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와 추사 김정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경주 김씨로 정조 10년 예산에서 태어났다.
고조 할아버지는영의정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월성위는 영조대왕의 사위였으며,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 출신으로 왕가의 사돈집 귀공자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았고 24세 때 동지부사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갔다가 청나라 석학 옹방강과 완원을 만났다.
옹방강은 그에게 금석학을 훈도했고 완원은 그를 제자로 삼아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35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규장각 대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그가 지향하는
학문과 예술의 세계는 고증학(考證學)에 바탕을 두었다.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추사는 병조참판으로, 그해 가을에는 동지부사가
되어 30년 만에 다시 연경에 가게 되었으나, 안동 김씨 세력가들이 10년 전에 마무리
되었던 한 사건을 들먹이며 추사에게 정치적 공세를 가하여,추사는 모진 형벌과
고문으로 죽음 직전에 이르렀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인덕이 높고 인복이 많았던 추사였기에 귀양살이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지내주었다.
추사의 충실한 제자 소치 허련은 전후 세 차례나 유배지를 찾아와 머물며 같이
지냈다.
헌종 10년(1844), 추사 나이 59세,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째 되었을 때 추사는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歲寒圖, 국보 180호)를 제작했다. 동그란
창이 나 있는 소담한 서재와 노송 한 그루와 곰솔 세 그루가 그려진 단아한 문인화다.
그러나 이 소산한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그 내용에 있다.
<세한도>는 추사가 그의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역관인 이상적은 스승이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정성을 다해 해마다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었다.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
공자께서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했는데(...)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고 후라고 덜한 것도 아니다.
(...)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 (세한도 '발문' 중에서)'
이상적은 그해 10월, 동지사를 수행하여 연경에 갈 때 이 <세한도>를 가지고 가서
청나라 학자 16명의 시와 글을 받았다. 이것이 <세한도>의 '청유십육가(淸儒十六家)
제찬' 이다.
이렇게 꾸며진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뒤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이 후지쯔까 치까시
에게 팔아넘겼다.
후지쯔까는 일본의 대표적인 중국철학연구자로 청나라 경학(經學)이 그의 전공이었다.
청나라 금석학을 연구하면서 그는 당시 조선에도 이 학문이 전파되어 박제가, 유득공,
김정희 등 많은 학자들이 중국 학자들과 실시간으로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못
놀랐다. 그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서울로 왔다.
서울로 온 후지쯔까는 인사동 고서점에서 실학자들의 관계자료를 수집하여 새로운 많은
사실을 밝혀내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추사 관계 책과 글씨, 편지는 닥치는 대로 모았다.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청조문화의 동점(東漸)과 김정희>에서 후지쯔까는
이렇게 말했다.
"이리하여 청나라 학문은 조선의 영특한 천재 추사 김정희를 만나 집대성되었으니 청조학
연구의 제1인자는 김정희이다."
그러던 1944년 여름, 후지쯔까는 태평양 전쟁 말기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살림살이를
싸들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서예가이자 당대의 서화수집가였던 소전 손재형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건너가버리고 말았다고 크게 걱정하다가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부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후지쯔까 집을 찾아갔다.
당시는 미군의 공습이 한창인 때였고 후지쯔까는 노환으로 누워 있었다. 소전은 후지쯔까를
만나 막무가내로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졸랐으나 후지쯔까는 단호히 거절했다. 소전은 뜻을
버리지 않고 무려 두달간 매일 찾아가 졸랐다.
그러던 12월 어느날, 후지쯔까는 소전의 열정에 굴복하여 <세한도>를 건네주며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으니 잘만 보존해달라고 했다.
소전이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하고 나서 석 달쯤 지난 1945년 3월 후지쯔까 가족이 공습을
피해 소개해 있던 사이에 그의 서재는 폭격을 당하였고, <세한도>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에
살아남았다.
그후 소전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선거자금에 쪼들리게 되자 <세한도>를 저당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고, 결국 <세한도>는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
손창근씨가 소장하고 있다.
후지쯔까의 아들 아끼나오는 아버지의 논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했고, 부친이 모은 나머지
추사 자료 2천 점을 2007년 과천문화원에 기증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
하였는데 그는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 유홍준 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