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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의 명칭은 어디서 나왔으며 삼천포 이전의 지명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어찌하여 삼천포란 지명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역사기록이나 구전되어 오는 자료를 근거로 하여 삼천포 지명에 관한 역사를 알아 보고자 한다.
삼천포 지역의 옛 지명을 살펴 보면 구라(仇羅)· 구량(仇良)· 구라량(仇羅梁:구라량진)이 있고 말문(末文), 각산(角山), 삼천진(三千鎭)· 삼천리(三千里)등이 있으며 말문리에는 11개 방(坊)이 있었는데, 적례(赤禮)· 무임포(無任浦)· 골포(骨浦)· 송포(松浦)· 이현(梨峴)· 수내(藪內)· 검암(儉岩)· 죽사(竹寺)· 역촌(驛村)· 모자랑포(茅茨廊浦)가 나온다. 또한 각산리에는 대방(大方)동· 동림(東林)· 실안동(實安洞)이 있다고 영남읍지1)에 지명이 나오고 있으며 말문리는 주(진주)에서 남으로 60리에 있으며 동으로는 고성과 경계하고(이현) 서쪽은 바다이며, 남북 길이가 15리로 11방이 딸려 있고 각산리는 주에서 남으로 7십 5리에 있고 동쪽에는 삼천진이 있으며 서· 남쪽은 대해(大海)이며 북쪽에는 말문리가 있는데 4방이 딸려 있고 구라량은 각산촌 앞 바다 가운데 늑도(勒島)에 있는데 늑도라는 이름은 말굴레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앞의 진주의 창고 조(條)에는 문화(文化)창은 말문리에 있는데 죽사촌 앞에 있고 만력 갑신에 이설하고 문화역은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타 없어졌으나 다시 짓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포상팔국(浦上8國)의 어느 한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1)영남읍지(1895년경) 30책 진주편 591~2쪽(한국지리 총서 : 아시아문화사간)
삼천포의 역사는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선사시대에는 뚜렷하게 구분해서 역사를 기술한 자료가 없고 다만 후세에 와서 학자들이 유적이나 유물을 통하여 발표하는 논고나 학술보고서 등에서 그 일부분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삼천포지역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가늠할 수 있는 각종 유물이 사천만을 중심으로 늑도의 패총에서나 서포 구평리의 유적에서 이미 발견되었으며 최근에는 이금동 일원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 조사되고 있음은 B.C 2000년 경 이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 역사의 새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인 B.C 1000년경인 청동기시대에 와서 당시의 지배세력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 마도의 유물과 신벽동의 지석묘가 말해 주고 있듯이 부족국가가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부여· 고구려 및 삼한이 대두하게 되면서 삼천포의 늑도를 거점으로 중국-늑도, 서해안-늑도, 늑도-일본 간의 해상교류가 성행했을 것으로 예측되어 문헌상에 나타난 원삼국시대의 변한지역 12개국 중 어느 나라인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그 중에 하나였을 것으로 보아진다. 삼천포지역은 삼한시대에는 진국(辰國) 12개국 중의 한 나라에 속했을 것은 분명하나 고성으로 추정되는 변진고자미동국1)에 속했거나 사천(천관우 비정)· 진주(이병도 비정)로 비정하는 변진고순시국일 것으로 생각되나 일부 다른 향토사학자는 포상8국의 하나인 보라(保羅)국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어 어느 것이 확실한 것인지는 다시 연구해야만 할 과제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부단히 움직이고 이동하면서 형성되므로 어느 국가에 속했는지 속단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포상8국의 하나인 사물국(사천 비정)이거나 보라국(삼천포 비정)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나 성부사(成浮査) 등이 1622년(광해군14)에 착수하여 1632년(인조10)에 완성한 진양지(晋陽志)에는 말문리의 남쪽에 사제단(社祭檀)이 있어 아마도 한 주(州)의 중심인 읍거유지(邑居遺址)일 것이다. 그 건치연혁은 반드시 삼국의 앞에 있었을 것이다.1) 이 대목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인데 하나의 부족국가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끝내 고자미동국의 속국으로 결론지어 버린 것은 가까이에 있는 손 쉬운 진양지의 구석머리의 자료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존재한 한 나라를 찾지 못한 것이 아닌가 본다.2) 1) 와룡산의 정기 중 역사편(손상봉 집필)14쪽. 삼천포시 간행 2) 삼천포시지 역사편 77쪽 삼천포시 간행 |
그런데 사물국의 사실상 주도세력이 늑도를 중심으로 한 경제권을 장악한 포상8국 중의 하나인 사물국의 중심세력이 늑도와 삼천포지역에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 것은 최근에 발견된 이금동 유적지에서 고상건물 유적지가 발견됨으로 해서 고상건물을 소유하고 해상무역을 관장한 세력이 있었던 삼천포지역이 사물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지난 2000년 11월 11일 KBS의 역사 스페셜에서 잘 입증하고 있음을 본다. 앞에서 기술한 진양지에 나오는 사제단(현 늑도 유적의 산 정상부에 있음)이나 무역의 중심 세력이 있던 늑도(구라량)이거나 이금동의 고상건물지 등이 모두 입증자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해왕(奈解王) 14년(209)조의 “포상8국”이 아라를 치니 아라의 사신이 이사금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으며 이사금이 왕손 나음으로 하여금 가까운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케 하여 드디어 8국의 군사를 파하였다는 삼국사기열전 물계자전에서 보이듯이 포상8국의 세력이 당시로서는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는 무왕6년(606) 2월에 “각산산성(角山山城)”을 쌓았다고 삼국사기 권37 지리지에 나와 있는데 학자간에는 삼천포의 옛이름인 “각산”이라는 학자(김중권)가 있고 전북 정주의 동남(고부의 동남)으로 비정하는 학자(이병도)가 있는데 각산성은 위치 미상이라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각산과 각산성을 일반적으로 동일지명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지금은 아파트(현 선구동 한국전력 삼천포화력본부 사원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서서 흔적도 없지만 공민왕 7년(1358)에 “각산수(角山戍)”에 왜적이 몰려와 배 300여 척을 불태웠다라는 기술로 보아 이 곳에 왜구를 막기 위한 방비책을 세우기 위하여 성종9년(1488)에 사천현 남면 “삼천리(三千里)”에 “삼천진(三千鎭)”을 설치하고 있다. 성종실록 권223, 성종 19년(1488년) 12월 30일 기미조에 보면 “이 달에 경상도 사천현 삼천진의 성을 쌓았는데 높이는 15척이고 둘레는 1천4백 40척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천진은 남쪽 74리에 있다. 석성인데 둘레가 2천50척이다. 권관(權管)을 두어 방비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삼국사기지리지나 고려사지리지에는 아예 성이나 봉수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까 별 문제이지마는 단종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많은 분야에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중 역과 봉수편에 진주의 신역(新驛)에 “말문신역(末文新驛)(주의 경계에 있다.)과 봉화가 나오는데 5곳 중의 하나인 “각산봉화”가 각산향(角山鄕) 주산은 주의 남쪽에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문화량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비고(備考)에 의하면 고읍(古邑)조에 “문화(文和:진주의 동남쪽 60리)는 본래 신라의 문화량이었는데 경덕왕 16년(757)에 문화라 고쳐 고성군의 영현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이 삼천포의 지역명이 맨 처음 역사기록 책자인 사서(史書)에 나오는 것은 나해이사금 14년(209)에 “포상8국”이 처음이며, 앞에서 기술한 포상8국의 8개 나라중 삼천포지역이 사물(史勿)에 속했거나, 보라국에 속했으리라 추정하므로 삼천포 지역의 나라 이름은 사물이거나 보라국으로 비정된다. 그 후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6년(604) 2월 조에 “각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각산성”이 지역 명칭으로 처음이고, 같은 책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8년(661) 4월 19일 조에 “상주낭당(上州 郎幢)은 적을 각산(또는 각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는 역사상 기록으로 각산성, 각산, 각산수(角山戍), 각산향(角山鄕), 진주각산, 각산, 삼천포라 하여 진주목의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또는 두입지(斗入地)였다. 이러했던 삼천포는 광무10년(1906)에 칙령 49호로 삼천포가 되고 개항을 보게 되었으며 사천군으로 이속된 것이다. 그러기에 이 곳은 통상 진주로 설명되어 왔다. 한편 고려사에서는 각산수라 하였는데 이 각산수는 곧 각산성이다. 수(戍)는 수변(守邊)이요, 막는다는 알(瑁)이요, 사(舍)를 말하는데 적군의 동정을 망보려고 성위에 만든 누각을 수루(戍樓)라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니 곧 성(城)인 것이다. 따라서 신증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사료에 의거 각산과 관련된 지역을 조사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다음은 구라(仇羅)에 대한 지명을 알아 보면 구라량(仇羅梁)이란 지명이 사서나 사료(史料)에 처음 나오는 것은 현재 향촌동에 있는 매향암각비문(태종18년 : 1418)에 “우리들 시방(十方) 시주들이 각자 은근히 노력하여 구라량의 동쪽 용두 초지를 닦고 정유(丁酉 : 1417) 2월 15일과 …(중략)” 영락무술 2월 일비(永樂戊戌二月日碑) 부아시방시주각자근(夫我十方施主各自懃) 수구라량목처(修仇羅梁木處) 용두초지정유이월(龍頭初地丁酉二月)(중략)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다음으로 세종실록 권4 원년(1419) 7월 28일 조에 “경상도의 노량과 구라량(仇羅梁) 등지에서 방비에 나서야 할 것이니…(중략)” 구어경상군노량구량량등처(俱於慶尙軍露梁仇良梁等處)에서 구량량이 나오고 있음을 보는데 구량량은 구라(仇羅)에서 구량(仇良)으로 구라량에서 구량량으로 변하지 않았나 짐작되어진다.
앞에서 언급한 말문신역 또한 삼천포의 옛 지역명이다. 그러나 구량량이나 각산이 삼천포의 지명을 내포하지 못하고 말문신역 또한 삼천포란 지명을 지칭할 수 없으 며 삼천리란 지명이 처음 나온 사례는 다음 사료에서 찾을 수 있다.
단종실록 권14, 3년(1455) 윤 6월 3일 정미조에 보면 “사천 남면(南面)의 삼천리(三千里) 등지는 토지가 비옥하고, 또 염리(鹽利)가 있기 때문에…(중략)” 일사천남면 삼천리등처 토지옥요차유염리(一泗川南面 三千里等處 土地沃饒 且有鹽利)(중략)라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처음 삼천포를 지칭하는 지명이 나오고 있음을 보아 뒤에 삼천리가 삼천포로 변하지 않았나 추정되는데 순조32년(1832) 경상도읍지가 완성될 당시 사천현의 삼천리면(面)이 나오고 영남진지(1894년) 1895년 5월 26일(고종32년) 칙령 제98호로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삼천리면이 수남면(洙南面)으로 개칭되고 있으며 1906년 9월 24일 광무 10년 칙령 제49호에 의거 진주군의 문선면이 사천군에 편입되고, 남양면은 고성군으로 이속되며 그 해 11월에는 삼천포항이 개항을 하게 되었다. 뒤 이어 1918년 5월 10일 도령 제7호에 의거 삼천포읍(삼천포와 팔양포를 합한 총칭)과 남양면을 합하여 삼천포시로 승격되고 31리를 소관하는 시가 되었으며 1995년 5월 10일 도· 농 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제4948호에 따라 삼천포시는 역사의 베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삼천포의 지명을 구라(仇羅:늑도)에서 찾는 사람도 있고, 각산(角山)의 말문리(末文里)에서 찾는 학자도 있으나 음운상 구라나 말문이 삼천포라는 지명을 지칭하는데 아무런 뜻이 없고 오직 삼천리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삼천진(三千鎭) 또한 삼천리에 설치한 진(鎭)으로 보아 삼천포의 어원은 삼천리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데 삼천포라는 이름은 늑도(勒島:굴레섬)의 학섬에 삼천마리 학이 일시에 내려 앉은 물안이라서 붙어진 이름일까? 지명에서 각 지방의 특성을 살펴보면 자연환경적 지명으로 산· 천(江)· 곡(谷)· 바다· 포(浦)등과 같은 광범위한 지형의 지역명이 나오는데 여기서 삼천포는 왜 삼천(三千)이란 이름을 택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불교와 연관이 있지 않은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각 지방의 명칭을 보면 그 지방마다 지리학적 또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과거, 현재, 미래의 복합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자체 생산적 명칭이 있고 또 외지 수입적 명칭이 있다. 산의 이름에서는 인도, 중국 등의 것과 지역 명칭에서는 중국의 명칭이 다수 압도적인 것이다. 그런데 삼천포의 명칭인 “삼천(三千)”이란 명칭은 명칭의 생성 조건에 맞추어도 그 어느 곳에서도 관련이 되지 않아 그 해답이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또한 한문식 표기 이외의 구 지명을 변음시켜 보아도 역시 삼천포와 연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교와 연관을 지어보면 그 해답이 명확하게 나온다. 불교에서 삼천이란 이상향(理想鄕:유토피아)으로 꼽힌다. 다시 말하면 온갖 것을 삼천이라 칭한다. 즉 우주(宇宙)의 모든 것을 총섭하기 때문에 삼천이라고도 하고 삼천제법이라고도 한다.
이 삼천의 모든 법은 중생의 일상 마음 가운데 다 갖추어 있다는 뜻에서 이것을 심구의 삼천이라고도 하고 그 삼천이 진여(眞如)의 본처(本處)에서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것을 이구의 삼천이라고 하고, 이구의 삼천이 인연(因緣)에 따라 현황계에 나타나는 것을 사조의 삼천(변조삼천, 사용삼천, 수덕삼천, 수기삼천)이라고 한다. 또 현상계에서의 세계관은 삼천세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고대 인도에서의 세계관에 의한 우주관이다.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 4개의 대주(大州)가 있고, 구산(九山)과 팔해(八海)가 있으며 위로는 색계의 초선천에서부터 아래로는 지하의 풍륜까지를 말하며 그 가운데 해, 달, 수미산, 성신(星晨) 4개의 천하, 삼십삼천, 아래로 도솔천(兜率天), 태화자재천(太和自在天) 등을 포함한 한 개의 세계가 중생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 천개를 모은 것을 소천세계(小天世界)라 하고, 소천세계 천개를 모은 것을 중천세계(中天世界)라 하고, 중천세계 천개를 모은 것을 대천세계(大天世界)라 하는데 삼천이란 이름은 고대 불교인들의 이상향이었고 이상적 최대의 목표적 수치였던 것이다. 그 잠재의식적 이상향이 후세 행정가들로 하여금 삼천이란 명칭을 자연발상(發想)으로 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싶다. 그러나 그 근거는 문헌상에나 정설로서는 찾을 수 없으나 금강산(金剛山)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라는 노랫말 속의 숫자적 시초가 와룡산(臥龍山)에서부터 이라는 말이 불교계(佛敎界)내에서 구전되어 오는 말이다. 그로 인해 때로는 고성와룡(운흥사)부터라고도 하고 진주와룡(와룡사)이라고 하는 말이 오늘까지 전해옴을 보더라도 이 지방 삼천포가 미래 지향적 이상향임에 틀림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 삼천포라는 지명의 유래를 생각해 본다. 밤이면 삼천 별빛이 자우룩히 고여 넘치던 물안이란 이름일까? 아니면 삼천 마리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용궁나들이 하듯 모여 들어서 삼천가지 빛살이 일렁대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일까? 혹은 삼천궁녀 다 어우러진 것에 비기고도 남을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라서, 삼천포라 한 것일까? 아니면 삼천(三天) 세계 통틀어 으뜸으로 빼어난 곳이라서 삼천포라야 옳을 것인가? 또는 저 무량의 서방정토, 흔히들 극락이라고 하는 서방 미타찰이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 바깥 머나먼 곳인 줄만 알았는데 이 곳 남해의 물깃, 한려수도 안자락에 뜻밖에 자리잡고 있다는 뜻일까? 달리는 삼천갑자 동박삭이 갑년 삼천번, 18만년 세월동안 와룡산 용을 낚음질하였다고 해서 일러 삼천포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한양(서울)에서 뱃길로 삼천리라 해서 삼천포가 되었을까? 궁금할 따름이다.
삼천포의 별칭은 옛 어른들이 “삼치이”라고도 했다. 이는 고개치(峙)가 삼(三) 셋이라 하여 붙여진 “삼치이”이기도 하지만 이는 삼천포에 세 고개가 있긴 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고 아무튼 삼천포의 지명은 삼천(三千)이라는 이상향의 불교적 의미가 내포하는 바닷가란 개포(浦)를 뒤에 달아 개가 수 없이 많은 이상적인 항구라는 뜻으로 삼천포라 이름 붙이게 된 근본적인 생각이 아닌가 짐작되는 것이다. |
*사천시 史에서 퍼옴
첫댓글 글이 너무 길어 뭔 소린가도 모르겠고요 ...머리에 쥐가 남니다요...삼천미륵이 드나들 포구라는 무시 못할 정보도...캬캬컄
앞으로 요러커랑 많이 올리지 마시고 요점 정리 좀 해서리 올려 주심 좋겠는디요..... 공부 잘하는 사람은 요점정리 잘 한다던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