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15일 (모스크바 3상회의 전야, 우리 민족 내부의 패착)
12월 15일 이승만은 독촉중협 제 1차 회합에서 독촉중협의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모스크바 회의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하여 언급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운이 조석에 달려 있습니다...시기가 대단히 절박하니...최근 개최될 모스크바
각국외상회의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중요한 결정이 있을 터인데...독촉중협은 원래 민의 대표기관을
만들려한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 모스크바 회의 같은 데 대해서 우리의 민의를 부르짖으려면 이러한
합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해방된 지 4개월 우리 지난 한반도의 장래는 아직까지 불투명한 상태였다. 미소는 한반도를 해방했
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군사적 점령과 군사 통치를 실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38선을 그은 미소는 모스크바 회담 전까지 거의 4~ 5개월 동안 한반도 문제를 방치했다.
그들의 일차적 가치판단 기준은 조선인의 이해와 요구가 아닌 점령국의 국가적 이해의 확보였다.
12월 16일 개최될 모스크바 3상회의도 마찬가지였다. 강대국들이 만약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정을
채택할 때 조선인의 관점과 이익을 고려했다면 마땅히 조선민족 대표를 참석시키거나 그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물론 모스크바 3상회의가 다룬 의제가 여섯 가지였고, 3개국의 입장에서 조선문제는 큰 비중을 차지
하지 못했다. 또한 한반도의 직접 점령자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장래를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하려 한 것은 힘이 지배하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국가
이익 추구와 무관심, 냉대 속에서 고통과 혼란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은 조선인들이었다.
그렇다고 모스크바 3상 회의와 관련한 비난의 화살이 강대국에만 돌려지는 것 역시 공평하지 않다.
해방후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 통일된 목소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모스크바 3상회담과 관련해 두 가지 점에서 큰 오류를 범했다
첫째, 좌우 남북을 막론하고 국내 정치 지도자들은 모스크바 3상 회담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될 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우리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점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과오였다. 물론 여기에도 합리적 이유와 변명이 있을 수 있었다. 미소가
모스크바회담 개최를 알려주지 않아 남북한 모두 모스크바회담 개최를 몰랐다거나, 3상회의는 말
그대로 승전 3개국이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개최한 회의였기 때문에 국내 민족대표는 참가, 참관할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초청될 수도 없었다는 등의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인가 하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1943년 11월 미,영,중의 루즈벨트, 처칠,
장제스는 카이로회담을 통해 한국민의 노예적 상태에 주목해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반도를 독립시킨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루즈벨트가 구상한 대로 신탁이라는 적절한 절차를 통해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한 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의미였다. 해방 직전 적어도 충칭과 미국의
한인들은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을 잘 알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주도한 신탁통치 구상은 한반도에 미소 양군이 진주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는 10월 20일 미 외교협회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을 발언했고
이에 대해 좌우를 막론하고 남한의 모든 정치세력은 격렬히 반대했다. 따라서 1945년 11월 이래
조선인의 반대 여하에도 불구하고 조만간 국제회의에서 신탁문제 내지 조선에 대한 중대 결정이
내려질 것임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조선의 중요 정치 지도자들이 모스크바
회담 자체를 몰랐거나 그 회의에서 조선 문제가 결정될 것을 몰랐다고 한다면 이 역시 국제 정세와
대세에 어두웠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국내 정치 지도자 중 적어도 한 명은 모스크바회담의 개최와 개최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승만이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있던 하지는 신탁통치의
대안으로 제출할 '정무위원회'와 같은 조직체가 필요했고 이승만의 독촉중협을 통해 이를 실현하
려고 했다. 하지는 이승만에게 모스크바 회담이 열리는 12월 16일 하루 전인 12월 15일까지 독촉
중협의 결성을 요청했고 그 최후의 기일인 15일 이승만은 서두의 발언을 한 것이다.
이승만은 다음 날 모스크바에서 회담이 열리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다른 정치세력과
공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1933년 국제연맹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하기 위해 뉴욕에서 제네
바까지 불원천리 달려간 것처럼 모스크바로 직접 가지도, 대리인을 보내지도 않았다.
두 번째, 모스크바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면 적어도 회의를 참관하거나 방청해서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만 했다.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의에 초청되지 않았다고 불참했다는
변명은 통용될 수 없다. 식민지 시기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등에도 조선은 초청받지 못했지만
참가했다. 식민지의 자칭 '민족 대표'로서 일제의 방해와 탄압, 강대국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국제회의에 참가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모스
크바 3상 회의에 대한 정치 지도자들의 접근 태도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파리강화회의나 워싱턴회의처럼 승전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개최된
회담이 아니라 한반도가 '해방'된 보다 좋은 조건에서 개최되었고, 정치의식도 식민지 시기보다 각성
된 때였다. 그렇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무책임했고 무관심했다. 한반도 문제가 다뤄질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고, 또한 그것이 미국이 구상해온 신탁 통치 안과 관련이 있을 것임이 분명했
지만 한반도의 주인들은 주인 구실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물론 모스크바 3상 회의에 조선의 민족 대표가 파견되었다고 해도 회의 참가와 의사 개진, 결정에
영향력 행사가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조선의 민족 대표가 모스크바의 파견되었다면,
그리고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회담의 진행 경과와 조선 문제에 대한 미국 측, 소련 측
안의 제출. 토론. 결정 과정을 지켜보았더라면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했을 것이다.
3상회의 결정문의 결정과 결정 과정과 주요 내용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현실에서 벌어진 행동의
혼선과 내부 대립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3상회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세력도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은 주인 스스로 챙기지 못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광복과 정부수립]-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