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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6일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제1독서 : 예레 3,14-17
복 음 : 마태 13,18-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외국 아이가 생양파를 먹는 영상을 봤습니다.
생양파가 과연 맛있을까요? 아이가 먹기에는 너무 맵지 않을까요?
사실 이 아이는 엄마가 양파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어디 한번 먹어보라고 하자,
정말로 맛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생양파를 먹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너무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생양파가 사과처럼 맛있겠습니까?
아이는 처절하게 생양파를 사과처럼 먹었습니다.
터져 나오는 콧물, 그렁그렁 맺힌 눈물, 새빨개진 얼굴.
그러나 자기가 사과라고 했던 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최대한 아삭아삭 맛나게 생양파를 씹어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아이 엄마도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아이가 힘들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보라 하고 또 여유 있게 영상까지 찍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부모는 이 순간 무조건 말리지 않을까요?
직접 체험하고 한 입 정도는 허락할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의 경우처럼 끝까지 기다리는 부모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더는 양파를 사과라고 우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기가 결정했고, 자기가 선택했으며, 자기가 행동하고,
그래서 자기가 책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깨달았겠지요. ‘양파는 사과가 아니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더라도 간섭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면서 당신께로 나아가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은 모두 주님께 책임을 떠맡기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며칠 전에 나왔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보통 농부가 길가에 그냥 씨를 뿌리고 할 일 다했다고 할까요?
또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는 농부도 없습니다.
농부는 보통 좋은 땅을 만들고 그곳에 씨를 뿌리는 것이지요.
바로 복음에 등장하는 땅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길가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이 오래가지 못하는 돌밭의 마음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시덤불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에도 당신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십니다.
우리가 직접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그래서 좋은 땅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나쁜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그래서 주님과 언제나 함께 많은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관리인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몇 개의 화분을 작은 바구니에 담았는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놓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곧 죽을 것같이 보인 거실의 화초가 거짓말처럼 생기를 찾는 것을 보고
물 한 모금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한 모금의 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 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 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13,8) 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 지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함을 말합니다.
이사 날짜를 잡으러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 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지금 내 안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런데 정작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뿌려진 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뿌려진 씨’는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뿌려진 씨’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밭’이 아니라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뿌려졌듯이,
사람도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사 된 선물일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우리에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소명’은 자신이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씨앗(말씀)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을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라는 환경(조건)과의 관계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곧 ‘길’, ‘돌’, ‘가시덤불’, ‘좋은 땅’과의 관계 안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예컨대, 씨앗을 물어가는 ‘새’(악한 생각)와,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는 ‘돌’(시련과 박해)과,
씨앗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재물과 유혹) 등과의 관계 안에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이는 우리가 형제와 더불어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구원의 동반자요, 동행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조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이 거름이 되는 것, 죽어 거름이 되는 것,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밭이 씨앗을 일구는 줄로 알지만, 사실은 씨앗이 밭을 일굽니다.
씨앗이 밭을 규명하는 것이지, 밭이 씨앗을 규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밀 씨가 뿌려지면 밀밭이 되고, 콩이 뿌려지면 콩밭이 됩니다.
돌이 깔려 있으면 돌밭이 되고, 가시덤불이 덮고 있으면 덤불밭이 됩니다.
쓰레기가 가득하면 쓰레기밭이요, 똥이 뿌려지면 똥밭입니다.
그러니 결코 밭이 스스로 밀밭이 되거나 콩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내가 어떤 밭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곧 내 안에 말씀이 자라고 있으면 향기를 뿜는 좋은 밭이요,
쓰레기로 쌓여 가고 있으면 온갖 악취가 뒤범벅이 된 오물 밭일 것입니다.
옛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은 한 권의 책, 곧 한 권의 복음서다.”라고 표현했으며,
특히 “성모님은 말씀의 도서관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는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고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요?
말씀이 자라고 있는 ‘말씀의 도서관’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욕망이 자라는 잡초밭인가요?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라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열매를 맺는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고,
어떤 처지에서도 방관자로 살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기꺼이 죽어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이스라엘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중에 ‘아이언 돔(Iron Dome)'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국을 향해서 날아오는 로켓포와 미사일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아이언 돔을 개발하였습니다.
실전에 배치된 아이언 돔은 이스라엘을 향해 날아오는 로켓포와 미사일을
요격하는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2023년 10월에 하마스는 수천 발의 로켓포를 이스라엘 영공을 향해 발사했고,
아이언 돔은 모두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언 돔을 개발하는 것보다, 가자지구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아이언 돔에서 발사되는 미사일 하나의 가격은 일억 원이 넘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야2, 4)”
우리는 남과 북에서도 슬픈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남한의 탈북단체들은 북한이 싫어하는 전단을 만들어 풍선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오물을 담은 풍선을 남쪽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검색의 시대에 웃지 못할 슬픈 자화상입니다.
전단과 오물을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남한의 기술을 북으로 보내고, 북한의 인력을 남으로 보내면 좋겠습니다.
개성 공단을 재개하고, 금강산 관광도 다시 열면 좋겠습니다.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가 개통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전단과 오물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암입니다.
암은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우리의 몸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아이언 돔처럼 우리의 몸에 들어온 암세포를 막아내는 방어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것은 면역체계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몸에 들어온 독성 물질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CT와 MRI로 찾아낼 수 있는 암세포의 크기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암세포는 그런 검사로 찾아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암세포를 찾아서 막아낸다면
우리는 암세포가 있다고 할지라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면역체계는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선천적인 요소와 환경적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선천적으로 좋은 면역체계를 물려받았다고 해도,
후천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합니다.
반면에 선천적인 면역체계는 부족할지라도
후천적으로 노력하면 건강한 몸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이웃에 대한 헌신은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도파민은 우리의 면역체계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사는 우리의 면역체계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한국인에게 발생 빈도가 높아지는 암 중에 ‘대장암’이 있다고 합니다.
육류 위주의 식사 대신에 우리의 전통적인 식사를 하기만 해도 대장암 발병률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콩을 사용한 단백질 섭취와 나물과 해초를 곁들인 식단이 좋다고 합니다.
세례는 악의 세력을 막아낼 수 있는 신앙의 면역체계입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척적인 면역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100% 악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습니다.
후천적인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를 증진시키는 커다란 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를 높이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의 면역체계는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실천’은 어떠한 악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는 ‘Faith Dome'입니다.
이런 신앙의 면역체계를 가진 사람은 유혹에 약한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초 한 자루가 캄캄한 밤을 밝힐 수 있듯이,
신앙의 면역체계가 강한 사람은 공동체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 마치 씨앗처럼 모든 이의 마음의 밭에 뿌려지지만,
그가 내는 결실은 그 마음 토양이 어떠냐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하신다.
즉,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다 받았지만,
그 말씀이 잘 성장하고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가꾸느냐는
각자의 바탕과 노력과 열의와 능력에 달린 것이다.
여기서 결실을 보지 못하는 나쁜 땅은 길,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이 있고,
좋은 땅도 백 배를 내는 곳, 예순 배를 내는 곳, 서른 배를 내는 곳이 있다.
길에 뿌려졌다는 것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쾌락과 세상의 걱정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거룩한 빵과 참된 양식을 가시덤불 가운데서 먹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걱정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씨앗이 그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과 물과 빛과 기후와 환경 조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길바닥이나 돌밭에서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서 곡식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농사를 짓더라도 그러한 곳에서 결실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곳에 씨를 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싹트고 잘 자라서,
많고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그 바탕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길바닥이나 돌밭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곧 외면하고 마는지?
아니면 들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빠져
하느님 말씀을 숨도 못 쉬게 가두고 뒷전으로 미뤄 놓는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으로,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바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을 큰 결실을 낼 수 있도록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닮는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귀는 있지만 마음이 없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듣기 싫은 말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립니다.
귀로 들은 말이 마음에까지 가야 듣는 것인데
마음에까지 가지 않도록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관심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까지 오면 마음이 괴로우니까 관심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심은 존재건 말이건 일이건 그것들을 마음에까지 끌어당기고,
무관심은 그런 것들을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관심에 두 가지 관심이 있습니다.
사랑의 관심과 욕심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심과 욕심의 관심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관심은 유익의 관심이고,
욕심의 관심은 이익의 관심이라고.
우리는 일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고,
존재의 유익을 위한 일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까 일은 사랑하면서 존재는 사랑하지 않거나
일에 관한 관심은 있지만 사람에 관한 관심이 없다면
그 일은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여자와 비교해 남자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환심을 사기 위해 너를 위한 일을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서 실제로는
사업 욕심 때문에 사랑한다는 가족을 놓치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기념일이나 아내와 자녀의 생일을 놓치고,
아내나 자녀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관심하게 듣고 마음에 남겨두지 않으며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편리하게 잊어버립니다.
아무튼 욕심은 사랑의 관심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꺼버립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러니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일에 사랑하지 않는 핑계를 대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일에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고 오래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있었던 일이나 추억도 잊지 않습니다.
아무튼 말이건 존재건 그것을 마음에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사랑의 관심이고,
욕심의 관심은 욕심부리는 것만 소유하고 소유한 뒤에는 그만이며,
말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림으로써 말이 마음에 와닿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말씀을 새겨들으라 하시는데 어디다 새기라는 말씀입니까?
명심(銘心) 곧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귀는 있지만 새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찌 새기고 어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입니다.
누군가의 부모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인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혈육의 부모로 살지는 않았지만,
수도자들과 교우들의 영적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부모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인지?
반대로 부모 역할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노고와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아플 때 부모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자녀가 방황할 때 부모 역시 산란한 마음을 어찌할 바 몰라 잠 못 이룹니다.
자녀가 환하게 웃을 때 부모도 덩달아 행복합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그 결과 동정 잉태라는 놀라운 초대를 받았을 때,
두 분의 마음도 함께 설레고 뛰놀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피앗! 이라고 외침과 동시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의 생애 앞에 펼쳐진 통상적이지 않은 수 많은 사건들을 바라보며
안나와 요아킴의 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주님 말씀에 충실했던 마리아의 부모답게
요아킴과 안나 역시 주님 말씀을 씹고 곱씹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주님 말씀이 자신 안에 이루어지도록 열렬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님 말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살았던
안나와 요아킴의 생애는 이 세상 어떤 밭보다 기름지고 풍요로웠던 토양이었습니다.
그 비옥한 토양 위에 성장한 한 그루 아름다운 나무가 바로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무엇이든 끝까지 이루어내는 사람의 비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농부 비유의 해설입니다.
예수님은 길은 말씀을 듣고도 깨달으려 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
그리고 돌밭은 육체적 기분에 따라 사는 사람,
가시밭은 돈에 대한 욕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들 안에서는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는 영웅적인 의지입니다.
영화 ‘박하사탕’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었지만, 교만과 음란함,
그리고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사람의 일생을 담았습니다.
반면 세상에서 자수성가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이 세속-육신-마귀를 이깁니다.
이것을 이기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교만함을 어떻게 이길까요?
자기 처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이깁니다.
1990년대 CIA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말단 직원 ‘카멘’이라는 여성은 매우 능력자였습니다.
CIA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일의 효율이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를 찾아냅니다.
그래서 하루 3시간 정도는 부처마다 실시간 정보 공유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 주장은 무시당하였습니다. 정보 유출 위험이 크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카멘이 그럼에도 계속 그러한 주장을 하자 친구들까지도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극소수의 사람들은 아직 때가 아니니 힘을 키우고 능력을 보여주며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먼저 서는 게 중요하다고 간언하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인정받는 직위에 오르고 능력을 인정받은 다음
그녀는 다시 그러한 제안을 하였고 결국 사내 내부자용 ‘인텔리피디아’를 만들어냅니다.
자기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상황에서는 금방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처지를 깨닫고 나니 기다릴 줄 알게 되었고
그동안 자기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재정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수성가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겸손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다음은 육체적 욕망에 따라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기러기는 혼자서는 40,000킬로미터를 날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혼자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뜻을 함께 이뤄줄 공동체를 찾습니다.
그 공동체에 있으면 혼자서는 포기하고 싶어도 그들을 보아서라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나약함을 안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게 만들 시스템에 자신을 몰아넣습니다.
이는 마치 열쇠공이 잠긴 문을 여는 과정과 같습니다. 수많은 열쇠를 꽂지만 지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것 하나는 맞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공동체와 함께라면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탐욕이라는 가시밭을 벗어나야 합니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일한다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실패했을 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잠깐만 게임을 못 하게 하거나 한 끼만 굶겨도 죽을 듯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충분히 이겨나갈 고통도 못 살겠다며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큰 꿈이 있다면 어떨까요?
나의 손해는 큰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참아나갈 수 있습니다.
아이보다 부모가 더 잘 참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 자신만의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닌 자녀를 키워내야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모든 사람은 다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모든 실패를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서 적용되는 법칙이 이 세상의 성공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결국 마귀-육신-세속의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깨닫고 이 세상에서도 원하는 것을 이뤄내고
천국에도 들어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