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 한국인들의 머리 속에는 대강 '20세기 들어서 들어온 것은 새것, 나머지는 전통'이라는 관념이 들어있다. 한 세대를 40여년 가량이라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 보통 서너 세대쯤 지나도록 지속되면 전통으로 쳐주곤 한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자기가 보아왔으면 그걸 전통이라고 무턱대고 믿기도 한다.(말하자면 전통이란 건 생각보다 가소로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그냥 수용할 수는 없다. 나는 애기때부터 TV를 봤다. 국민학교때부터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들었다. '음악은 음반으로 듣는 것'이라는 관념이 절대로 이상하지 않다. 커피와 콜라와 맥주는 어디서나 보이는 음료의 하나였다. 반면에 국악은 전혀 듣지 않고 자랐으며, 중고생 시절에는 머리를 극도로 짧게 깎아야만 했다. 이걸 전통이라고 쳐줄 순 없지 않은가?
전통이 의미있는 것은 거기에 그만한 권위를 부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클래식'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 보면 인습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들도 그 옛날에는 그럴 만했던 혹은 그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이유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우리로선 최소한의 정보, 판단근거가 필요하다.
(1)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들이 얼마나 오래 됐는지
(2) 그러면 그것이 있기 전에는 어땠는지
(3) 또 지금 없는 것은 언제 없어졌는지
객관적인 자료라도 우선 알고 있어야 거기에 근거해서 가치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하는 이를 위한 개인적 자료정리 정도가 되겠다.
2. 기본연표
B.C. 3000~2000경, 북방종족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정착. 신석기문화 시작
B.C. 2333~194, 고조선
B.C. 100년대~A.D. 600년대, '삼국시대' => 정말 세 나라밖에 없었던 것으로 오해하면 안됨
A.D. 676~935, 통일신라 / A.D. 699~926, 발해
A.D. 891~936, 후삼국시대
A.D. 918~1392, 고려
A.D. 1200년대, 몽골과의 전쟁
A.D. 1392~1910, 조선
A.D. 1590년대, 일본과의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A.D. 1630년대, 청과의 전쟁 (병자호란)
3. 음식
쌀: 동남아시아 원산. 인도에서는 B.C. 7000~5000년대, 중국에서는 B.C. 5000년경에 재배시작. 한반도에는 B.C. 2000년경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옴. 최초의 벼농사 흔적은 경기도 여주에서 B.C. 6세기경. 그러나 A.D. 400~500년대만 하더라도 귀족들을 위한 식품이었을 정도로(일반인의 경우 북부는 조, 남부는 보리가 주식) 귀했다가 점차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조선시대에 와서야 대표적인 곡류로 자리잡음. 20세기 중반의 남한만 해도 100% 쌀밥은 부유함의 상징이었다는 점.
밀: 중앙아시아 원산. 보리와 함께 가장 오래된 작물 중의 하나. 한반도에도 기원 전에 들어옴.
차: 인도 및 중국 원산(인도 이름은 '차이', 중국 이름은 '챠'. 물론 여기에서 '차', '다', 'tea', '챠이'(아랍어) 등이 기원한 것임) A.D. 828년에 당을 통해 통일신라에 들어옴.
- 술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차문화는 특히 고려시대에 대단히 발전. 이를테면 제삿상에도 술을 올리지 않고 대신 차를 올렸다. 당시에는 정부가 차문화의 보급, 관리에 앞장서느라 곳곳에 기관을 두기도 하였는데, 그 이름이 바로 '다방'이다.
- 한편, 이른바 '다도'라고 하여 무릎을 꿇네 두손으로 찻잔을 받치네 어쩌네 하는 것은 조선시대까지도 그런 기록이나 전례가 없다. 순전히 일본의 전통인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의 전통인양 들어앉았다. 그게 과연 언제일까?
고추: 남미 원산. 임진왜란때(1500년대 말) 일본에서 들어옴. 그러나 일반에 널리 이용된 것은 19세기나 들어서의 일
고구마: 중남미 원산. 당연히 신대륙 발견 이후 한국에 들어옴
감자: 남미 원산. 1800년대 초에 중국에서 들어옴
옥수수: 중미 원산. 당연히 신대륙 발견 이후 한국에 들어옴 (16세기 초에 중국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호박: 중남미 원산. 당연히 신대륙 발견 이후 한국에 들어옴
유채: 중앙아시아 원산. 고려 시대에 중국을 통해 들어옴
사과: 1655년에 중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옴. 명칭 역시 순우리말이 아니라 '沙果'라는 한자어임. 다만 현재 중국에서는 예전에 쓰던 이 단어를 쓰지 않고 대신 '핑과'라고 부름.
당근: 중앙아시아 원산. 한국에서는 1500년대부터 재배 시작
마늘: 서아시아 원산.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서쪽에서부터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 B.C. 2세기로 추정. 아무래도 웅녀가 먹을 마늘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됨.
배추: 중국 원산. 삼국시대부터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
무: 아시아 원산. 삼국시대부터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
밤: 중국을 통해 들어옴. 적어도 기원후 200년 이전부터 재배해옴.
양파: 서아시아 및 지중해 원산. 앞에 '양(洋)'자가 붙는 많은 단어들(양송이, 양상치, 양배추, 양식, 양주, 양담배, 양복, 양말, 양산, 양장점, 양품점, 양동이, 양재기, 양은, 양철, 양잿물, 양초, 양탄자, 양궁, 양악, 양금, 양옥, 양약 등)처럼 근대에 와서 한국에 들어옴
[*비슷한 경우로는 앞에 '호(胡)'자, '당(唐)'자가 붙은 단어들이 있음. 모두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임을 의미하며, 당연히 유입된지가 훨씬 더 오래됨]
- 호~: 호떡, 호빵, 호두, 호밀, 호초(후추의 원래말), 호적(=태평소)
- 당~: 당면, 당나귀, 당나발(=당나팔), 당악, 당삼채, 당모시, 당초무늬
만두: 원래 남만인(중국 남부 사람들)의 고유음식.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면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음식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음. 한국에는 조선 중기 이전에 들어온 것이 확실하며, 오랜 기간 겨울, 특히 정초에 먹는 특별음식이었음.
두부: 기록에 의하면 중국 한나라 때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혹은 그의 제자들이 발명한 것이 시초라고 함. 중국에서 유래한 음식임이 100% 확실하며, 지금도 중국사람들은 갖가지 방식으로 만든 두부를 한국인보다도 자주, 많이 먹고 있음. 한국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함.
- 초당두부 :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개발해 후에 강릉특산물이 됨. '초당'은 바로 허엽의 호임. 동해바닷물로 간을 함(처음부터 바닷물로 만드는 것은 아니고).
담배: 남미 원산. 1600년대 초에 한국에 들어옴.(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설과 거꾸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설이 대립.)
-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예의다'는 풍습은 처음에는 전혀 없었다. 담배연기를 무척 싫어한 한 왕이 금지시켜버리자 이후 풍습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 '여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 한다'는 풍습은 더욱 근거가 없다. 위와 같은 사정에 의해 새로운 풍습이 생기자 괜히 따라하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여성은 낮은 남성 앞에서, 나이가 많은 여성은 적은 남성 앞에서 당연히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담배 피우는 할머니들, 옛그림들 속의 담배 피우는 마님에은 이러한 배경이 있다. 여성은 무조건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기이한 풍속도의 연원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중국의 경우에도 한국보다는 덜하지만 여자가 실외에서 마구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커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원산. 한국에는 19세기 말에 들어옴. 1920년대부터 일반인에게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사탕수수: 인도 원산. 그러나 기후 문제로(쿠바 정도가 사탕수수 재배의 북방한계선) 한국에서는 재배되지 않아옴. 제품화된 설탕은 20세기 초에 한국에 들어옴.
라면: 중국의 건면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일본 고유의 개발품이라는 설이 있으나, 어쨌든 현대식 인스탄트 라면은 일본에서 1950년대에 개발한 것. 그러나 이름만큼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확실함. 지금도 중국에서 라면(라미엔)은 우육면, 딴딴면, 볶음면 등과 함께 가장 흔한 국수류로 널리 애용되고 있음. 단지 매우 형태가 달라 '맑은 육수로 만든 우동'쯤 되며, 특히 난주(동네 이름) 라면이 유명함. 우리식 컵라면과 비슷한 것을 먹으려면 라면이 아니라 '매운 우육면'을 찾아야 함. 일본식 인스턴트 라면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60년대 초에 '춘궁기 구휼'용으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임. 다만 그 이후의 개발과정에서 맛이 많이 달라져 이제는 전세계인이 일본라면, 한국라면, 중국라면(정확하게는 인스탄트 우육면)을 분간할 줄 암.
어묵(오뎅): 일본에서 1400년대경에 개발. 1700년대에 들어와 한국식으로 점차 바뀌었다가 개화기 이후 다시 일본식 어묵이 널리 보급됨.
우동: 유래는 중국. 일본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면'을 모두 우동이라고 함.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온 것인지 중국에서 바로 한국으로 들어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음.
메밀국수(소바): 일본에서 들어옴.(메밀로 만든 모든 국수가 아니라 요즘 흔히 먹는, 차가운 장국에 찍어먹는 것을 말함.) '소바'는 원래 일본어로 메밀을 뜻하나, 이제는 보통 '메밀로 만든 면'(정식명칭은 소바키리)을 가리키게 되었음.(단, 야키소바(볶음면)는 그냥 밀가루로 만듬.)
4. 생활문화/문명
B.C. 700~600경, 농경문화와 청동기문화 시작
B.C. 400~200경, 철기문화 시작
양성평등: 불교사회였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이후의 조선과는 매우 다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제사를 지낼 때도 남녀가 함께 지냈으며, 사위도 아들들만큼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재산의 상속에 있어서도 평등원칙은 마찬가지였다.
결혼풍습: 위의 사정은 물론 결혼에서도 그대로이다. 괜히 장가를 '간다'는 말이 생긴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면 우선 남편이 몇년간의 처가살이를 의무적으로 한 후에야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
주거문화: 고려사회까지는 주거문화에도 대단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당연히 오랜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좌식문화--의자가 아닌 방바닥에 앉고, 실내에서는 신발 벗고, 잠자리도 침대가 아니라 방바닥이고--는 여말선초에 생긴 것이고, 그 이전까지는 마치 중국같은 의자, 침대, 신발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건축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방바닥 전체에 온돌을 깔 만큼의 기술이 되지 못해서 '쪽구들'만 있었고 따라서 실내의 대다수 공간은 좌식생활을 하지 못할 만큼 추웠기 때문이란다.
결혼(및 섹스) 허용연령 및 혼전순결 문제: 20세기 초까지 '노총각, 노처녀'의 기준은 20세였다. 바꿔 말하면 스무살 이전에 결혼을 하고 성생활을 하며 아이도 낳아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춘향전]의 판소리 사설본들을 보면 만나고 사귀고 섹스할 당시 이몽룡과 성춘향의 나이는 16세라고 명시되어있다.) 마찬가지로 기생도 스물이 넘으면 슬슬 은퇴준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기에 신체적 성숙연령이 지금보다 2-3년 늦었을 것까지 감안하면, '혼전순결'이라는 가치가 별 대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A.D. 1364년, 목화가 원나라에서 들어옴(원산지는 인도). 물론 그 이전에는 면옷이란 것이 한국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A.D. 1446, 훈민정음 반포
A.D. 1470, 화장풍습 금지 => 당연히 불교사회였던 고려시대까지는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A.D. 1471, 6촌 이내 결혼금지 / A.D. 1669, 동성이본 결혼금지 =>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 바보.
장유유서: 사극을 잘 들여다보거나 옛날 소설을 읽어보면 장유유서가 어지간히 안 지켜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가 수염이 허연 노인에게 반말을 하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다. 아이는 양반, 노인은 몸종이다. 신분 떼고 계급 떼고, 옛날에도 같은 직종에서의 선후배 관계라는 게 엄연히 있었음을 감안하여 이것까지 떼고 나면 비로소 장유유서의 희미한 흔적을 발굴할 수 있다. "나이 내세우면 쌍놈"이라는 속담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감'이라는 호칭: 지난날 종이품과 정삼품의 관리를 부를 때 쓰던 존칭. 나이많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이 용법이 남아있는 유일한 경우는 검사를 지칭할 때이다.
'어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예의다': 다시 사극 어느 구석을 봐도 절할 때, 죄인이 끌려왔을 때, 혹은 왕 앞에서의 백성 말고는 그런 경우가 없다. 평상시에 어른 앞에서 아랫사람이 무릎을 늘 꿇는 풍습은 대신 일본의 영화, 만화에서 차고 넘치게 볼 수 있다. 언제 한국에 들어와서 전통의 자리를 꿰어찼을까?
A.D. 1883, 태극기를 국기로 정함
가장, 호주의 권위: 가장의 권위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만큼 폭군이어서가 아니라 아주 단순한 사실, 즉 식구 수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대가족이 해체된 것이 불과 몇십년 전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두세 명 중에서 대장? 더 이상 예전처럼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A.D. 1896, 양력 사용 시작
승복에 대해: 승려들이 입는 회색의 승복을 먼 옛날부터 입어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래 승복의 의미가 넝마를 주워입는 것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 형태는 매우 오래 되었다고 하지만, 색깔이 지금과 같은 회색이 된 것은 20세기 중반에나 들어와서의 일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시대변화나 승려의 지위에 따라 홍색, 황금색, 검정색, 흰색 등 다양한 색깔이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의 대가사도 홍색이었다. 현재의 회색 승복은 그중 검정색 옷을 오래 입다보니 자연스럽게 색깔이 빠져 회색이 된 것에서 연유한다고 하는데, 50~60년대 비구-대처 분쟁을 거친 조계종이 무소유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이 통일시킨 색상이다. 현재도 회색 이외의 색깔을 채택하는 종단이 있다.(그러니 TV 사극에서 어느 시대든지 승려들이 지금과 똑같은 승복을 입고 나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5. 사상/종교
A.D. 200~300년대, 이즈음 혹은 그 이전에 삼국에 유학 전래 => 당연히 이때의 유학은 성리학이 아닌 한대까지의 고대 유학임
A.D. 372, 고구려에 불교 전래 / A.D. 384, 백제에 불교 전래
A.D. 400~1300년대,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는 불교 시대 =>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는 교종, 고려는 선종 중심
A.D. 527, 이차돈 순교와 함께 신라가 불교를 공인
A.D. 613~686, 원효 / A.D. 625~702, 의상 [한국불교의 사상적 확립]
A.D. 600년대, 삼국에 도교 전래, 이후 특히 고구려와 고려에서 번성함
A.D. 1055~1101, 의천(천태총)
A.D. 1105~1130, 예종 즉위 당시, 도교의 최번성기
A.D. 1158~1210, 지눌(조계종, 교선일체)
A.D. 1300년대, 주자학(=성리학)의 전래 및 유교의 세력화 (안향, 이제현, 이색, 정몽주 등)
A.D. 1400~1800년대, 조선의 성리학 시대 => 정도전, 조광조, 서경덕, 이황, 이이, 정약용 등 / 불교 및 도교 탄압, 도교의 경우 1600년대부터 종교의식 소멸
A.D. 1501~1570, 이황(이기이원론) / A.D. 1536~1584, 이이(주기론)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
A.D. 1600년대초, 이수광이 최초로 천주교 사상을 들여옴 => 이후 200여년간 종교가 아닌 학문('서학')으로 연구되어짐
A.D. 1700년대, 실학파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 A.D. 1762~1836, 정약용
A.D. 1784년, 한국 천주교의 본격적인 시작(최초의 천주교 신자 이승훈), 더불어 박해도 시작 => 단테와 그 후예들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의 95%는 틀림없이 지옥 아니면 연옥에 떨어졌음
A.D. 1885년, 미국(언더우드, 아펜젤러)으로부터 개신교 전래 / A.D. 1886년, 천주교 박해 중단
6. 예술
[음악]
- 판소리: 역사 약 300년
- 산조: 역사 약 100~120년
- 사물놀이: 역사 약 30년
- 양악 도입의 역사는 물론 구한말 이래 외세 침입의 역사와 일치
- 음반 도입의 역사는 일제 탓에 세계적 기준으로 봐도 매우 빨라, 1910년대에 이미 SP 음반들이 판매되기 시작
- 아악: 원래 고대중국의 궁중음악을 일컫는 말 -> 국악에서 남아있는 것은 <문묘제례악>뿐
- 당악: 당, 송 시절 서역음악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중국의 민속음악을 일컫는 말 -> 국악에서 남아있는 것은 <보허자>와 <낙양춘>뿐이며, 이나마도 향악으로 거의 변했음
- 향악: 위 둘을 뺀 나머지 정악. <수제천(=정읍)>, <영산회상>, <동동> 등. -> 말의 원래 뜻대로 보자면 현재의 정악은 거의 모두 향악임
- 거문고: 고구려
- 가야금: 가야
- 대금: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파
- 피리, 비파: 서역지방의 악기가 고구려때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
- 장고: 삼국시대
- 생황: 중국 묘족의 악기가 삼국시대에 들어온 것 (그런데 [열국지]에도 생황 얘기가 나옴)
- 아쟁: 고려
- 해금: 몽골지방의 악기가 고려때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 얼후와 매우 비슷한 점을 고려할 것.
- 태평소(=호적=새납), 퉁소: 고려때 들어온 중국 악기
- 양금: 아랍지방의 '덜시머'가 1700년대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
- 단소: 1700년대에 등장, 양금과 함께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설과 퉁소를 개량한 것이라는 설이 있음
[*국악기중 주변지역과 관계없이 순전히 한국에서만 만들어진 것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며, 반대로 한국에 들어온지 오래됐는데 개량이 되지 않은 것도 없다고 봐야 할 것]
- 5성(궁상각치우): 중국 주나라때 관중이 3분손익법에 의해 만들었다는 5음계. 여기에 변궁, 변치를 추가한 7성도 있으나, 특히 중세 이후에는 5음계를 주로 씀. 서양음계로는 도레미솔라에 해당. 국악의 대다수도 이 5음계를 사용.
- 12율: 중국 주나라때 역시 3분손익법에 의해 만들어진, 서양의 12음계와 거의 비슷한 음계. 정악에서는 5성이 아니라 12율에 의거해 표기함. 즉, 정악 악보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궁상각치우라고는 쓰여있지 않고, 대신 황종 태주 고선 임종 남려 등으로 쓰여있음.
-- 이것이 유럽 12음계와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은 평균율이냐 순정율이냐의 문제라는 얘기가 있음. 즉, 평균율로 바뀌기 전에 쓰였던 순정율은 12율과 훨씬 잘 맞는다는 것.
-- 5음계라고 해도 실은 이렇게 간단하지가 않음. 양악의 모드 기법처럼 다섯 루트음에 따라 다섯 음계가 있고(그중 기본적으로 '솔라도레미'면 평조, '라도레미솔'이면 계면조), 조가 다른 두 음계를 섞어 쓰는 복합계면조도 있고, 곡에 따라 6음계도 있고 등. 그나마 이것은 정악의 얘기고, 속악에서는 변화가 더 다양해짐.
- 정간보: 세종대왕이 발명한 고유의 악보표기 방식. 이전에 쓰이던 율자보, 공척보 등 중국악보의 한계를 극복한 동양최초의 유량악보(음높이뿐 아니라 음길이도 표시할 수 있는 악보).
-- 세종 이전 동양의 어떤 악보에도 음길이를 표시하는 방법이 없었다는 점은 흥미로움.
-- 참고로 서양의 오선보도 13세기 이후에나 발달된 것이라는 점. 그래서 중세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애를 많이들 먹는다고.
[문학]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 고대가요, 시가문학: 가야의 <구지가>,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 <공무도하가(=공후인)>,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한국 최초의 한시), 제목만 남아있는 고구려 가요들, <정읍사> 외의 백제 가요들,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친당문학), <서동요> 외의 초기 신라 향가들
- 향가(통일신라): 삼국시대의 <서동요> 등에서 시작, 이두와 함께 점차 발달. 월명사의 <제망매가>,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영재의 <우적가>, <처용가> 등
- 한문문학: 최치원(한국 한문문학의 시조, [계원필경]) 등
- 고대 신화, 설화, 서사문학: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이상국집] 등에 기록되어있는 수많은 신화, 설화들
{고려}
- 향가: 고려초까지 지속. 균여의 <보현십원가>(마지막 향가) 등
- 별곡: 향가에 이어 문인들이 새로이 탄생시킨 양식. 연희를 염두에 둔 분장 형식의 긴 가요. <청산별곡>, <서경별곡>, <귀호곡(가시리)>, <동동>, <쌍화점> 등
- 경기체가: =별곡체. 별곡형식의 변형. <한림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
- 시조: 고려 후기에 성리학자들이 탄생시킨 새로운 양식. 정몽주의 <단심가> 등
- 설화문학: 일연의 [삼국유사], 박인량의 [수이전] 등
- 가전체 소설: 임춘의 [국순전]과 [공방전], 이곡의 [죽부인전], 이첨의 [저생전] 등
- 서사문학: 한시 운문체 양식의 것들.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승휴의 [제왕운기]
{조선 전기}
- 한글 문헌으로 된 송축가: <용비어천가>(1445, 최초), <월인천강지곡>(두 번째)
- 번역문학: 한글창제와 더불어 정립. [두시언해](1481,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 외에 유, 불가의 경전들 다수
{조선 후기}
- 시조: 윤선도(1600년대)의 <어부사시사>, <산중신곡> 등을 정점으로. 사대부층을 넘어 평민층에까지 확산, 사설시조의 등장.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 박효관과 안민영의 [가곡원류] 등 많은 시조집 편찬
- 가사: 박인로(1500~1600년대)의 <태평사>, <선상탄>, <누항사>, <영남가> 등을 정점으로. 한동안 침체되었다가 1700년대 들어 소설의 인기와 함께 재부각. 장편가사, 내방가사의 등장
- 소설: 새로이 등장하여 조선 후기를 대표, 1700년대에 전성기. 허균(1500~1600년대)의 [홍길동전](최초의 한글소설), 김만중(1600년대)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박지원(1700년대)의 [허생전]과 [양반전] 등. 그밖에 [임진록] 등의 군담소설, [춘향전] 등의 염정소설, [장화홍련전] 등의 가정소설, [심청전] 등의 도덕소설, [옥루몽] 등의 기연소설, [흥부전] 등의 우화소설, [계축일기] 등의 궁정문학이 다양하게 만개
-> 19세기까지의 운문체 문학(고대가요, 향가, 별곡, 시조, 가사)은 어디까지나 '노래가사'이며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불리어지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조를 부르는 법은 시조창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 대략 1600년대부터 우리가 '소설'을 '읽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에도 서사문학은 많이 있었으나 운문체 문학과 달리 특정작가를 내세운 '창작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특징적임. 둘을 이렇게 차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참고로 중국의 이른바 '4대기서'라는 것도 모두 명대에나 들어와서 쓰여진 것이며, 4대기서 외의 것들은 오히려 더 이후임.
-> 설화/소설/구전문학과 따로이 존재하는 희곡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의 이야기가 들려지기도 하고 연행되기도 하고 읽혀지기도 했다. 따라서 치밀하고 정제된 연출과 대사 등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즉흥적인 것이었겠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연극항목을 참고]
[미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 본격적인 미술활동은 불교가 전래된 후 불교미술로부터 시작, 이후 오랫동안 한국미술의 중심에 위치: 불탑, 불상, 사원 등
- 금속공예도 발전, 특히 신라 범종
- 회화: 몇몇 고분벽화가 전부
- 서예: 이후의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구양순체(해서)와 왕희지체(행서)의 절대적 영향 하에 놓임
{고려}
- 계속 불교미술이 중심
- 도예: 고려 청자. 1000~1200년대가 전성기
- 회화: 불교미술 중심으로 200여점이 남아있으나 대부분 일본 등으로 유출되고 한국에는 불과 몇점만이 남아있을 뿐.
- 서예: 후기 들어 조맹부체(송설체)가 크게 유행하여 조선 전기에까지 이어짐. 부분적으로 안진경체의 영향도 받음
{조선}
- 불교미술의 소멸, 유교와 중국적 미감이 지배, 백자와 회화가 대표적
- 회화: 1600년대까지 철저히 중국화의 영향 아래에 있다가 1700년대 들어서야 조선화 정립 (정선 1676~1759, 강세황 1712~1791, 김홍도 1745~?, 신윤복 1758~?, 장승업 1843~1897 등)
-- 진경산수 = 실경산수(고려~조선 초중기; 실용적 목적으로 그린 풍경화, 풍류화) + 남종화법(명나라 문인화가들 특유의 산수화). 실경산수와 달리 하나의 시대적 조류로 전개되었으며, 조선 특유의 독창성이 강하고, 실용적 목적이 아닌 예술적-수양적 목적을 가짐
- 도예: 전기 - 분청청자, 백자 / 후기 - 청화백자
- 서예: 계속 중국서체만 모방하다가 1800년대의 김정희에 이르러 추사체 등장. 한글서예의 경우 궁중 여인들에 의한 궁체를 중심으로 발전
{현대}
- 서양미술은 20세기 초까지 별 반응이 없다가 일제시대부터 서서히 확산. 당시에는 일본식 서양화의 영향 하에 있다가 해방 이후 급속히 발전.
-> 한국에는 회화의 전통이 대단히 약하며, 있더라도 중국회화의 철저한 영향 하에 있다는 얘기.
-> 한국 고유의 서예 전통이랄 것은 19세기의 김정희를 제외하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
-> 주되게는 조각, 공예, 도예에서 한국적인 독창성과 높은 성취를 이룬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는 얘기 -> 추상성보다는 구상성? 눈-시각보다는 손-촉각? 평면보다는 입체?
[연극]
- 전통극에는 가면극(탈춤), 인형극(꼭두각시놀음), 그림자극, 판소리의 4가지가 있음
- 가면극: 삼국시대에 형성. 원시제의에 기초하고 서역의 가면희의 영향을 받아 정립. 조선 중기까지는 관청의 후원을 받다가 후기부터 그러지 못하면서 각지역의 민속예능으로 정착, 갈수록 지역적, 민중적 특색이 강해짐
- 인형극: 고대 인도에서 시작. 삼국시대에 전래. 유랑예인집단들에 의해 행해짐.
- 그림자극: 인형극과 같은 맥락. 1920년대까지 사찰을 중심으로 연행되다가 현재는 사라짐. 불교적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음.
- 판소리: (너무 유명하니 생략)
7. 레저/스포츠/무예
(상대적으로 생소한 분야이므로 인터넷 백과사전에서의 발췌 위주로. 따로 표시가 없는 것은 모두 여기에 해당함. 단, *표로 설명한 보충항목들은 다른 곳에서 얻은 정보임.)
바둑: 바둑의 기원은 누구에 의해서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게 전해지는 문헌이 없어 알길이 없다.(...) 중국 상고 때부터 바둑이 존재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에 바둑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보인다.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에 '호위기 투호지희(好圍棋投壺之戱)'라고 하였고, 《후주서(後周書)》 '백제전'에 '잡희연 대상혁기(雜戱然大尙奕)'라 하여 모두 바둑을 좋아하고 잘 두었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기(百濟紀)>에 의하면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 때 고구려의 간첩승(間諜僧) 도림(道琳)이 개로왕과 바둑을 두며, 국사를 돌보지 않게 하여 백제를 망쳤다고 한다. 신라는 738년(효성왕 2)에 형도(刑璹)가 당(唐)에서 바둑을 들여왔다고 한다.
순장바둑: 1940년대까지 많이 둔 한국 고유의 바둑. 현행 바둑은 일본식 바둑이다. 순장바둑은 흑돌과 백돌을 대칭적으로 각기 8개씩 도합 16개의 돌을 놓고 두기 시작한다. 그 다음부터 두는 방법이나 사활은 현행 바둑과 같으나, 끝내기에서 남아 있는 공배가 집이 될 수가 있어서 끝까지 한 점씩 놓아야 한다. 또 바둑이 끝나서 집을 지을 때도 서로 접촉하는 경계선상의 돌 이외는 전부 집어내 버리고 남은 공간을 자기집으로 간주한다. 즉, 잡은 상대방 돌도 상대방 집을 메우는 것이 아니고 바둑판 밖으로 집어내 버리는 것이다. [편주: 게임 룰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지 바둑판 자체가 다르게 생기거나 한 것은 아님.]
장기: 장기는 약 4000여 년 전에 인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 미얀마 사람들은 자기네의 고대국 타이링의 왕비가 발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장기의 발상지는 역시 중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장기짝(말) 자체가 초(楚) ·한(漢)으로 되었고, 초패왕 항우(項羽)와 한왕 유방(劉邦)의 각축전을 모방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약 2,000년 전 삼국시대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19년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崔南善)의 저서 《백과사전(百科事典)》 <유희편(遊戱篇)>을 보면 현행 장기는 중국 송나라 때 고려로 전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추측하건대, 장기가 전래된 후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양반계급이나 고관들만이 즐기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다른 기록에 의하면 장기의 명칭이 개정되기 전에는 혁기(奕棋) ·상기(象棋) ·상희(象戱) 등으로 명칭도 다양했던 모양이다.
오목: 중국에는 예로부터 있었던 것으로, 황허강[黃河] 유역에서 발생하였다는 말도 전해내려 오는데 한대(漢代)의 책에는 오목두기를 ‘격오(格五)’라고 쓰여진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문화, 예를 들면 한문 ·불교 ·미술 등이 모두 대륙에서 발생하여 한국으로 전해졌고, 다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 많은데 바둑이나 오목도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 나중에 받아들인 일본에서 오히려 대성하여 세계적으로 수준급이다.
가위바위보: 본디 중국에서 전해진 손의 싸움으로, 처음에는 술자리 놀이였으나 후에 어린이 놀이가 되었다.(...) 이탈리아에도 '모라'라는 비슷한 놀이가 있는데 이것도 중국에서 페르시아제국을 통해 이탈리아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윷놀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오는 한국 고유의 민속놀이로 대개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즐긴다. 부여족(夫餘族) 시대에 5가지 가축을 5부락에 나누어주어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비롯된 놀이라고 하며, 그에 연유하여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에 비유한다.
제기차기: 제기차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대 중국에서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고안된 축국(蹴鞠) 놀이에서 연유한다고 하며, 그 시기를 중국의 전설적인 왕 황제(黃帝) 때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세계 각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특히 동양 3국에서 성행하고 있어 나라마다 명칭도 다양하다. 연은 BC 400년대에 그리스의 알투스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 송나라 때 고승(高丞)이 찬한 《사물기원(事物記原)》에 보면 BC 200년경 한신(韓信)이 군사적인 목적에서 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기록은 중국보다 약 800년이 뒤진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보면 신라 선덕여왕 말년에 김유신이 밤에 풍연에 불을 달아 하늘로 올려 민심을 수습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팽이치기: 중국에서는 당(唐)나라 때 성행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것이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에서는 팽이를 고마[高麗]라고 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으며, 종류도 나무 ·대나무 ·금속 ·유리 등이 있고 모양도 다양하다.
공기놀이: 세계 각지에서 옛날부터 보급되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시대에도 있었으며, 그리스의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여자에게 가장 알맞은 놀이라고 하였다.
구슬치기: 구슬은 일제강점기부터 놀이의 도구였으며 투명한 것, 속에 무늬를 넣은 것, 채색한 것 등이 있다.
그네뛰기: 그네뛰기 풍습은 고대 그리스 등에도 있었는데, 여자들은 봄이 되면 성적인 생산의 의미나 풍작의 주술로 그네를 탔다.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의 놀이가 춘추전국시대에 제(齊)나라에 들어왔으며, 한(漢)나라 때에는 궁중 후정에서 즐겼고, 당(唐)나라에서도 한식(寒食)의 절속(節俗)과 더불어 민간에서 여자의 놀이로 발전하여 반선희(半仙戱)라 하였다. 한국에서는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궁중이나 상류사회에서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널뛰기: 널뛰기의 유래에 대하여는 고찰할 자료가 없고, 다만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말타기 ·격구(擊毬) 같은 활달한 운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널뛰기 역시 놀이의 성격으로 보아 당시의 여성들이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화투: 한국 고유의 오락이 아니라 19세기경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처음 누가 전파시켰는지 알 수 없으나, 쓰시마섬[對馬島]의 상인들이 장사차 한국에 왕래하면서 퍼뜨린 것으로 여겨진다.
투전(鬪錢): 청나라 때 들어왔다고 전한다. / 두꺼운 종이로 나비는 손가락만하고, 길이는 15cm쯤 되게 만들어 그 위에 인물·새·짐승·곤충·물고기 등의 그림 또는 시구(詩句)나 문자를 그려 끗수를 나타낸다. 원래 중국에 있던 것이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군사를 통해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숙종 때 장현(張炫)이 당상통역관(堂上通譯官)으로 중국에 드나들면서 가져왔다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화투가 등장하면서 투전은 점차 자취를 감추어 오늘날은 보기 힘들다.
주사위: 주사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이집트에는 이미 왕조시대(BC 3400∼BC 1150)에 현재의 것과 똑같은 것(상아 ·골제)이 있었고 이것이 그리스, 로마, 지중해 연안지방으로 전래되었다.(...) 인도에서도 인더스 문명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사위가 발견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일찍이 육각기둥 모양의 나무조각의 각면에 문자를 새겨 이것을 굴려 신의(神意)를 점쳤다. 수(隋) ·당(唐) 나라 때에는 현재의 것과 같은 주사위를 사용한 ‘쌍륙(雙六)’이라는 놀이가 있었고, 현종이 양귀비와 둘이서 주사위를 써서 쌍륙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격구: 원래 페르시아에서 비롯된 폴로 경기가 당(唐)나라에 전래되어 격구로 불리면서 고구려 ·신라에 전해졌으며,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다.
24반 무예: 한국의 무술을 갑오개혁 이전에는 무예(武藝)라고 하였는데, 그 무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책이 바로 조선 정조(正祖)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다. 이 책에는 무술이십사반(武術二十四般)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 본래의 무예인 무예 6기(技), 다시 이것을 발전시킨 무예 18기에다가 한국 고유의 무예 6기를 첨가한 것이다.(...) 한국 고유의 6기는 엄격하게 말하면 고유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무술인데, 고유 6기의 무술도 그 기본은 중국의 무술이며, 이것을 한국에서 취사선택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술은 어느 것이나 우리 고유의 국술이라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삼한(三韓)·삼국시대 이래 한국의 무술은 심산유곡이나 한적한 산사(山寺) 같은 곳에 숨어 살던 무술가들에 의해 독창적인 것이 개발되었고, 그것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문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씨름: 한국의 씨름은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태조 주몽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계루부(桂婁部) 족장 때 5부족장(五部族長)의 고추가(부족장의 존칭)시합이 있었는데, 이 시합종목이 각저 ·궁사(弓射) ·승마 ·수박(手搏)이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의 문헌에는 우리의 씨름은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라고 했을 정도로 중국의 각저희(角溟戱)나 일본의 스모[相撲]와는 그 방식이 다르고 독특하였다.
택견: 이런 기예는 북방민족에 널리 퍼져 있던 것으로, 고구려의 무용총(舞踊塚)과 삼실총(三室塚) 벽화에 두 사람이 서서 서로 손을 내밀고 싸우는 자세가 그려져 있는데, 바로 이 기술이 택견으로 보인다.(...) 수박(手拍)·수박(手博)·수벽타(手癖打) 등의 문헌 기록도 보이나 오늘의 택견과는 다르다. 주먹을 쥐지 않고 손을 편 채로 춤에 가까운 동작으로 하는 것으로 미루어 문헌에 보이는 탁견(托肩)·각희(脚戱)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편주: 여러 기록으로 보아 택견만큼은 고유의 무예가 거의 그대로 전승되어온 것이 확실해보인다. 다만 현재는 택견에도 여러 유파가 있어서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느니만큼 이에 대해서는 더 고려가 필요하다. 유파 중에는 "개량시킨 것 맞다, 그게 뭐 나쁘냐"고 당당히 주장하는 쪽도 있다. 한편 합기도에 비해 택견은 발기술을 중심으로 하며, 이런 발 중심의 특징은 태권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선족 학자 김문학은 "중국무술은 손 중심, 한국무술은 발 중심, 중국은 모든 문화가 손 중심이라 만드는 것을 잘하며, 한국은 모든 문화가 발 중심이라 축구를 잘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 택견의 유파 - 어디나 뿌리는 송덕기
(1) 한국전통택견회(KTA) : 송덕기 - 신한승(前 레슬링선수, 충주) - 정경화(회 창립). 넘기기 위주, 부드러운 동작. 원래 없던 홀새김(수련체계, 품새)을 만들어냈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 유파임. '협회'와 정통경쟁을 벌이며 사이가 안좋음.
(2) 대한택견협회 : 송덕기 - 이용복 (前 태권도, 부산). 발차기와 걸이기술, 힘이 들어감. 역시 원래 없던 홀새김(수련체계, 품새)을 따로 만들어냈음. 전수관 숫자가 제일 많음. 'KTA'와 정통경쟁을 벌이며 사이가 안좋음.
(3) 결련택견계승회 : 송덕기 - 도기현 外 서울의 대학생들. 실전기술, 팔꿈치와 손도 사용, 원래대로 홀새김이 없음. 'KTA'와 '협회' 모두 이곳 '계승회'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듯.
((4) 동이택견 : 송덕기 - 박성호. 정통으로 안 쳐주는 경우가 많음.)
검도(현재의 검도): 현재의 검도는 한국에서 전수한 검술이 일본 내의 전란 과정 속에서 발전되었고, 나중에는 스포츠로 체계화된 일본의 검도가 역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강제 수용된 검도는 8 ·15광복 후 상당 기간 동안 침체된 상태였으나, 점차 검도 자체가 가지는 운동의 진가를 인식하는 층과 국제화되고 스포츠화한 운동으로서 8 ·15 광복 후 새로운 세대의 호응을 받아 스포츠로서 정착되었다.
합기도: 기록에 의하면 약 3,000년 전 고대 인도에서 시작된 체술(體術)로 동양의학에서 다루는 신체의 경락(經絡)까지도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매우 짜임새 있는 무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일에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수도승들의 호신술로 비전되어 오다가 중국의 소림사(少林寺) 권법이 달마(達磨)에 의해 진흥되었던 당시에 이르러 같은 유권술(柔拳術)로 크게 융성하였다고 한다. 한국에 합기도가 정리된 모습으로 재등장하기는 8 ·15광복 후 최용술(崔龍述)이 귀국한 다음부터이다.
[편주 1: 중국의 소림권도 인도의 고대무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정설임. 소림사와 소림권(과 선종)을 창시한 달마가 인도인이라는 점.]
[편주 2: 아무래도 합기도는 택견처럼 한국 내에서 고래로 전승된 것이라고는 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최소한 한국에서 전래되던 것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가 (위에 나온) 최용술에 의해 역수입되었다고는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혹은 태권도와 마찬가지로 아예 20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경우 가라데와 유도를 중심으로 해서 혼합한 신종무예라고들 주로 말하는 것 같다. 택견이 발기술을 중심으로 하는데 비해 합기도는 상대적으로 손기술을 더 많이 쓴다.]
유도: 기원국-일본, 한국도입시기-1934년. 한국 유도의 역사는 기록상 고구려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 한편 한국의 수박·권법을 전해받은 일본은 16세기경 '유술(柔術)'이라는 특유의 무예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오늘날의 유도로 정착시켰다.
가라데: [편자: 원래 이름은 당수. 이것이 공수 혹은 공수도로 바뀌었고, 그것을 일본식으로 읽은 이름이 가라데다. 원래는 중국에서 일본 오키나와 지방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그래서 '당수(唐手)'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다만 오키나와는 19세기까지 일본의 일부가 아닌 독립지역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20세기에 일본에 편입되면서 이 지역 전통무술인 당수가 본토 전역에 알려졌고, 국기로 육성하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것임을 드러내는 당수라는 이름을 공수도로 바꾼 것이다. 합기도가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데 비해 힘을 중심으로 한다. 한편 최영의(최배달)가 창시한 '극진 가라데'는 기존의 가라데를 최영의 혼자서 혁신시켜놓은 실전중심의 무술이다.]
* 일본의 무술들: 19세기까지의 모든 무술들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카노 지고로의 주도에 의해 스포츠화(=시합화, 대중화, 비실전화, 비위험화)되었고, 묘하게도 이러면서 '술 術'을 '도 道'로 바꿨다.
- 유술(쥬지쯔) - 지역마다 다양한 유파들이 있었던 사무라이들 중심의 실전무술 -> 유도(쥬도) - 근대화시키며 한 종류로 통합되고 스포츠화된 대중 스포츠
- 대동류 합기유술(아이키 쥬지쯔) - 옛 유술 유파 중 현대유도로의 통합에 참여하지 않은 한 유파 -> 아이키도(합기도) - 대동류 합기유술을 현대화한 것. 한국 합기도와는 좀 달라서 이것은 유술기 중심, 한국 합기도는 타격기 중심임
- 그레이시 유술(브라질 유술) - 카노 지고로의 유술 스포츠화에 반대하다 파문된 그 제자 마에다 미쯔요(콘데 코마)가 브라질로 건너가 그레이시 가문에게 전통 유술을 가르친 것에서 출발
- 겐쥬쯔(검술) - 철저한 사무라이들의 전투/살인중심 검술 -> 겐도(검도) - 역시 현대화-스포츠화된 것
- 가라데(당수) -> 가라데도(공수도) - 위의 '가라데' 항목 참고
용무도(龍武道; 이건 새로 나온 거지만 재미있어서 첨가):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를 중심으로 무도대학 내 5개 학과 교수들이 4년 동안 전공 분야 기술을 접목해 만든 종합무술이다. 삼국시대의 화랑도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으며, 태권도·합기도·씨름·검도·유도 등 기존 무술 및 호신술의 장점만 취해 2001년 탄생하였고, 실전무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호신술에 적합한 실전무술을 지향하기 때문에 스포츠로 자리잡은 태권도·유도 등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급소치기·십자목비틀기 등 실전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