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國古代史가 해방 후 美.日.中.蘇 4强의 한반도 정책에 미친 영향
1. 1945. 8. 15 이전 미국과 일본의 정책
대한제국 말엽 일본과 미국은 카쓰라.타프타라는 비밀약정을 맺은 적이 있다. 그 약정의 내용은 미국은 일본이 한반도로 진출하는 것을 묵인하는 대신에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으로 진출하는 것을 묵인하는 것이다.
이 약정은 언뜻 보아서는 아주 공평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어다 보면, 당시 한반도는 유럽의 열강과 청국, 러시아 등이 진출하여 각종 이권을 차지한 뒤이므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열강과 청국,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어야 했던 반면에, 필리핀은 한반도처럼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강대국이 없었고, 또 고무와 주석 등 각종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 약정은 일본이 매우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뒤에 이 약정을 맺은 것을 대단히 후회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한국으로의 진출을 희망하였고, 미국은 일본과 이 약정을 맺은 것을 후회하였을까?
당시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를 이해하지 못하여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미국은 일본이 한반도로 진출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고, 이것이 뒤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 약정을 맺은 후 미국은 필리핀으로 진출하여 비행장, 항만 등 군사기지와 도로를 차지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데 실패하였고, "양키 고 홈"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반면에 일본은 한반도로 진출하여 대한제국의 부패한 고위관료들을 매수하여 대한제국의 조정을 장악한 후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하였고, 영.일 동맹을 빙자하여 중국동해안으로 진출하였으며, 청나라가 멸망하고 공화정이 세워졌을 때 북경 동쪽 발해연안으로 진출하였고, 후에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의 동북 3성을 장악하였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유럽의 열강과 연합하여 일본을 외교적, 경제적으로 고립시켰으나,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의 물자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비축한 후,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의 해군을 일시 마비시키고 각종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로 진출하였다.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은 미국이 필리핀으로 진출하여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반면에 일본은 한반도를 합병하고 만주와 중국동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요인과 일부 한국인들이 한국을 침략한 일본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이유를 분석하였다.
당시 이 분석을 맡은 군사전략가들은 일본이 필리핀보다 한반도 진출을 희망한 이유, 일본이 한반도 병합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일본이 중국동해안과 북경 동쪽 지역에 진출할 수 있었던 요인,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고 만주국의 수도를 봉천(현재 심양)에 둔 이유에 대한 해답을 동북아시아의 고대사에서 찾아내었다.
위 분석 팀은 고대에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가 왕검조선이라는 동일세력권에 속해 있었고, 그 뒤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 백제와 일본열도가 동일세력권에 속하였으며,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까지 고구려와 만주가 동일세력권에 속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된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은 일본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는 만주, 한반도, 일본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 만주,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중간에 있는 한반도를 일본의 세력권에서 이탈시키려고 태평양전쟁에서 잡은 한국인 포로들을 심리.첩보전 요원(속칭 OSS요원)으로 교육시킨 후 한반도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등지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이 성공한 것과는 달리 한국으로 투입된 심리전 요원들은 일본에 부역하는 한국의 면서기, 이장, 반장들의 신고로 투입되는 즉시 처형됨으로서 미국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후 2차 대전이 종결될 무렵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은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2가지 전략을 세웠다. 그 하나는 종전 후 일본이 다시 강국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한.일 합방조약을 무효화시키고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가 한반도나 일본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만주가 한반도 세력권으로 들어갈 경우, 한반도와 만주가 결합된 강국이 생겨 일본을 자극함으로서 일본의 재무장을 촉발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과 또 만주를 독립세력으로 두었을 경우 만약 만주가 다시 일본의 세력권으로 들어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만주국은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와 전혀 관계가 없는 중화족의 나라 중국에 병합되었다.
종전협상 때 미국은 만주가 중국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이 만주족을 중화족에 동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만주정책은 단기적으로는 타당하였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국가이익에 전혀 부합되지 않았다.
만약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이 중국의 이민족 정책에 대하여 조금만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여우를 피하기 위하여 호랑이를 키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이민족 정책은 漢나라 이래로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역사, 국방, 외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에 대하여 자치를 허용해 주면서 천천히 이민족을 중화족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였는데, 2차대전 후에도 중국은 이러한 정책을 사용하여 만주의 소수민족들을 중화족에 동화시키고 강국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2. 해방 후 4강의 한반도 정책
1). 미국
해방 후 4강의 한반도 정책을 살펴본다.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은 종전 후에 대비하여 한반도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소련과 미국의 완충지대로 만들고, 미국 군대는 일본에 주둔하여 일본의 재무장을 막고 대한해협과 일본열도를 방위함으로써 소련의 남진을 막으려 하였다.
그후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은 한반도 역사를 더 분석한 결과 백제 멸망 후부터 한반도 세력과 일본이 대부분 비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태평양전쟁으로 전투 경험이 많은 유능한 군인들과 애국심이 강한 많은 지식층을 보유한 한국이 이 같은 인적자원을 토대로 하여 강국으로 변한다면, 한국과 비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일본의 재무장을 촉발시킬 우려가 있었다. 이를 염려한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은 종전 후 일본의 재무장을 촉발시키지 않기 위하여 미국 군대가 일정기간 동안 한국에 주둔하여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해방 후 남한에 세워진 친미적인 이승만 정부는 반공.반일 정책을 시행하여 반공정책으로 북한과 대치하고, 반일 정책으로 일본과 대치하였다. 그후 소련이 북한을 사주하여 한국을 침략하였을 때, 미국은 대한해협까지만 방어하겠다던 미국 국무장관의 말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이는 소련의 남진을 막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그 보다는 한반도가 통일되어 강국으로 변하면, 전통적으로 한국과 비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일본의 재무장을 촉발시키게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연합군이 38선 이남 지역을 수복하였을 때, 미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지 않고 38선에서 정지하였다. 이것 역시 한반도가 통일되어 강국으로 변하면, 전통적으로 한국과 적대관계에 있던 일본의 재무장을 촉발시키게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꿰뚫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으로 38선 이북으로 진출하였고, 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출하자 미국의 맥아더 원수는 미국의 정책당국자의 의도와는 달리 미군을 38선 이북으로 진출시켰다.
국군과 미군의 반격으로 한반도가 거의 통일되려 하였을 때, 북한의 남침에 동조하지 않던 중공이 의외로 대규모의 병력을 한국전쟁에 투입하였다. 이는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강국으로 변한 한국이 만주의 조선족들을 부추겨 만주의 분리.독립 운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한반도에 투입되자 미국의 맥아더 원수는 미국정부에 소형 원폭을 만주에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는 중국이 아직 원자폭탄을 보유하기 전이고, 중국의 중앙정부가 만주의 소수민족들을 아직 중화족에 동화시키지 못한 시기였다. 따라서 중공군의 진군로나 병참기지에 소형 원폭을 사용할 경우, 주로 보병으로 구성된 중공군은 병참선의 차단과 심리적 공포감으로 인하여 전투능력을 상실할 것이 거의 명백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의 이 건의는 미국의 정책당국자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맥아더 원수는 해임되었다. 이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이 뿌리째 흔들릴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중국이 만주의 소수민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군사적, 경제적으로 급속히 힘을 강화하자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종전까지 일본의 재무장 억제 정책에서 일본의 재무장 제한적 허용 정책으로 바뀌었다.
2). 일본
일본열도는 왕검조선 때 대동강 가에 위치한 마한(말 임금)의 다스림을 받았고, 왕검조선이 멸망한 후는 지금의 경상도로 이주한 진한, 변한 무리들이 이주하여 소국을 세우고 지냈다. 그후 A.D 97-103년경에 구주의 가야계가 중심이 되어 야마대연맹이 세워졌고, 이 야마대연맹은 A.D 205년경부터 백제에 복속하다가 A.D 400년부터 479년까지 일시 광개토왕이 세운 대마도 임나연정에 복속하다가 다시 백제에 복속하였다.
그후 A.D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고 A.D 662년에 백제복국군이 패배하자 백제지배층은 가족들을 일본으로 이동시키고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바꾸었다. 해방 후 일본의 역사학자인 에가미 교수는 기마민족설을 주장하였다. 이 학설의 요지는 일본국을 세운 민족은 만주에 살던 기마족이 만주에 왕검조선을 세웠다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이 학설의 핵심은 왕검조선의 주체세력은 일본인이고, 만주나 한반도에 남은 무리들은 왕검조선의 가지(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뒤에 미국이 중국을 의식하여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을 허용하였을 때 일본의 국수주의와 결합되었다.
미국은 중국이 강대국으로 변하자 중국을 견제할 의도로 종전까지 일본의 무력강화 견제 정책에서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 허용 정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라는 몸서리치는 경험을 겪은 일본의 양심세력들은 일본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았다. 이때 속된 말로 총대를 메고 나온 것이 일본의 역사학자들과 공영 방송인 NHK였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가지마 교수는 우리의 환단고기를 번역.배포하여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설을 뒷받침하였고, NHK는 많은 돈을 들여 기마민족이 거주한 실크로드를 직접 탐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고대에 만주에서 이집트까지 태양을 숭배한 태양의 제국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심어 주려 하였다. 위 2가지는 일본인들을 우익화시키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후 NHK는 일본인들을 우익화시키는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하여 NHK는 일본인들을 우익화시키는 방법으로 일본의 전국시대 때 장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일대기를 그린 프로그램을 만들어 약 2년 동안 방영하였고, 그 유적지를 살펴보는데 또 몇 년을 방영하였다.
위 드라마의 줄거리는, 전국시대 때 오와리 지방의 소규모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노부나가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영주인 다께다 신겐을 덴까꾸 계곡에서 기습공격으로 죽이고, 천황이 거주한 수도 주변 지역을 평정한 후 천황을 받들었다는 내용으로, 이 드라마는 일본국민들을 우익화, 보수화 시키는데 이용되었다. 이 드라마 방영의 영향으로 일본열도는 급격히 우익화, 보수화 분위기로 변하였고, 일본정부는 국민들의 저항을 별로 받지 않고 자위대를 강화할 수 있었고, 차츰 자위대의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현재 일본열도에는 민주화라는 표면 아래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익화, 보수화라는 강력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가끔 일본의 중견 정치인이 신사를 참배한다던지 한반도에 대한 망언을 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의식이 전반적으로 우익화, 보수화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일본의 한반도 기본정책은 남북한의 공존과 남북한의 통일로 인한 한국의 강대국화를 막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만약 북한이 경제적으로 위험에 처하여 붕괴 위험이 있을 경우 미국, 중국처럼 일본도 북한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최소한의 지원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만약 한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하게 되면 한국에 대한 병참 물자 지원과 자국민 보호를 위한 해상 및 육상 자위대의 한국 파병을 희망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에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은 후 영국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중국동해안에 주둔한 독일군을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중국동해안으로 출병하여 중국동해안을 점령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은 유사시 일본자위대가 자국민 보호를 위한 한국 파병을 희망해 오더라도 단호히 이를 거절해야 한다.
3). 중국
중국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만주라는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이때 중국은 만주에 거주한 소수민족들을 중국에 동화시키기 위하여 역사, 외교, 국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하여 자치를 허용해 주어 소수민족의 반발을 무마하고 소수민족을 천천히 중국화 하였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첫번째는 한반도에서 강대국이 탄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만주에 거주한 소수민족들에게 한반도와 만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었다.
첫번째 과제는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어서 중국은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북한이 1950. 6. 25에 한국을 남침하려 하였을 때 중국은 북한을 돕지 않다가, 한국이 반격을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하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한국의 통일을 방해하였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이 중국의 만주 장악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두번째 과제를 실천하는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이를 위해서 중국정부는 만주의 조선족들에게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국이지 한민족이 세운 국가가 아니므로 신라, 고려, 이씨조선, 대한민국 등 한반도 세력과 고구려의 옛 영토인 만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반복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정책도 성공을 거두어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조국이 중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두번째 과제가 성공을 거두자 중국은 종전까지 한반도와 만주가 전혀 관계가 없다던 학설을 변경하여 만주뿐만 아니라 한반도도 고대에 중국의 복속국이라는 식으로 학설을 변경하였다. 이는 먼 훗날 한반도를 중국의 세력권에 넣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다. 앞으로 중국은 남북한의 분단 유지를 위하여 남북한에 대하여 등거리 정책을 계속할 것이다.
4). 소련
소련은 청나라와 아이훈조약, 네르친스크조약을 맺고 연해주로 진출하였다.
그후 1932년에 일본이 만주에 만주국을 세웠을 때, 연해주의 역사를 연구한 결과 연해주는 왕검조선 때 연해주, 한반도, 대마도, 구주를 통치한 마한(馬汗)이 다스리던 지역이고, 왕검조선이 멸망한 후는 읍루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고구려에 복속하였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국에 속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연해주는 만주에 근거지를 둔 왕검조선, 고구려의 복속세력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연해주의 역사를 알게 된 소련은 일본이 한반도 또는 만주에 거주한 조선족들을 선동하여 연해주 분리독립 운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1937. 9월에 연해주에 거주한 조선족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고 대신 그곳에는 러시아족을 이주시켰다. 이때 연해주에 거주한 조선족들은 자신들이 왜 중앙아시아로 이주되는지 그 이유도 전혀 모르는 채 강제이주 당하였다.
해방 후 소련의 한반도 정책은 미국, 일본, 중국과는 다르게 한반도의 통일에 대하여 그렇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연해주에 거주한 조선족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기 때문에 한반도가 통일되더라도 만주나 한반도의 조선족이 연해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고, 또 만약 북한에 의하여 한반도가 통일되면,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미국. 중국이 원하지 않는 북한의 남침을 소련이 지원한 것은 소련 정책당국자들이 이러한 의식구조 때문이다. 소련의 한반도 정책은 소련의 연해주에 대한 역사교육에서 잘 나타난다.
소련의 역사학자들은 연해주가 만주나 한반도 세력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연해주는 왕검조선 또는 고구려 때 독립된 세력으로 있었다는 것과 연해주를 근거지로 하여 건국된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나라가 아니고 고구려와 별개인 연해주 방면의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는 학설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끝(94.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