의 길
정도는 알거라고 했거늘.
'이미 절정을 향해 치닫는 검수, 화산의 폭풍검 이구나!'
감탄만 하고 있을수는 없는 노릇. 그 역시 애검을 빼들고 정혜란의 반대편
으로 신형을 날렸다.
츠츠츠-
무거운 검기가 흐르자 장내는 확연한 두개의 전장으로 구분되었다. 자연스
러우면서도 강력한 바람을 일으키는 정혜란의 검식에 맞서는 여섯의 검수들
과 생긴것과 다르게 둔중한 검식으로 나머지 여섯을 괴롭히는 우건. 자전은
한발 뒤로 물러나서 이 싸움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일방 어떤 '틈' 을 노렸다.
'길게 끌면 불리하다. 몇년만에 살계를 열더라도 상황의 연장은 장대인의
안전에 좋을게 없으니.'
이대로 압박한다면 얼마 지나지않아 여섯을 패퇴시킬수 있겠으나 언제 상황
이 바뀔지 모르는일. 조금이라도 유리할때 종료시킨느 편이 낫다고 판단한
정혜란이 빙글 몸을 돌리며 전공력을 실어 창궁우전검의 절초를 쏟아내었다.
원래부터 고분고분했던 검초가 아니였지만 독수(毒手)를 쓰려 마음먹자
그 위력은 실로 놀라워서 여섯명의 검수는 급격히 수세에 몰렸다. 노도와
같은 검풍이 몰아치자 수비하는것도 급급하여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순간
을 지탱하는게 고작이었다.
"타앗!"
우전검의 절초중 하나인 삼성조화(三星造化)가 백무량의 손 이래 가장 완벽
한 자태로 펼쳐지고 뚜렷한 형태의 동심원 세개가 천지를 뒤덮으며 노도와
같이 여섯명을 뒤덮자 가까스로 버티던 세명의 손아귀가 찢어지며 검을 움
켜주기도 어려운 형국이 되었다. 이대로 전개된다면 몇초 지나지않아 절반
은 누일수 있으리라.
문제는 우건쪽에서 발생했다. 본시 생사결을 처음 해보는지라 사람을 상하
게 하는것이 익숙치 않았기에 승기를 잡고도 번번히 수를 늦추다보니 자연
정신적으로 위축되었고 그대로 상대의 사기를 올리게 되었다.
'저 바보 뭐하는거야!'
장유열의 안전과 우건의 약세(弱勢), 두가지 상황을 신경쓰다보니 그녀의
공세도 처음처럼 날카로움이 사라졌고 무뎌진 틈을 타서 열두명의 검수들은
전열을 가다듬을 기회를 얻었다. 소리라도 질러서 우건을 일깨우고 싶었지
만 약세만 노출시키는 것이기에 그저 속만 타들어갔고 조급함은 검초의 헛
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열둘의 검수는 최소한의 상황파악은 할 줄 알았다.
까강!
순간적으로 네명의 검수가 전후좌우로 날아들며 수비에 가까운 검세로 정헤
란을 가두면서 나머지 둘이 우건에게로 돌진했다. 약한 하나를 먼저 처치하
고 힘을 모아 나머지를 처리하겠다는 것이니 병법의 기본이랄수 있는 전술
이지만 지금처럼 적절하게 적용되는 경우도 없으리라.
우건이라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가 살초를 써본적이 없기에
결정적인 순간에서 각도가 어긋나고 비뚤어짐은 어쩔수 없었다. 처음에 사
용한 는 효과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저지했으나 그것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무공이 아니라 다음번 초식과의 연계기(連契技)에 불과했기에 일단 발동이
걸렸을때 몰아쳐야만 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본래 연계기로 상대를 제
압하는 경우 초반 기선을 잡는다는 장점이 있으나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되
치기를 당한다는 약점이 있다. 거기다 우건의 심약한 성격까지 일조를 하여
국면은 이들에게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성격보다 강호경험이 일천하여 더 곤욕을 치르는구나. 저리 고강한 무공에
저렇게 아무것도 모를수 있을까? 단 한번도 생사결을 치러본적이 없는것
같구나.'
아예 능력이 없으면 기대도 안하지만 하면 될듯한데 버벅이는 사람을 보면
속이 끓는다. 우군(友軍)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자연 집중력이 떨어지고
전투력이 저하됨은 불문가지. 그래서 강호는 무공이 강하다고 꼭 승리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적인 무력을 가졌다면 몰라도.
우건에 대한 걱정이 그녀의 사고를 지배하면서 허둥거리는 그에게 다가서기
위해 문가에 대한 방비가 느슨해졌다. 한켠에서 사태를 주시하던 자전을
놓친것을 보면 정혜란 역시 강호경험이 풍부하진 않다는 반증이리라. 그러
나 작은 실수가 때때로 돌이킬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파박!
미동조차 없던 자전이 돌연 정혜란과 네명의 검수를 뛰어넘으며 그녀의 방,
더 정확히 말해 장유열이 쓰러져있는 방으로 돌진했다.
"안돼!"
"이런!"
동시에 우건과 정혜란이 소리질렀으나 단지 비명일 뿐 그들의 앞은 거의 동
귀어진처럼 다가서는 전력의 칼날들이 버티고 있었다.
'늦었다. 이를 어쩌면 좋아!'
자전은 그들의 비명과 함께 방안으로 진입한 뒤였고 그 방엔 야산쪽으로 창
문이 나 있다. 뚫고 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비켜!"
성난 암호랑이처럼 으르렁 거렸지만 목숨을 도외시한듯 무지막지한 칼날이
대답으로 돌아왔고 정신적인 부분을 제압 당헀기에 검법의 정교함과 힘이
상실되어 그녀의 몸짓은 맥풀린 검무와도 같았다. 이들을 다 죽이면 뭐하나.
지켜야 할것을 지키지못한 싸움인데.
'정말 미안해요 장대인, 장가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이런 결과가
오고 말았네요.'
극한 상황이 닥치면 평소보다 몇십배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게 된다. 발을
헛딛어 절벽에 떨어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산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떨
어지는 찰라동안 그의 인생 전체가 눈앞을 가로지른다고들 했다.
자전이 뛰어들고, 그들이 소리지르고, 정혜란이 자책의 한숨을 토한것이 모
두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니 그야말로 찰라지간에 모든 상황이 발생했다 종
료된 것이다.
우드득-
허탈뒤에 자라는 건 분노.
자책후에 남은 건 복수의 일념.
왼손이 부러져나갈듯 꽉 움켜진 그녀의 기세는 누구도 막을수 없는것처럼
무섭게 타올랐다. 이대로 벽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려 해도 영혼마저 평온
하게 안식을 취하지 못하리라. 저들의 행동양식상 장유열의 안전은 기대하
기 어렵기에 더욱더 서글프다. 우건의 표정은 더 절박했다. 한순간의 머뭇
거림으로 이렇게 초악의 결과가 도출될것을 누가 알았으랴.
'미안해요, 이제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그런데...
"캬앙-"
"크아악!"
날카로운 짐승의 울부짖음과 함께 쇄도했던 기세만큼이나 빠르게 자전이 튕
겨나왔다. 그는 오른손등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는데 왠만한 도검으로
도 이만한 상해를 가하기 어려우리라.
모두의 이목은 그가 나온 방문에 쏠렸다.
"어머, 너!"
발자욱소리 하나없이 어두운 방에서 걸어나와 방문을 지키듯 버티고 선 작
은 형체는 다름아닌 도둑고양이였다. 우건 역시 신기한 얼굴로 고양이를 주
시했는데 싸움의 주재자로 보였던 자전이었고 아무리 방심했다고 해도 미물
에 당해서 피를 흘리며 패퇴했다는건 말이 안된다.
"으아아악!"
창피함과 당황함이 어우러져 비명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칼을 빼든 자전이
다시 방문, 정확히는 방문을 지키는 고양이에게 달려들었다.
팟!
무언가 희끗했고 다시한번 그가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서야했다.
이번엔 오른 뺨에 긴 상흔을 입은채로. 언제 움직였냐 싶게 고양이는 제자
리에 돌아와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방을 쏘아보는데 그 폼이 영락없는 무
림고수였다. 열두 검수의 손발이 멈춰진 짧은 순간, 재빨리 몸을 뺀 정혜란
이 우건과 등을 붙였다.
"우린 한번 실수를 했고 한번 기회를 얻은거에요. 또 한번 고생하고 싶지
않다면 알량한 동정심은 던져버려요!"
낮고 빠른 그녀의 말에 우건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만 돌려 서로
의 눈을 확인하고 누가 먼저랄것 없이 반대방향으로 튀어나온 둘은 서로의
상대들에게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인간지사 세옹지마라던가. 처음 우건의 등장으로 힘을 얻었다가 그의 허둥
거림으로 최악까지 이르렀던게 방금전이거늘 숨 한번 고르고 적을 몰아부치
는 우건의 검은 정혜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지 않는가.
'좋아!'
분위기란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모든 승부 - 그것이 피터
지는 싸움이건 머리로 승부하는 바둑이건 간에 - 에서 승기를 한번 타면 평
소에 없던 힘까지 솟아나게되고 수세에 몰린 쪽은 지닌바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그녀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리며 크게 검을 휘둘러 다시 한번 삼성조화의 기
운으로 검수들을 압도해갔다. 어차피 독수였고 힘과 기운이 충만했기에 그
어느때보다 방위와 각도가 예리했고 미쳐 검을 들지 못한 두명의 검수가 피
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틈도 주지않고 직단의 기세로 검결을 이동시키자 폭
음과도 같은 경기와 함께 주위가 두조각으로 나뉘어지듯 산산히 부셔졌다.
이렇게 몸과 검이 하나가 될때가 있다. 검신합일(劍身合一)의 지고한 경지
는 아니더라도 그저 검과 함께 파묻히는 기분이랄까?
피보라 속에서 느끼는 검령(劍靈)과의 조우(遭遇).
잔인하다 할것인가? 뿌리까지 무인인 정혜란에게 그런건 문제가 되지 않았
다. 단지 그녀는 검이 부르는대로 움직이고 검을 부림으로서 검과의 일체라
는 삼매경(三昧境)에 빠져든 것이다. 검은 사람을 베기위해 존재하는것이지
누군가를 위협하려 만들어진게 아니니까.
'후우~'
숨을 한번 몰아쉰 그녀가 검을 중극으로 세우고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다.
가장 평범한 기수식과도 같은 자세. 그러나 검에 담긴, 그녀의 묘한 기백이
장내를 압도하다 못해 터져나갈듯 하여 나머지 네명은 가슴에 검을 세워
수비식을 겸함과 동시에 연방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그들도 여태까지와 다
른 정혜란의 기도에서 무언가 느끼는것이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도 이 초식을 정의 내리지 못한다. 화산의 역사속에 이것이 펼쳐진
경우는 모두 합쳐 백번도 되지 않으리라. 흉내 정도야 낼수 있겠지만 본연
의 위력을 이끌어낸 사람이 얼마나 될꼬? 그것은 이 초식이 검결에 의해 전
승되지 않거니와 깨달음이 없으면 절대로 시전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산문인들이여! 창궁천추(蒼穹千秋)를 만나지않고 부동화를 피울수 없음이
니 뼈를 깎는 아픔속에서 시리도록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을 검 하나로 그려
보거라......
우우우웅-
배가 되는 검의 기운, 그녀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하는 상태
에서 한발 또 한발을 찍고 있는 것이다. 지켜야 할 대상에의 연민과 한번
겪었던 실수, 그리고 든든한 두(?) 동료에의 믿음이 정헤란의 검을 무의식
중에 또다른 차원으로 이끌게 되었다.
17. 창작연재 [담당자 - 박근우(ADAGIO)]
[15610] [연재] 삼류무사-108
그에 비해 우건의 싸움은 다른 색깔의 그것이었다. 한번의 실수를 초래했다
는 자책과 쓰기싫은 살초이외엔 상황을 타계하기 어렵다는 중압감으로 그의
검과 장은 지독히 암울한 빛을 뿌리며 나머지 여섯을 몰아치고 있었다. 방
위를 점한 사람을 서로 바꾸어가며 버텨 보려 하는 노력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울것만 같은 얼굴로 휘두르는 그의 검을 어쩌지는 못했다.
"타아앗!"
억눌린듯한 기합성으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것 같은 눈물을 감추며 솓아내
는 우건의 검은 슬픈 표정과 다르게 힘이 있었으며 요사스러웠다.
청명(淸明)한 얼굴속에 숨어있는 간특(姦慝)함이랄까?
섞일수 없을것 같은 두가지 이질적인 형태의 기운이 함유된 검식.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섯명의 검수들에게 직접적인 상해를 입히지는 못하는 정도였
고 단지 압도 정도에 그치는 것이었기에 그의 눈망울은 작은 파랑(波浪)을
일으켰다.
완전 제압을 위해선 그 검식을 써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들은...
......강호에서 네가 겪을일이 얼마나 흉흉한지, 얼마나 위험한지 아무도
모르기에 이 초식을 연마해야 한단다. 무림사 가장 위대했던 이름일수도 있
는 이 초식을 살기만으로 가득하게 변형한 건 선조들의 마지막 안배일 것이
다. 상대에게서 자유로울수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완전히 적을 제
압하는 것일테고 확실하게 적을 무릎 꿇리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니까. 네
무공이 한단계 더 올라선다면 이 초식의 그야말로 내면을 볼수 있겠으나 현
재론 무리이기에 이렇게라도 전수하는 것이니 죽을 위험이 닥쳤을때나 사용
하거라......
그의 아랫입술은 윗이빨에 의해 찢어진지 오래, 가는 핏줄기가 턱을 타고
흘러 점점이 떨어져내리는 핏방울이 사슴같은 눈동자에서 흘러내릴 눈물을
대신하는듯 했다. 고뇌와 결심의 시간은 길었지만 행동은 의외로 빨랐다.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할 살인에의 쓴물, 지키고픈 이를 위해서 행하였다면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덜할수 있을까?
빙글.
한차례 몸을 돌린우건이 조용히 검을 들어 상단의 자세로 검극을 이동시켰
다.
츠츠츠츠-
대립하던 두가지 성질중에 정(正)했던 기운이 사라지며 사(邪)의 그것만이
넘실거리고 먹이를 노리는 독사마냥 파르라니 빛을 발하는 저것은 여지껏
그가 사용했던 검식과 다를것이다.
'위, 위험하다!'
고양이와 몇번 더 실갱이를 벌이고도 별다른 재미를 못본 자전이 엉거주춤
서 있다가 일변한 그 기세에 놀라 합류하려는 순간 정혜란의 창궁천추가 발
동되었다.
검파는 둑을 타고 치솟는 해일과도 같이 상념의 벽을 가득 채우고 넘쳐 흘
러 온천하를 뒤덮는구나......
고오오오-
그저 마강하다고 밖에 표현할수 없는 검의 기운이 장내를 수놓으며 한가로
이 노니는 나비의 몸짓처럼 느리게 느껴지는 그녀의 검앞에서 네명의 검수
들은 속절없이 피를 뿌리고 쓰러져갔다.
단 한줌의 반항조차 용인하지 않는 절대의 기세! 그래서 상대들도 치명상은
면할수 있었다. 대전시에 무공의 고하가 확연히 구별되면 상수(上手)의 아
량에 따라 최악은 면할수 있지만 엇비슷한 무공으로 부딛친다면 큰 사상(死
傷)이 벌어진다. 이기기도 바쁜대 남에 대한 배려가 어디있겠는가.
핑-
일순간 내력소모가 컸기에 약간의 어지러움이 그녀를 엄습했고 이마에 손을
짚으며 목을 쳐드는 순간 정혜란은 한편의 도살극을 보게 되었다.
츠츠츠-
검풍도 없고 검기도 없는, 그저 칼질에 불과한 단선(單線)이 흐를 뿐인데...
처음의 제물은 가장 앞에 나서있던 검수였다. 우건의 검은 변식(變式) 같은
건 생각지도 않는것 처럼 정직하게 떨어졌기에 아무 생각없이 막아보려 가
도에 맞춰 칼을 들었다.
서걱!
분명 아무런 변화가 없었음에도 검초는 그의 칼을 지나치듯 뒤로하고 검수
의 목을 쉽게 도려내었다. 피분수가 솟구치는 하나의 몸뚱이가 쓰러지기도
전에 방향을 튼 우건의 검에 동료의 죽음을 바로 곁에서 목도한 또 하나가
들어왔다.
"으아아악!"
수비를 배제한 공격만의 초식. 이런 막무가내의 공세엔 누구라도 위협을 느
끼게 되고 자연 손속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나...
축-
유연하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매끄럽게, 그러나 잔인하게 흐른 검은 달려
든 검수의 오른손을 몸통에서 끊어내었고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목줄 마저
잘라 버렸다. 이 모든 동작이 한호흡에 이루어 졌기에 그들의 동료들에겐
방조(幇助)의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리도 정명하던 검식이 이
렇게 바뀔걸 누가 알았으랴.
두 동료의 간단한 죽음 앞에 네명의 검수들은 눈이 뒤집혀졌다. 살업을 자
행하지 않은것도 아니요, 수많은 난관을 겪었고 언젠가 검의 고혼이 될 각
오가 없었던것도 아니지만 이건 너무 허무하다.
빙글돌아 다시 하넙 피를 갈구하는 그의 검 앞에 네명의 검수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무엇이 그리 원통하고 서러운지 모르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참
을수 없는 분노의 밑바닥을 읽게 되리라. 왕왕 극한에 이르면 사람은 지닌
바 능력의 이상치를 발휘 한다고 했다. 이른바 잠력(潛力) 이랄까?
그들의 사방합격은 여지껏 보여왔던 검진중 최강의 위력으로 우건을 옥죄여
왔고 절정을 바라본다는 무인도 쉽게 상대하지 못할 힘과 기운을 품고 있
었기에 그들의 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흥분한 상태에서도 가장 효
과적으로 상대를 대처한다는건 분명 쉬운일이 아니기에 사방검진이 지닌 의
미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다가오는 네개의 검날, 우건의 손이 또하번 파동을 쳤다.
츠츠츠-
분명 변식도 강렬한 검기도 함유하지 않고 있다. 어찌보면 장난과도 같은
검적을 그리건만 가장 가까운 검수의 목을 그으며 횡으로 이동을 하여 또다
른 검수에게 손짓을 한다.
......죽음으로의 초대.
저건 가장 완벽한 살인의 검이다!'
만약 정혜란이 월광살무를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우건의
검과 월광살무는 둘 다 살인검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막연한 차
이가 있다. 여기서 막연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종잡을수 없다는 말이고 검
도에 어느정도 눈을 뜬 그녀라도 쉽사리 지적하지 못하리라. 그저 우건의
검은 어떻게든 막아볼텐데 월광살무는 자신이 없는 정도랄까?
불행이 세명의 검수는 정혜란 수준의 검로를 걷지 못했고 헛된 노력은 목에
서 솟아나는 피분수로 댓가를 치러야만 했다. 남은 이들이 이판사판의 심정
으로 육탄돌격 비슷한 찌르기를 감행했으나 그의 검은 기묘한 사선을 그리
며 범위내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고 종국에는 팔 다리가 잘려나간 그들
의 목을 취했다.
이 모두가 단 육초의 검식에 이루어진 일이니 한 번의 초식에 정확히 한 명
의 목숨을 거둔것이다.
......일섬류(一閃流) 일명수(一命收)!
경악할 만한 도살극에 모두가 말을 잊고 우건의 뒷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게 지칠것도 없었을텐데 가쁜숨을 몰아쉬는지 그의 어께는 상하로 크게
기복을 보이고 있었다.
축 늘어트린 검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핏방울.
비록 손에는 묻히지 않았지만 역한 피비린내 사이로 서있는 슬픈 음영(陰影).
이 피는 누구의 것이며 나는 누구인가.
누가 있어 나의 살업을 변호해줄까...
꽃이 좋아 나비들과 술레잡기 즐거웠고
시린 달빛이 서러워 밤마다 창가에서 눈물짓던 어린날의 초상(肖像)이여.
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애처럽게 날 비추고 있는데
난... 어디에도 없구나.
입을 때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는듯 작은 움직임도
없이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멈춰져 있었다. 가끔우는 풀벌레만이 시절 모
르는 배짱이 마냥 태평하게 하품하는 듯 하여 이 공간은 더욱 을씨년스러웠
는지 모른다.
"가요!"
적막은 정혜란의 낮은 목소리에 의해 산산히 깨졌다. 단순한 한마디에 담긴
감정과 기도가 워낙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지라 말 잘듣는 어린아이처럼 바
닥을 기고 있던 여섯의 검수들은 겨우겨우 일어나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
으나 원념만은 잃지 않겠다는 듯 곁눈질로 우건을 노려보았다.
"빨리 안가면..."
얼음장 같은 목소리. 이 광경을, 어두웠던 새벽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의 음성은 지독스레 냉막했다.
"영원히 갈수 없어요."
믿지 못할 패배였건만 자전은 얼이 빠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것 뿐. 가까스로 말한마디 던지는게 그의 최선이었다.
"화산은 오늘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오."
순간적으로 살인멸구(殺人滅口)의 충동이 왈칵 쏟아져왔다. 감히 화산을 어
찌 한다고 말할 인물이나 조직은 현 무림에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오존중
최강이라는 적미천존이라도 입에 담을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자전이 뱉아
내자 무언가 서늘한 것이되어 그녀의 마음을 후벼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혜란은 빨리 가라는 손짓으로 모든걸 대신해야 했다. 자신의 존재
여부를 알았다 함은 그들의 수뇌부에까지 전달되어 있음이고 입을 막아봐야
소득이 없다. 무엇보다...
'이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의 피는 무의미해.'
사방에서 진동하느 피비린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젓던 정혜란이 아직
도 우두커니 서있는 우건을 인식한건 경황이 없어서라기 보다 워낙 많은 생
각이 그녀의 머리에서 스쳐갔기 때문이리라.
"악몽이 끝났네요."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건냈으나 여전히 달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일견 아름다웠으나 금방이라도 무너저 내릴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어쨌든 고마운 조력자였기에 성큼성큼 다가가서
어께를 툭 치고 특유의 사람좋은 미소로 사례를 표하려던 정혜란은 흠칫 굳
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우건의 커다란 눈망울에선 가는 빗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가의 경련
을 억지로 참는듯 앙다문 입술은 그래서 더 처연했기에 무슨 말로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어께에 얹은 손만 쑥스러워졌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수 있었다. 아무런 말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혼자
내버려두는 것이 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란 것을. 힘든일을 겪고 있는 상
대에게 도움을 준답시고 이것저것 캐묻고, 이 얘기 저얘기 늘어놓는게 때로
배려가 아니라 부담을 주는 경우가 있다. 가만히 나두는게 나을때가 있는
것이다. 지금이 그럴때다.
'첫살인... 이었구나.'
우건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그녀의 시선도 옮겨졌다.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
과 넉넉한 얼굴로 대지를 비추는 만월(滿月).
"초승달 이었으면 섭섭했을거야."
뜻몰르 정혜란의 독백에 우건이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그제서야 그에게 씨
익 한번 웃고 어께에 얹어진 손을 가볍게 두드린다음 장유열을 살펴보려 정
혜란이 걸음을 옮겼다.
"니야앙~"
"오오... 내가 너를 잊고 있었구나. 우리 귀염둥이, 우리 수호신! 넌 신이
보낸 사자일거야! 암, 그렇고 말고!"
고양이를 들어서 만세부르듯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던 그녀가 문득 눈을
빛냈다.
"그래! 넌 묘령(猫靈)이야! 고양이정령!"
"니야앙~"
별 관심없다는 투로 눈을 감고 골골거리는 고양이에게 다짐하듯 정혜란이
일렀다.
"묘령! 넌 이제부터 묘령이야! 이 집을 지키고 나를 지키고, 전 무림을 지
킬 정령인지 누가 아니?"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에 이끌린듯 다가온 우건이 머뭇거리다 힘겹게 말머리
를 꺼냈다.
"저..."
"이제 다 울었어요? 하하... 아무튼 오늘 고마웠어요. 댁이 아니였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네요."
고양이를 내려놓고 정혜란이 깊숙히 포권했다.
"세상 감출것도 없으니 말하지요. 화산 일대제자 정혜란이 소협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 이러싫것 없어요."
손사래를 치는 우건을 무시하고 계속 포권자세로 있자 마지못한듯 그도 포
권으로 화답했다. 억지로 절받기의 전형이리라.
"우건이라고 합니다. 큰 도움도 아니였..."
"몇살이지요?"
그의 말을 끊고 포권을 풀지도 않은채로 정혜란이 물었다. 익살스럽게 눈을
뜨고 있었기에 홀린듯 우건의 입도 열렸다.
"올해로 스믈다섯... 그건 왜..."
"내가 위군."
포권을 풀고 정혜란이 빙글 돌아섰다.
"앞으로 만나면 언니라고 불러요. 가르쳐줄게 너무 많은거 같아."
" ! "
어안이 벙벙한 그에게 정헤란이 빗자루를 내밀었다.
"뭐죠 이건?"
물독을 옮기며 그녀가 경쾌하게 말했다. 세삼스레 그런건 왜 묻는냐는 투로.
"청소 해야지요. 그럼 이꼴을 하고 아침을 맞자는 거에요? 다 치우면 숨겨
둔 후아주 한병으로 신세 타령이나 하자구요. 보아하니 그쪽도 할말이 많은
것 같은데."
달빛을 등불로 삼아 두 여인은 부지런히 쓸고 덮었다. 피내음이 강한곳은
흙을 가져와서 깔았는데 간간히 미소짓는 우건이나 쾌활하게 웃으며 얘기를
주도하는 정혜란, 아까의 일을 잊으려는 듯 모두가 분주히 움직였고 많은
말을 했다. 어슬렁거리던 묘령에게 물벼락을 뿌리며 장난도 쳤으나 한방울
도 스치지않는 날렵함을 과시하는 고양이 덕에 이들은 또한번 깔깔댈수 있
었다.
덧글: 처음으로 덧글을 달아봅니다. 다름이 아니라 삼류카페 회원 여러분께
알리는 공지입니다. 이벤트 마감일이 20일 이니 모르셨던 분이나 관심있으
신 분들은 속히 참여해 주세요.
환절기 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모두들 행복하세요.
17. 창작연재 [담당자 - 박근우(ADAGIO)]
[15628] [연재] 삼류무사-109
"데릴사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갑자기 그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요? 왠 데릴사위?"
장추삼의 심드렁한 반응에 고무된 남궁선유가 힘을 내어 입을 열었다. 그러
나 연방 눈치를 살피는 폼이 요 며찰동안 장추삼의 지랄맞은 성격을 완벽히
파악한듯 했고, 말의 완급을 조절하여 긴장을 조장하지 않으려 무지 애쓰
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노부는 현재 유행하는 사회현상을 말하는 것일세. 데릴사위 말이
야. 어떻게 생각하나, 응?"
앞서서 말을 몰던 하운이 의아스러운 듯 북궁단야를 바라보았다.
"북궁형, 요즘 데릴사위가 언제 유행한다고 저러시오? 난 금시초문이외다.
데릴사위라?"
북궁단야가 쓰게 웃었다. 이 상황... 언젠가 본듯하지 않은가? 단지 대상만
바뀌었을뿐.
"내가 알기로도 그런 사회현상은 없는거로 아오."
그들이 뭐라하든, 아니 둘의 대화를 들었더라도 남궁선유는 박박 우겼을 것
이다.
요즘 데릴사위가 유행이야!
불행히도 장추삼에겐 요즘 사회현상 같은게 도통 관심거리가 아니였는지 손
가락으로 귀만 휘적휘적 파고 있었다. 또 모른다. 요즘 사회현상이 귀찮은
노인을 내다버리는것 이라면 눈을 번쩍 떴을지도.
"그런거 관심 없어요. 후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는 쩝쩝 입맛을 다시는 그를 곁눈질하며 파랑검
객은 나름대로 스스로를 자위했다.
'이정도가 어디야? 최악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지.'
조금만 더 하면 어떻게 얘기가 될 것도 같다!
'여기서 더 밀어붙였다간 재뿌리는 격이지, 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흐
흐흐.'
자신의 말빨과 경륜에 감탄하며 묵묵히 말을 몰던 그가 어느정도 시간이 되
었다 싶었을 즈음에 천천히 말머리를 꺼냈다. 한참의 침묵이었고 지루하다
면 지루한 행보였기에 누가봐도 적절한 시기였다.
"내가 보기엔 데릴사위라는 거 무척이나 합리적인 제도 같다고 생각하네.
암, 괜찮은 사회현상이지. 실력있는 사위와 능력있는 처가의 절묘한 조화!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인가! 가히 예술이야, 예술!"
"내참, 노인은 데릴사위제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구려. 이제라도 늦지 않았
으니 손자를 데릴사위로 보내시오. 하고 싶은거 못하고 죽으면 원귀가 된다
고 합디다. 쩝쩝."
누가 있어서 파랑검객 남궁선유에게 원귀 어쩌구 하겠는가. 아니, 할 엄두
라도 내겠는가. 목숨이 아홉개라도 아홉 모두 작살날 발언이다. 그런데 이
런 경천동지할 발언을 뒷집 똥개이름 부르듯 하는 놈이 있었고 대하는 남궁
선유의 얼굴은... 놀랍게도 지극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쾌재의 빛마저 역
력했다!
"하아~ 자네의 한마디 한마디는 구구절절 나의 심금을 울리고 남음이 있구
먼. 그래, 사람이 원하는걸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편히 눈감지 못하고 구천
을 떠돈다고들 한다지. 맞네, 맞는 말이야."
내심과는 다르게 그의 어조는 구슬프기 그지 없어 금새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처럼 처량했다. 석달은 비루먹은 똥개라도 이러할까?
이 노인이 왜 이러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추삼을 연방 힐끔거리며
묵직한 한숨을 토해내는 그의 연기에 안 속아넘어갈 사람이 어디있으랴! 데
릴사위제가 예술이 아니라 그의 표정이 예술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
라면 남궁선유의 발치부터 살폈을 것이다. 땅이 패이다 못해 뒤집어질 정도
로 강렬한 탄식에 관도라도 배겨날 도리가 없을것 같았으니까.
"내가 왜 그런생각을 하지 않았겠나. 손주놈을 보내라... 좋은 말이지. 그
런데 자네도 보았다싶이 내 손주놈은 그런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네. 말했
지 않은가! 실. 력. 있. 는. 사. 위. 와 능. 력. 있. 는. 처. 가. 라고. 내
손주놈? 허, 어림도 없지. 어림 반푼의 어치도 없어. 그런 놈을 누가 데려
가겠나. 거기다 능력있는 집에서? 에구 내신세야."
난 왜이리 복이 없을까, 어쩌구 하는 일방 장추삼을 훔쳐보는 걸 있지않는
남궁선유의 속내를 알길이 없기에 바보처럼 그가 맞장구쳤다.
"하긴, 내가 봐도 노인장의 손주는 좀 더 사람이 되어야겠더군. 그렇게 버
릇이 없는건 어디까지나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것이오. 듣자하니
번듯한 집안인것 같은데 자식교육이 그리 개판이었는지 몰라?"
'자식교육에 문제? 가정교육이 개판? 이노옴...'
그의 턱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여기서 흥분하면 안된다. 다된밥에
개똥을 발라도 유분수지 어찌 이런 사소한 일에 성을 낸단 말인가.
'너 이놈 나중에 보자.'
단단히 이를 갈고 있었지만 나오는 말은 달랐다. 어쩌겠는가, 아쉬운건 그
인데.
"맞네, 맞는 말이야. 노부가 부주의하여 손주놈이 그리 엇나가게 되었구먼.
할말이 없어."
할말? 무지 많았다. 하루종일 줏어 삼켜도 모자랄것이다!
참아야한다. 이제 얘기가 되어간다. 아주 좋은 기회가 왔다.
"그렇지만 우리가문 만큼은 자네가 말한대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네.
무림 전체를 통틀어도 우리 세가에 견줄수있는 집안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게! 내 당장 그놈을 찾아가서 조목조목 따질 것이야!"
그가 열을 올리지않아도 남궁세가의 위명을 무시할 담량이 있는 무림인은
아무도 없다. 세가? 어떤 세가가 있어 감히 강남의 남궁세가와 비교될수 있
을까? 남궁선유의 자부심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칼밥을 먹는 사
람들이라면 누구나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얘기다.
누구나가... 아, 여기 예외가 하나있다. 완벽한 예외가!
"그러던가 말던가. 후아암~. 노인의 기세를 보니 그런말 하고 싶은 사람도
질려서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게 생겼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같소. 그
리 정정한 힘을 딴대 쓰지 그러오?"
"딴대? 어디?"
"쓸만한 손주를 하나 더 생산하던가... 아! 그것보다 노인장이 직접 데릴사
위로 들어가면 되겠구려! 그래! 그러면 되겠네! 그야말로 능력있는 사위감
으로 노인장 만한 인물이 어디 있겠소! 가문 좋지, 능력 탁월하지! 이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있겠소!"
남궁선유의 안색이 점점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무엇처럼 변해갔지만 장추삼
은 여전히 중언부언 떠들어댔다. 완벽한 파악? 아직 그는 장추삼이란 인간
의 단면도 보지 못했음이다.
'그러게 왜 대꾸를 하셔서는...'
고소짓는 하운과 웃음을 참는 북궁단야야 장추삼이란 인간을 훤히 꽤뚫고
있었기에 암말 않고 앞서서 말을 몰고 있었다.
완벽하다, 완벽해 하며 혼자 취해있는 장추삼이 밉살스럽지만 칠십년의 세
월은 남궁선유에게 무공의 깊이만을 선사하지 않았다. 노회한 강호의 이 고
수는 아직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들인 공이 얼만데 여기서 포
기하겠는가!
"허, 허험! 여, 역시 자네는 농담도 재밌게 하는구먼. 그래도..."
"농담은 무슨 농담? 내가 그리 실없는 놈으로 보이오? 방금전에 먹은 오향
장육하고 녹두활어가 울겠소!"
'그거 다 내가 사줬잖아, 임마!'
"좋은 음식먹고 쉰소리 할만큼 바보는 아니요. 날 뭘로 보는거요? 그러지말
고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오. 이거야말로 누이좋고 매부좋고, 도랑
치고 가재잡는 격 아니오."
'......'
참지 못하고 단리혜가 쿡쿡 웃었다. 그녀는 행렬의 맨 마지막에 쳐져 있었
기에 두 노청(老靑)의 대화를 낱낱히 들을수 있었고, 웃음을 참느라 손바닥
에 손톱자국이 깊게 패일 정도였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 그래도 손주며느리가 될 아이 앞에서 이게 무슨 망
신이란 말인가!'
지금이야 단리혜의 마음이 북궁단야에게 가 있겠지만 척 보기에 훤칠한 이
청년은 마음속에 담아둔 여인이 있다. 딴 사람은 다 몰라도 남궁선유의 눈
을 피할순 없다. 만약 북궁단야가 맘 먹는다면 무조건 포기하겠으나 그건
아니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남은건 요 심퉁맞은 놈인데 어떻게든
얘기를 이어보려 해도 송사리처럼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게 보통 내기가 아
니다. 속마음을 들켰나 반문도 해봤지만 그건 말이 안된다. 구체적으로 무
얼 어찌 하겠다는 언질도 주지 않았거늘 불가에서 말하는 천심통(天心通)이
라도 익히지 않았다면 무슨 재주로 알겠는가.
"아하하하... 나같은 노인이 팔자를 고치겠다고 들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걸세."
"하긴, 주책스럽긴 하겠구나!"
'끄응-'
심호흡이 필요하다. 이마에 굵은 힘줄이 하나 불뚝 솟았지만 남궁선유의 인
내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수모를 겪더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라서일까?
"맞네,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 ? "
여기가 중요하다!
"자, 자네는 요즘의 사회현상이 적용된 겨, 결혼을 할 용의가 있나? 물론
만약에 말일세."
"사회현상이 적용된 결혼? 그럼 나더러 데릴사위로 들어갈 용의가 있냐는거요?"
"그, 그렇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이렇게 싹둑 짤라도 되는가. 얼마나 힘겹게 상황을 만들어 냈는데. 이놈은
장유유서란 말을 생전에 들어본적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장추삼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않았다. 그런 소리 자체를 들었다는
게 일생일대의 수치라도 되는 양 길길이 날뛰는데 이건 영락없이 선불맞은
맷돼지다.
"내가 처가에 얹혀사느니 길거리에서 구걸을한다! 뭐? 데릴사위? 별 정신나
간 소리를 다 듣겠네. 에잇, 그래서 노인하고 중하고는 상대하지 말라더니
옛말중에 틀린거 하나 없네."
사람이란 참 묘한 동물이다. 분명히 기분나쁘고, 자존심 상하는 순간이건만
하나가 이뻐보이니 다른것도 다 마음에 든다.
'아암. 사내놈이라면 이정도의 기개는 있어야지! 적어도 남궁가의 밥을 먹
으려면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진놈이라야해. 처가에 얹혀 사느니 구걸을 하겠
다? 그래그래. 남궁가의 식구들도 그런 놈이라면 환영하지 않는다.'
벌써부터 장추삼이 데릴사위라도 된 양 흐믓한 얼굴로 툴툴거리는 그를 훔
쳐보는 폼이 딱 손주사위 절받는 할아버지다. 이를 알리 없는 장추삼의 투
덜거림속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이 또하나 있었으니...
'저놈이 바보라서 다행인건가. 여하튼 남궁노선배의 노력은 별반 효력이 없
겠군.'
다행이야, 속으로 생각하던 북궁단야가 퍼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
부터 저놈을 인정했단 말인가! 저런 못배우고 버릇없는 동네건달 녀석을 말
이다. 괜히 남궁선유가 찝쩍대니까 일시지간 마음이 쏠린것이리라.
피식 헛웃음을 짓다가 놀란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마구 도리질하는 북궁
단야를 보며 하운이 뭐라하려 했지만 곧 그만 두었다. 장추삼도 그렇고 이
친구 역시 가끔 이해못할 행동을 벌일때가 있고 잠자코 내버려두면 곧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는 것 역시 파악이 되어있다. 사람이 완벽할수야 없지않은가!
'그리고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도 있지.'
총기있던 북궁단야도 장추삼의 바보병에 전염되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정
신나간 짓거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가만? 의식하지 못하는 중이라?'
갑자기 머리를 한번 벅벅 긁더니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
리는 하운이 또 이상해 보여 북궁단야가 뭐라 하려 했지만 곧 그만 두었다.
종종 여독이 겹치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뒷쪽에서는 여전히 작은 소요가 있었다.
"인간 장추삼도 다됐다, 다됐어! 이런 거지같은 소리나 듣고! 차라리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어버리자!"
"안 함세! 내 그런말 절대로 안할테니 기분을 풀게나. 늙으면 입이 방정이
라지 않나. 젊은 자네가 이해하게."
"에에휴~ 청춘만 끝장난줄 알았더니 인생이 아예 망가진거야!"
좀처럼 끝나지 않을것 같았던 장추삼의 넋두리는 남궁선유의 한마디로 종결
되었다.
"하남땅에 천상루(天上樓)라는 최고의 음식점이 있다네. 거기서 잘하는 음
식이..."
"호오~ 나두 돼지고기 볶음엔 일가견이..."
일순간 말을 잊은 하운과 북궁단야가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이 순간만큼은
둘의 생각이 일치했으리라.
역시 저놈은 바보야!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건간에 장추삼과 자칭 미식가임을 자랑하는 남궁선유
는 돼지를 주제로 한 요리의 세계로 빠져들어 아까 일 같은건 까맣게 잊고
심각한 토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느새 도착한 하남성, 물정모르는 산비적 몇몇이 까불다가 장추삼의 심심
풀이 상대가 되어준것 빼면 지극히 평온한 여정이 었다. 유람은 아닐진대
모두가 어두운 얼굴을 피한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정의, 또는 혈육애
같은것이 앞서기 때문이리라. 물론 아무 생각없는 놈 하나 빼고.
그 아무 생각없는 놈은 성도에 들어서면서 발(發) 한 일성(一聲) 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천상루가 어디야!"
17. 창작연재 [담당자 - 박근우(ADAGIO)]
[15651] [연재] 삼류무사-110
그가 어떤 헛소리를 하건간에 적응이 될대로 된 두 청년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하남성... 그리고 무룡숙. 간단치 않은 일이 그 이면에 숨어있을
것이다. 단리혜와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장추삼이 보았
던 월광검무의 중복된 조우(遭遇)를 그저 '어쩌다' 같은 말로 흘리기에 사
건이 가지는 의미가 너무 크다.
무림은 그들이 알고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굴러갔었는지도 모
른다.
가장된 평화, 가장된 평화...
그들을 짓누르는 한마디. 밝혀진것 아무것도 없는데 의문만 쌓여간다. 그러
나 이곳에서 어쩌면 실마리를 잡을지도 모른다. 절대로 나갈수 없을것 같은
미궁도 하나가 풀리면 언제그랬냐 싶게 풀리곤 한다.
"말만 하지 말고 어서 가요! 어디에요?"
"아, 닥달하기는. 제촉하지 않아도 갈걸세. 가야해!"
"가야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겁니까?"
둘의 생갱이에 하운이 끼어들었다. 천상루란 곳을 가려는 남궁선유에게 음
식이외에 어떤 이유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음. 사람을 좀 만나기로 했네."
"개인적인 용무입니까?"
북궁단야가 차갑게 눈을 빛냈다. 둘 - 남궁선유와 단리혜 - 의 합류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이상 그들의 행보가 알려저서 좋을게 없으니까. 그
를 한번 처다보고 남궁선유가 기지개를 켰다. 아무리 무림고수라도 나이가
있고, 지루한 여정에 피곤했을 테니.
"가 보면 알걸세."
"노선배..."
"가 보면 안다니까!"
얼음장과도 같이 북궁단야의 말을 끊는 그의 기백은 방금전까지 데릴사위
운운 하며 히히덕 거리던 촌노의 것이 아니었다. 일체의 질문을 불허하는
남궁선유의 단호함에서 파랑검객의 외호가 다시한번 느껴졌다.
불만족 스러운 북궁단야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하운이 그의 어께를 한번 쳤
다. 대저 노인들이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돌아앉은 석불도 제자리를
찾는 법이다. 하물며 파랑검객 남궁선유 임에야.
(" 북궁형 암말 말고 한번 따라봅시다. 설마하니 남궁노선배께서 경우 없는
일이야 벌이시겠소. 우리가 닥친 일의 성질조차 파악 못하실분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 같소.")
머릴르 한번 쓸어 올리는 것으로 불만을 대신하고 말을 모는 북궁단야의 속
내를 짐작키는 어려운 것이었으나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불만이 완전히 사그
러들지 않았음을 표출하였다.
"아, 빨리 와요. 배고파 죽겠구만. 자랑 만큼 음식맛만 없엇다간, 흥! 각오
하는게 좋을거요."
"그럼 맛있으면 어쩔건가?"
"내 참~ 맛있으면 맛있는거지, 맛있는게 그럼 맛없는거요?"
이런 실없는 대화속에 어느새 일행은 남궁선유가 말한 '중원 오대 음식점'
천상루에 이르렀다. 성문에서 어느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한 천상루이기에
배가 고파서 연신 툴툴거렸지만 간단한 요기라도 하자는 남궁선유의 말을
'입맛만 버려요' 로 일축하며 그곳만을 고집하는 장추삼의 오기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정말 묘한 곳에 최선을 다하는 놈이라 하겠다.
"오옷! 보기엔 썩 그럴듯 한대? 흐흥, 하지만 내용물이 꽝이면 이런게 다
무슨 소용이람?"
"아따, 그친구 정말 말 많네. 그러게 자네 입으로 내용물을 직접 확인하면
될거 아닌가!"
으리으리한 외관에 주눅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를 떠밀며 남궁선유들이
천상루에 들어서자 일류 요리점이란걸 몸으로 보여주듯 깨끗한 입성의 점소
이들이 어서옵쇼를 연발하며 짐을 받아든다, 말 먹이는 최상급이 어쩌고 수
선을 떨었다.
"아직... 안왔나?"
"예?"
"아, 아닐세."
의아해 하는 하운에게 손사래를 치고 자리에 앉은 남궁선유가 총관으로 보
이는 사내를 불렀다.
"나 기억 안나나?"
"그, 글쎄요... 워낙 많은 분들이 오가는지라... 소인의 기억력이 이정도
밖에 안됨을 이해해주십시오, 대인"
척 보기에 기품과 차림새가 다른 노인, 그리고 무인 냄새가 풀풀 나는 일행
들에 질려 일단 저자세로 일관한 천상루의 총관이었는데 그건 매우 잘한 선
택이었다.
"하긴... 오년전에 두번 오고 발을 딛지 않았던 하남땅이니. 그럼 수석숙수
(首席熟手) 오노인은 아직도 일을 보고 있나?"
"아! 오숙수님을 아십니까? 그럼요. 오숙수님은 우리 가게의 자랑인대 어찌
손을 놓으실수 있겠습니까? 직접 음식을 만드시지는 않지만 주방에서 후학
들을 볼보고 계시죠."
"우리동네 노칠아저씨 같은가보군."
천상루의 총관 성봉준이 보기에 가장 없어보이는 장추삼의 말이라 그는 치
밀어 오르는 콧방귀를 참아야했다. 어느 시골마을에서 주방일 보는 노인을
말하나본대 어디감히 오숙수와 비교한단 말인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눈빛을
보내는 성총관에게 남궁선유가 은자를 집어주었다.
"어이구 이러실것 까지야..."
"가서 오노인좀 나오라고 하게."
돈이 좋긴 좋다. 눈썹이 휘날리게 주방으로 들어간 성총관은 잠시후에 오관
이 단정한 노인하나와 같이 나왔다. 주방일보다 동네 학장에 어울려보이는
노인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성총관의 안내로 일행을 보게되었고 순간 오
노인의 안색은 어떤 격동으로 물들었다.
"아아아..."
비틀비틀 걸어오는 그의 기세에 성총관을 비롯한 천상루 사람들 뿐만 아니
라 손님들 까지도 의아한 기색으로 그의 반응을 주시했다. 강시처럼 비척비
척 걸음을 옮기던 오노인이 남궁선유의 앞에서 무너질듯 무릎을 꿇기까지
분명 긴시간이 아니였을텐데 모두에게 지루하다 싶은 느낌을 준 건 그의 동
작 하나하나가 대단히 특별했기 때문이다. 죽은 조상이 살아와도 이렇게 정
중할까?
"노야, 남궁노야! 노야께서 미천한 이놈을 찾아주셨군요!"
"허, 사람도. 자네 나이에 무릎꿇고 우는건 썩 보기 않좋네. 어서 일어나게."
"노야... 으흐흑, 노야!"
일견 대단히 아름다운 광경. 그런데 장추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거, 어디서 많이본 광경인대... 분명 이런일이 있었던것 같은데... 언제지?'
오년전, 소림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가던 남궁선유가 우연히 천상루에 들렸
던게 인연이었다. 음식이 맛있어서 은자나 쥐어주려고 요리사를 청했더니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질린 오숙수가 나왔고 몇마디 말이 오가다가 뭔가 사
정이 있음을 안 남궁선유가 넌지시 자신의 외호를 알려주었고 파랑검객이란
이름앞에 늙은 주방장은 피눈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들놈이 비록 만취된 상태였다고는 하나 무
림인과 씨비가 붙을만큼 바보놈은 아닙지요. 거기다 흑월회라면 그 표식 만
으로도 하남에서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터인데 어떤 담량으로 그들과 상
대하겠습니까? 상해를 입혔다는건 더더욱 말이 안되는것이 아들놈의 무공,
허 무공이라고 말할 수준이라도 되야... 어흐흐흑."
말인즉슨 그의 첫째 아들이 술을 먹고 취해서 정신이 없이 돌아왔는데 다음
날 흑사회의 자칭 제 팔령에 속한다는 인물들이 오숙수의 집에 난입해서는
치료비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유가 얻어맞았다는 건데 누가 봐도 말
이 안되는것이 동네 도장에서 장법 몇수 있혔다는, 그것도 만취된 사람에게
명실상부한 조직의 무인이 당했다는거다.
그래도 힘이 없기에 어떻게든 좋게 해결을 보려 했지만 배상액을 듣고 오숙수는
그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집이며 가산을 모조리 처분해도 불가한 거금을
불렀으니 말이다. 돈을 주든지 팔을 하나 내놓던지 가부간에 결정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이 아들을 데려갔기에 관에도 고변을 할 형편이 못되었다. 사실
말해봐야 별반 도움도받지 못할게 뻔했다. 관이란 언제나 약한자의 옆에 있지
않았으니까.
"약속 날자가 내일이랍니다. 그러나 백방으로 수소문해봐야 그런 돈을 만들
수는 없었기에..."
하염없이 우는 주방장을 뒤로하고 자리에 일어선 남궁선유의 노안에서 분노
의 광망이 일었음은 물론이다.
의외로 사건은 싱겁게 끝난것이 흑월회를 직접 방문한 남궁선유에게 외당당
주란 인물이 나서서 사과를 하고 팔령주란 자의 눈을 하나 뽑아버림으로 자
칫 무거울 뻔했던 분위기는 끝났다. 오숙수의 아들이 풀려났음은 물론이다.
오숙수의 긴 이야기에 이제야 파랑검객을 알아본 무인들이 앞다투어 분주하
게 인사를 나누고, 여류 무인들이 북궁단야를 보며 넋이 나가있는 동안 한
참을 고민하던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 알았다! 우리 부친하고 망할놈의 영감탱이랑 만날때랑 똑같... 잠깐?
지금 흑월회의 팔령인가 하는 애꾸 말하셨소?"
"그렇습니다, 소협."
"혹시 그럼 덩치 큰 놈 하나랑 얍삽하게 생긴놈 둘이 같이 있지않았소?"
오숙수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남궁선유와 하운
들도 의아함에 장추삼을 쳐다보았는데 뭐가 그리 웃긴지 킬킬거리는 그에게
서 대답을 듣긴 어려웠다. 북궁단야가 뭔데, 하고 묻지 않았더라면 언제까
지라도 웃고만 잇었을지도 몰랐다.
"그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장추삼이 동굴에서 나온것만 빼고 흑월회 제팔
령주 노문적과 그의 떨거지들을 두들겨준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늘
상 그렇지만 전투장면이 나오면 일어서서 폼까지 잡는 그이기에 얘기는 당
연히 재밌었다. 오숙수는 아예 박수까지 치며 경청을 했다. 얼마나 통쾌했
으면 요리를 하러 가면서 '재밌었어 애꾸' 란 말을 몇번이고 되뇌였겠는가!
"하남땅에서 감히 흑월회를 욕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군."
느닷없이 들려온 한마디. 모두의 시선이 구석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있는 사
람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장추삼의 얼굴은 정말 볼만한 것이었다.
"내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걸 아는걸 보니 노인의 시력이 매우 뛰어남을
알수 있겠소."
벌떡 일어선 장추삼이 피식 웃었다.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리는 없으니까.
"눈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뛰어나다네."
술울 마시던 노인이 고개를 들고 히죽 웃었다.
'뭐가 이렇게 동글동글하게 생겼어? 완전 부도옹(不倒翁) 따로 없네.'
작달막한 노인이 느믈거리며 일어났다. 무거움 말투와 달리 그리 표정과 체
형은 매우 희극적인 것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짓게 만드는 무엇이 있
었다. 동글동글한 몸, 톡 튀어나온 배, 그리고 싱글거리는 얼굴. 도저히 싸
움을 거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였기에 당황한 장추삼이 목을 한번 꺾었다,
물론 소리나게.
"뭐야, 노인. 장난치고 싶으면 딴대가서 알아보시오. 가뜩이나 배고파 죽겠
구만 엉뚱한대 힘쓰게 하고있어, 진짜."
무인의 기세라곤 자라똥 만큼도 풍기지 않았기에 맥이빠진 그가 돌아섰다.
사실 무인의 기세를 흘리지않는건 장추삼 본인도 마찬가지면서도 말이다.
"말만 많은 놈이군."
"뭐요!"
"그렇잖아? 실컷 주절거리다가 상황이 되니까 꼬리말고 도망가는 꼴이라니.
.. 아랫도리에 있는 그걸 띠어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똥개들에게 보시하는게
낫겠다. 킬킬."
사람좋게 싱글거리면서 말하는데 뱉아내느니 독설이요, 빈정거림이다. 그렇
다고 무작정 노인네에게 달려들만큼 막배워먹은 놈은 아닌지라 그저 씨근덕
거리고 있는 장추삼에게 동그란 노인이 결정타를 날렸다.
"너... 사실 고자지?"
"씨앙!"
오랫만에 해보는 육두문자다. 별볼일 없어보여서 봐주려고 했는데 이따위
망발이라니!
장유유서고 나발이고 모두 잊고 장추삼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 기세가 실
로 무서운것이라 누구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동그란 노인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얼굴울 들이민 장추삼이 씹어뱉듯 말을
던졌다.
"시력이 매우 안좋구려. 내것은 매우 훌륭하여 새벽마다 하늘을 찌른다오.
알고나 말하쇼!"
"자네 하늘은 땅바닥에 붙어있나?"
"남말 하지 마시지?"
얼굴을 딱 붙이고 웃으며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비틀
려있었지만 나서서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체로 주루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총관등이 나서서 말리는게 상례이건만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성
총관이란 작자는 그저 멀뚱멀뚱 바라만보고 있었고 장추삼의 일행들도 굳이
나서려 하지 않았다. 엄한 손님들만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첫댓글 대릴사위는
가장
현명한 선택입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