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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116
훈수 삼단이라는 말이 있다. 뭔 얘기냐 하면 한발자국 떨어져서 보게되면
당사자들이 알수없고 놓치는 부분까지 집어내는 눈을 가진다는 거다. 바닥
을 둘 때도 어깨넘어로 판을 들여다보면 자신들보다 상수들의 실착과 요처
가 거짓말처럼 쏙쏙 눈에 띠게 되지만 막상 반상에 앉으면 그 역시도 아까
까지의 혜안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평상시처럼 두게 된다.
소름끼치도록 괴이하고 완벽에 가까운 변화를 보이는 검초 이기에 직접 맞
상대해 보고싶은 마음이 없는것도 아니다. 그 역시도 무인일진대 상승을 추
구하는 욕구가 왜 없으랴. 이런 검법은 평생을 걸쳐도 한번 보기 어렵다.
칼을 쓰는 무인으로서 피가 끓고 회가 동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참아야할
때를 아는 것은 노강호로서의 직감과 예리함이 아니겠는가.
'이 검초에는 무언가가 담겨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현재로는
복잡한 사슬만이 연결안된채 이리저리 꼬여만 있어. 무얼까? 대체 뭐란 말
인가! 이걸 알려줄 사람은 저 심퉁맞은 녀석이리라.
검대 검의 싸움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눈으로 쫓아 검초를 헤아리기 어렵
다. 한번의 격돌에서 수많은 변화가 중첩되고 맞상대하는 이 역시도 그에
걸맞는 초식을 펼쳐야 상대가 되는데 그렇게 엉켜버리면 싸움 자체에 눈이
가게 되고 또한 검식의 의미가 재대로 구현되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저녀석은 맨손 박투를 한다지?'
그걸 몸으로 부딪친다고 함은 엄청나게 강한 권력이나, 장력, 또는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울만큼 빠른 몸놀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전서구의 내용에 오
악세를 뚫고 들어온 녀석이라고 했으니 일격 필살의 위력이 담긴 손속을 위
주로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가 생각해봐도 하운이라는 청년이 펼친 검
식을 힘으로 상대할만한 권법이나 장법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백보신권?
십단금? 모두 유명하고도 위대한 이름이긴 하나 그야말로 극성이 아닌담에
야 어렵다.
몸으로 검초를 뚫어준다면 검식이 갖는 의미가 가감없이 드러날 것이고 거
기서 어떤 실마리가 풀려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부탁한건데 뭔일이 있었는
지는 몰라도 펄펄 뛰며 뒷걸음질이니 난감하다.
'끄응...'
장추삼은 고개마져 옆으로 돌리고 외면하고 있었다. 표정만으로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기세가 역력했다. 왠만한 구슬림 따위론
먹혀들어갈것 같지 않았다.
"한말씀 드려도 될까요?"
문득 단리혜가 입을 열었다. 첫마디 후 여백이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게 되었고 특히 장추삼의 안색은 눈에 띠게 굳어졌다. 그의
뇌리를 강타하는 새찬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본능적인 것이라 어떤
계기 같은 것으로 표현할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런게 있었고 너무도 직접적
이어서 마치 옆에서 큰소리로 귀에 지르듯 다가왔다.
그 말 들으면 무조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구!
움찔 몸이 굳어졌지만 어쩔것인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막는다면 그 뒷말을
풀어서 해야할 터이고 그야말로 신선이 아닌데 무슨 재주로 그녀의 속마음
을 짚어내겠는가?
"말 하시오."
북궁단야의 목소리는 평소에도 매정한 감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런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얄미웠다.
"우선 제 개인적인 일이 가미되어 여러분들께서 하남까지 히며운 걸음을 하
신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 말씀 드립니다. 어떤 경로든 간에 저와 직접적
인 연관이 있으니 마음에 부담이 가는건 어쩔도리가 없습니다."
됐다 돼어, 하고 제지하는 남궁선유에게 다시 한번 깊은 포권을 하고 잠시
허공을 올려다 본 그녀가 낯게 헛기침을 토해내었다. 여태까지의 얘기는 아
마도 형식적으로 앞에 단 인사말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나 제지하는 이
는 아무도 없었다.
"경위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오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느끼고 계시니
까 다시 언급하는게 지극히 비생산적으로 다가옵니다만 한번 더 말씀 올리
겠습니다. 아마도 저희가 직면한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간단치 않은정도가 아니라 어찌보면 전 무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커다란 사건일지도 모르겠지요.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생각하겠지만 지접 몸으로 느끼신 분들이기에 제 말이
그저 허언만은 아니라는걸 아시겠지요."
장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엄숙을 넘어선 침전. 그들이라고 사안
의 심각성을 왜 모르랴. 다만 서로에게 부담을 주고싶지 않아, 또는 부담이
되기싫어서 이렇게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모순...
"그런데 여기 작다면 작을수 있고 크다면 엄청난 열쇠가 될수 있는 일이 있
답니다."
'으읔!'
가슴을 부여잡는 장추삼이지만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았다. 그렇다!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
"그것이 뭐 얼만큼이나 대단한 실마리를 줄지 아무도 모르지요. 후련한 돌
파구가 될지, 아님 변죽만 요란하게 울린 빈수레가 될지 말이에요. 그렇지
만 해봐야하지 않을까요? 어찌보면 동정호에 빠진 술잔 찾기보다 어려울수
있는 일인데 한가지라도 도움이 될 일을 마다한다는 건 분명 문제가 되겠지
요.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겁니다. 우린..."
그녀가 심유한 눈을 들어 장추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기엔 위엄이나 동
정이라든가 기타의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한 인간이 다른 객체에게 표할
수 있는 최고의 신뢰가 깔려 있었다.
절대적인 믿음!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에게 정중히 포권을 했다. 마치 한송이
국화가 봉우리에서 움터 만개하듯 아름다웠기에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장
추삼 에게는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딜 가겠는가? 멍청히 일
어서서 맞포권 할 도리밖에.
"아이고, 왜 이러시오. 왜 이러느냐고요!"
왜 이러는지 다 안다. 하나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장공자께는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답니다. 못된 여자아이가 제 오빠와
가문의 혈채만을 생각하여 이리 못되게구니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그
러나 박옹노선배께서 장공자를 지목하시어 비무를 말씀하시는걸 보면 무언
가 큰 뜻이 있다고 여겨져 감히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베어진 장갑은 어떻
게든 제가 꼬메어 보겠으니 한번만 더 힘을 쏟아주세요. 이렇게 간곡히 청
하옵니다. 제발 한번만 더..."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은 가슴속에서만 울려퍼졌다. 놀랍게도 그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담
담하게 단리혜를 응시하고 있어서 누구라도 그 속내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
비명까지도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던 장추삼이 고개를 한번 저은후 품에서 천천히 장갑을
빼었다.
"히유~"
터져나오는 한숨만큼은 참지 못했나보다. 그의 한숨에 단리혜가 고개를 돌
리고 바닥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힘으로 누르면 절대로 응하지 않으나 진정한 부탁에 움직이는 사람. 강자
의 억누름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으나 약자의 손길은 결코 외면하지 않는
사람. 투박한 말투지만 남을 무시하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낮추지도 않
는 사람. 경박한듯 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힘이 있고 주위를 볼줄 아는 사람
... 장추삼이란 남자... 대장부 이리라.'
그 말이 밖으로 세 나왔다면 부끄러워서 우헤헤하고 웃었겠지만 단리혜는
가슴속 깊숙히 장추삼의 초상을 묻어두었다. 그 사이 공터 한가운데로 들어
서며 그의 몸은 변환을 끝내고 전투를 위한 본능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시시하게 벌일 바에야 아예 하지 않지만 일단 상화이 벌어졌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건 자신에게의 예의일테니까.
"또 하게 되었소."
맥빠진 음성으로 장추삼이 말을 건내자 하운이 빙긋 웃었다. 왠지 몰라도
이 친구와 겨루면 재미가 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지음(知音)?'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어, 왜 이 낱말이 생각났는지 반추하기도 전에 장추삼
의 말이 그를 일깨웠다. 지금은 그런 달콤에 젖어있을 시간이 아닌것이다.
"합시다, 후딱 끝내고 술이나 한잔 더 해야겠으니 서둘러요."
끄덕.
하운이 검을 들어 달빛에 검신을 한번 비추었다. 앞으로전개될 초식의 가공
함을 알기에 관전하는 이들은 사소한 동작이건만 무언가 섬찟함을 느꼈다.
이를테면 독사의 눈에서 발산되는 살기라고 할까?
"가오."
하운의 검이 춤추듯 허공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대상이 있을때와 없을때
의 상대적 비교가 가능하다면 이럴때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무엇보다 처
음 월광살무를 펼쳐냈을때의 하운은 이렇게 강한 살기를 품지 못했다. 장추
삼의 지적에 따라 두번을 숙고하고 세번째에야 검초에 담긴 뜻을 풀어냈지
만 살기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런건 누가 가르쳐준다고 알게되는것 하고는
거리가 먼 문제니까 말이다. 그렇게 볼때 하운이 단번에 살기를 검에 담아
낸것은 분명 진보라고 할것이다. 하운의 진보는 당연히 장추삼을 곤혹스럽
게 하는것이지만 그렇다고 겁먹을 장추삼은 아니다. 오기가 생기면 생겼지...
오랏줄처럼 퍼져나오는 살기가 그를 덮칠때 이미 천고의 추뢰무영으로 공격
권역에서 탈출을 시도하자 불어난 신형과 함께 제각기의 장추삼은 사방을
동시에 점하고 나름대로의 움직임을 보였다.
"으악! 저놈 뭐야!"
기겁하듯 박옹이 소리질렀다. 아무리 산전수전에 별 괴이한 초식을 접해보
았다 해도 사람 몸이 몇개로 분열되는건 본적도, 아니 상상조차 해본적 없
다. 거기다 일반적인 잔상의 그것은 그저 같은 모양새의 남은 형태 일텐데
눈앞의 녀석들은 생각이라도 하는 듯 따로따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이봐, 남궁! 저녀석 대체 뭐야! 지금 내가 꿈을 보는거야!"
"크하하하하핫!"
남궁선유가 득의 만만하게 웃었다. 마치 자신이 칭찬이라도 받은 양 어깨에
힘까지 들어가서 호쾌하게 웃는데 아주 가관도 아니라서 멀뚱히 그를 바라
보던 박옹은 고개를 갸웃거릴수 밖에 없었다.
'뭐야? 내가 언제 지 칭찬했나? 뭐가 그리좋아서 실실거리는 게야?'
생각은 생각, 관전은 관전. 박옹은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몸소
느끼고 있었다. 장추삼의 맨손 박투는 비록 그의 예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양새로 전개되었으나 어떤식으로든 하운의, 그가 펼쳐내는 검식의 극한을
끄집어 내는데 충분해 보였고 생각지도 못한 방식의 몸놀림은 그로 하여금
비무를 더욱 분할적으로 관찰하게 하는 도움을 주었다.
추뢰무영이 짙어지며 그의 신형이 점점 실체화가 되어갈때 박옹은 인정해야
했다. 넓은데서 만났다면 자신도 크게 망신당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
다. 이것은 신법과 보법의 완벽한 조화 이고 무엇보다 그 속도를 말한다면
박옹이 알고있는 모든 상시선은 가차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에서 월광살
무라 명명된 괴검초(怪劍招)보다 더 흥미를 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잡고있는 목표는 이것이 아니기에 그의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면과제는 목표된 검초에서 받은 단상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전달되어서 일까? 하운의 검극은 더욱 더 독랄하게 변해가고 장추
삼의 신형도 그에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악마처럼 닥쳐오는 물살을 해치는 연어의 몸짓...
'이것은 최고의 대결이다! 내가 알고있는 어떠한 무인들 이라도 이렇게 박
력있는 공수(攻守)를 주고받지는 못한다!'
그 이면에 담긴 의미, 그것은 정신과 육체의 극한에 이른 무인들의 한 판
살풀이. 박옹에게 다가온 의미가 그렇게 구체된 의미가 아니기에 일단은 감
탄으로 자신이 받은 감흥을 대신하였다.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넋놓고있지 못할만큼 두 젊은이의 공방은 다급하게 치달았고 실타래
같이 엉켜있던 박옹의 단상도 어떤 형태로 가닥이 잡혀가는듯 했다. 그게
무엇일까? 머리로 느껴서는 안된다.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정속의 편린들을
언어로 표출해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무슨 단어로 말해야 하는가?
파파팍!
옷깃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장추삼의 분신들 중 하나가 급작스래 튀어나
왔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움직임이지만 그가 표출하는 마지막 변화, 즉
가속추뢰가 재대로 발현된 것이고 이미 한번 겪어본 남궁선유도 지켜보는
것 만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흥분되었다. 그런데 그때와는 또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어 북궁단야가 나직한 탄식을 토하며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이건 그저 바른 또하나의 분신만이 아니다. 빠른 또하나의 장추삼
은 달려나오며... 또한번의 분열을 보이려는 듯 희뿌옇게 신형이 변색되었
다.
'이 녀석은 싸울수록 자신의 무기를 한단계식 올려놓지 않는가!'
가속 추뢰보에 이은 또하나의 변화, 이를테면 가속 추뢰무영이라 해야할까?'
반동을 받은듯 급작스레 튀어나온 또하나의 장추삼은 악마의 입술처럼 낼름
거리는 하운의 검초를 거의 파괴시킬 것 처럼 맹렬하면서도 눈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월광살무가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
이리라!
'멋지군! 마지막의 몸놀림은 능히 강호의 십대절기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것
이야. 그나저나 아직도 잡아내지 못했으니 모두에게 뭐라고 얘기할꼬?'
박옹이 쓴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을때였다.
빙글-
하운의 검이 기이한 각도로 구부러지는 착각을 일으킬만큼 급작스레 꺽였다.
" ! "
" ! "
" ! "
모두의 눈이 화등잔 만큼 커졌다. 그도 그럴것이 그림에 그려진 월광살무,
즉 하운이 전에 보였던 피의 검법은 마지막 변화가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우스운건 하운이 보인 또다른 변화가 앞초식과 지극히 자연스레 어울려 누
가 보아도 준비된 뒷동작처럼 여겨질만큼 이질감 없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16042] [연재] 삼류무사-117
이들중에서 무학에 관해 가장 많은 경험을 한 이는 박옹이다. 명문 무가중
에서도 능히 강호 삼십대 무벌에 속한다는 산동악가의 셋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일류 수준의 권법과 장법을 보고 배웠으며 악가를 방문하거나 식객(
食客)으로 있던 여러 무인들에게 한두수 정도 귀동냥을 듣기도 했다.
본래 거대세가의 강점은 무가(武家) 스스로가 지니고있는 힘도 힘이려니와
여기저기를 떠돌다 이제 지쳐서 쉴곳을 찾아 세가의 그늘로 안주한 식객들
이 풍부하다는데 있다. 솔직히말해 식객이라 자처하는 이들중 구할은 아무
런 도움도 안되는 어중이떠중이들 이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둘이 알고
보면 쟁쟁한 인물인 경우가 있기에 큰 무가들은 식객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가를 벗어나서도 무의 꿈을 버린적이 없었던 그 이기에 나름대로 무학의
길을 걸었르며 '산동악가의 셋째'란 꼬리표를 떼 내기위해 역설적으로 검학
에 매진하여 누구도 무시할수 없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박옹이 무학 전반에 폭넓은 견식이 있다면 검에 관하여 가장 깊은 고찰을
한 사람은 남궁선유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이가 없으리라. 단일 세가로는 최
고의 성세를 구가하는 명문중의 명문 남궁세가의 장자로 태어나 검만을 생
각하고 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가주직을 맡고서도 검의
길이 좋아서 세가의 일은 대부분 동생들에게 일임하고 검의 마음을 얻기 위
해 이리저리 여행을 다녔었다. 명백한 직무유기 였지만 세가 사람들은 그저
고소만 지었다. 가주가 저리 열심인데 뭐라 할 것인가? 그리고 남궁선유는
그를 말없이 성원해준 세가 사람들에게 검정오존중 수좌라는 이름이 아니
라 남궁가의 검식을 십초식으로 체계화하는 것으로 화답을 했다.
말이 쉬워 체계화이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세가의 독문검식을 자신의 눈에
서 정리하여 누구라도 납득할수 있는 모양새로 그려낸다는게 어떠한 경지이
겠는가. 최소한 검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에 맞추어 몸이 움직일 정도는
되야 할 것이다.
그런 남궁선유의 안목으로도 하운이 불러온 변화가 너무 이질적이어서 그가
말하는 검의 소리가 와닿지 않았다. 검의 소리... 이 말은 굉장히 추상적
이지만 일정 경지 이상에 오른 무인들 사이에서 널리 통용되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검정오존중 수좌라는 파랑검객 남궁선유도 들을수 없는 검의
비명이 하남의 작은 야산에서 아직 이름조차 알려지지않은 청년검수의 검을
통해 표출되었다.
"이, 이건!"
벌떡 일어선 북궁단야가 순간적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그 기세는 도발적이
다 못해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관전하는 이에게도 알수없는 위압감으로 닥쳐
왔다. 승부사 기질의 북궁단야가 반발이라도 하든 검자루에 손이 간 건 당
연한 일.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놀란건 직접 맞이하는 장추삼 본인이다. 그의
전투 방법상 접근을 해서 상대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어야 하기에 하운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간 상태였고 가까운 거리이기에 그만큼 피할 여지도 적
다는 얘기다.
'으학!'
머리가 삐죽 설 정도로 갑자기 찾아온 변화. 이건 예정에 없었던 일이다.
그렇다고 무를수도 없다. 목검으로 맞아도 아플판에 진검이라면 스쳐도 중
상이다.
...... 예정된 형태의 공격이라면 그것은 더이상 공세라고 부를수 없을것이
다. 때릴곳 다 가르쳐주고 막아보라는 싸움은 시장 뒤켠에서도 하지 않는다
. 전능지체의 효용은 인간이 보일수 있는 가장 빠른 반응속도와 다름 없으
니 익숙해진 너의 몸과 신경을 믿어라. 아무리 완벽한 무학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생각하고 구현해낸 이상 어딘가에 반드시 사각(死角)은 존재하기 마
련이다. 너를 믿고 네가 감각해낸 사각을 믿고 네 자신을 맡기거라. 무엇보
다 너 자신을 믿는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대전에서 널 승리로 이끄는 원동
력이 되리니......
'빌어먹을 사부! 뭐가 보여야 믿든가 하지... 어?'
찰라지간에 머리를 스치우고간 사부의 말과 푸념 너머로 하운의 눈동자가
보인다.
어이없게도 그의 눈빛을 채우는것은...
그의 전신에 알수없는 감흥이 흘러 전신을 관통하며 순간적으로 어떤 세계
가 열렸다.
'장추삼아, 장추삼아!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자책할 사이도 없다. 무엇이든 해야하고 할 것이다. 언뜻 엿보인 '그 세계'
로 가야만한다. 생각은 무슨놈의 생각, 일단 믿고 가는거다!
푸스스...
그의 신형이 스러져갔다.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너무 느리게 진행
된듯 하여 평소의 장추삼이 보였던 탄력적인 움직임과 괴리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하운의 검은 매정하게도 그 한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해버렸다. 어느
누구라도 막아내지 못할정도로 기묘한 각도에서 꺽여왔기에 알고도 막지 못
할 판이었는데 갑자기 느려진 장추삼은 모든걸 포기한듯 그의 검에 몸을 맡
겨버린 것이다.
"말도 안돼!"
북궁단야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목소리를 타고 하운의 검은 다시한번 독사의
꿈틀거림처럼 허공에서 각도를 바꾸며 장추삼의 희뿌옇게 흩어지는 동체를
난도질했다.
"그만둬!"
남궁선유 마져도 소리를 지르며 공터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기 위해 튕기듯
일어섰다. 이건 비무다! 목숨을 담보로한 생사결이 아니라는 거다. 비록 전
력을 다하라는 박옹의 당부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해 겨루
어보라는 인사치례같은 것이였다. 목숨을 뺏을만큼 싸우란건 아니였다는거
다. 그러나 모든건 늦어버렸다. 하운의 검은 너무도 냉정하게 그를 훑고 지
나갔고 장추삼에겐 대항 수단 조차도 없었다.
"이렇게 멍청할때가!"
으드득 이빨까지 갈며 걸음을 옮기는 남궁선유가 칼을 빼어들려 손을 검집
에 가져가는데 그의 손등에 조용히 얹어지는 무엇이 있었다.
"놓게, 저녀석을 가만둘수는 없어! 아무리 제흥에 겨웠다고하나 동료의 피
를 머금은 칼질을 두번이나 반복하는 녀석은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지
금 싹을 잘라내야 한다구!"
막옹이 남궁선유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평소의 장난기어린 얼굴이 아닌 구
도자의 그것으로 고개를 저으며 남은 왼손으로 장내를 가리키는 그의 얼굴
에 아까 장추삼이 지었던 얼굴과는 또다른 감흥이 흘러 내리고 있어서 남궁
선유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저건... 뭐라고 생각하나? 내가 비록 하찮은 무부이지만 강호 견식이 짧은
건 아니라고 자부했었거늘 오늘에 와서야 천외천이 있음을 알았다."
"응?"
무슨 말을 하는게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남궁선유가 어떤 환상에
흠칫 굳어졌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던 장추삼은 같은 공간에서 흩어졌던 뭉게구름이 분산되
었다 모아지듯 하운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합쳐졌다. 이 알수없는 현상에 모
두가 돌처럼 굳어 망연히 장추삼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엉뚱한 소리가 장
내를 아련히 맴돌았다.
파라락-
믿을수 없게도 옷깃 부딛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공터에 옷깃소리가
날 만큼 격렬한 움직임을 보인이는 주지하다싶이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그
렇다면...
'극쾌의 마지막을 둔(鈍) 이라고 했었다. 그럼 저녀석이 멈춰보였던 이유가
쾌를 넘어선 둔형(鈍形) 이었기에 발생했던 거란 말인가!'
남궁선유는 자신의 상식으로 그가 본 움직임을 정리해보려 했다. 곧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는지 깨닫긴 했지만 말이다.
"자네도 봤지?"
"나도 눈 달려있네. 아직 노안같은 거 아니란 말이야."
가늘게 떨리는 박옹의 말에 눈길조차 돌리지않고 넋놓은 사람마냥 힘없이
대답하는 남궁선유의 심정은 허탈 그 자체였다. 검을 알고 무학의 세계에
빠진 60년이 오늘 따라 왜이리 부질없고 허망하게 느껴지는지. 누구보다 열
심히 살았고 미련없는 인생이라고 여겼었거늘 저 어린 두 청년이 보이는 동
작은 그의 삶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불공평한가? 그렇다, 어차피 인간사회에서 평등이란 말은 존재만 할 뿐 실
현된 적은 없었다. 평등하다는 말 자체가 모순일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평등을 나름대로 정립해서 - 그냥 어떻게든 말을 맞춘것
이지만 - 기회의 균등 정도로 생각한다면 두 청년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
천재라는 말로도 모자를 만큼 뛰어난 육체적, 정신적 감각은 몇십년이고 무
학만을 목표로 살아온 이들에게 좌절감을 줄 만큼 빛나는 것이지만 또한 잔
인하기도 하다. 인간의 우열은 날때부터 정해진 것이란 말인가. 열심히 노
력해봐야 천재들의 번뜩임 한번을 쫓지 못한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이 나이에 질투심이라니 아직도 멀었구나!'
부러웠다. 솔직히 말해 약이 오를 만큼 부러웠다. 무인에게 무보다 더 탐나
는건 없었지만 이제보니 보석같은 자질 이야말로 최고의 선망이 됨을 처음
으로 알았다. 나름대로 근골과 자질에서 자부심을 가졌었던 두 노인이건만
박옹의 말마따나 천외천이 있었고 그것이 눈앞에 펼쳐졌기에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체면 때문이라기 보다 마지
막 남은 자존심의 발로 일지도 모른다.
멍하니 서있던 두 청년은 서로를 한번 멀뚱히 쳐다보는 것으로 비무의 마지
막을 대신했다. 어떤 수인사도 무슨 말도 없이 그냥 서로를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관전하는 누구도 끼어들기 어려울만큼 둘을 둘러싼 공기의 파
동이 묘했고 또한 독특하여 과연 이들이 방금전까지 그런 공수를 나누었다
는게 믿겨지지 않았다. 하운의 시선은 잔잔한 가운데 경악을 감추고 있었고
그래서 심연에 감춰진 눈빛은 누두라도 읽어내지 못했다. 잠시의 정적은
칼을 한번 보고 장추삼의 몸상태를 확인한 후에 그가 날린 짧은 한마디로
깨졌다.
"아홉번..."
모두가 어? 하는 표정으로 하운의 말을 새겼다.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도 유
분수지 왠 아홉번인가? 그렇다고 무슨말이냐고 질문하기도 뭐해서 그저 뒷
말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말이 안되는군, 아홉번이라니."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하운이기에 모두의 궁금증이 증폭되었
다.
"그걸 다 센거야? 눈도 좋아, 정말."
장추삼의 대답. 여전히 아리송한건 마찬가지라 안듣느니만 못했다.
"눈이 좋은게 아니라 감각적으로 느낀거요. 대전 상대의 움직임도 인지하지
못하는 검수가 어디있겠소?"
많어 임마,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은 박옹의 눈이 갑자기 동그레졌다.
그리고 다른이들도 연쇄적으로 침음성을 입에서 흘렸다. 장추삼이 뿌옇게
변한건 안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형이 너무 빨리 움직여서 잔상이 남아
발생했다는건 알았지만 이들의 대화 내용을 보면 그 수가 무려 아홉이었다
는 거다. 말이 쉬워 아홉번 신형을 움직이는 거지 잔상이 남았다 함은 그
위치를 점하는 여하한의 동작을 취했음을 의미하고 그렇게 아홉번의 위치이
동이 순식간에 이루어 진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이 안되는
변화를 보지 않았는가.
"그럼 어쩌란 말이야? 피도 눈물도 없이 베겠다고 들이닥치는데 얌전히 목
내밀고 기다릴수는 없잖아? 하형이 내게 그리 감정을 품고 있었는줄은 예전
에 미쳐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사람 하나 잡자고 두세번을 베더구만. 잔인
해, 아주아주 잔인해."
"맞소, 잔인하지. 그래서 이 검식은 더 슬픈지도 모르오."
언제나 그러하듯 월광살무를 펼쳐내고는 달을 바라보는 하운의 눈매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보았더라 하고 갸웃거리던 장추삼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않은 얼굴이 떠올라 인상을 구겼다.
'맞다! 그 빌어먹을 노친네가 습관적으로 짓던 표정하고 똑같아. 어쩜 저리
빼다 박은것 처럼 닮은거지?'
그것은 아련한 슬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과거에의 기억을 형상화하여 감정의 저편으로
떠나는 짧은 여행.
닿을수 없기에, 잡을수 없기에 더욱더 안타까운 손짓으로 불러보아도 메아
리조차 없는 공허.
장추삼의 표정도 미묘한 곡선으로 하운의 검을 바라보았다. 월광을 반사하
는 검극은 슬프도록 아름다웠지만 그곳에 어떤 추억이 간직되어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단지 하운만이 느끼고 반추할 뿐.
그들의 생각이 각자의 길로 하염없이 달려가고 있을때 봄 햇살에 녹아내리
는 시냇물처럼 굳어있던 관전자 일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하
지 못하고는 있지만 이들이 얼마나 놀라 있는지는 서로의 얼굴에 그대로 새
겨져 있었기에 무공이 가장 떨어져서 둘의 비무에 관한 설명을 기다리던 단
리혜가 저도 모르게 웃음지었다.
"저놈 진짜 괴물일세. 이거봐, 장추삼이! 너는 네가 한 행동이 어떤 의미인
지 알고나 있냐? 소림사에서 봤으면 세번은 기절했을거란 말이다. 어이가
없어서 내가 말이 다 안나온다."
"소림사?"
장추삼이 툴툴거렸다. 뜬금없이 여기서 소림사가 왜 나오는가! 소림사라면
문전박대를 당해도 재대로 당한 곳이고 사부를 만났던곳도 소림사에 감자바
위를 먹이고 분이 안풀려 씩씩대던 때였다. 한마디로 그와 소림사는 썩 괜
찮은 관계가 아니란 말이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소림사 썩은건 거지
들도 다 안다. 한때야 무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살아있는 부처와도 같은 고
승들을 배출했다지만 지금의 소림사는 돈만 밝히고 자리보전에 급급한 땡중
들이 장악한지 오래다.
"소림사에서 날보고 왜 놀래? 땡중 집합소에 발 한번 딛은적 없구만."
"누가 뭐래냐? 내 말은 니가 보인 보법이 소림사의 연대구품과 너무 흡사해
서 한 말이야. 들어는 봤겠지? 아무리 무식해도 연대구품 정도는 귀동냥을
했을테고 넌 본적은 없겠지만... 이런, 나도 본적은 없구먼. 하여튼 들은
풍월을 종합해보면 네녀석이 펼친 보법과 변화와 속도가 아주 비슷한게야."
"내가 한 몸동작이 땡중들의 그것과 비슷했다구!"
펄쩍뛰는 장추삼이 어이가 없어서 모두들 어이가 없었다.
연대구품.
아무렇게나 언급된 이 보법을 겸한 공격식은 사실 달마삼검과 함께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소림의 두가기 극상승 젛학이다. 왜 전설이 되었는가 하면
이 두가지 무공역시 화산의 암향부동화검과 무당의 무극시생태극변, 그리
고 점창의 후예사일처럼 실전된거나 다름없이 지난 몇백년간 펼쳐진 예가
없다는 말이다.
한번 몸을 움직이면 동시에 아홉가지의 변화를 보인다는 이론상으로나 가능
할것 같은 절대의 공격식.
'세상에 땡중의 움직임이라고? 소림출신의 승려들이 들었다간 입에서 개거
품을 세번은 물 일이군.'
남궁선유가 장추삼에게서 눈을 거두어 하운을 바라보았다. 장추삼이야 원채
사람을 잘 놀래키는지라 충격이 덜했지만 도인 비슷한 청년까지 그의 턱을
빠지게 할 줄 누가 알았겠나. 분명 저 청년은 월광살무라 불리운 괴검초의
제 일식만 알고 있었다. 그럼 아까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심심
해서 해본 칼질이라고 하기엔 그 변화와 연결이 너무 매끄럽지 않은가?
"얘기를 좀 정리해보도록 하지요."
북궁단야가 조용히 모두의 동요를 잘라냈다. 그는 칼 뿐 아니라 말 역시 시
의 적절하게 구사하여 무리의 혼란을 잘라내고 깨끗히 정리해낸다. 지금의
어수선함도 북궁단야의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정리가되어 모두가 일련의 사
건을 수습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16095] [연재] 삼류무사-118
“이럴게 아니군. 모두 앉아서 천천히 사건을 정리해 보도록 하지. 서서 있
자니 왠지 산만한 느낌을 받는구나."
남궁선유가 북궁단야의 말에 동의하여 일행을 환기시켰다. 누구나 그러하겠
지만 대화란게 모름지기 편한 상태에서 나누어야 술술 풀리는 법이다. 정신
적인 안정에 자리가 얼마나 큰 몫을 차지하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뭐, 그렇다고 너무 편안함을 추구했다간 얼마후에 대화가 끊기
고 코고는 소리가 진동하겠지만 말이다.
"그래, 그래. 요즘들어 영 다리가 안 좋은 것이 한해가 다른 걸 느낀다. 젊
은 너희야 모르겠지만 노인네들은 영 피곤하다구. 난 앉아야겠어."
털썩 주저앉으며 에구 다리야를 연발하는 박옹을 따라 하나 둘 모여 앉은
이들은 첫마디를 꺼낼 엄두를 못 내는 듯 서로를 멀뚱멀뚱 처다 보며 다른
이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평소엔 잘도 주절거리던 장추삼이건만 분위
기가 분위기인지라 괜히 술 한 잔을 따라놓고 딴전을 부리고 있었고 하운역
시 방금전의 감흥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듯 멀거니 달을 올려보았다.
"이래서야 얘기가 안 되겠군요. 그럼 우선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하형
?"
"말씀하시오."
눈조차 돌리지 않고 하운이 대답했다. 그에게 지금의 상황은 무언가 비현실
적인 느낌이라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정립되지 않았기에 말조차 시큰둥했을
지 몰랐다.
"이런 질문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나 모두의 의문을 풀기위해 감히 묻겠소.
하형을 비롯한 우리 모두는 월광살무라 명명한 괴검초의 한 가지 초식밖에
알지 못했소. 그리고 하형은 그 초식을 충실히 재현해 내었던 것이고... 여
기까지는 누구나 예상 했었고 예견된 수순이었소. 그런데 말이오."
북궁단야가 말을 한번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동의를 구하는 눈빛
이었고 그 대답은 가슴으로 전달되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하형은 우리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알 수 도 없는 두 번째 변화를
시작하였소. 그건 정말로 충격이었지. 나름대로 검의 길을 묻는 무인으로서
부러울 정도로 완벽한 검초였거든. 문제는 그 검초의 색깔이었소. 마치 제
2초식을 알고 있는, 아니 분명히 알고 있던 두 번째 변화를 구현해 내었다
고밖에 볼 수 없었단 말이오. 나만의 착각 이었을 것 같소? 아마도 아닐 것
이오. 여기 검을 우리 나이의 두 배가 넘게 걸어오신 두 분 노선배님들이
계시고 두 분의 생각도 아마 일치하지 않을까 하는데..."
"음, 나도 동의한다."
박옹이 거들고 나섰다. 아까부터 끼고 싶어서 좀이 쑤셨지만 별달리 기회가
없었는데 북궁단야가 그들을 거론하자 냉큼 대화에 입장한 것이다. 그는
지금 궁금한 게 너무나 많았고 하고싶은 말이 넘쳐흘렀기에 어디서부터 풀
어가야 할지 몰랐다.
"에구야~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재대로 말 잘했다는 소리를 듣나... 그래 우
선 너에게 들어야겠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종이에 그려진 초식은 그게
아니 였잖아. 그렇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제 서야 밝힌 것 같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몰랐다고 하기에 너무 매끄러웠다. 이걸 어떻게..."
"누구라도 펼쳤을 겁니다."
박옹의 말을 끊듯 툭 던진 하운의 말은 분명 의외였다. 누구라도 펼쳤다니?
"이놈아,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래도 중원에서 검으로 행세께나 한다
는 나도 종이에 그려져있는 칼춤의 반에 반도 이해가..."
"제말은..."
또 한번 말이 잘리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지는 박옹이었지만 하운은 괘
념치 않았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뻔히 알고 있었고 심정도 이해가 가
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해를 못하는 것도 말이다.
"월광살무를 마음으로 이해한 누군가라면 이란 단서가 붙겠지요."
"음..."
누가 뭐랄 것 없이 깊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
지만 묘하게 납득이 가는 말이다. 무학에 어느 정도 길을 연 사람들답게 하
운의 아리송한 말이 어떤 감으로 다가왔다.
"단리소저."
하운이 단리혜를 부르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
었다. 그가 자신을 부를줄은 예상치 못했었으니까.
"전에 저더러 단리 노선배께서 제 2초식에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그건 단리
가에서 잘못 판단하듯 합니다."
"예에?"
그게 무슨 말인가. 조부는 분명 월광살무의 일합은 견디어 냈다고 했다. 그
녀가 직접 본것은 아닐지라도 단리가에 내려오는 월광살무의 초식으로 볼
때 그 말은 분명 사실일 것이고 단리가에서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 그런데
그의 말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판단을 잘못했다... 거짓말이나 착각등과는
분명 다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언뜻 이해하지 못하실 것이오. 그럼 모든 분들을 위해 제 생각을 단도입적
으로 말씀드리지요. 결론적으로 월광살무란 초식은 애초에 제2, 제3의 초식
따윈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월광살무는 그 자체만으
로도 가장 완벽한 초식이기에 뒤를 받쳐주는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그 변화가 처음의 열아홉장에 모조리 녹아있다고 할
까요? 한마디로..."
하운은 모두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한번 달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아름
다운 달은 백년 전에도 거기 있었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에 있지
만 사람은 바뀌었다.
"이 초식은 무형질 입니다. 종이에 적힌 모양새는 말 그대로 그저 모양 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거지요."
쿠쿵!
무형질의 검식!
그야말로 심검의 초입을 일컬음이 아닌가?
통상적으로 심검이라 함은 검을 잊고 나를 잊고... 이런 쓸데없는 낭설만으
로 대변되는 신의 영역이다. 보인 적이 있어야 그것을 구체화 시키든지 말
든지 할거 아닌가. 물론 소림의 달마삼검이나 무당의 태극혜검의 절초라는
무극시생태극변, 그리고 창궁우전검의 최후초식인 창궁천추등이 흔히 말하
는 심검의 단계라고들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심검을 구경이라도 한번 하
는 게 무인들의 꿈이라고들 하니 그 심오한 경지를 말로해서 무엇하랴. 그
저 막연한 무림인들의 이상향.
여기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을 슬픈 어조로 뇌까리는 청년검수가 하나 있고
열 아홉장의 빛바랜 종이가 나부낀다. 종이위에서 살기어린 검을 놀리는 사
내는 눈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지 않은 것 인가, 어쩌면 그리지 못한 것
일지도. 마음의 창이라는 눈이기에 그곳을 차지하는 내음을 감히 건드릴 엄
두조차 내지 못한 것 인지도.
그렇게 시간은 갔고 종이 위의 검수는 청년검수의 검 끝 에서 살아나 그의
마음속까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삶과 행적을 당장 읽어내지는
못하겠지만, 완전한 이해도 어렵겠지만 어떤 느낌만은 전달할 수 있었는지
도.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는지도.
말은 쉬웠지만 그 속의 의미가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의 얘기인즉슨 백 년 전의 암살자는 살수같은 게 아니란 말이다. 고도로
단련된, 무의 궁극을 바라보는, 완성으로 치닫는 절정의 무인이었다는 얘기
다. 그럼 그런 인물이 뭐가 아쉬워서 도둑처럼 야밤을 틈타 사람을 죽였다
는 건가. 일인자를 꿈꿔서? 그건 아니다. 백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천하제일인은 나오지 않았다. 세간에서 절대오존중 적미천존을 제일인의 위
치에 올려놓고 입방아를 찧지만 절대적인 느낌 면에서 몇 백 년 전의 인물
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영향력에서 말이다. 그리고 제일인을 꿈꾸며 살
업을 자행했다면 백 년 전에 그, 아니 그들일 수 있는 자들이 왜 등장하지
않았단 말인가.
남궁선유가 까닭모를 한숨을 토해내었다.
'심검이라... 허허허허, 그토록 원했건만 완강히 뒷등만 보이던 너였거늘
저 청년에게는 그리 쉽게 손을 내밀었더란 말이냐. 원망스럽구나. 참으로
원망스러워.'
북궁단야의 눈빛은 심유하게 빛나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다만 한가지, 남궁선유처럼 낙담하거나 하는 건 아니 였다.
"그걸 너도 이해했으니 심검을 펼쳤다는 거 아니냐. 그렇다면 너의 정체가
심히 의심이 간다. 아까의 얘기대로라면 단 한번 본 그림만으로 불가사의에
가까운 괴초식을 펼쳐내었고 이제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짚어내고 있다.
네가 아무리 하늘이 내린 기재라고 한다고해도 기본적인 밑바탕이 없으면
어림 반 푼의 어치도 없는 노릇. 충실한 기본기와 유능한 가르침이 깔려 있
을 것이야. 너는 어디서 왔으며 목적은 무엇이냐?"
"사문을 밝힐수는 없습니다. 만약 제가 못 미더우시다면 일행에서 빠지겠습
니다."
하운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내참, 웃기네. 이보쇼 노인. 노인이 뭔데 하형 더러 이래라 저래라요? 굴
러온 돌이 박힌돌 빼도 유분수지. 정 의심스러우면 노인이나 빠지슈. 하형
이 왜 일어나요? 앉아요 앉아!"
"이놈이?"
"내가 뭐 말 잘못한거 있소? 늙으면 자고로 의심만 많아진다더니. 그런 식
으로 말한다면 북궁형도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하니 마땅히 의심받아야 할
거 아냐? 오호라~ 그럼 우리 셋 중에서 의심받지 않을 사람은 나같은 놈 밖
에 없단 말이네? 안 그렇소?"
둘 사이에 또다시 뜨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박옹이 봐도 도인 냄새
가 풀풀나는 청년에게서 어떤 악한 마음같은 걸 엿보지는 못했다. 그저 이
렇게나마 말하면 어떤 단서라도 얻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데 저 심퉁녀석이
느닷없이 끼어든 거다. 하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장추삼의 말에 마땅히 대
꾸도 못하고 그저 쥐잡듯 노려보는게 전부였다.
"이제 그만들 좀 하시게. 갈길이 멀구만 일행끼리 이러면 어쩌겠는가? 그리
고 박옹, 아직 할말이 남아있지 않은가?"
"뭔 할말?"
퉁명스럽게 반문하고는 남궁선유가 뭘 원하는지 안 박옹이 장추삼을 한번
더 꼬아보고 헛기침을 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비무를 청한 건 박옹 자신
이었고 그 결과 어떤 실마리 비슷한걸 얻은것도 사실이다. 그냥 놀라서 입
만 벌리고 있었던 건 아니였다. 심퉁스러운 놈을 보자니 얘기할 맛이 싹 달
아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무림명숙이라는 작자가 한 말은 책임을 져야지.
"뭐... 내가 어떤 대단한 결론을 도출해낸 건 아니란 걸 우선 말해두겠어.
그러니 너무들 기대하지는 말길 바란다."
걱정 마요, 기대 같은 거 안... 까지 나온 장추삼의 주둥이는 북궁단야가
한번 꼬아보자 잦아들었고 억지로 마음을 다잡은 박옹이 천천히 그러나 또
렷한 어조로 말을 했다. 눈을 감고 말을하는 모습을 보니 아까의 비무를 머
리 속에서 다시 한번 되새기며 그때의 감상을 옮기는게 역력했다.
"그 괴초식은 역시 놀라웠다. 방위건 속도건 기본적인 검초의 틀을 완전히
탈피했고 거기다 한 치의 허튼 동작도 배재되어있는 그야말로 실전 검학이
었어. 나보고 펼치라면 자신 없지만 분명 뛰어난 검식이었지. 그런데 보면
서 묘한 느낌을 받았었어. 그런데 구체화가 안되어 둘이 싸워보라고 한 것
이고. 사실 첫째 변화를 마칠때까지도 그 생각은 정리되지 않앗던게 사실이
야. 그런데 저 녀석의 검이 한차례 더 변화를 보이며 허공을 가르자 문득
어떤 단어가 떠오르더군. 긴가민가했지만 일단은 지켜보았지. 미꾸라지 같
은 눈꼬리 사나운 녀석의 발놀림에 잠시 정신을 뺏겼던 것도 단상을 정리하
는데 방해가 되었었고. 그런데 아까 했던 말을 들으며 내 생각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게 되었어."
"무형질이라는 말... 그것 말씀 입니까?"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뜬 박옹이 하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는 이 초식이 무형질이라고 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도 훑어낼 수 있겠느냐? 단 한마디로 말이다."
"속에 담긴 의미를 한마디의 언어로 말씀입니까?"
반문하고 눈을 위로 치뜬 하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었다. 마음을 이해
하고 검으로 풀어내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
하는건 아직 무리였다. 그래서 경험이란 걸 무시하기 어려운 거다.
"그래, 어쩌면 네 나이에 그걸 알길 바란 건 무리일수도 있겠구나. 그럼 내
가 말하겠다. 알광 머시기라는 괴초식은 무형질이란 말마따나 무형의 초식
이고 그걸 만든 이는 최소한 두개 이상의 무학을 섞었을 것이다. 그것도 강
호를 떨쳐 울리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본래의 내음을 완전히 제거해
내고 그 안에다 또 다른 감상을 심어놓았으니 정말 엄청나다는 말 밖에 나
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월광 머시기는 창조된 무학이라 보기 어렵다. 물론
달마 이래로 창조된 무학이 없다고 한다면 할말이 없겠지만 그건 궤변이고.
노부가 지금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겠느냐?"
하운과 북궁단야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정도로 단서를 주었는데 어쩐
지 쉽게 말이 나오지 않음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여 두 청년을 사로잡았던
월광살무에의 경외감이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 단어로
깎아내리긴 너무 아깝고도 훌륭하지 않은가? 특히나 무에 미쳐본 두 청년이
다. 풀벌레들만 무성하게 울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들을
바라보던 박옹의 심정도 착찹하긴 마찬가지 였지만 할 말이기에 해줘야 한
다. 지금 무학 토론하자고 모여앉은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대답은 엉뚱
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뭐야? 그럼 짜집기란 말이잖아? 그렇게 무시무시한 무학이 고작해서 짜잡
기란 말야? 정말 김새네."
투덜거리는 장추삼의 한마디 한마디가 아프게 이들을 후벼팠다.
짜집기... 여기저기서 필요한걸 가져와서 짜맞추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흠, 맞는 말이다. 짜집기라... 아주 정확한 비유였
어."
왠일로 자기를 다 칭찬하나 하는 얼굴로 박옹을 바라보던 장추삼이 곧 안색
을 굳혔다. 그도 영 바보는 아니다. 일행이 상대해야할 적들중에 이런 짜집
기가 가능한 인물이 있다면 - 백년전의 인물이 살아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
그건 무서운 일이다. 하운의 검식도 마지막에 그의 눈을 보지 않았다면 피
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가만? 그렇게 실력있는 인간이 뭐하러 무공을 짜집기 한거지? 뭐, 무인들
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도 하고 그런다지만 지금 말하는 분
위기로 보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음... 설마?"
장추삼의 눈이 오랜만에 번쩍 빛났다. 무언가 추리해 냈을때의 번쩍임. 턱
까지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영락없는 판관이다. 박
옹이 뒷말을 제촉하자 검지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말을 막길 몇차례 긴 한
숨과 함께 그의 입이 열렸다. 이렇게 진지해보긴 처음일지도 모른다. 빌어
먹을 동굴 생활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잘 봐요. 나같은 경우도 윗동네 머시기랑 싸움이 붙으면 깨끗이 처리하겠
지만 놈들의 뒷통수를 쳐야 할때는 절대로 얼굴을 안보일뿐 아니라 그녀석
얼굴은 손도 안댄다구. 왜냐구? 나더러 칠공토혈 이라고 다들 부르거든.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면상만 패는 건 아닌데 그리 소문
이 났더군. 그래서 기습해서 흔적 남기지 않고 치고 빠질 때는 절대로 얼굴
을 치지 않는 거라구. 그러면 대부분의 바버들은 서로 의심하고 싸우다가
자멸해 버리지. 그걸 유식한 말로 일컬어 고정관념이 때론 독보다도 무섭다
라고 표현하는거지."
"그렇다면..."
남궁선유가 낮게 으르릉 거렸다.
"그 말대로라면 무림에 잘 알려진 그, 혹은 그 단체가 자신의 독문무공을
알리지 않기 위해 그런 수고를 했다는 말인가? 그게 말이 될것 같아? 본대
로 월광살무라는 초식은 짜집기를 했더라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었
을 게야. 백년전의 혈사 이후에 크게 득본 개인이나 세력도 없었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평생을 바쳐서 그런 작업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보네."
다시 한번 장추삼의 검지손가락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이번엔 표정도 가관
이었는데 그 얼굴을 보노라니 남궁선유는 아주 불쌍한 사람처럼 전락하는
듯 하여 화가 나려 했지만 일단은 참았다. 물론 쓸데없는 말 하면 바로 혼
을 내겠지만.
"방금 전에 말한 걸 또 까먹네. 다시 말해줘요? 고정관념은 독보다도 무섭
다고 했잖아요. 왜 그걸 일대(一代)라고 단정 짓는 거에요? 무학에 잼뱅이
인 내가 봐도 월광 머시기는 정말 끔찍했거든. 무서우리 만큼 오랫동안 준
비된 초식이라고도 할수 있잖아요."
그 뒤에 그가 윗동네 쓰레기 깡패조직 둘을 혼자서 와해시키기 위해 며칠을
고뇌했느니 하는 말이 길게 이어졌지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위
의 말을 사마검군과 토론중에 적괴가 했었다는 것은 물론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비천무서에 관해 논했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매우 뛰어난 무학
이라는 것이고 차이라면 하나는 만들어 내는 것이고 하나는 파훼한다는 거
였다.
"일대라 단정 짓지 말라... 분명 흥미로운 말이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 혹은 그들이 이런 노력을 기울인 걸까?"
"아니, 내가 무슨 점쟁이 인줄 알아요? 그걸 어찌 알겠소! 그냥 말이 그렇
다는 건데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물어요! 에잇, 이제 말 안해!"
별로 기대도 안한 물음이기에 남궁선유가 장추삼을 일별하고 스스로의 생각
에 빠져 들었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운도 북궁단야도 그리고
박옹 역시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부싯돌 부딛치듯 틱틱 소리만 날뿐 어떠한
해답이 돌아와주지 않았다.
"또다른 가정이 있을수 있지."
북궁단야가 차갑게 말을 꺼냈다. 어떤 해답을 찾은건 아니지만 가정만큼은
머리 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무공의 속성을 바꾸기 위해서 택한 고육지책. 예를 들면 유(柔)하고 정(正
)한 초식을 강하고 피내음 물씬 풍기는 살초로 전환하기 위한 경우같은 거
죠. 각 초식은 그 특성과 사상이 함유된 경우가 많고 그것을 일거에 바꾸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잘 아실겁니다. 그래서 여러가지의 초식중 그 부
분부분을 모아 차원 높고도 살기어린 또 하나의 초식으로 재편집 한게 아닌
가 하는 가정도 나올법 하다고 봅니다. 억측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여러 가
지 경우의 수를 놓고 본다면 이것 또한 가능한 것이 강호상에 이처럼 살기
짙고 이처럼 유연한 초식은 없었기에 그리고 이런 초식이 짜집기라면 제 가
정도 일리가 있을수 있겠지요. 월광살무는 분명 피를 갈구하는 초식이니까요."
그것 또한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추삼의
가정과 북궁단야의 그것은 전혀 다른 듯 해도 같은 궤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무성해지면 잡념만 많아지는 법.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으면
서 가정만 늘어놓는다면 쏟아지는 의구심의 홍수에 빠져 숨조차도 쉬기 어
려울 것이다. 문제는 정리가 안 된다는 거다.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해도 마
땅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답없는 가정의 예정된 흐름이기에 알아차렸을
때 발을 빼는 편이 낫다. 그게 정신 건강은 물론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맥
을 짚는데도 유리하다.
"밤도 으슥하고 했으니 이만 객방으로 가세들."
"어? 벌써?"
"뭐 더 할말이 남았는가? 그럼 마저 해보시게."
멍석 깔아놓으면 못하는게 사람 심리다. 무언가 미진한 것 같은데 막상 하
라니까 괜시리 머리만 벅벅 긁던 박옹이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들 기지개를 한번 편다든지 하는 동작으로 긴 대화의 종지부를 알렸다.
미진하고 또 미진한 토론이었지만 어쨌든 한걸음 더 다가선 것이었고 그렇
게 접근하다 보면 언젠가 중심부에 이르를 지도 모른다. 한걸음에 몇십계단
을 오르지는 못할테니까.
아쉬움을 접어두고 산을 내려가며 괜히 박옹이 장추삼의 옆으로 왔다. 입이
좀 걸기는 해도 이런 놈이야 말로 사내가 아니던가. 무림의 추악한 이면에
단단히 질려있던 박옹이기에 장추삼처럼 가식없는 존재가 그리웠을 것이다
. 싸우자고 달려들지는 몰라도 최소한 뒤통수는 치겠다고 숨어있을 놈은 아
니기에 왠지 모를 정이 간다.
"뭐에요? 더우니까 떨어져서 걸으쇼, 예?"
"임마, 어른이 옆으로 오면 황송해 해야지 덥다니! 그래서는 나중에 이쁜
색시 못 얻는다. 노인을 공격하지 않는 놈 치고 참한 소저 만나는 경우를
본적이 없단 말이다."
"이제보니 점쟁이는 노인 몫이었군. 그 구변에 점까지 본다면 얼마 안가서
거부가 될터이니 이참에 은퇴하고 시전(市廛)에 자리를 까시오. 내가 좋은
목은 봐 주겠소."
"그런 재미없는 노년을 보내느니 차라리 굶어죽겠다. 그나저나..."
박옹의 눈이 그윽하게 젖어서 장추삼을 응시했기에 무언가 어색해진 그가
고개를 돌렸다. 저런 눈빛은 왠지 낯설다. 이효나 장유열이 보이는 거야 가
족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것도 만난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받으니 무언가 마주 대하기 어려워진다. 아주 오래전, 어
디선가 본적이 있는것도 같은데.
"아까의 보법은 최고였다. 월광 머시기도 훌륭했지만 네녀석의 그것처럼 감
동을 주는 건 아니였어. 이 나이의 늙은이가 초식, 그것도 보법을 보며 행
복해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
"여, 역시 노인은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소. 감동은 얼어 죽을 감동."
얼렁뚱땅 대꾸하고 급하게 산을 내려가는 장추삼의 뒷등을 말없이 바라보는
노강호의 얼굴에 어떤 감정이 묻어났지만 아무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제각기 서로의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빴고 우거진 나무들은 달빛을 차단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우리 시대는 끝났는지도. 남궁의 말대로 이번 일만 정리하면 금분세수
를 해야겠어. 저런 팔팔한 놈들이 날뛰는데 나 같은 늙은이가 기를 펼 수
있나...
***
이렇게 얘기가 꼬일줄은 몰랐다. 그저 사문의 밀명이었고 - 장추삼의 옆에
있으라니, 그것도 밀명 축에나 끼겠는가 - 용서받지 못할 어떤 방파에의 조
사 차원에서 오른 강호행 이었는데 사건은 여기저기서 얽히고 얽힌 나머지
처음조차도 구분이 안갈 정도였다. 애초에 처음이란게 있나 싶으니까 긴 말
이 필요 없으리라.
그리고 월광살무.
생소해야할 이 괴검초는 맞춘 듯 그의 손에서 펼쳐지고 거두어진다. 도대체
왜? 어떤 이유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모를 일이야, 하나도 모르겠어. 오직 알 수 있는 건 그 초식이 나를 부르
는 것 같다는 느낌 뿐.'
하운은 여전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피곤한 여정에 정신없이 코를
골며 단잠에 빠져있을 새벽이지만 그만이 홀로 깨어 밤을 벗 삼아 상념의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한 시진 남짓을 고민했지만 산
에서 내려올 때 보다 의문은 더 깊어져만 갔기에 차라리 잠을 청하는 게 나
았을 거라 생각도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후회처럼 부질없는 두뇌의 소모도 없다. 그러나 인간인 이
상 후회는 필수처럼 찾아오고 안할 거라 마음을 먹어도 그건 부질없는 소리
다. 한 숨 자두었더라면 불과 두어 시진 후의 햇살 아래서 편안했을지도 모
르겠지만 말해봐야 공염불이다. 속절 없이 시간은 흐르고 여름 벌레들도 밤
새 울다 지쳐 목이 쉰것처럼 소리가 잦아들무렵 그의 등뒤에서 인기척이 들
려왔다. 발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수 있기에 답답한 마음을 애써 거두고
하운이 빙글 돌아서며 웃음으로 새벽의 동지를 맞이했다.
"하하... 장형은 어인일로 잠못 이루고 이런 야심한 시각에 서성이는 게요?
아주 흉악한 악몽이라도 꾼 사람마냥 안색이 납덩어리 처럼 굳어있으니 말
이오."
'읔!'
장추삼은 또 한번 놀라야했다. 농담으로 그가 말한게 사실 맞았기 때문이다.
이름모를 꽃밭에서 우건을 만난것까진 좋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사소한
다툼을 하였고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울길래 달래준답시고 살짝 어깨를 안
았더니 긴 머리를 쳐든 얼굴이 변해있었다.
북궁단야로 말이다!
지상 최악의 악몽 덕에 가쁜 숨까지 몰아쉬고 이마를 훔쳐보니 식은땀이 홍
건하고 머리가 다 어질어질 하였다. 그리고 옆을보니 바로 그 얼굴이 신나
게 잠을 자고 있지 않은가. 이 상태에서 누워봐야 밤 새도록 악몽을 동반한
가위눌림에 시달릴게 뻔했기에 피곤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북궁단야의 옆을 지나칠때 한번 걷어차주고 싶었지만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어서 조용히 꼬리를 말고 객잔내의 연못가로 나섰는데 선객이 있
었기에 내심 반가워서 살금살금 접근했건만 어떻게 알아차리고 먼저 인사를
건낸 하운이었다.
'어쨌든 재미없어. 이사람은 말야.'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연못가에 널려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에 대충 앉아서
멀거니 물고기떼를 바라보는 장추삼은 바라이 찬지, 바위에 이슬이 얼마나
내렸는지 모를 정도로 비몽사몽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들의 하남행
은 강행군이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었고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장추삼은 아
주 죽을맛 이었다.
[16103] [연재] 삼류무사-119
"잠이 안오시오? 아니면 물고기랑 긴히 할말이라도 있었던거요? 나는 장형
이 어류와도 통한다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오. 하하핫."
'아, 재미없어.'
농담이라고 한거 같은데 안 웃기다. 이 사람은 우스개조차도 무언가 맥이
빠진다. 그리고 웃기기보다 그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지 않은가 하여 괜
히 한 번 더 머리를 굴리게 된다. 그래도 말을 하며 부담이 없는 건 그의
선한 마음이 알게 모르게 우러나와 모든 이들을 촉촉히 적셔주기 때문이리
라. 바로 이런 사람이 앞에서 한잔도 안마시면서 술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벗일 거라고 장추삼은 생각했다. 그러기에 재미가 없어도 바보처럼 빙긋이
미소 지어 주는 게 아니겠는가. 딴 사람이 이렇게 썰렁한 농담을 했다면 어
림도 없다.
"오, 오늘은 내 우스개가 그럭저럭 먹히나 보오! 장형도 미소 짓고 말이오.
전에는 사제들에게 이런 말 하면 모두들 하늘만 바라보..."
흠칫.
말실수라고 생각했는지 하운이 급히 입을 닫았다. 그러나 장추삼에게 그런
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그의 과대망상에 혓바닥이 쑥 나왔을 뿐
이었다.
'아이고~ 재발 딴대가서는 참아주시오. 나니 되서 맞장구치는 거니까.'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가로질러서 넓게 퍼졌다. 장추삼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데 하운 혼자 안절부절 한 것이 크게 말실수 했다는 기색이 역력
했기에 눈 찢어지고 심퉁 맞아 보이는 청년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 생각해보라. 박옹의 말이 아니더라도 오관 번듯하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예의란 걸 실현시키는 하운을 보며 일반 세가에서 평범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고 누가 믿겠는가? 아무리 눈치코치 없는 바보라도 그런 말은 도리질
할 것이다.
"어허험... 밤바람은 역시 차구려. 여름이라고 해도 새벽이슬에 몸을 드러
내는 건 몸에 안 좋은 것 같소."
"그래요."
"내가 보기에 장형도 많이 피곤한 듯 하고 내일부터 꽤나 바빠질 텐데 눈을
좀 더 붙이시지 그러오?"
"그럴까요."
정통 매가리 없는 대화. 침묵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법한, 건성끼가 물씬 묻
어나는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는 각자에게 지루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
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알맹이 없는 대화는 그럭저럭 이어졌다. 그러나 씨
없는 수박으로 후사를 기대하기 어렵고 겉도는 대화로 재미를 유지시킨다
는 건 난망이다. 버틸 대로 버텨서 서로가 슬슬 따분해질 무렵 하운도 이
지겨운 대화를 종식시키고 싶었는지 작별성 인사를 던졌는데 장추삼이 낼름
삼켜버렸다.
"이만 날도 축축해지니 건강상..."
"아아, 그런 재미없는 대화는 관두고. 하형은 맘속에 숨겨둔 소저 없어요?
내가 여자라면 반합을 싸들고 쫓아다니겠다. 인물 훤칠하지, 사람 신실하지
, 거기다 능력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오? 이쁜 여동생만 있
었더라면 볼 것도 없이 소개 시킬 텐데."
"마, 마음에 둔 소저?"
일격을 당한 하운이 버벅였다. 얼굴까지 빨개져서 허둥대는 모습은 영판 '
있소!' 를 대변하기에 흥미가 발동한 장추삼의 유도심문이 집요하게 이어졌
다. 이런 말 끌어내는 건 일도 아니다. 순진한 하운같은 성격이라면 여반장
보다 쉬울 것이다. 친구들끼리 술 한 잔 하면서 이러한 농담을 실전처럼 수
없이 치른 장추삼 이었다. 유곽근처에서 새벽에 어슬렁거리는 하대보를 보
았다는 첩보만으로 그가 어떤 기녀에게 넋을 잃고 총각딱지를 뗐을 거라는
추측하에 반 시진을 넘게 꼬드겨서 끝내 토설하게 만든 전력도 있거니와 청
빈로 사인방중에 가장 먼저 여인네와 만나고 다니던 조명산의 취중 실언 한
마디를 물고 늘어져 기어코 사건의 전모를 들은 적도 있다.
"없는 거요? 흠... 알았소이다. 이건 같은 남자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로군
. 설마하니 그 나이에 동정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내
가 기가막힌 아가씨들이 우글거리는 유곽을 하나 알고 있으니 기분 전환이
라도 할 겸 가봅시다. 양귀? 서시? 허, 가기서 그런 여자들은 미인 축에도
끼지 못한다오. 벌써부터 회가 동하지 않소?"
"유곽이라니! 당치도 않소!"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러는 거지? 내가 무슨 못할 말이라도 한건가? 마음
에 둔 여자 없다니까 객고라도 풀어주겠다는 선의의 마음에서 말을 꺼낸 건
데. 정말 섭섭하오. 상대방의 마음을 이리도 무시해도 되는 것이오? 하기야
, 나 같은 놈이 선의든 뭐든 가진 것 자체가 웃기지. 그냥 들어가서 자는
건데 엉뚱한 말이나 늘어놓은 거야. 이럴 때 내가 너무 싫어진다니까..."
마지막으로 강렬한 한숨 한방을 터트리자 괜히 하운만 나쁜 사람이 되었다.
본래 천성이 선하기에 이런 대화에 익숙치않고 교활한 장추삼의 속내를 알
도리가 없으니 머리만 긁게 되는 것이다.
휘이잉-
짧고 강한 바람이 스치우듯 지나치자 새벽이슬을 머금은 잎새들이 후두둑
춤을 추며 작은 물방울을 뱉아 내었다. 아직도 달은 처연히 빛나고 있었기
에 그들은 하늘 속 어딘가에 있는 각자의 얘기를 가져올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장추삼이 하운에게 짓궃은 농담을 해서라도 그의 가슴속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였을까? 마
침 하운에게도 정인이 있었기에 말이 길어졌을 뿐 그의 사정은 장추삼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던 건 열 살 때의 겨울이었다오. 어린아이 눈망울처
럼 커다란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지..."
아득한 기억의 마차를 타고 이십 여 년 전의 동심이 된 하운은 고즈넉한 목
소리로 그 만의 사랑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밋밋하고 따분하기
까지 한, 커다란 일이나 사건도 없었던 사랑이야기. 그러나 장추삼은 알 수
있었다. 그녀와 - 이름을 얘기해주지 않으니 이렇게 칭하는 도리밖에 없었
다 - 그의 사랑은 어떤 요란하고 격정적인 그것보다 오히려 견고하고 충실
하다는 것을. 말로는 야단 법석 하거나 순식간에 타오르고 이내 식어버리는
사랑의 공허와는 차원이 다른 무엇이 있음을 살짝 엿보게 되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서글프고 또다른 마음에서 벅차오르는 기대가 있었다.
하운의 말이 끝나자 장추삼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치기어린 소년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무겁지는 않았으나 회한이 담겨 있었기에 그의 말은
절절했고 그래서 하운의 마음 깊숙이 와 닿았다. 너무나 사랑 했었으나 우
유부단하고 막무가내인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여 날아가 버린 첫사랑의 추억
은 조소령이란 목표가 생기고 그야말로 최선을 다한 삶을 걸었던 하운과 대
비되었기에 더욱더 애절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충실했었더라면. 조금만 더
미래를 바라볼 안목이 있었더라면.
"장형, 그렇지만 미련을 남겨두기엔 장형의 미래가 너무 아름답지 않소?"
미련을 남겨두기엔 미래가 너무 아름다워서...
장추삼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아직도 미래를 보고 있지 못하는 건 아닐까? 같은 실수를 또 한 번 되풀이
할까봐 그리도 소극적인 것일까?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걸려 다가오는 사랑
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걸까? 왜 그리 과거에 집착하는 걸까?
'난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바라볼 대상조차도 뿌옇게 흐려
진 지금,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하듯 바라보는 시늉만 하는 건가. 과거
를 추억해야만 이전의 못난 자신에게서 어느 정도 보상받는다는 착각을 하
는 건 아닌가...'
"그래도 옛 추억을 반추할줄 아는 사람과 같이 앉아 있는 편이 이전 자신의
길을 부정하는 이와 있는것 보다 낫다고들 합디다. 장형의 과거도 장형이
고 지금도 물론 장형이지만 미래의 장형도 반드시 장형이란 걸 알았으면 하
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과는 상종조차 하지 말란 말도 있잖소?"
"내가 아는 누군가와 똑같은 말을 하네?"
장추삼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나 보다. 그의 주위
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다. 부친과 표국주를 제외한다고 해도 듬직한 누
이동생 같은 정혜란과 넉넉한 - 이런 표현을 여자에게 쓰는 것이 왠지 걸리
긴 하지만 - 당소소가 있고, 어떤 말을 해도 이해할 것 같은 하운과 그리고
... 그녀. 이제 그녀를 명명할 때에 연연에서 우건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 얼음 덩어리는 일단 제외다. 왜냐하면 얼음 덩어리니까.
하운의 말대로 앞만 봐도 바쁜 시간이 그의 귓가를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데 자꾸 마음은 쉼터를 못 찾아서 허공을 선회하는 잠자리 마냥 제자
리를 맴돈다.
"현재의 그녀에게 미안한거요?"
"엥?"
얘기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 도사청년이 자신의 뒤를 밟았다는 건 더
더욱 말이 안 되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로 점복술(占卜術)
에 일가견이 있는 것인가? 그의 의아한 눈빛이 재미있었는지 하운이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놀랄 것 없소. 장형의 말엔 과거에의 후회만큼 이나, 맞이할 미래의
불안이 짙게 깔려 있었다오. 내 비록 비상 하리 만치 빠른 눈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나 전후를 놓고 봤을때 그정도의 추론을 할 머리는 가지고
있소이다. 장형은 누군가에게 계속 미안해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오."
맑은 웃음이 화원을 가득 메우자 엉뚱한 목소리가 화답을 했다. 똑같이 투
명하기는 하나 앞서의 것이 푸근하고 안온하다고 한다면 뒤에 들린 목소리
는 시리도록 맑고 더할 나위 없이 차가운 것이었다.
"이른 새벽에 뭐가 그리 즐거운 거요?"
'읔!'
냉랭한 목소리만큼이나 차가운 표정의 북궁단야가 그에 어울리는 달빛을 받
으며 객잔 건물에서 화원 쪽으로 걸어오는걸 보며 장추삼은 왠지 뒤가 캥겼
다. 평소에도 그리 달가운 상대가 아니였지만 지금의 상황은 더더욱 꺼림직
했기에 스스로에게도 왜 이러나 반문하고 싶었다.
"오늘따라 불면의 새벽을 맞이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을까? 어쩌다가 이런
새벽에 기침하신거요?"
"왠지..."
"아무튼 어서 오시오. 지금 장형과 재미있는 얘기를 하던 중 이였소이다."
"재미있는 얘기라?"
부드러운 새벽바람의 희롱이 간지러운 듯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한손으로
쓰다듬으며 북궁단야가 둘 사이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장추삼을 대변이라도 하듯 친절하게도 하운은 여지껏 했던 이야기를 용약해
서 들려주었고,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던 긴 머리의 청년이 첫사랑
과 끊어내지 못한 정신적 동거에 관해 말을 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 같은 고민 이지."
장추삼을 한번 보고 코웃음을 친 북궁단야가 길게 늘어져있는 나뭇가지의
잎새를 하나 따 내었다. 그것은 왠일인지 말라 있었기에 바스러지는 것 같
은 소리를 내었다. 손바닥에 놓여있는 마른 잎새를 보던 그가 주먹을 꼭 쥐
어 생명을 다한 나무의 일부를 가루로 만들었다.
"과거를 모르는 체 하는 놈도 문제지만 그것에 집착해서 한걸음 앞으로 나
가지 못한다면 사내가 아니다. 사람으로서도 실격이지."
'끄응~'
짠 것도 아닌데 왜 이들은 비슷한 생각으로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걸까?
말이 쉽지, 과거라는 게 한순간에 잊혀지는 사건 같은 건 아닐진대 말이다.
북궁단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추삼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첫사랑의 아픔 같은 기억 따위가 없기에 그의 마음을 이해하
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건 모르지만 사랑의 감정 같은 문제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그는 꼭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너의 머뭇거림에 또 다른 상대가 상처 받는다면 같은 실수를 다시 한번 반
복하게 되는 거다. 알면서 또 틀리는 건 다섯 살짜리라도 안한다."
점쟁이는 많았다. '장추삼의 새로운 상대' 라는 언질을 준 이는 아무도 없
건만 북궁단야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고 이야기에 파묻혀 그들도
의문을 가지지 않고 받아들였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말도 아니 였군."
북궁단야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그런가요, 하고는 하운이 쓰게 웃었다. 얘기
를 이리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이야 예상도 못했는데 그는 마치 자기일이
라도 되는 양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장추삼의 고민을 분석했다.
'언제나 진지하군. 저런식으로 매사를 임하게 되면 피곤은 쌓이고 언젠가
후유증이 올지도 모른다. 북궁형도 정신적으로 조금은 긴장을 늦춰도 될 터
인데.'
하운이 딴 생각을 하는데 북궁단야가 일어서더니 칼을 뽑아 들고는 나름대
로 어떤 검로를 밟아보려고 시도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나름대로 노력은 하
는데 잘 되지 않는 듯 전체적으로 어색했지만 검풍에 담긴 패도적인 기운만
은 여전했다.
한차례 몸을 풀고 나서 다시 바위에 앉으며 그가 씁쓸하게 검을 거두어 들
였다.
"잘 안되는군."
"처음에 그 정도면 훌륭한 것이오. 특히 검에 담긴 힘만큼은 여전한 듯 하
오만."
하운의 대꾸에 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안면 근육을 잘 움직이지 않
는 북궁단야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표정. 그도 그럴 것이 몇 번을 보고 나름
대로 해체해 본 검식이지만 펼치는 데 무리가 따름을 토로하고 있는데 그것
을 한번 보고 정확히 구현해 낸 사람이 옆에서 처음에 그 정도면 어쩌구,
하니 어이없지 않은가.
그가 시도했던 검법은 물론 월광살무의 첫번째 변화였다.
"그럼 한번 보고 속에 담긴 의미까지 파악한 이는 천재란 말이로군."
"대단할 거 없어요. 그저 나와 파장이 맞은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가시돋힌 말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하운
이기에 별달리 할 말이 없어서 북궁단야는 아까의 살벌했던 비무를 되새겨
보았다. 처음의 변화야 사무귀일로 어떻게든 막아 보겠으나 두번째의 움직
임이 찾아든다면...
"하형은 무슨 생각으로 저 친구에게 그리 독수를 쓴 것이오? 잘못했으면 송
장 하나 치울 뻔 하지 않았소? 요행수로 피했기에 망정이지."
"북궁형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오."
" ! "
듣기에 따라 굉장히 실례되는 말. 그러나 하운은 별로 미안할 것 없는 사람
마냥 말을 계속했다. 무학에 관한 문제라면 유하던 그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래서 무림인인 것이다.
"말을 정정하겠소. 상대가 제 아무리 누구라 해도 두번째 변화를 예고 없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오. 단 한명, 장형을 제외하고는 말이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장추삼은 자신이 화제의 주인공이 되자 슬며시 고
개를 들었다. 딴 청 부리고 있어도 들릴 건 다 들렸기에 그들이 무엇에 관
해 말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아까의 섬찟했던 순간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
리고 하운의 눈동자에 박혀 있었던 단어도.
믿는다(信)!
스스로도 자신을 회의(懷疑)하고 있을 때 상대방이 보여준 무조건적 믿음.
그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안 간다. 일방적이며
독선적인 하운의 믿음이 그를 또 다른 세계로 초대한 것이니 세상사는 역
시 꼭 맞추어 돌아가는 것 만 은 아니리라.
"왜 나였소?"
이것만은 반드시 묻고 싶었다. 그토록 소름 돋는 검식의 첫번째 견식자가
왜 자신이었느냐에 관해 말이다.
"장형이니까."
간단명료한 대답.
순간적으로 북궁단야는 장추삼이 몹시도 부러웠다. 저만한 검수에게 그런
믿음을 받는다는 건 무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일 것이다.
내게도 언젠가는 저 말을 할까...
"자자, 새벽이슬이 차오. 모두들 들어가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도록 합시
다. 밤을 샐 수 야 없지 않소."
하운이 천천히 바위에서 일어서자 뒤따라 북궁단야가 일어섰다. 장추삼이
그대로 앉아있는 걸 보고 하운이 재촉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억지로라도 눈을 좀 붙여야 하오. 지금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에 피로
가 몰려온다오."
"고맙소."
짧게 말하고 벌떡 일어선 장추삼이 객잔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졸지
에 남겨진 둘은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 털레털레 그의 뒤를 쫓아왔다. 새벽
이슬을 맞은 화원은 어느 때 보다 싱그러웠고 내일에의 불안과는 상관없이
밝아오는 여명 속에 세 명의 사내는 쉴 곳을 찾아 지친 몸을 움직이고 있었
다.
나보다 더 나를 믿어준 동료여, 진심으로 고맙소...
[16110] [연재] 삼류무사-120
묵경루(默景樓)란 이름의 주점은 전혀 고요하지 않았다. 조용할수가 없는
것이 번화가에서 '고요한 경치'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고 화창
한 날씨까지 곁들여지자 인파가 몰려서 주루가 미어 터질듯 했다. 여기저기
서 손님이 점소이를 부르는 소리와 왁자지껄한 대화, 주문 받은 점소이들의
경쾌한 재창까지 곁들어지자 이곳이 음식점인지 시장통인지 분간하기 어려
웠다.
"손님께선 뭘 주문하시겠습니까요?"
주점 경력 칠년이 넘는 으뜸 점소이 오정달은 직감적으로 똥 씹은 표정의
이 손님을 잘못 건드리면 골치 아파질거란 느낌이 왔기에 여느 때 보다 조
심스럽게 주문을 받으려 했다. 근자에 들어 이렇게 에의 차리고 손님을 맞
이한 건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야야, 시끄러우니까 절루 가. 음식 안 먹고 자리만 축내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빠직-
이렇게 최선을 다해 대했거늘. 돌아오는 대답이 고작해서 이따위란 말인가.
대부분의 점소이들이 그러하듯 오정달도 소싯적에 힘께나 썼던 인물이다.
아직도 시장통의 뒷골목에 가면 어느 정도 대접을 받는다. 성깔은 더러워
보이지만 무인티는 자라 발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놈이 어디서 감히 이따위
로 말을 해대는가. 오정달은 점소이들 중에서도 장 급에 속하기에 다른 녀
석들이 봤을까 걱정되어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이 이쪽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봐요 손님."
잔뜩 불량기 어린 목소리로 오정달이 불손한 손님을 불렀다. 이정도의 위압
감이면 왠만한 장한들이라도 지레 겁을 먹고 고분고분해진다. 그의 커다란
덩치와 험악한 인상도 무시할 수 없는 자산 가운데 하나였다. 턱을 괴고 탁
자를 응시하던 손님이 고개를 들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는데..."
엄청 내리 깔은 음성에서 뒷골목 특유의 음습한 내음이 짙게 배어져 나왔다
.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손님은 눈이 동그레졌고 오정달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곧 손님은 꼬리를 말고 대충 음식을 주문해서 급히 먹고 도
망치듯 자리를 떠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은 오정달을 불렀다.
"이봐, 점소이."
"옙!"
패기 있게 대답한 오정달은 손님의 다음 말에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이 되었다.
"죽을래?"
"뭐요... 헉!"
엉겨보려 눈살을 찌푸리려던 그는 손님의 눈가에서 스산한 살기를 보고 급
히 입을 틀어막았다. 무인일지 아닐지는 몰라도 저자는 진짜였다. 덩치나
외모로 한 몫 해보려는 얼치기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거다. 저런 사람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가라... 오늘 기분 더러우니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란 말이다."
"예옙!"
눈썹이 휘날리도록 도망가는 점소이의 뒷등을 멍청히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내는 손님은 다름 아닌 장추삼 이었다. 방금 전에 그가 말 한
대로 기분이 매우 안 좋은 상태라 평소에 즐기지 않는 낯 술에 대해서도 심
각하게 고려중일 정도였으니 그 상태가 짐작 가는 바였다.
"빌어먹을 영감쟁이..."
아침에 어찌어찌 일어나 모여앉은 일행은 간단한 탕 한 그릇을 비우며 어떻
게 움직일까 상의를 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은 쪽에서 결정이 나게 되었
고 각자 맡은 임무가 하나하나 정해졌었다.
"그럼 긴 머리 너는 무룡숙 주변의 매복 사항이라든가 하는 주변적인 상황
을 검토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네 기도가 눈에 띠므로 절대 무룡숙
근처 십장내로는 접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옹의 말에 북궁단야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생강이 맵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박옹은 모두의 특성에 맞는 일을 제시해 주었고 일행들도
군소리 없이 따르는 폼이 암묵적으로 그의 식견을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하운이라고 했던가? 너는 긴 머리가 접근하지 못하는 그 안쪽에서 무룡숙
의 경비 형태와 교대 시간 등을 알아 보거라. 너는 묻히기 쉬운 외양과 드
러나지 않는 기도를 가지고 있으니 큰 문제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
다. 네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지 설명을 안 해도 될 거다."
"알겠습니다, 노선배님."
모두의 표정에서 비감함이 넘쳐흘렀고 덩달아 고무된 장추삼도 괜히 젓가락
을 꼭 움켜쥐었다. 바야흐로 무언가 벌어지려 하는 것이다.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제 곧 보게 될 것이다.
"나와 남궁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단리가의 아이는 우리와 같이 다닐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해라."
"예."
"그럼 이만 일어나자. 벌써 해가 중천이다. 야심한 시각은 그들도 경계를
늦추지 않을지도 모르니 가급적이면 빠른 시간 내에 일을 처리하는 게 낫다."
"어? 나는?"
장추삼이 자신을 가리키며 황당해 했다.
"엥? 네녀석이 있었구나?"
'엥, 네녀석이 있었구나... 이 노인네가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는 거야!'
늙으면 사람이 이렇게 잊어버리는 게 많다니까, 하면서 박옹이 장추삼을 멀
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도 할일이 없어서 박옹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
리던 박옹이 뒷목을 손우로 두어번 꾹꾹 누르고는 입이 찢어져 라고 하품을
했다. 많이 피곤했으리라.
"말을 해요, 말을! 난 뭐하냐구요!"
"가만 좀 있어봐 이녀석아. 생각하잖아."
번뜩!
위의 말을 볼 때 애당초 박옹은 그를 염두조차 하지 않았다는 거다. 쫌생이
같은 노인네가 분명 어제 일을 담아두었다가 지금 분풀이 하는게 틀림없었
다. 동글동글한 것은 액면만이고 마음속은 삐죽삐죽 날이 서 있을 것이다.
정의의 응징을 위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박옹이 한마디 했다.
"너 뭐 잘하냐?"
"엥?"
"뭐 잘하냐고 묻잖냐."
"으음..."
"매복? 은신? 그렇다고 어디 큰 세가에서라도 지내봐서 전체적인 상황이라
도 잘 파악하냐?"
"으읔..."
"말귀를 못 알아듣나? 뭘 잘하냐고 묻잖아?"
"그, 그게..."
헹, 하고 코웃음을 치며 박옹이 실실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얄미워서 멋
지게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할 말이 없다. 원통하고 절통한 일이
지만 현실은 지독히도 냉정한 것이다. 단리혜가 입을 가리고 웃는 게 보여
서 얼굴까지 빨개졌지만 박옹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어제 당한
수모를 이자까지 쳐서 받겠다는 의지가 뚜렷이 보였다.
"쌈질 좀 하나본대 지금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되거든. 뭐 말 빨이 좋
다면 정탐이라도 시키겠지만 시비 거는 거 외에 별 볼일 없는 주둥이 같고.
문젤세, 문제야."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 란 말이 가슴깊이 실감나는 순간 이었다.
참혹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는 장추삼에게 적당히 놀렸다고 생각했는지 온화
한 목소리로 박옹이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목소리와 내용은 전혀 다른
색깔이었다. 그래서 장추삼은 더 슬펐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바쁘게 일을 하는데 네녀석 혼자서 객방을 지키라고
하긴 뭐하니 무엇이든 해야겠지. 지금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너는 무룡
숙 근처 아무 주루, 되도록 큰 곳이면 좋겠지, 에 가서 하루 종일 죽치며
사람들이 그곳에 관해 뭐라고들 하나 청취하거라. 본래 여론 수렴처럼 중요
한 일도 없는 법. 적을 알고 나를 알면 필승이라고 하였으니 근처 사람들이
평하는 무룡숙을 알아두는 것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끄응~"
말이 좋아 여론 수렴이고 적을 아는 것이지, 이건 하루종일 주루에서 멀거
니 앉아있으란 말 아닌가. 너무 기가 막혔지만 도대체가 할말이 없다. 완패다.
"자, 그럼 각자 맡은 일을 하러 가자고!"
다섯명이 힘차게 일어섰고 강시 비스므리한 것 하나가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끊 떨어진 연이 따로 없네, 젠장.'
참혹한 현실에 내던져진 장추삼은 어떻게든 인격체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려
고 노력을 했다. 잠깐 흥분해서 덩치 큰 점소이 녀석을 갈궈 주었지만 천천
히 냉정을 찾고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온 신경을 청력에
집중시키고 오가는 말 속에서 무룡숙이라는 말을 잡아내어 보았다. 흥분하
기 잘하는 장추삼의 성격을 고려하여 주변업무에서 제외시킨 박옹의 배려였
건만 - 할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 그는 곧이곧대로 믿고 어쨌든 시
킨 일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반 시진 후...
'젠장!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말이 여기저기서 엉키고 먼 곳에서 떠드는
인간들과 가까이 있는 인간들의 소리가 섞이니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있나!
자리를 바꾸던가 해야지, 원.'
그는 아까 기죽인 덩치를 불러서 주루의 중앙에 위치한 탁자로 자리를 옮겼
다.
또, 반시진 후...
'으아아악! 아예 이놈말과 저놈말이 합쳐지잖아! 됐어! 안해! 에초에 이따
위 말도 안되는 업무를 내린 늙은이의 잘못이야. 난 최선을 다 했다구!'
머리를 쥐어뜯던 장추삼이 쾡한 눈으로 점소이를 불러서 화주에 간단한 안
주를 시켰다. 술이라도 붓지 않고서는 날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을 성 싶
었다. 낯 술을 금기시하는 그였으나 이번만은 예외다. 열통이 터져서 죽겠
는데 어쩌란 말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마냥 주루에 죽치고 앉아 있
을 순 없다.
막상 술이 나오자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낯 술에 취해본 경험이 있는 사
람이라면 그 압도적인 공포에 관해 잘 알 것이다. 하루 종일 시체가 됨은
물론 빠개지도록 아파오는 머리며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술 냄새에 잘못 걸리
면 다음날까지도 발목이 잡힌다. 숙취의 해소방법은 오로지 잠일 만큼 무시
무시한 위력의 낯 술.
청빈로에서 한참 힘주고 다닐 무렵의 장추삼 역시 객기로 한 번 먹었다가
된통 걸려본 경험이 있었기에 금기시하여 여지껏 '낯 술은 세잔만' 의 신조
를 잘 지켜왔던 터였다. 그래서 눈앞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술병이 못미
더운 것이리라.
'에이~ 이거 어쩌지. 확 먹고 퍼져 잘까? 아냐, 괜히 그랬다가 내일까지 헤
롱거리면 이 무슨 망신이겠어.'
일 시켜 놓았더니 술이나 먹었다고 방방 뜰 박옹이 떠올라 더 손이 안 간다
. 그렇다고 안 먹자니 너무 맹숭맹숭하다. 할 일이 없으니 괜시리 한 잔 따
라 놓고 여기저기 눈동자를 굴리게 된다. 많은 수의 사람들은 그 만큼의 색
을 가지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내음을 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침울했던
장추삼의 입매에도 어느새 힘없는 미소가 어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사
람들에겐 자기가 가지는 고유의 모양새와 그 각자의 느낌이 있고, 숨기려
해도 자연적으로 드러나지 않는가.
'재미있군. 구경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이 동종에의 관찰 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아주 재대로가 아닌가. 에라~ 느긋하게 관전자나 되어 볼까나?'
그런데 그도 모르는 게 있었다. 관전자의 입장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치는
언제나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들을 바라보는 지금에도 누군가가
똑같은 입장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래서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 했던가?
다행히 장추삼은 눈치가 빠르다. 아주 빠르다. 그래서 그를 응시하는 어떤
시선이 있음을 곧 잡아내었다.
'뭐야? 어느 놈이 감히 나를 처다 보고 있는 거야?'
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눈치하면 청빈로 칭
공토혈! 어디서도 틈을 주지 않는 장추삼 이었다.
어디서 감히 그를 훔쳐보고 있다는 건가!
눈길을 잡아내는 대는 두 번의 목 움직임이 필요 없었다. 오른손잡이의 특
성상 좌측으로 한번 좌중을 훑었던 그의 고개가 우측으로 이동하자마자 바
로 시선의 주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무언가 사건을 기대했던 장추삼은 맥
이 다 빠졌다. 그곳엔 파리하고도 여린 사내가 하운만큼이나 맑은 미소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사건? 솔직히 말해서 시비를 바랬었던 것이
다. 재대로 한번 어우러지길 바랬다. 기분도 꿀꿀한대 몸 한 번 풀면 기분
좋게 땀도 울리고 마음속까지 상쾌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뒷골목 시
절 자신보다 약자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게 철칙이었지만 먼저 시비를 거
는 놈들에게는 관대히 예외를 배풀어 몸소 지도를 내려주곤 했다. 그나마
자신이 손 봐 주면 병신은 만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저런 얼굴엔 인상도 쓰기 어렵다. 악의라곤 찾아보기도 어려운데 어
디서 시비인가?
눈 이 마주치자 빙긋 웃으며 잔까지 쳐드는 사내에게 바보처럼 마주 잔을
드는 장추삼의 입에서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오늘 일진? 보기드믄 최악
의 날 중에 하나리라. 그러고 보니 병약해 보이면서 무슨 놈의 낯 술인가?
의원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주워들은 것도 있고 안색만으로도 판단한 상태
가 느껴지기에 잔을 든 사내가 결코 정상이 아니란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첫댓글 월광머시기
와
소림사.
즐감합니다.
즐독 ㄳ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삼류무사의 삼류에 공감합니다. 멋진 삼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