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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9일 월요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제1독서 : 1요한 4,7-16
복 음 : 요한 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형제님은 반드시 회사에 출근한 뒤에 회사 화장실에 들러 대변을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데요.
“나는 똥을 싸면서 돈을 번다.”
틀린 말이 아니죠?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산다면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겠다 싶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회사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봉인데도 늘 즐겁게 생활하십니다.
사실 세상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아니 분명히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그 형평성은 자기 마음에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보상을 받으면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이 세상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하나를 베풀면, 상대방도 하나를 줘야 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10개를 줘도 하나도 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큰 이득을 얻었다면서 좋아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히려 주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너무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삶은 길게 잡아봐야 100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 자기가 베푼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사랑이 하느님 나라에 보물로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입니다.
100년 동안 사랑만 베풀었다고 하느님께서 바보같이 살았다고 하실까요?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나라에 가야 진정한 공평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예수님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누이며 마리아의 자매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집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지치셨을 때 찾아오셔서 쉴 수 있는 곳이었지요.
그만큼 예수님과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과 같은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님만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을 알고 있었지요.
다른 사람은 다 살리면서,
사랑하는 오빠에게 무관심했던 예수님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르타는 자기의 신앙을 강하게 고백합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이라는 믿음을 표현하지요.
그 결과 오빠를 살리시는 주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합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의 모든 일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주님의 섭리를 그때 비로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 고백을 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해야 하느냐?’ , ‘해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굳이 낫게 해 달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또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집 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르타는 마치 떼를 쓰듯이 하느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지라도,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렇게 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에 대한 확증을 일깨워줍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오늘 독서에서도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문자 보냈습니다. 자동차 키가 안 보인다고 합니다.
분명히 차를 타고 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키가 없다고 합니다.
제게 키가 하나 더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사무장님이 자동차 키를 가져왔습니다.
교우분이 길에 떨어져 있는 자동차 키를 주워서 사무실에 맡겼다고 합니다.
키를 하나 복사해야 했는데, 찾아서 다행입니다.
저도 좋은 일을 했습니다. 공항에서 여권과 핸드폰 그리고 항공권을 주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10분 정도 있으니 한 남자가 급하게 뛰어왔습니다.
저는 제가 보관하고 있던 여권과 핸드폰 그리고 항공권을 보여주며 본인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맞는다고 하면서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저도 기분 좋게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생명이 머물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하느님 나라가 마치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겨자씨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는 사람입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겨자씨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였던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꽃동네를 시작한 오웅진 신부님입니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환경미화원에게 따뜻한 국물을 나눠주는 포장마차 주인입니다.
헌혈증을 모아서 수혈이 필요한 아이에게 전달한 국밥집 주인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겨자씨’와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리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나라입니다.
문학적인 상상력을 뛰어넘는 나라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외장 하드에는 수백 편의 영화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나라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정보를 검색하기도 하고,
은행 업무를 보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하고, 사진을 보내기도 합니다.
스마트 폰은 작지만 접속하기만 하면 또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해 줍니다.
시간과 공간의 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에 접속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 머물며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나라에 머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스마트 폰으로 접속하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기도로 하느님 나라에 접속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과 나눔이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로 접속하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던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탄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도 “예,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라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은 바로 구원의 체험이며
그럼으로써 부활 신앙을 올바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가족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이 옛날에는 성녀 마르타의 축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는 마르타의 동생과 오빠는 성인으로 공경받지 못했다는 말이고,
마르타만이 가족들을 대표하는 성녀가 되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세 분을 성인으로 같이 기념하는 새로운 전례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고 과거에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것을
이제 제대로 조명하는 의미가 있을 텐데 제 생각에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을 사랑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저는 이순희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를 높이 삽니다
부부가 같이 하느님께 나아간 경우이니 말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대단히 훌륭하지만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에게 귀감이 되지요.
그렇지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 사랑은 갇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갇히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사랑에 갇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많은 사람이 자기 사랑에 갇히고,
기껏해야 가족 사랑에 갇혀 더 이상 사랑이 확장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세상 서로 사랑하다가 같이 사랑을 끝내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이것을 심하게 얘기하면
고양이를 사랑하며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처럼 슬픈 사랑입니다.
인간이 되어서 그래 고양이나 사랑하며 살다가 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인생입니까?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되어서 하느님 사랑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신앙생활입니까?
이는 천국에 가려 하지 않고 기껏 이 세상에서 복되게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슬픈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주 얘기합니다.
연인들의 풋사랑은 서로를 보지만
부부의 익은 사랑은 같이 한곳을 바라본다고.
그런데 부부의 사랑이 같이 한곳을 바라보긴 하지만
그 한곳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식일 수도 있지요.
이번 행진자 중에 딸이 출산하여 첫 손주를 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딸이 출산하러 가는 날 행진에 참여하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출산하는 딸 옆에 있지 않은 비정한 엄마일 수도 있지만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잘 갔다가 오라고 한 남편이 있어 자녀도 같이 사랑하고
주님도 같이 사랑하는 것을 동시에 실현한 성숙한 부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교회는 오늘 한 가족의 축일을 통해
한 가족의 거룩한 삶에서 자극도 받고 본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에겐 성녀 클라라의 가족이 이 거룩한 가족의 본보기이지요.
세 자매가 클라라의 수녀가 되었고 나중에 어머니까지 수녀가 되었으며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성녀 또는 복녀가 된 거룩한 가족이니 말입니다.
한 가족이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은 욕심을 내도 좋을 욕심일 것입니다. 아멘.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11,27)
‘기도와 활동’은 교회의 오랜 논제입니다.
문제는 기도와 활동 사이의 괴리가 아닌 조화와 통합입니다.
모든 영성 학교가 답변을 내려야 하는 결정적인 질문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활동)와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기(=관상)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상과 활동 사이의 조화 보다 관상에 우위를 제공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마르타(=활동)와 마리아(=관상) 자매 사이에 서열을 매기는 오류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 복음적 근거가 바로 지난 16주일 복음의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10,41.42)라고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갑작스레 마리아 축일은 없는데 마르타 축일은 있었다, 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으로 묵상을 시작합니다.
물론 2021년부터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환대의 여인인 마르타의 축일에서 기념일로 바뀌었지만,
우리가 오늘 듣는 독서와 복음은 변함없이 둘 다 요한의 편지와 복음입니다.
요한은 오늘 편지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4,7~8)하고
선언함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사랑의 신비를 요한은 자신의 뛰어난 통찰로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어쩌면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가 알고 있었던 앎은
사변적인 앎이 아닌 경험적인 앎이며, 무엇보다도 예수님과의 관계 체험을 통한 사랑의 앎이라고 봅니다.
마르타의 가족은 예수님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한 가족이었습니다.
어쩌면 동생 마리아와 함께 마르타 역시
순수한 사랑의 경쟁(?)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하고,
또한 “마지막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1,24)하고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를 표현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랑의 여인이었고,
그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께 자신이 바라는 바를 기꺼이 요구할 수 있는 당찬 여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마침내 사랑의 앎에서 솟아나는 믿음으로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했던 마르타와 마리아는 진정 사랑의 여인들이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고백한 사랑은
바로 인생의 길에서 지치고 힘든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환대의 사랑이었고,
자신의 소중한 것, 향유를 다 쏟아부어 사랑을 표현함으로 이런 환대와 사랑을 확인하고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걸어갈 힘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 중 되찾아야 할 영성의 요인 중 하나가 환대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마르타 기념일에서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변경되었지만,
환대의 중요성을 교회가 배제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의 집은 여전히
곧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나그네들을 위한 환대의 집’이요,
교회 구성원은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처럼
‘환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마르타 가족의 환대의 원천은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마태11,28) 언제나 기꺼이 환대하셨고
당신 안에서 참된 쉼을 갖도록 초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환대를 실행한 사람이 바로 마르타와 그 가족들입니다.
우리 역시도 오늘을 살면서 마르타와 그 가족들처럼
누군가를 기꺼이 환대하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간청하면서
「환대란?」 글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렵니다.
『환대란 낯선 사람이 들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환대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환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을 자신의 방식으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환대에 숨어 있는 역설은 환대가 비어있음을 창조하기 원하기는 하지만
두려움으로 가득 찬 비어있음이 아니라 낯선 이들이 그 공간에 들어와
자신이 이미 자유롭게 창조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친절한 비어있음을 원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춤을 출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부름을 따라 원할 때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그런 비어있음이 환대이다.
우리가 진정 환대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면
단순히 낯선 이들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중적이지 않은 명료한 우리의 존재감으로 낯선 이들을 만나고
중립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의견, 우리의 삶의 방식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명료하게 드러난 우리의 선택과 태도, 관점을 보면서 낯선 이들이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관점을 탐구하게 되는 경계와 경계의 만남이 열리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과 진정한 소통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성녀 마르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녀 마르타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 출신으로 성서상의 성인이다.
마르타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16번 언급된다.
그것도 대단히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루카복음 10장에 3번(38, 40, 41절)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12번, 12장에 1번(12,2)이다.
복음서에 언급된 마르타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오빠 라자로의 그의 동생 마리아이다.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가족이다.
이 가족은 성서상의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당대에 명성을 떨친 위인도 아니고,
재산이 많고 세력도 있는 富豪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족, 이스라엘의 대다수 가족이 그랬듯이 평범하다 못해 가난하고 소외된 그런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족이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하느님의 눈물을 보이신 예수께서
마르타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蘇生시킴으로써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계시하셨다.(요한 11,1-4)
루카복음에서 보듯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청취하는 일을 즐겨하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행동을 다소 시기했지만 예수님과 그 일행을 시중드는 일을 즐겨하였다.
물론 예수께서는 마르타가 많은 일에 신경을 쓰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으로써 마리아가 그것을 택했다고 하셨다.(루카 10,38-42)
그러나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예수께서도 굶주린 군중을 빵의 기적으로
먼저 배 불리신 후에 쌩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지 않으셨는가.(요한 6장)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밤’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觀想과 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德目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균형과 조화를 필요로 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일찍이 베네딕토 성인(470-547)은 “일하며 기도하라!(ora et labora)”고 말했을 것이다.
2000년 교회사는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 태도를 한 번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녀 마르타의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굳센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11,27)
그녀 또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기 때문이다.
마르타 성녀의 축일에 듣게 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대화를 통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말씀(25-26절)과
마르타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27절)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로 알려진 라자로가 병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이틀씩이나 여유를 부리시다가(11,3-6)
결국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는 날(11,17)
베다니아에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었다는 말은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뜻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사흘이 지나면 무덤에 안장하였다.
많은 유다인들이 喪家를 찾아와 유족을 위로한다는 것은
당시 관례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잠시 후에 벌어질 놀라운 기적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고,
동생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설명은
마르타의 활동적 성격과 마리아의 관상적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루카 10,38-42 참조)
요한 복음사가는 마르타의 굳센 신앙을 토대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한다. 이는 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마르타가
오빠가 소생하기도 전에 예수께 고백한 신앙은 다소 표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蘇生시킴으로써 마르타의 부족한 신앙을 넘치게 채워주셨다.
우리의 믿음도 마르타의 그것처럼 표면적인 경우가 많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약점은 인간의 理性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의 믿음을 언급한다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는 것이며,
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언급한다는 것을
‘무능한 짓’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다.
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죽음 다음에도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