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반경
김대호
종이의 재질은 고요이다
고요 위에 물글씨로 문장을 쓴다
몇 분 후
글씨와 문장은 마르고 없다
문장이 있었던 자리를 햇살에 비춰보면
약간 쭈글하다
글씨와 문장은
고요의 근육이 되었으리라
때로는
돈 받고 쓰는 글보다 더 힘들게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엮을 때가 있다
돈보다
낱낱이 흩어지려는 내 안의 짐승들을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돈을 받고 쓰는 글에 가장 몰두하게 된다
마감을 넘긴 때도 없다
자신의 글에 대한 자존과 권리를 주장하려면
상거래법도 준수해야 한다
수많은 말이 난무하지만 서로 얽혀서 무슨 말인지 풀어낼 수 없을 때
고요는 선명해진다
소리의 덩치를 줄이고 줄여
하나의 점이 되었을 때
점점점 고요의 밀도는 예민해진다
그러나 잠깐이다
아무렇게나 하품을 하고
아무렇게나 널 생각하지
아무렇게나 생각할 수 있는 너는 예쁘고 교양있고
또한 요염해서
호박잎을 뜯어먹는 검은 고양이의 속성을 닮았지
입이 없고 소리가 없고 손가락 끝으로만 글씨를 쓰는
투명에 가까운 널 나는 좋아하는 거지
반복하고
반복해서 쳐다봐도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는
너의 묵음이 좋은 거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침저녁으로 몸이 다르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내가 사는 곳에서
반경 백 미터 안에 모든 것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이 착각의 암수는 어디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걸까
ㅡ「시산맥」2017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