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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서울
사람들은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낯선 풍경,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와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를 키웁니다. 그리고 그런 비교를 통하여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기도 합니다. 트레일 서울은 서울시내를 걸으면서 보고 듣는 여행을 돕는 안내서입니다. 트레일 여행은 다른 곳으로의 공간여행과 과거에서 현대로의 시간여행을 내 의지대로 효과적으로 체계적으로 이룰 수 있도록 합니다. 세계도시로 성장한 서울이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어떻게 변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배우고 앞으로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 바로 트레일 서울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서울시내를 여행하며 서울에 대한 애정을 키우고, 이해의 폭을 넓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트레일 사대문지구
지하철 서울역 - 4번출구 – 남대문 – 시청 광장 – 청계천 입구 - 광화문 사거리 – 광화문 광장 – 세종대왕 기념관 – 경복궁 – 청와대 – 삼청동 거리 - 가회동 북촌 – 창덕궁 – 창경궁 – 종묘 – 광장시장 – 청계천 – 두산타워 – 디자인 뮤지엄 – 을지로 3가 – 충무로 영화거리 – 남산 한옥마을 – 남산길 – 남산타워 – 남산 성곽길 – 남대문 시장 – 명동.
지하철 서울역
지하철 1호선과 지하철 4호선의 환승역인 지하철 서울역은 중구와 용산구에 있는 서울메트로의 지하철역으로 보통 지하 서울역이라고 부릅니다. 1호선의 서울역은 중구 남대문로5가, 4호선의 서울역은 용산구 동자동에 있고, 1번 출구 인근에는 한국철도공사와 코레일공항철도의 서울역이 있습니다.
남대문인 숭례문은 지하철 서울역으로 내려가 4번출구로 나와 100m 직진하면 거기에 있습니다. 지하철 서울역으로 내려가기 전에 우선 서울역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서울역
철도 서울역은 114년의 긴 역사를 가진 일일 평균 9만여명이 이용하는 서울의 관문입니다. 서울역은 2004년 4월에 고속철도인 KTX 열차가 개통되자, 서울종합민자역사로 새롭게 개편되어 경부고속철도, 경부선 일반(새마을, 무궁화), 경의선의 시종착역이 되었습니다.
서울역은 1900년에 남대문역으로 출발하였으며, 1925년에 역사가 준공되면서 경성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고 1년 후인 1946년 광복절에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한다는 서울시 헌장이 공포되면서 이곳도 11월 1일부터 서울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그 후에 서울역은 꾸준히 증가하는 여행객과 화물을 소화하였으나,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들도 여럿 나타났습니다. 해결책은 노후 협소한 역무시설의 현대화, 양질의 서비스 제공을 위한 편의시설 확충, 급속한 경제발전과 도시팽창에 따른 역 주변의 개발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민자역사 건설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민자역사인 서울역은 지하2층 지상3층 연면적 26,100평방m의 건물로 한화역사(주)에 의하여 1987년 8월에 착공되어 1989년에 준공되었는데, 면적 중에서 역무시설 5,900평방m는 철도청에 귀속되었습니다.
서울민자역사는 (주)한화유통에 의하여 운영되었으나, 그러나 얼마 후에 고속철도 건설사업과 연관된 서울역 개량사업과 기존시설의 개선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1999년 12월 말에 철도청과 한화역사(주)가 서울통합역사개발사업 추진협약을 체결하였고, 2000년 5월부터 서울종합민자역사사업을 추진하여 2003년 12월에 지하2층 지상5층 연면적 69,100평방m의 역사를 준공하였습니다. 신설된 건물에는 역무시설 16,000평방m, 판매시설 32,400평방m, 주차시설 20,700평방m가 들어섰습니다. 서울종합민자역사는 전체적으로 연면적 95,200평방m의 복합건물로 세워졌습니다. 서울종합민자역사는 백화점이 입점하고 주변에 대형 할인점이 들어섬으로써 여행객이 여행과 쇼핑을 겸할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변신하였습니다.
서울종합민자역사 중에서 철도전용역사는 2층과 중2층의 맞이방, 3층의 이루어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층 맞이방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동부 맞이방은 매표소 13개, 유실물센터, 자동차전시장, 종합관광안내소, 남녀화장실 1곳, 여성전용화장실 1곳, 철도공안사무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부 맞이방은 매표소 7개, 철도회원 가입창구, 은행출장 환전소, KTX패밀리 라운지, TMO, 남녀화장실 1곳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층 맞이방에는 이밖에 유아놀이방, 패스트푸드점, 식당 등이 있습니다. 중2층 맞이방에는 매표소 4개, 오픈 콘서트홀, 남녀화장실 1곳, 패스트푸드점, 푸드코너의 식당 등이 있습니다. 3층 이루어짐은 대회의실, 별실 등의 회의실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울역 역사에는 대합실과 역무실로 이루어지는 5,100평방m의 운수시설과 18,200평방m의 판매시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밖에 기계 및 기타 시설, 130평방m의 옥내주차장, 그리고 옥외주차장이 있습니다.
서울역은 12개 승강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8번 승강장은 KTX, 새마을, 무궁화 열차의 출발장, 9~12번 승강장은 이들 열차의 도착장입니다. 그리고 12번은 경의선 열차, 고상폼은 천안행 전동열차를 위한 승강장입니다.
구(舊) 서울역사
1900년 7월에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소규모 목조건물에서 철도업무가 시작되었는데, 원래 위치는 염천교 부근으로 명칭은 남대문역이었습니다. 1925년 9월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르네상스식 건물을 새롭게 준공하고 명칭을 경성역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구 서울역사는 도로면에서 볼 때 2층, 철로에서 볼 때는 3층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부산역사나 신의주역사처럼 구 서울역사 역시 철근 콘크리트와 부분적인 화강석으로 건설되었습니다.
구 서울역사는 비잔틴 건축양식에서 보여지는 펜던티브를 사용하였으나, 원형의 뼈대 위에 돔을 올리지 않고 사각형의 평면에 돔을 결합시킴으로써 돔의 높이를 낮추어 시각적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현관지붕은 볼트구조로써 정면에 거대한 창을 배치하였고, 그 가운데 애디큘러 모양의 감실(龕室)을 만들어 시계를 배치하였습니다. 붉은 벽돌이 주(主)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는데, 변화를 유도하기 위하여 백색 화강석 수평 띠를 두르고, 벽면 모서리에 귓돌을 설치하였습니다.
중앙부에 큰 홀을 배치하였고, 그 앞쪽에 2층 높이의 큰 출입구를 외부로 돌출시켜 입구로 만들었으며, 홀 좌우에 2층 건물을 덧붙였습니다. 1층 중앙홀의 바닥에는 화강석을 깔았고, 중벽(中壁)에는 석재를 사용하였고, 벽에는 인조석을 부착하였습니다. 귀빈실 마루바닥에는 박달나무를 깔았고, 2층에는 양식당을 설치하였습니다.
광복을 맞은 뒤에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개명되었고, 6·25전쟁 때에는 역사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이후 서울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늘어나는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하여 1960년대에 구 서울역사에는 남부·서부 역사가 새로 설치되었습니다. 2004년 1월에 새로운 민자역사가 건축되면서 구 역사는 폐쇄되었습니다.
구 서울역사는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외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9년 7월에 구 서울역사의 문화재적 가치 회복과 근대 문화재의 문화 공간화를 위하여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2011년 8월에 공사가 끝나 '문화역서울 284'로 의미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명칭은 대국민 공모를 통해 정해졌는데, ‘284’는 구 서울역사가 사적 제284호의 국가지정 문화재라는 의미입니다. 복원된 구 서울역사는 사적의 모습과 가치를 보존하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역의 상징성을 살린 공간입니다. ‘문화역서울 284’는 강연, 공연, 전시, 연구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전시관람 시간은 매일 10시부터 19시까지입니다. 월요일은 휴관일입니다.
숭례문
대한민국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은 정면5칸 측면2칸의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 건물로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양 도성의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어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진각지붕 다포건물이란 지붕의 측면에 ㅅ자형으로 붙인 두꺼운 널인 박공(牔栱)이 사용되지 않고, 지붕과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인 공포(栱包)가 여러 개 사용된 건물을 말합니다. 숭례문은 거대한 석축 기단 위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세운 현존하는 성문 중에서 가장 큰 건축물입니다.
숭례문이 위치하던 자리는 원래 지대가 낮아 그대로 축조하면 도성 정문으로서 품위가 없을 뿐 아니라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지 않아, 조선 왕조는 남쪽 목멱산(남산)과 서쪽 인왕산을 연결하는 이곳의 지대를 높여 경복궁을 아늑한 지세 안에 들도록 하였습니다. 숭례문은 임진왜란에도 온전하였으나, 1908년에 일제가 전차와 차들을 다닐 수 있도록 성문의 양끝을 잇던 성벽을 허물어 600년 조선 왕조의 정문 역할을 끊었습니다. 그 후 달리는 차들과 높은 빌딩으로 둘러싸여 1백여년 동안을 외딴 섬처럼 외롭던 숭례문은 주변 차로 정리와 공원 단장 공사로 2005년에 시민들에게 다시 가까워졌지만, 안타깝게도 2008년 2월에 화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 6·25전쟁의 난리도 무사히 겪은 이 문이 한 순간에 재로 변하였습니다. 다행히도 2013년 4월 29일에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5월 4일에 복구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이 건축물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태조 5년인 1396년에 기공되어 1398년 2월에 준공되었습니다. 1447년에 개수공사가 있었으며,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에 발견된 상량문은 1479년에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숭례문을 지은이는 홍예문을 화강암으로 구축된 아치형의 누기(樓基)와 마름질된 석축으로 시공된 기층의 중앙에 설치하였고, 이곳에 철갑을 씌운 판문 두 짝을 달았습니다. 그는 석축 기단 윗면을 높이 1.17m의 전돌로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쌓아 돌렸고, 이 여장의 동서 양쪽에 1개씩의 협문(夾門)을 두어 계단으로 통하도록 하였고, 앞뒤 여장 밑에는 4개씩의 석루조(石漏槽,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구멍을 뚫어 지붕 처마에 설치한 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숭례문의 기단을 양측의 성벽과 연결시켰고, 바깥 주위 바닥을 판석(板石)으로 깔았습니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 칸만이 우물마루이고, 다른 칸들은 흙바닥이며, 위층은 널마루입니다. 기둥은 모두 굵직한 둥근 두리기둥으로, 기둥뿌리에 나직한 하방(下枋, 벽의 아랫쪽을 가로 지르는 인방)을 걸고 기둥머리에는 키가 큰 창방(昌枋)을 걸었습니다. 창방과 기둥 위에는 널찍하고 두툼한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습니다. 공포는 기둥 위쪽과 건물의 앞뒷면 중앙간에 네 개씩, 다른 기둥 사이에 두 개씩, 그리고 양 측면에 두 개씩의 공간포(空間包)로 올렸는데, 내외포(內外包)는 모두 이출목(二出目)입니다. 위층의 기둥 사이의 중방(中枋)과 창방 사이에는 작은 창(窓)이 있습니다. 공포는 외삼출목칠포작(外三出目七包作)과 내이출목오포작(內二出目五包作)이고, 천장의 가구(架構)는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었기에 천장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서까래 바닥면이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되었습니다.
지붕은 아래위층 모두 겹처마로 이루어진 우진각지붕으로 사래 끝에 토수(吐首, 추녀 끝에 끼워져 사용되는 기와)가 씌워졌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머리 모양의 장식)가 올려졌습니다.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한자 편액의 글자를 쓴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으나,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는 기록이 ‘지봉유설’에 나와 있습니다.
이 건물은 창건연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다포양식과 견실한 목조건축수법을 보임으로써 한국건축사에 중요한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숭례문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8년 2월 10일에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습니다. 다행히도 홍예문과 기반 석축은 온전하였습니다.
문화재청은 화재 이후에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하였고, 그리고 2010년 2월에 착공식과 함께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복구 작업에서는 중점적으로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였습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살렸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숭례문은 원래 팔작지붕이었고, 헛공아가 아래위층의 살미첨차의 하향을 막기 위하여 후세에 첨가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공포 사이의 포벽(包壁)은 토벽으로 내외면이 단청되어 연화 또는 당초문 등이 그려져 있었으나, 이것들도 후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문화재청은 이들의 수정과 함께 전통 기와를 올렸고, 잘려버린 숭례문의 좌우측 성곽을 복구하는 등으로 일제 때에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아, 조선 시대 당시 모습에 더욱 가깝도록 만들었습니다.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에 복구 기념식과 함께 시민에게 공개되었습니다.
남산타워
창뎍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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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단장한 창덕궁
새로 단장한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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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글자색이 같은 계통이라, 글자가 흰색이면 쉽게 눈에 들어오겠네요,
한기 산우회 를 주관하고 있는 김상탁회원님께서 100여page에 달하는 트레일 서울이라는 글을 보내왔어요.
이글에 사진을 찍어 첨부하여 책자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겁니다.
한기 사진동우회 회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로 볼만한 재미있는 책자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이번 년차 총회에서 제시한 서두 2-3 page를 올립니다,
많은 참여와 의견 부탁드립니다.
소운선생 의견 수렴하여 수정 하였읍니다,감사....
황성연회장님과 김상탁회원님의 창조적인 고견인것 같습니다. 그럴려면 출사 계획을 하셔서 순차적,지역별로 포토회에서 출사를 하여 작품을 모아야 책자가 될것 같습니다.좀 방대한 작업이네요.그룹을 나누어 지역별로 추진하는 것도 괜찬을꺼 같고요...굉장히 의미있고 기관에서 하지 못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