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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1일 수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예레 15,10.16-21
복 음 : 마태 13,44-46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혼자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인터넷 검색으로 맛집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짬뽕 맛집이 있었습니다. 메뉴는 딱 두 개였습니다.
‘짬뽕과 탕수육’. 그런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도 ‘언제 이 집에 와서 짬뽕을 먹어보겠어?’라는 생각으로 줄을 섰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상 다 치우면 들어오라니까요.”라면서 짜증을 냅니다.
뻘쭘하게 앉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상 다 치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자리에 앉자, “무엇을 드릴까요?”라고 퉁명하게 묻습니다.
“짬뽕과 탕수육만 있는 거죠?”라고 묻자, “메뉴 보면 알잖아요.”라고 대답하십니다.
“물은 어디 있나요?”라고 물으니,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고 “물을 셀프입니다.”라고 말만 합니다.
기분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한마디 하려다가 다시 오지 않을 집이라는 생각에 참았습니다.
음식은 맛있었을까요? 별로였습니다. 그냥 평범한 짬뽕 맛입니다.
기분도 좋지 않아서 두 젓가락 먹고 그냥 나왔습니다.
화났다는 것을 이것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제 감정을 눈치챘는지 주인은 계산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죄송합니다. 오늘 손님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어요.”
더 짜증이 났습니다. 짜증의 원인이 손님이라니….
결국 저 때문에 짜증이 났다는 말이 아닙니까?
누구나 남 탓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할 이유보다 자기 힘든 것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맛집이 된 이유가 단순히 음식 맛 때문일까요?
근본적으로는 이 집을 찾는 손님 때문이 아닐까요? 나중에 보니 결국 폐업했습니다.
손님에게 감사하지 않으니 망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식당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오는 손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을 짜증의 대상으로 생각하니, 장사가 제대로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중요한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
좋은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서 그것을 샀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은 것 발견하면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죄를 지어서라도 자기 것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랑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마치 하나의 짐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남 탓만 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 탓만 하다가는 우리도 망합니다.
진정한 보물,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13,46).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되듯이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내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때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머물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카9,62)
내 삶의 자리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 보물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2사무22,29).
이제 당신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보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절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내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참된 행복, 참된 기쁨, 참된 보물,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 그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 13,44)
이는 그 ‘보물’이 멀리 하늘 위에 높이 매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일터인 내 직장,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보물'은 내가 있는 이곳에 ‘이미 묻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그렇지만 그 보물은 누구나 발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밭을 충실히 일구고 가꾸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우리의 머리속, 관념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주를 찾아다니는' 행동 안에 깃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길을 찾는 발길 그 안에, 진리를 더듬는 손길 그 안에,
사랑을 찾아 나서는 우리의 행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신앙의 여정, 신앙의 행위 그 안에 깃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 진주는 누구나 발견하는 것은 아니라 열심히 찾아다니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이 '하늘나라'를 어떻게 얻을 수가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마태 13,44.46)
이는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비록 보물을 발견하고 찾았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그 보물을 차지하려면, '먼저' '가진 것을 다 파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목숨까지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비우지 않고는 채워지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나 비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는' 일입니다.
사는 일이 본질이지, 비우는 일이 본질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그 보물이 더 값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는' 일입니다.
비록 보물을 발견했다 해도, 또 가진 것을 다 팔았다 해도,
그 보물을 실제로 사들이기 전에는 아직 그 보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살 때라야 그것은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보물이 없다면 결코 그것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보물이 '먼저' 주어졌다는 사실이요, 그 보물이 우리를 이끈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루카 17,21) 말입니다.
그러니 그 이끄심에 응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그 보물을 차지하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그 보물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 그리스도요, 그분의 나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태 13,44)
주님!
밭을 일구는 제 손길이 당신의 나라를 찾아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고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값지고,
그 모든 것을 합해도 그보다 나을 수 없는,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기에,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바로 그것을 얻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느덧 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는 유명한 카지노가 있습니다.
카지노에서 게임을 하기도 하고, 공연을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카지노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즐기면서, 공연을 보는 건 좋지만, 노다지를 찾겠다고 올인하면
자칫 몸도 상하고, 가진 재산도 모두 날리게 됩니다. 한마디로 패가망신하게 됩니다.
매일 복권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즐기면 좋지만, 복권에 올인하면 역시 몸도 상하고, 영적으로 메마르게 됩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박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노다지가 묻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처럼 투자는 분산해서 하면 좋다고 합니다.
적당한 투자는 좋지만, 주식에 올인하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카지노, 복권, 주식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할 줄도 모르고, 일단 겁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카지노’가 아닙니다.
‘복권’도 아닙니다. ‘주식’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밭은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부른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들어간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오늘은 이냐시오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이라는 보물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영신수련은 4주간에 걸쳐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길잡이입니다.
준비기도, 구할 은총, 주어진 성서 말씀 묵상, 마침 기도, 묵상 내용 정리의 순서로
30일 동안 하루에 5시간 정도 기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10년 동안 신학생들과 함께 3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미국 있기 때문에 아쉽게도 30일 피정에 함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신수련은 그 내용이 모두 좋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원리와 기초’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따름으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 세상 모든 걸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유익하면 그것을 사용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병환자가 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기꺼이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작은 가시가 박혀있으면 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많은 가시가 박혀있습니다.
‘분노와 원망,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의 가시들입니다.
이런 가시가 박혀있으면 우리는 참된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내 영혼의 쓰레기를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영신수련의 시작입니다.
밭에 묻혀있는 보물
조욱현 토마 신부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절)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이 보물을 가지려면 밭을 사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라도 밭을 사야 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보물은 세상의 것을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세상의 것이란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들로, 우상숭배를 버려야 한다.
밭이란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밭으로 오는 사람은 그 안에서 보물인 지혜를 찾는다.
신앙인은 성경을 알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을 따르려 애쓰는 가운데 보물을 발견한다.
보물을 숨기고 있는 밭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즉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것이다.
거기서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합당한 비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게 된다.
값진 진주는 율법과 예언서보다 더 귀한 살아계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영원한 삶이라는 진주를 찾는다.
하느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은총으로 하느님을 알아보고는
과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고 그분만을 따르게 된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속된 욕망에서 돌아서게 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면 나머지 모두도, 즉 율법과 예언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거룩한 삶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그 진주와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은 하찮을 뿐이다.
그 마음은 하늘의 것, 오직 값진 진주의 광채, 즉 그리스도만을 원한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 한다.
영원한 삶에 대한 불타는 열망은 물질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게 한다.
하느님께 깊이 빠진 사람은 속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찾아야 하고 가져야 할 값진 보화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보화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파헤쳐서
그 보화를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 얻는 기쁨을 가져야 한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희생을 해야 하는 것처럼,
구원도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참 기쁨을 우리에게 주며,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며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13,44)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핵심인 발견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전에,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아르키메데스에 기인한 상징적인 감탄사
‘유레카!’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유레카는 발견의 기쁨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오래도록 이어져 왔습니다.
유레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기원하며,
이 단어는 ‘찾다’ 또는 ‘발견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heuriskein’에서 유래했습니다.
발견의 기쁨을 압축하는 유레카는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짜릿한 경험을 구체화하는 표현입니다.
아울러 유레카라는 감탄사는 의미 있는 발견에 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끊임없는 추구와 인내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업적들이 종종 변함없는 헌신, 지칠 줄 모르는 노력,
그리고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역사적 의미를 넘어, 유레카는 모든 분야, 곧 과학기술부터 예술, 문학, 종교
그리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떤 분야에서든
돌파구와 영감의 순간이 일어날 수 있다, 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유레카의 정신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도전에 접근하고, 호기심을 포용하며,
해결책과 개인적 성장을 추구하는 데 있어 끈기를 유지하도록 격려합니다.
이렇게 유레카는 시간을 초월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영역에 걸쳐 개인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발견의 기쁨, 의미 있는 돌파구에 필요한 끈기,
지적이거나 영적 성취의 본질적인 기쁨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를 가르쳐 주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든 또는 진주를 애써 찾다가 얻었든
귀중한 것을 발견한 이들은 한결같이 “가진 것을 다 팔아” (13,44),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13,46) 구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보물이나 진주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다 처분해서 구입 할 만큼
투자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모든 것을 처분함을 통해 여러 가지 불편하고 어려운 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들이 찾길 원하던 귀한 것을 획득했다는 기쁨이 더 컸기에 그런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 귀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별로 의미가 없지만,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그 귀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과 함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마치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고
지금껏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다 매각하고 처분해서 구매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하늘나라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발견하고 찾은 기쁨이 너무 행복했기에 기꺼이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물과 진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 바로 하늘나라의 놀라운 가치를 대면한 제자들이며,
그들은 그 가치에 압도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적절한 삶을 살아가고자
전 존재를 바쳐 투신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고귀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필3,8)
이런 발견의 기쁨을 누리길 바라면서, 다음 노랫말로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이 세상 모든 영예와 행복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성가61 주 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한다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삼복더위에 70명, 80명의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주방 온도가 40도를 훨씬 넘어섭니다.
하는 일은 언제나 단순 작업의 반복입니다. 다듬고 썰고, 지지고 볶고, 삶고 끓이고...
때로 이 나이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다가도
아이들이 깔깔대며 맛있게 먹는 광경을 생각하면 얼굴에는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생각하면,
그 작은 일들이 우리를 성화의 길로 이끄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을.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 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 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러운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