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w2HLMMc8Ig?si=Aym7AdcMsGEu3r83
Franck: Variations Symphoniques - Walter Gieseking, piano; Herbert von Karajan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1
세자르 오귀스트 프랑크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1885년 여름부터 그해 말에 걸쳐서 작곡.1886년 5월 1일 파리(국민 음악협회 )에서 루이 디에메의 피아노와 프랑크 자신의 지휘로 초연 되었다.
프랑크는 이작품에서 교향적 변주곡을 의도했으며 협주곡적인 뜻을 피하고 있다. 이렇게 부름으로써 한편으로는 교향시가 가진 자유스러운 형식에 접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로 전통적 협주곡 형식에서 멀어지려 한 것이다.
피아노는 독주악기로써의 역할이 아니라 음색 구축적 발전에 직접 가담한다. 이 곡은 두개의 병열적 이고 서로 강한 대조를 보여주는 주제에 의해 구성된다. 이 주제는 서두에서 제시되며 오케스트라에 의한 남성적이고 격렬한 리듬을 가진 것과,피아노에 의해 연주되는 애원하거나 슬퍼하는 듯한 주제이다.
곡은 두부분으로 나누어지며 각 부분은 각각 따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음색의 변화, 다채로운 리듬, 그리고 변주로 다양한 분위기(꿈을 꾸는 것 같은,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시적인) 를 낳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코다에서, 그에게는 드물게 누르기 어려운 해방적 기쁨의 작열과 함께 전곡이 끝난다. 초연 때부터 이 작품은 크게 호평 받았고 그 이후 항상 각지에서 연주되었다.
발터 기제킹 (Walter Gieseking 1895~1956. 10.26)
https://youtu.be/g1LubmMjAJs?si=M3J0WWBv9mstzSPy
Walter Gieseking plays Franck Variations Symphoniques (1932)London Philarmonic Orchestra. cond. Sir Henry Wood
일반적으로 피아노 음악에서 독일 악파라 하면, 매력적이라기보다는 견고하고 냉정하며,본능적이기보다는 근엄하며, 유연함보다는 전체를 통찰하는 계획성을 존중한다. 켐프나 박하우스의 경우가 이러한 특성과 가장 잘 부합하는 연주상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기제킹은 독일 악파에 속하는 연주자로서 상당히 예외적인 연주자이다.
그는 금세기 최대의 인상파 연주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독일 작곡가의 피아노 곡은 거의 모두 연주하였고, 다분히 독일낭만주의적인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까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역시 그는드뷔시와 라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주자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그의 전성기(1920-1939)에 기제킹만큼 섬세한 음빛깔을 들려주는 연주자는 없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특히 페달링에서 그는 최고의 테크닉을갗추고 있었으며,하프 페달(페달을 반만 눌러 아주 섬세한 음색과 음향의효과를 빚어내는 기술)의 명인이었다.그의 연주에서는 불필요하거나 지저분한 음향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또한 드뷔시의 피아니시시모를 조절함에 있어서 놀라운 균형을 유지하며 거대한 연주회장이 끝까지 들리도록 연주하여, 드뷔시의 작품과 완전히 동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기제킹은 1930년대의 모짜르트 해석에 있어서 19세기의 모짜르트 연주관을 토대로 한 해석으로 높이 평가 받았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레슨을 하고 밤에는 비행기로 날아가 연주하고 돌아 오는 정력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초인적인 기억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곡도 몇 번만 훑어보고 연주하였으며,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테크닉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곡에 대해 표현하려는 것을 분명하고도 완전한 생각으로 쌓아올리는 것'을 해석의 기초로 삼고 있었다.따라서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이 나타날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으나,'자신의 연주를 들을 줄 아는 귀를 지녀야 한다'는 또 하나의 철학으로서 객관성을 유지하였다.즉 자신의 연주를 언제나 예리하고 비판적인 귀로 듣고,하나 하나의 음의 길이,강약,그리고 질을 자신이 지배 아래 유지 시키는 조직적인 정신 집중으로 연주했다. 그리고 학구적인 자세로 음악 작품의 올바른 성격을 이해하고 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구명해 나가는 연주를 들려 주었다.
프랑스의 리용에서 독일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기제킹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였고 하노버 음악원에 입학해서는 칼 하이머에게 배웠다. 1915년 하노버에서 데뷔하였고(최초의 데뷔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15세 때 데뷔하며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완전 암보로 6회에 나누어 연주 하였다고 한다)그 후 독일 각지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3년에 런던, 26년에 뉴욕, 29년에 파리에서 데뷔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그만 2차 대전중에 나치 독일에 협력한 경력 때문에 연주 활동을 정지당했다. 1947년에 연주 무대로 복귀하여 자르브뤼켄 음악 대학의 마스터 클래스를 지도했는데, 프랑스와 미국에서 그의 연주 활동을 제지하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음악으로 그것을 극복해 내었다.
그러나 이런 바쁜 스케줄의 후유증 때문인지, EMI의 런던 애비 로드 3번 스튜디오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녹음하던 중 갑자기 격렬한 복통을 호소했다. 바로 근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예후가 좋지 못해 10월 26일 타계하고 말았다. 사인은 급성 췌장염이었다(췌장의 소화 효소가 자기 자신을 소화시켜 버리는 병으로,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다. 매년 미국에서만 최소 수천명은 이 병으로 죽는다고 한다). 마지막 녹음 세션은 10월 17~22일에 있었는데, 맨 마지막 녹음은 베토벤 소나타 10곡 외에 쇼팽의 '뱃노래'와 '자장가'였다고 한다.
프랑크(Cesar Auguste Franck, 1822.12.10넬덜란드 리에주~1890.11.8 파리.)
벨기에 태생 프랑스의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교향곡 D단조,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 Variations symphoniques〉 같은 낭만적 대작으로 유명하다. 발롱 지방 출신인 아버지와 독일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했다. 피아노의 연주 솜씨가 뛰어나 그의 아버지는 1834년 프랑크를 데리고 엑스와 브뤼셀 등 여러 도시로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1년 뒤 파리로 보내 파리 음악원 교수로 있던 보헤미아의 작곡가 안톤 라이하에게 배우게 했다.
1836년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요제프를 비롯한 가족이 파리로 이사했으며 1837년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1년이 못 되어서 그는 독보력(악보 읽는 능력)시험에서 명예대상(Grand Prix d'Honneur)을 받았으며, 1840년에는 푸가 부문에서 1위, 1841년에는 오르간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어 로마 유학이 상으로 주어지는 로마 대상의 준비를 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의 동생과 프랑크에게 대가로서의 경력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고 연주회를 열었다. 그리하여 음악원을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다.
아버지를 만족시키고 돈을 벌기 위하여 연주회를 열었는데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주로 그당시에 유행했던 오페라 접속곡과 직접 작곡한 대중적 환상곡이었다. 1840년 이후 관심이 오르간 쪽으로 기울자 작품은 진지해졌으며 그때 작곡한 3개의 트리오(삼중주곡)는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에게 감동을 주었다. 1846년 1월 4일 파리 음악원 무대에서 처음 연주되었던 칸타타 〈루트 Ruth〉는 그의 야심작이었다. 내키지 않는 연주회 공연, 수많은 언론의 악평, 수입을 위해 강행해야 하는 교습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자신의 재능을 착취하는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된 다음에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크는 본명이 펠리시테 사일로트인 여배우 데스무소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가 극장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자 프랑크는 1848년 결혼을 앞두고 잠시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서 그의 생활 방식은 그뒤 42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르간 연주자와 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생활은 소박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했다. 여름과 겨울에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2시간 뒤부터 하루 종일 계속되는 교습을 시작했다. 작곡은 주로 이른 아침 시간과 여름휴가 동안에 했다.
1851년 생장생프랑수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으며, 1858년에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생트클로틸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생트클로틸드의 오르간실에서는 다른 오르간과 합창곡의 역작과 더불어 그를 유명하게 한 즉흥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즉흥음악은 연주하는 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공식적인 직분을 맡기 전에 작곡된 음악으로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달콤하고 서정적이다. 그러나 프랑크와 그의 친구인 샤를 구노가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되면서 그들의 교회음악은 어려워지고 엄격해지게 되었다. 1872년에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로 임명됨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중요한 경력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과 관심밖의 일이어서 무척 놀라워했다. 대인관계에서 솔직하고 직선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호감과 반감을 동시에 얻었다. 그에 대한 적대감은 그가 오르간 수업시간을 작곡 수업시간으로 만들어버리고, 보수적인 그의 작곡 기법에 반감을 품은 학생들이 늘어나자 더해졌다.
1860년대 후반에 이미 프랑크에게서 개인교습을 받았던 앙리 뒤파르크와 알렉시스 드 카스티용이 그의 제자들 중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71년 2월 25일 국립음악협회가 설립되어 진지함, 정서적 안정, 기술적 기초가 마련될 준비가 갖추어지고 난 후 비로소 그는 저술과 학생들과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2년 프랑크의 제자가 된 프랑스의 작곡가 뱅상 댕디의 열정적인 선전은 피아노 연주와 작곡의 대가가 되는 데 실패해서 의기소침해 있는 프랑크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880년대 초반 에른스트 쇼송, 피에르 드 브레빌, 샤를 보르드, 기 로파르츠를 포함한 프랑크파(派)가 형성되었다. 그뒤 뱅상 댕디가 〈세자르 프랑크 전기〉(1906)에서 보인 열렬한 찬사는 한때 프랑크가 '제자들이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880년부터 1990년 그가 죽기까지 작곡한 음악을 보면 위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알수있다. 화려한 연주와 기교적 성향의 작곡의 대가였던 그는 초기에도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그러한 예가 나타나고 있는 작품으로 피아노를 위한 〈Prélude, aria et final〉(1887 완성, 마지막 악장)과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1885)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랑크의 음악적 쇠퇴기의 몇 작품은 페렌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더욱 멀게는 베토벤의 예를 들면서 피상성과 강렬한 정서의 배양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1890년 프랑크는 길가에서 마차채에 옆구리를 찔려 늑막염에 걸려서 죽었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진지함은 프랑크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유래한다. 프랑크의 천사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와 고결함, 세상사에 대한 순박함은 작품의 경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 활기 없다는 평도 있어서 자신의 음악적 특성과 상반되는 경향을 가진 작품 창작요구에 직면했을 때 그의 특성이 결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가 되는 작품은 1870년대에 작곡되어서 사후에 연주되었던 오라토리오 〈Les Béatitudes〉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Le Chasseur maudit〉(1882)·〈귀신 Les Djinns〉(1884)이 있다. 한편 1886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와 〈교향적 변주곡〉은 그가 기호와 정서의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수했던 철저한 장인정신과 따뜻하고 고귀한 음악성의 완벽한 기념물로 남아 있다.
글출처: 하늘바람꽃
https://youtu.be/Ux0nUypJ69I?si=AQXf-XfATK1HODOP
Franck: Symphonic Variations - Artur Rubinstein, piano; Dimitri Mitropoulos 지휘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