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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 노고산 흥국사(老姑山 興國寺)를 찾아서 ①
-일주문(一柱門)에서 약사전(藥師殿)까지-
지난 토요일인 17일, 미소님께서 일요일에 경기 화성의 신흥사에 가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 시기에 좋다고 하였는데, 언제 출발하면 되겠냐고 하니 일요일 아침 의용소방대에서 북한산 입구인 구기탐방소에서 '산불예방 캠페인'봉사가 있어 10시쯤이면 가하다고 하셨습니다.
아침 일찍이면 가하나 늦게 출발하면 가친의 식사문제 때문에 불가하여, 신흥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대신 구파발 너머 고양의 흥국사에 가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리니 흔쾌히 쾌락하여 흥 국사로 가기로 했습니다. 최근에 흥국사의 대방이 근대기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아 문화재가 된다는 기사를 읽고 대방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많았습니다.
18일인 일요일 아침, 미소님은 일찌감치 북한산 구기동 탐방로 입구에서 산불예방 캠페인을 시작하여 10시에 끝나기에 비니초님과 함께 미리 나가 그 근처 운동기구를 이용하며 기다리 고 있었고, 염화님 승용차를 몰고 때를 맞추어 나오셨는데, 10시 무렵이 되자 캠페인을 마치 고 내려오신다는 전갈이 있었고, 이윽고 서로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10시 10분, 고양 의 흥국사로 향했습니다.
흥국사는 여러 번 갔지만 이번에는 꽤 오래 되어 거진 10년이 흐른 것 같습니다. 그간에 많 은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염화ㆍ미소님 내외는 흥국사가 있는 것은 아시지만 아직 못 가 보신 곳이라 기대를 안고 불광동을 거쳐 연신내 구파발을 지나 북한산 입구 근처 인 흥국사로 향했습니다.
흥국사에 도착했습니다.
10시 50분 정도에 일주문 앞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비니초님이 아침에 물을 끓이면서 미 소님께서 캠페인하시면서 추위에 떨을지도 모른다면서 뜨거운 물을 준비했는데 기우로 끝났 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날씨는 화창하고 기온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
일주문 앞에 약수터가 있는데 물줄기가 아주 가늘었지만 수국사 약수터보다는 낫다고 웃음 지으며 약수를 받아 목을 축이고 준비해 간 과일을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눈 후 일주문으로 향했습니다.
각종 법회를 알리는 현수막
매월 첫째 일요일은 정기법회 법화경 강의. 매월 둘째 일요일은 거사림 가족법회. 매월 셋째 일요일은 참선법회.
또, 매월 음력 초하루에서 초사흘까지 화엄신중 3일기도 법회 매월 음력 초사흘 인등법회 매월 음력 8일 약사재일 포살법회 매월 음력 18일 지장재일 법회 매월 음력 24일 관음재일법회
이밖에도 매주 중ㆍ고등부 학생법회와 어린이 법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흥국사 불교대학 제13기 신입생모집 입간판
흥국사 주지 대오(大悟)스님께서 신행과 공부 양면에서 많은 노력을 하시고 계시네요. 2001년 주지로 부임하신 이래 흥국사가 많은 변모를 하고 있음을 봅니다.
흥국사 주차장 주변. 주차장이 넓어서 주차가 용이합니다.
흥국사에 왔으니 흥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흥국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번지(흥국사길 82) 노고산(老姑山)에 위치한 대한 불교조계종 직할교구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입니다.
앞에는 북한산의 봉우리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뒤에는 한미산(漢美山)이 연꽃 봉우리처 럼 펼쳐져 있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찰입니다. 서울에서 아주 가깝고 주차장도 넓어 언제 든지 찾으면 좋은 절입니다.
흥국사를 부를 때 '한미산흥국사(漢美山興國寺)'라 하였는데 이제 가보니 '노고산흥국사(老 姑山興國寺)'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지 스님께서 '한미산'보다는 널리 알려진 '노고산'으로 부르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일대 산을 '노고산'이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 이곳 노고산에서 훈련 을 여러 번 받은 바 있어 친근하기 조차 한 곳입니다.
그러면 한미산(漢美山)은 무엇이고 노고산(老姑山)은 무엇인가? 결국 같은 말입니다. 흥국사가 자리한 한미산(漢美山)은 원래 이름이 노고산(老姑山)이라 합니다. '노고(老姑)'란 뜻은 '할미'를 뜻하기에 '할미산'이라 불렸는데, 영조(英祖)가 어머니의 묘소인 소령원(昭寧 園)을 가는 길에 이곳에 들렸다가 '할미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할미산과 이름이 비슷한 한자어로 표기하다 보니 한미산(漢美山)이라 명명한 것 같습니다. 혹은 북한 산의 끝자락을 뜻하는 한미(漢尾)가 한미(漢美)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흥국사가 만일염불회 도량답게 만일염불회 1차 1000일 기도입재를 지난 3월에 했네요.
이 절은 신라 문무왕 원년인 661년, 원효(元曉) 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이름을 흥서사(興瑞寺) 혹은 흥성암(興聖庵)이라 했다고 합니다.
「흥국사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인 문무왕 원년인 서기 661년에 당대 최고의 고승인 원효스님께서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시던 중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산을 내려와 이곳에 이르게 되었고, 서기(瑞氣)를 발하고 계신 석조 약사여래(藥師如 來)부처님을 보신 원효스님께서 인연도량이라 생각하여 본전(本殿)에 약사부처님을 모시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다.' 하시며 절이름을 흥성 암(興聖庵)이라고 하고 오늘의 흥국사를 창건하셨습니다.」 -미타전 아미타불 복장 연기문-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기(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記)》에도 흥국사 창건 연기가 새겨져 있 어 흥국사의 중요 연혁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비문에 의하면,
「전해 오기를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해동 화엄초조(華嚴初祖)인 원효대사께서 양주(梁 州, 지금의 경남 양산지역) 천성산(千聖山)으로부터 와서 북한산에 머물며 몇 곳의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북한산성 서쪽에 있는 원효대(元曉臺)가 그 첫째요, 노고산 흥서암(興瑞庵) 이 그 다음이며, 약사불 석상도 또한 같은 시기에 조각한 것으로 천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엄 연히 존재하고 있다. 암자를 절로 바꾸어 흥국(興國)이란 호를 내린 것은 조선 영조 때의 일이며, 산이름을 한미(漢美)로 바꾼 것은 노고(老姑)의 뜻을 옮긴 것으로 별다른 뜻은 없 다.」
창건된 후 1,000여 년 동안 역사가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숙종 12년 1686년에 중창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영조 46년(1770)에 영조가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묘인 소령원(昭寧園)에 가다가 많은 눈을 만나 이곳에 행차하여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노고산(老姑山)을 한미산(漢美山)이라 명명하고, 약사불이 나라를 흥하게 한다며 흥서 사(興瑞寺)를 흥국사(興國寺)로 고치게 하고, 이 절을 망모(亡母)의 원찰(願刹)로 삼아 약사전 의 편액을 써서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약사전을 을 증축하고 미타전을 신축하였고, 상궁(尙宮)들이 번갈아 머무르면서 선학(禪學)을 익히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흥국사는 숙빈 최씨의 왕생극락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이 되었습니다.
영조대왕이 하루를 머물고 아침에 일어나 지은 시가 비문에 전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朝來有心喜 조래유심희 아침이 돌아오니 마음이 기쁘도다. 尺雪驗豊徵 척설험풍징 눈이 한 자나 쌓였으니 풍년이 들 징조로다.
이 시를 쓰고 약사전 편액의 글씨를 써서 하사했으니 약사전 편액은 영조대왕의 글씨입니다.
흥국사 일주문(興國寺 一柱門)입니다.
1785년(정조 9) 당시 남북양산성(南北兩山城)의 승도대장(僧都大將)이었던 관선(觀禪)과 법 헌(法軒)이 중창하였고, 1867년(고종 4) 뇌응(雷應)이 약사전을 중건하였으며, 1876년 칠성 각(七星閣), 1902년에는 나한전(羅漢殿)과 산신각(山神閣)을 창건하였다. 1904년 10월에 는 완해(玩海)를 회주(會主)로 하여 만일회를 열었습니다. 1913년에는 이 모임을 주도하였던 해송(海松)ㆍ뇌응(雷應)ㆍ풍곡(豊谷)ㆍ호봉(虎峰) 등 여러 승려들이 새로운 건물을 짓고 대가 람(大伽藍)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습니다.
1915년에는 대중이 협력하여 2동 32칸의 건물을 세웠고, 1917년에 다시 재물을 모아 향각 (香閣)과 동별당(東別堂) 2동 14칸의 건물을 지었으니, 비로소 대가람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 습니다. 1929년에는 귀산사문(龜山沙門) 정호(鼎鎬) 스님의 글과 김돈희(金敦熙)의 글씨로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기(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記)」를 세웠습니다.
1966에는 약사전을 중수하였고, 1968년에는 약사전에 단청을 입혔습니다. 1992년에는 종무소ㆍ식당 등을 건축하고 종각을 종무소 2층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그 후 2001년 현 주진인 대오스님이 부임하여 도량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여러 전각을 건축 하였는데 이런 자료가 없어 아쉽습니다.
흥국사 일주문(一柱門)
흥국사 일주문은 기둥만 달랑 두 개로 세워졌네요. 소박하기조차 하는데 그 위는 다포작 팔 작지붕을 하여 아름답습니다.
일주문(一柱門)이란 기둥 하나로 지어진 문이란 뜻이 아니라 기둥이 한 일자(一字) 모양의 문이란 뜻입니다.
이 일주문은 불교의 대의를 무언으로 말해 줍니다. 일심(一心)의 도리를 웅변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는 만법귀일(萬法歸一),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문 안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해(知解)는 쓸데없는 망상 이니 다 털어 버리고 빈 마음으로 들어가라고 이릅니다.
일(一)이란 불이(不二)를 말함이니, 불이(不二)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선(善)과 악(惡) 이 둘이 아니요, 유(有)와 무(無)가 둘이 아니며 색(色)과 공(空) 둘이 아니라는 중도(中道)의 깊은 묘법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분별망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흥국사(興國寺) 편액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선생 글씨.
낙관을 보면 八十二翁 해로당(海鹵+土堂)이라 쓰여 있는데, 해로당(海鹵+土堂)은 해사 김성 근(海士 金聲根) 선생의 또 하나의 아호입니다.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
「1862년(철종 13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과 홍문관 벼슬과 삼사를 두루 거쳐 도승지, 홍문관제학,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 31 년) 동학 혁명 때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898년(광무 2년) 의정부참정에 승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홍문관 학사를 지냈으며, 1901년에 장례원경, 의정부 찬정, 규장각 학사, 홍문관 학사 등을 지냈으며, 1902년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 고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자작(子爵)이 되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원(仲遠), 호는 해사(海士)이다. 서예가로도 유명하며 서재필 의 양 외숙부(外叔父)이기도 하다. 또한 서재필은 그의 문인이기도 하다.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합방조약때 받은 그의 작위는 손자 김호규가 습작했다. 청렴 결백했고 서예에 뛰 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 -위키백과-
그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27세에 급제하여 승승장구 하면서 전라관찰사를 거친 일이 있는데 그 때 전주의 원암산 원등암을 참배했다. 마침 전해 내려오는 석함이 있는데 아무도 열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 번 보기를 청했다. 이에 길게 쓴 글이 나왔는데 그 중 일부 내용은 이러했다
원암산의 붉은 해가 서울 도성에 떨어져 재상의 몸을 받게 되었으니, 갑오년 이전에는 해봉스님이지만 갑오년 이후에는 김성근이 되도다.
도광 14년 갑오 5월 15일 해동 사문 해봉 성찬이 원등암 16굴 중에 향 사루고 묻어두다. 알고 대비할 정도로 혜안이 밝았던 분이었으니 수행력이 대단했던 분으로 여겨진다. 많은 절을 찾아 공부하고 삼보를 받들어 보호하며 불교인으로 힘을 다하는 일생을 보냈다.
그가 석함을 연 뒤 심회를 토로한 것이 전하고 있다.
옛날 원암산에 노닐던 한 스님이 서울에 잘못 떨어져 재상이 되니 -한국매일뉴스 김은희 기자글 옮김-
를 남겼습니다.
흥국사 경내로 들어갑니다.
일주문을 지나 막 경내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이름하여 <흥국사만일회비(興國寺萬日會碑)>입니다.
염화님께서 흥국사만일회비를 담고 있습니다.
흥국사만일회비(興國寺萬日會碑)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기(漢美山興國寺萬日會碑記)
순한문으로 쓰여진 만일회비는 고종 41년인 광무 8년(1904), 흥국사에서 개최된 만일회(萬 日會)를 기념해 불기 2956년(현불기 2473년. 1929년)에 세워졌습니다. 만일회란 아미타불 을 신행하는 모임으로 만일 동안 아미타불을 신행정진하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만일회 는 그 역사가 깊어 신라시대 건봉사(乾鳳寺)에서 처음 개최된 이래 조선 중기 이후에 크게 성행되었고, 후기에 와서는 많은 사찰에서 만일회를 봉행하면서 극락왕생을 염원했습니다.
이 비에 의하면, 당시 만일회를 이끈 회주(會主)는 완해(玩海)스님으로서 스님은 상궁 김씨 등의 힘을 얻어 회를 만든 뒤 이듬해 진관사의 해송(海松)스님을 새로운 화주(化主)로 모셔 이후 1929년에 이르기까지의 법회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 비문은 귀산사문(龜山沙門) 정호(鼎鎬) 스님이 찬(撰)하고 성당거사(惺堂居士) 김돈희(金 敦熙)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
범종각이 보입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고목 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일주문을 지나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데 흥국사를 찾는 이들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고목입니다. 이 나무는 수령이 460년 정도 된 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정일자는 2003년 8월 1일로, 지정번호는 '경기 - 고양 - 32번'입니다.
그런데 십년 만에 이곳에 오니 제일 먼저 변화를 느낀 것은 연못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 고 목 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꿔서 마당을 만들었고 대신 한 옆에 조그만한 인공 연 못을 조성하고 연꽃을 키우기 위하여 대형 연꽃화분을 열다섯 개를 조성해 놓았네요.
인공연못을 조성해 놓은 모양
지금은 황량하기조차 하지만 여기에 연의 움이 나오고 잎을 피우고 연꽃이 피어나면 그 아름 다움에 많은 사람들이 반하여 연신 기념사진을 찍을 것입니다. 그런 상상을 해 봅니다. ^^
미소님과 비니초님이 이곳을 찾았네요.
조촐하게 연분(蓮盆)이 놓여 있지만 한여름이 되면 연꽃이 피어나 흥국사 경내를 향기롭게 해 줄 것입니다.
연지에서 바라본 흥국사 풍광
감실형태의 야외불단
불보살님을 비롯한 동자승 인형들과 탑이 놓여져 있습니다.
어디를 보시는가요? 건너편의 새로지은 선원을 보시는가요?
대방(大房)의 모습
금명간에 문화재가 된다는 대방 모습입니다.
이 대방은 현재 설법전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데 안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 아미타전 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인데 아직 편액이 없어서 무슨 건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측면 모습입니다.
아직 편액을 달지 않은 신축건물입니다. 정면 모습입니다.
흥국사의 본전인 약사전 모습입니다.
약사전 앞의 5층석탑이 아름답고 약사전 안의 약사여래는 바라보기만 해도 편안한 상호입니 다. 약사전에 대해서는 제2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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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 추억이 많이 생각 나내요. 흥국사 하면 약사여래 부처님 그리고 탬플스테이.
이쁘게 잘 담으셨내요. 감사합니다....나무묘법연화경()()()
연 필 때 다시 한번 찾으면 또다른 분위기를 느낄 것 같습니다. 템플스테이도 좋고... _()_
사진으로보니새롭내요 잘보고 갑니다
청안님은국사와 인연이 깊지요 감사합니다. _()_
순례를 다녀오고 나서 사진을 보면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감사합니다. _()_
흥국사 참 아름답네요. 다음에 갈때 같이가요._()_
다음 순례는 어디로 갈 지 모르지만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한때 성산동 살던 동생네와 두어번 갔던 절입니다. 다시 보니 반가운 마음입니다. _()_
그렇군요. 한 번 눈길이 스쳐던 곳은 인상에 남게 마련입니다. 감사합니다. _()_
경내의 모습, 세세한 설명에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설명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실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예, 길가의 이름 모를도 마음을 주면 의미있게 다가오듯 님들이 글을 읽어 주시면 _()_
많은 시간인들 내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일하며 틈틈이 작업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