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법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법문을 청해서 열심히 듣고, 집에 가서도 열심히 기도하며 불자로서의 삶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일까? 본지는 4월 한 달 동안 ‘내 마음 속에서 발견한 부처님 이야기’를 공모했다. 그 중 몇 편을 정리해서 지면에 소개한다. <전문>
■ 일상사에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재섭 (서울특별시 중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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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섭 |
어릴 적 형님과 누님이 일찍 돌아가셨다. 부모님께서는 ‘절에 보내야 살아날 수 있다’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나를 작은 절인 ‘만리사’에 보내셨다.
나는 ‘만리사’에서 스님의 독경 소리를 귓전으로 담아 가면서 사찰의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경내의 풍경과 분위기에 익숙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십대 초반까지였다. 청소년기의 학창 시절을 지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속진에 켜켜이 쪄들어 간 40대를 그럭저럭 보냈다. 50대 초반이 되면서 지나온 삶의 궤적을 되짚어 보고 싶어져 불교대학을 마치고 재가불자로서의 자리매김을 스스로 해 나아가기에 이르렀다.
외로우나 괴로우나 보고 듣고 익혀온 법문과 간경을 통해서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근간으로 해서 불법 공부에 전념해 오던 중 부처님의 뜻을 뵙게 되는 불가사의한 체험을 실제로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수년 전 아이들의 혼사를 앞두고 자손 번창의 원을 간절히 세웠더니, 어언 외손자가 명년에 초등학교에 취학하는 나이가 되었으며 친손자도 형제간에 무탈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나고 있음은 그 모두가 부처님의 적지 않은 가피로 여겨졌다.
작년부터는 의미도 모르고 독송할 줄도 몰랐던 <관음정근>을 매일 출근길에 되뇌어 가면서 관세음보살님을 모시는 원을 세웠더니, 지난 2월 중순에 학술 단체의 일원으로 전남 무위사에 들렸을 때 ‘백의 관세음보살도’를 보시 받게 됐다.
나는 넉넉하지는 않으나 감당 못할 부채 없이 살아감을 늘 감사하게 여긴다. 또한 불자로서의 일상사에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늘 부처님을 모시면서 부처님을 따라 가고 부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 이런 의지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자긍심을 확인해 가는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삶의 진지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 결혼 30주년, 즈음에
최명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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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현 |
우리는 새 천년 어느 날, 한 야유회에 참석했다가 술에 잔뜩 취해 신륵사 구경을 갔다. 신륵사 대웅전에 수도 없이 절을 하면서 우리는 “당신께 귀의 하겠습니다!”라고 되뇌이며 불교에 귀의했다.
2001년 우리 부부는 불교대학에서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게 됐다. 그리고 그해 휴가 때 여수 향일 암, 송광사, 부산 용궁사, 불국사, 월정사 등을 다니며 열심이었다.
그러던 중 2002년 5월 11일. 아내는 삼성병원 응급실에 실려와 7일간 다각적 검사 끝에 ‘다발성 골수종’ 이란 진단을 받는다. 잠이 봇물처럼 쏟아져, 졸고 싶어도 졸수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삼성병원법당에서 “부처님! 저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은, 저 사람도 모르는 업의 바다에서 지은 죄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다시 일어나, 참회하고 속죄 할 기회는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 비방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저와 제 아내, 모두 초 발심자입니다”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 후 아내는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 듯 싶더니 7년 간 고생 끝에 2009년 4월 17일 영원히 잠들었다. 2009년은 우리의 결혼 30주년인 해였다.
여보! 정녕 떠난 것이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소! 모습은 그냥 하나하나 그대로인데…… 이 세상 태어나, 나만 좋아했던 당신이 있어서 행복했소. 내, 지금도 무척 그립지만 이 팽팽한 연줄 같은 그리움도 끊을 것이요. 내 당신에 대한, 마지막 사랑이요. 세상사, 모두가 무주상이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니, 사랑 할 사람이 떠났소. 허나, 실상은 떠난 것도 아니요. 꽃을 들여다 볼 때도, 아이들 얼굴에서도, 아이들 못생긴 발톱에서도 당신을 느끼오.
여보! 미래세에 약사여래 부처님으로, 화현 하시어, 당신처럼, 치료약 없어 떠나가는 저 뭇 중생 들, 서둘러 구원해 주시오.
■ 이제야 그대를 봅니다
이월례 (경기도 안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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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월례 |
저는 1996년부터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자유’를 찾아 헤매고 다녔었습니다. 그러다 부처님을 만나 제가 원하던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그 맛을 알게 되어 일상생활이 수행이도록 제가 저를 지켜봅니다. 제 안에 계신 부처님, 그대로 인해 날마다 행복입니다. 기쁨입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헤매고 있을 텐데, 제가 편안해 지니까 주변이 편안해합니다. 고맙고 감사한 나날들입니다.
제가 미처 몰랐을 때는 ‘광대무변한’ 거룩하신 부처님이라는 찬사가 약간은 의아 했습니다.대체 무엇이 그리 광대무변하다는 것인지… 아직도 배우고 익힐 것이 많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고,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함께 하시며 늘 저와 함께하고 계심을.
제가 보는 것에, 듣는 것에, 먹는 것에 행주좌와 늘 지켜보심을 알기에 매순간 생활이 감사하고, 고맙고,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됩니다.
그러니 예전엔 심했던 부부싸움도 멎었고 화도 안 내죠. 미운 것이란 없고, 모두 모두가 다 예쁘게 보입니다. 이제야 말로 부처님 제자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저를 이리 행복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여러 스님들과 정신적인 스승님 대행큰스님의 말씀이 제 가슴을 울리게 합니다. 실생활에서 불성인 부처님 자리에 모든 걸 맡기라는 대행큰스님 덕분에 저는 제 안의 부처님을 의지하며, 믿고 맡기며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 안의 부처님을 더욱 맑게 곱게 갈고 닦아 빛나게 할 일입니다. 부처님을 좀 더 일찍 만났다면 더욱더 잘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지상천국을 제 안에서 보며, 공부가 되면 될수록 부처님 법은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온 우주를 향해 경배 드립니다. 세상 모든 존재들과 주변인 모두모두 고맙고 감사합니다.
■ 내가 만난 아미타불
문금숙 (미국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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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금숙 |
미국에 산지 11년째다. 미국에 도착한지 1년 쯤 지난 어느 날, 근방의 K사찰을 찾아갔다. 한 보살님이 나오시더니 “남편은 있고? 아이도 있고? 남편이 실직했나요? 신분이 불법인가요?” 라며 알 수 없는 질문을 계속했다. 내가 계속 아니라고 답하자 보살님은 “그럼 여기 뭣 하러 왔어?” 라고 말했다. 이 날 충격이 너무도 컸는지 나는 미국의 절 수준에 실망하며 다른 사찰에 대한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렸다.
그리고 어느 해 부처님 오신 날 행사 후, 우리는 남편의 회사일로 3시간 반 가량 떨어진 카멜 삼보사를 찾아갔다. 법문시간 때 스님은 “절에 오는 이유가 무엇이냐” 며 공양 준비하던 보살님들을 법회에 참석시켰다. 그날 법문은 미국에서도 바르게 공부한다는 불교공부에 대한 마음의 회복을 일으켰다.
그 후 어느 주말, 남편이 회원으로 있는 축구회에서 선수 한 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날 남편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아침이 되자 무조건 멀리 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카멜 삼보사를 찾게 됐다. 나는 공양 후 스님께 불교에 대한 질문을 했다. 실은 아무 말이나 스님과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 참을 횡설수설 하고 있는데, 스님은 갑자기 “보살님은 불교 왜 하고 싶습니까? 보살님이 불교를 왜 하고 싶은지 그것부터 알아보십시오” 라고 말했다. 난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왜 불교를 하고 싶은지 늘 생각했다. 그러다 퍼뜩 생각이 났다. ‘불교 왜 하고 싶습니까?’와 ‘그럼 여기 뭣 하러 왔어?’가 같은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 분은 진작이 시간을 당겨주셨을 관세음보살님이었음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공성상 일여의 일합상인 아미타불을 알게 하고 공부하게 되기까지 인연돼 나투신 부처님과 보살님께 감사할 뿐이다. 나무아미타불.
■ 고행 끝에 진리를 만나다
김복교 (경기도 화성시)
저는 하찮은 중생 죽림정사에 있는 공양주 보살입니다. 6년 고행 끝에 제가 원하고 보고싶었던 극락세계, 제가 원하던 진리를 보게 됐습니다. 정말로 원이 있을 때는 일심으로 한 가지만 세우시고 기도해 보세요. 다른 잡념이 들어갈 틈이 생기지 않으면 원이 빨리 이루어지지요. 부처님 가피로 하나하나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씩씩하게 베풀면서 살꺼에요.자기가 복을 지어야 극락도 갈수 있으니까요.
■ 내 마음에 부처님
전옥순 (경기도 수원시)
십여 년 전 난 성당에 다니다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됐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나는 부처님께 무조건 잘되게 해달라고만 빌었고, 간절함 덕분인지 성취도 잘 됐다. 나는 인터넷법회도 듣고 하루에 5시간 이상은 수행정진 공부를 했다. 2010년 1월에는 화계사 선방에 입방해 하루 만에 내마음속에 둥글고 흰 그리고 텅 빈 마음의 물체를 두 번 보고 그냥 내려왔다. 그때부터 공부가 무르익기 시작했고,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무슨 메세지를 전하시려 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난 더욱 환희심으로 이세상이 행복하고 나와 더불어 함께가는 세상임을 알게 됐다.
■ 어머니 가신 나라
이영숙 (경기도 안양시)
살아생전의 어머니는 참으로 불심(佛心)이 강하셨다. 시골에서 올라와 정착한 북한산 계곡에는 유난히도 사찰이 많았다. 어머니는 다니던 사찰의 공양간 궂은일을 살뜰히도 보살폈다. 어머니가 자주 집을 비우셔서 우리가 투덜거리면 “부처님 그늘은 관동 팔 십다”하며 다독이셨다.
이제 어머니가 가시고 없는 지금 난 불신자(不信者)에서 글로써 법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닌 내게 부처였고 불법이었다. 그러나 나는 석가탄신일에 일 년 등과 칠월 보름 백중날에 영가 등 걸어 드리고 연화대에 안착하시길 빌어드릴 뿐이다.
“어머니 가신 나라가 ‘연화대(蓮花臺)’가 아닐런지요. 이 여식 꼭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 내가 만난 부처님
이영자 (서울특별시 강남구)
결혼 한지 2년쯤 되었을 무렵 시골에서 부모님이 자식 생각하는 마음으로 개고기를 보내 오셨다. 나는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음식 만들며 간 보느라 몇 수저 국물을 조금 먹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 했다. 병원을 가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친구가 스님으로 수행하고 있는 대성사를 찾았다. 몸이 아파 칠 정례 할 때만 간신히 법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배가 언제 아팠나 싶을 정도로 멀쩡해졌다. 그 후 나는 살면서 부처님 가피를 많이 받고 있다는 생각에 그 감사함을 조금이나마 갚으려고 노력한다.
■ 우리들의 부처님
성담 스님 (법락사원 주지)
2000년 1월. 처음 들어선 남양주시 대도사는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 아침 7시쯤 잠을 청하고 있는데 큰스님은 “몇신데 잠을 자고 있어”라며 호통을 치셨다. 얼른 눈을 뜨고 고행이 시작됐다. 전생의 업장이련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며 사시불공을 시작하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2002년 1월 나는 남양주시 봉선사 행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량리 금강선원 활안 큰스님을 만났고, 2005년 9월 출가행자부터 사미를 거쳐 비구로 거듭나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구리시 락사원 주지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처님과 함께하기 위해 입문한지 11년이다. 큰스님들의 법이 부처님이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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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들의 부처님, 맞습니다. _()_
저는 부처님을 만난 것이 일생 일대의 가장 큰![행운](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54.gif)
이라 생각합니다.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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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