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문과 방송을 통해 진흙탕 싸움 속에서 흉해진 말의 몰골을 접하고 심사가 어지러워져서 그랬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는 이규호 선생의 '말의 힘'이라는 책을 뒤적였다.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에서 나는 볼펜으로 줄 쳐놓은 구절만 골라가며 읽었는데,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언어는 진리를 밝히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진리를 숨기는 역할도 한다.'
일단 실체가 말을 통해 그대로 표현될 수 없다는 실상이언(實相離言), 혹은 도를 말하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니라는 불입문자(不立文字)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지만, 그러나 어쩐지 그 뉘앙스가 좀 사납다. 이것이 언어의 본질적인 한계이기도 하나, 사람이 언어의 이런 속성을 적당히 잘 이용한다는 쪽이 더 그 뜻에 맞을 것 같다.
오만과 궤변으로 말이 변질되고 타락해 관찰컨대 말을 통한 진실의 왜곡이나 의도 감추기를 효과적으로 잘 써먹는 사람은 두 부류 중에 하나이다. 한 부류는 듣는 사람들보다 자기가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미리 얻은 많은 정보와 형식적으로 오류가 없는 논리를 내세워 자기 주장을 펴거나 자기의 진짜 의도를 감춘다. 불리한 정보들을 감추고 유리한 정보들을 과장하고, 그 정보들에 대한 해석을 아전인수식으로 한다. 사과문의 형식 안에 비수를 담아 보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말은 변질되고 타락한다. 말의 타락은, 이청준이 '언어사회학 서설'이라는 연작 형태의 소설집에서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과 사람의 타락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말의 변질을 악용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은 듣는 사람들보다 자기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들은 한층 위험한데,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자기의(自己義)에 대한 믿음이 오만을 불러일으키고 주위의 여론에 귀를 막게 하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구사하려고 하는 일종의 설득의 논리조차 동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예수 시대 유대에서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다른 '죄인'들과 달리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금식을 하고 몇 시간씩 기도를 하는 '의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과 형식주의를 예수는 질타했다.
가장 나쁜 것은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고 믿는 부류들에 의해 자행되는 말의 변질이다. 오만과 궤변이 함께 결합된 이런 말을 우리는 심심찮게 들으면서 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는 아마 선거에서 줄줄이 참패한 후에 집권당에서 흘러나온 이런 요지의 말, '민심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가 아닐까. 글쎄, 민심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매선거마다 틀리기야 하겠는가. 그들이 민심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지 못한 것은 자기의에 대한 그릇된 환상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말은 결국 그 사람을 알게 해 줘 이야기를 아주 맛깔나게 잘해서 좌중을 사로잡는 사람이 있다. 그 자리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깔깔거리며 웃지만, 돌아서서는 무언가 찜찜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게 아닌데....하는 심정. 진실을 비틀거나 의도를 숨기고 말한 것이 감지되면 믿음이 사라진다. 말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왜곡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 그 말을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늦게든 빠르게든, 알게 해 주는 것이 또 말이기도 하다. 말을 한다는 것은 전인적인 행위이다. 하이데거의 저 유명한 은유적 표현대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의 주택 속에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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