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 오늘 법회를 주최하시고 준비해 주신 불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합장을 드립니다. 치하해서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범어사 주지스님께서 법무法務에 봉청奉請하시는데 일부러 왕림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한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한 6년 전(1993년)에 이 KBS 이 자리에 제가 와서 부처님 말씀을 전해 드린 그러한 사실이 있습니다. 6년 전(1993년)이나 또는 6년이 지난 지금(1998년)이나 저는 별로 큰 공부를 한 것이 없습니다. 아까 주최하신 거사님께서 너무나 과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마는 사실은 저는 거기에 상응될 만한 그런 법력法力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부처님 법은 저같이 근기가 낮은 사람이 그 확철대오廓撤大悟 할 만치 그와 같이 옅은 법은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정말로 심심미묘甚深微妙하고 부사의한 그러한 우주의 대법大法입니다. 저는 아직도 정상이라 하는 확철대오라 하는 그런 묘각妙覺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제 공부는 지금도 천리만리입니다. 따라서 저한테 대해서 분에 넘치는 말씀을 하시면 허물이 되십니다. 우리가 같은 말도 거짓말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보통 거짓말은 그것은 단순한 망언에 지나지 않지마는 이른바 자기가 미처 못깨닫고 깨달았다 하는 그러한 이른바 미오未悟를 오悟로 하고, 또는 증명을 못하고 증했다 하는 미증未證을 증證으로 하는 그런 말은 이것은 대망언大妄言입니다. 대망언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굉장히 무거운 죄, 불가에서 사말(말로 짓는 네가지-망어,기어,악구,양설)의 죄. 중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저뿐만 아니라 우리 누구든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스스로 공부를 과대평가 한다든가 또는 별스럽지도 않은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과찬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제가 아까 거사님을 대신해서 여러 우리 불자님들한테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야말로 지금 어려운 시대입니다.(IMF시기) 삼계유여화택三界猶如火宅이라, 법화경에 있는 법문과 마찬가지로, 이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불집입니다 따라서 어느 때 한시인들 정말로 안온하고 평온한 때가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중생은 우리가 복을 많이 지으면은 복을 받는 것도 불가피라, 선을 많이 행하고 자기 행동이 부처님 법에 여법한다고 생각할 때는 복을 구하지 않더라도 불가피하게 피할 수 없이 복은 우리한테 오고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이 악업을 지어놓으면은 또 고苦 불가피라. 이 고초라든가 그런 고행도 역시 이것도 우리가 피할 수 없이 우리한테 핍박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다생겁래로 지어내려온 여러 가지 그런 업장 때문에 이 현실적으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중생이 사는 세계는 언제나 빈틈없이 생로병사라 하는 근본적인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그 사상고思想苦가 있고 여러 가지가지 고苦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이 우리 중생세간인데. 그 더구나 현대의 무서운 그 정보화 시대, 이런 때 와서는 그런 인간의 고통이 더욱더 가중돼 있습니다. 이 혼란을 무엇으로 우리가 치유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암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도 제자백가라. 그 여러 가지 공자 또는 그야말로 노자 또는 묵자, 순자하는 각기 그 위대한 사람들이 각기 똑똑한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한 주의主義 주장을 세웠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하도 많으니까 인제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백가, 천가일 정도로 그런 주의, 주장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2000년이나 거의 후에 있는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자백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참 제자 천가 만가가 이제 되겠지요.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세계 62억인가 되는 그런 인구 가운데서 그렇게 많은 인종 가운데서 기독교를 믿는 분이 저번에 통계를 언뜻 보니까 19억이라 합니다. (기독교가)19억이고 힌두교가 한 7억 정도 이슬람교가 12억 정도고 우리 불교는 한 3억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각기 한 종교내에도 그 몇 십파 또는 몇 백파있는가 모릅니다. 다른 종교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차치하고라도 우선 우리 불법 내에도 이 한국내에도 종단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히 50종파가 넘는다고 합니다
저는 몇 년 동안 미국서 지냈습니다마는 미국은 그야말로 세계 종교의 박람회 같은 그런 나라입니다. 티벳트 불교, 또 인도불교 대만불교 중국 본토에서 온 불교, 태국불교 스리랑카불교 일본불교. 저는 참고 삼아서 그런 데에 가서 봤습니다마는 그 한 나라에서 오는 그 불법 가운데도 여러 가지 그런 파벌이 있습니다. 파벌이 있어가지고서 각 파벌마다 서로 각축을 합니다. 자식이 다해서 내가 옳고 넌 그르다하는 그러한 폐단을 각 나라마다, 각 나라마다 그러한 것을 지금 지울 수가 없는 그런 때입니다.
우리의 한국불교도 미국 들어가서 여러 가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종파별로 해서 들어와 있습니다마는 우리 조계종이 절 수만 해도 동부 서부 합해서 한 80군데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80군데 되는 몇 절 빼놓고서는 대부분 다 스님 한 분이 한 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들어갈 적에 외국어 실력이 있어 가지고 들어간 분은 극소수고 대부분은 그러한 국제포교를 할 만한 그런 실력이 없는 분들이 들어가 있는 셈인데 그것도 혼자 있다고 생각이 되니까 그 정다운 포교다운 포교 특히 주류사회에는 도저히 침투를 못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조그만한 나라 대만서 들어온 그런 불교는 서래사西來寺 동래사東來寺 해가지고서, 몇 개 절로 해서 단합해서 뭉치고 있으니까 한국 대본산도 그와 같이 큰 대본산은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네들은 아주 단합해서, 출판사업이라든가 또는 조그만한 그런 대학이겠지만, 그런 절에서는 대학까지도 사뭇 그 체계있는 그런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사는 승려들은 몇 십명 사는데 아주 영어도 아주 유창할 정도로 잘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적에 정말로 참 저희같이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한심스럽기도 하고 또는 우리도 앞으로는 정말로 단합해서 부처님의 정법을 펴야 한다는 그런 사명의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한국 불교나 또는 세계불교나 또는 세계적인 우리 종교 일반에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 가르침이나 사실은 본질적인 가르침은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천지우주의 진리가 오직 하나라고 생각할 적에 적어도 성자라고 하는 분들은 한 종교를 개교해 가지고서 2000년 세월이나 오랜 그런 경륜을 거쳐왔다고 생각할 때에 그 역사적으로 무수한 그런 점검을 다 받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2000년 후에 몇 십억이라든가 또는 몇 억이나 그런 그런 교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즉 따라서 기독교의 교조인 예수 그리스도나 또는 유교의 그런 교조인 그런 공자나 또는 서구철학의 그런 할애비 같은 그런 교조인 소크라테스나 그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이런 분들 가르침도 사실은 근본적인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부처님 가르침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 같이 궁극적으로,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를 밝히고 밝히고서 완벽한 가르침을 못 됩니다만 그렇더라도 궁극적인 진리를 지향에서 가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진리가 오직 하나의 도리인데 왜 그와 같이 분열, 분파가 생겼는가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 교조, 불교면 부처님 또는 기독교는 같으면은 예수 그리스도. 이슬람 같으면은 마호메트 그분들 가르침을 제대로 제대로 실천궁행實踐躬行을 못합니다. 그분들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한된 시간에 말씀드려야 할 것은 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여러분들이 공부도 하시고 그때그때 많이 들으셔서 대강 대강 알으시겠지만은 여러분들 그런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혜를 보다 더 돈독히 하시기 위해서 제가 재차 강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마경維摩經에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불이법문이라는 그런 장이 있습니다. 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은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 뿐 만이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진리의 기본적인 근본 원리입니다. 즉 둘이 아니라는 법문이란 말입니다.(불이법문不二法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눈에 보이는 이름만 상대유한적인 형이하학적인 그런 세계와 또는 눈에 안 보이는 초월적인 형이상학적인 세계 그런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절대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심심미묘深深微妙한 진리란 말입니다. 또는 불교같은 그와 같이 완벽한 가르침이 미처 못된다 하더라도 기독교 가르침이나 이슬람 가르침이나 이런 것 하고도 또 본래적인 근본본문적인 차원에서는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범부가 가지고 있는 이른바 삿된 견해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아니겠습니까 조금 불교를 공부하고 또는 불교의 제법공諸法空 도리를 알고 한다면은 응당 아직 아집이라 하는 자기를 고집하는 그러한 집착이 있을 수가 없겠지요. 또는 부처님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공부의 척도가 소승적인 이른바 근본적인 그런 불교에 그쳐버리면 물론 근본불교도 그 내용은 모두가 다 심심미묘한 대승이 들어있습니다마는 우선 표현된 걸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소승적인 차원은 이른바 법집法執은 미처 해설을 못해 있습니다. 법집法執이라 하는 것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자기가 느끼는 자기가 느끼는 진리만이 옳다 자기의 그런 견해만이 옳다 이 말입니다. 일체존재의 실상實相을 미처 모를 때는 그때는 필연적으로 법집法執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의 본 바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소승교에서 비로소 느끼고 있는 그러한 아집 정도라든가 또는 대승교에서 느끼는 그런 법집이라든가 이런 집착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 8.15 해방 뒤에 우리 불교의 역사적인 우리 상황을 본다 하더라도 대체로 아집 법집 때문에 필요 없는 그런 분열 분파를 했단 말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얼마나 많은 인력과 우리 신성한 그런 정재가 소모가 됐든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현재는 우리가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떠나서 참다웁게 부처님 정법正法을 믿고 있는가. 이렇게 자문해 볼 때는 현재도 오히려 우리 마음을 너무나 슬프게 하는 그런 현상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것은 왜 그러는 것인가. 그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둘이 아닌 법문. 진리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법문. 진리가 둘이 아니니까 자기와 남도 둘일 수가 없습니다. 벽암록碧巖錄에도 나와 있고 또는 승조법사(僧肇 384~414) 승조법사는 구마라습鳩摩羅什 제자라고 해서 위대한 그 법사입니다. 천재인 동시에 가까스로 32세에 그이가 열반들었습니다만 그래도 아주 '조론'같은 굉장히 훌륭한 그런 저술도 남겨놓고 있습니다 승조법사가 장자를 인용해서 했다는 그런 법문 가운데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하늘과 땅과 나는 동근이요, 원래 뿌리가 같다 말입니다.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아동체萬物與我同體라. 만물은 나와 더불어서 한 몸이란 말입니다.(萬物與我爲一) 천지가 나와 더불어서 뿌리가 같거니 모든 두두물물頭頭物物. 만물은 나와 더불어서 응당 하나의 몸이 되겠지요. 즉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장자 그분도 위대한 성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부처님 같이 그 법의 정상,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다 아는 궁극적으론 못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래도 지향점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이 초견성, 견성오도에서 법이 원래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훌륭한 말씀을 남겨서 역시 승조법사가 인용도 하시고 벽암록도 그것을 인용을 했겠지요. 그러한 하나의 도리라는 그런 법을 우리가 확실히 잘 모른단 말입니다 문자로는 설사 안다하더라도 그것이 자기가 증명해서, 자기가 삼매를 닦아 가지고서 자기가 선정이나 기도를 닦아서 거기하고 상응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아까 저 같은 사람한테 이 시대를 지도할 수 있는 대선사大禪師라고아주 과찬을 하셨습니다만은 사실은 저는 그런 자격이 없는 것을 재차 말씀을 드립니다. 원래 참다운 조실祖室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아주 그 소실육문少室六門에도 밝혀 있습니다만은 달마스님 말씀인데 불심佛心을, 불심을 궁극적으로 밝혀 가지고서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불심佛心을 극명하여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말입니다. 우리 인간과 모든 존재의 본래 실상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불심佛心 안 되겠습니까? 이 자리를 사무치게 사무치게 밝혀가지고서 행行과 해解가 같이 상응돼야 한다 말입니다. (행行과 해解가)같이 일치가 되야 그래야 이른바 조실이라고 말도 듣고 사실은 그야말로 참 큰스님이라는 말도 듣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라. 일미평등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이런 도리는 조금만 몇 번 들으시고 책을 보셔도 알으시겠지요 그러나 이것을 자기 자리 생활에 있어서 구현한다는 자기 생명화 한다는 이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즉 따라서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 하나의 법문이란 그것도 역시 우리가 참말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알똥말똥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경계에 부딪히면 그냥 자기 또 습習이 나온다 말입니다. 습관성習慣性이 나옵니다. 부처님 경전을 보면은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라. 도를 깨닫는 견성, 도를 깨닫는 견성오도할 때는 마치 우리가 도를 깨달을 적에 그냥 순식간에 바싹 깨치듯이 그와 같이 할 수가 있지마는. 수도라. 우리의 사혹思惑을, 우리 잠재의식에 들어있는 그러한 습관성, 그 지독한 무시이래의 그런 습기習氣 이것은 빨리 되지가 않는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혹思惑 사단여우사思斷如藕絲라. 사단여우사라. 사혹을, 우리의 생각 생각에 밉다 곱다 하는 그런 생각 우리 과거세부터 지어 내려온 우리 업습業習 이런 것은 마치 연뿌리를 연뿌리가 잘 부러지지 않지 않습니까 끈끈해가지고서 설사부러졌다 하더라도 연뿌리의 그런 줄기가 남아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단여우사思斷如藕絲라. 그런 사혹을 끊는 것은 마치 연뿌리를 끊는 것과 같이 쉽게 되지가 않는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의오이수依悟而修라. 우리가 해오解悟라하는 이치를 깨달은 그 자리에 입각해가지고서 점차로 닦아 나간다 말입니다.
화엄이나 능엄이나 법화경이나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가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달마 데부터 육조 혜능까지도 다 그런 법으로 해서 일관돼 왔습니다. 제가 몇 가지 참선에 대해서 저는 참선을 주로 한 사람입니다만 참선을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확실한 말씀은 드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제가 확신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뭐라 해도 참선은 달마 데부터 육조혜능스님 혜가를 거쳐서 삼조 승찬이라 사조 도신스님이라. 사조 도신스님때 비로서 이제 하나의 회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500 대중 700 대중 그렇게 모아서 공부를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오조 홍인스님이라 육조 혜능스님이라 이렇게 내려온 셈인데 그 달마대부터 육조까지는 순선시대純禪時代입니다. 순수한 선시대란 말입니다. 순수한 선시대는 그때는 선교일체禪敎一致라. 敎와 선禪을 절대로 둘로 안 봤단 말입니다 또는 선정일치禪淨一致라. 선禪과 정토淨土. 선과 염불도 둘로 안 봤단 말입니다.
그런데 당나라로 내려와서,당나라로 내려와서 특히 북송 때 와서는 같은 선도 화두공안선을 위주로 하는 그런 이른바 임제종臨濟宗 말입니다. 또는 화두가 없이 그냥 잠자코 자기 자성을 비추어보는 묵조선黙照禪이라. 그래서 조동종曹洞宗이 생기고 말입니다. 이렇게 양파가 대립 분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송나라를 지나서 원나라 때나 또는 또는 명나라 청나라 때는 또 시대의 추세에 따라서 모든 수행법이 종합적으로 하나의 것을 지향했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원나라 때에 중봉 명본(中峰 明本 1263~1323)이라. 중봉 명본은 임제종의 아주 위대한 그분도 선사입니다. 고봉 원묘로高峰 原妙부터서 법을 계승받은 이러한 선사이고 또는 산방야화라든가 지금도 아주 회자되어 있고 훌륭한 그런 법설이 들어있는 그런 어록을 그분이 많이 냈습니다. 근데 중봉 명본(中峰 明本 1263~1323)도 역시 그 화두공안선에만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한계를 초월해서, 한계를 초월해서 오직 그 자기 자성自性을 구하는 그런 쪽에다만 역점을 두고서, 염불이나 또는 주문이나 또는 묵조나 또는 공안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둘로 안 봤단 말입니다. 또는 명나라 때, 명나라 때 고승을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습니다마는 선관책진禪關策進을 낸 운서주굉(雲棲株宏,1535~1615), 이분도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이분도 화두공안선을 참구하는 임제종의 대선사란 말입니다. 이분의 저술이 돼 있는 선관책진禪關策進을 본다고 생각할 적에 이분도 조금도 치우침이 없습니다. 선과 교를 일치를 봤다 말입니다.
비단 운서주굉(연지대사) 뿐만 아니라 사실은 달마스님 자체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서 참선법을 전하신 아주 귀조 할애비라고 할 수 있는 달마스님 자체가 능가경楞伽經이라는 하는 경을 주로 위주로 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달마스님 말씀도 능가경에 있는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이라 제불심제일이라. 내가 말하는 것은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이라 모두가 다 일체 존재가 불심佛心뿐이라 이런 도리를 말씀했단 말입니다. 삼조의 그런 승찬스님은 신심명信心銘에서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지극한 길은 참다운 길은 이것은 무난無難이라 별로 어렵지가 않단 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공부가 아직도 미숙합니다만은 저는 부처님 법이 어렵다고 생각을 지금도 조금도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도 제가 어렵다고 생각을 조금도 안했습니다. 다만 제가 바로 못 닦아서 근기가 약해서 부처님 법대로 여법이 정진을 못해 그런 것이지 저는 부처님 법이 절대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극한 도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다만 꺼릴 것은 중생이 섣불리 분별시비한단 말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도, 그 섣불리 참다웁게 우주의 실상을 미처 모르는 그런 분상에서 분별시비할 때에 그런 여러가지 어려운 혼란이 생깁니다. 자기 마음도 혼란스럽고 자기가 속해 있는 종단도 혼란스럽습니다 아, 부처님 법이란 것이 내내야 따지고 보면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 아닙니까. 무아무소유라.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 이것은 비단 내 몸뚱이가 없다는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고유한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선 반야심경만 본다 하더라도 제법諸法이 공空이 아닙니까 부처님 말씀은 거짓이 아닙니다. 제법諸法이 공空이라는 것은 분명히 공이기에 공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어두운 번뇌煩惱 때문에 공을 공으로 못 보고서 참말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몸뚱이가 정작(정말로) 있고 자기라는 관념도 참말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말로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는 불법佛法은 모르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참말로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공부했다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공空인 것인가.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가상은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또는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도 그러한 가상은 없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라는 물질이 분명히 있는데 왜 없는 것인가. 물질 자체가, 물질 자체가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싸움이 우리나라나 또는 세계적으로나 왜 싸움이 이와 같이 치열하고 그치지를 않습니까.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무명심無明心, 무명심에 가린 중생심으로 간택하고 시비분별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선 자기의 실체 자기의 본래 면목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부처님 같은 참다운 안목 성자의 청정무비한 그런 청정의 법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라는 존재도 분명히 없는 것이고 세계의 모두가 다 어떠한 것도 두두물물이 모두가 다 본래 무일물無一物이라. 본래 암것도 없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의 그 법문 아닙니까. 다만 불심佛心이 우주의 본체인 우주의 실상인 우주의 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그때그때 인연따라서 잠시간 형성화 되어서, 형상화 되어서 산 같이 보이고 물 같이 보이고 나 같이 보이고 너 같이 이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아집我執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내 생각이 옳다는 옳다는 것 때문에 섣부른 그런 도그마가 있다 말입니다. 독단이 있는 것이고 또는 편견이 있다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하나의 도리거니, 그 도리를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싸울만한 아무런 거리가 없습니다 달마스님 법문 가운데서 육문六門법문이 있는데 소실육문少室六門이라 있는데 그 가운데 안심법安心法門문이라. 안심법문安心法門이란 명문으로 해서 아주 그 탐내는 그런 법문입니다. 안심법문입니다. 달마스님 법문의 요체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왜 안심법문인가 하면은 마음에 거리끼는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정말로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헛깨비 같은 또는 물속에 비친 그런 달 같은 거울에 비친 그러한 하나의 현상 같은 그런 것에 불과한 것을 우리 중생은 번뇌煩惱의 업業에 가려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것을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영생불멸하는 그 자리는 항시 존재합니다.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나오고 상관이 없이 영생불멸한 진여불성 자리. 이른바 법신불法身佛 자리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그 법신불法身佛 자리를 꼭 부처님이라고만 말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란 그 하나의 용어도 이것도 가명假名에 불과합니다.
기독교가 하나님 자리를, 자기들이 하나님도 내내야 우리말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자기들이 말하는 여호와. 여호와라 하는 우주의 그 신 자리도 역시 그 자리가 예수가 말한 말은 예수 본인이 생각하는 말은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 불교인들이 그 법신불로 생각하는 그런 관념이나 그런 개념이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허심탄회하게 바이블의 요한복음서를 보고 또는 토마스(도마)복음서를 봤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부처님이 언제 어디나, 언제 어디나가 존재한다. 내 몸 가운데도 부처님이 분명히 계시는 것이고 내 몸 가운데 어디 부분적으로 계시는게 아니라 내 몸 전체가 바로 부처님의 온전한 화신化身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징그런 독사같은 것도 역시 독사 꼬리나 머리나 어디에 가서 진여불성이 잠겨 있는 것이 아니라, 독사 온통(전체가)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따라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가 분명히 도인이라고 한다면은 성자라고 한다면은, 성자가 아니라고 하면 모르겠습니다마는성자라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가 말하는 이른바 여호와 하나님도 똑같이 부처님 우리 법신 부처님 같이 언제 어디나가 계시는 하나의 우주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다만 특히 근래에 와서 또는 우리가 인제 고대라든가 중세라든가, 그런 때도 예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와 같이 축소해서 말씀을 했다 말입니다 예수가 말하는 신은 하나의 유대의 민족신은 아닙니다.
인도의 간디(Gandhi1869~1948)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하지만은 기독교는 싫어한다. 그것은 왜냐하면은 그 크리스찬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 말입니다. 예수를 닮지 않으니깐 싫어한다. 이런 말을 저는 우리 불교에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그런 종가宗家요. 모든 철학의 본가本家요 말입니다. 현대물리학이라든가 일체 학문의 바로 귀향처가 부처님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인들이, 우리 불교인들이 부처님을 따르지 않는 분들이 너무나 많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마땅히 아집我執 법집法執이 없어야 됩니다. 또는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으로 봐야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정말로 우리가 부처님 법에 대해서, 부처님의 그 골수骨髓법문에 대한 확신이 선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는 순풍에 돛단배 같다고 생각합니다.
벽암록에도 있는 말씀입니다마는 용이 하늘로 올라갈 때에 용이 바싹 마른 그런 그야말로 참 한발旱魃(가뭄)만 되면은 용은 물이 없으니까 올라갈 수가 없겠지요 마땅히 구름이 있고 물이 있어야 하늘로 올라간다 말입니다. 따라서 먼저 부처님 법의 부처님 법의 대승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여룡득수如龍得水라 여룡득수라. 마치 용이 물을 얻어서 하늘로 등천하는 것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또는 사호고산似虎靠山이라. 범이란 놈은 산이 있고 언덕이 있어야 하룻밤에 천리도 가고 만리도 갈 수가 있다는 것인데 산이 없으면 범은 빨리 못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이란 놈이 사호고산似虎靠山이라 마치 언덕을 만나 가지고서 하루에 천리나 만리나 달린다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부처님 법도 대승법大乘法 입승법一乘法을 모두가 다 하나의 법이라 하는 하나의 진여불성이라 하는 그런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공부하기가 그렇게 쉽다는 것입니다.
지금 부처님 공부하시는 분도 스리랑카나 또는 태국이나 버마나 가까운 곳에는 위빠사나를 하신다고 하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 뜻이 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장한 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대승권인데 대승권에서 불법을 제대로 빛내지 못해 있다 말입니다. 대승불교를 제대로 구현을 못 시켜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젊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불만스럽단 말입니다 아, 평생 공부했다는 분들이 저밖에는 안되는가 불교 엘리트가 모여있는 종단이 저밖에는 아닌가(안되는가) 이렇게 회의심을 품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스리랑카나 태국이나 버마나 가서 보면은 그래도 소승권이지마는 열심히 하고 있다 말입니다.
경經을 무시하고 화두공안만 참구할라고 그렇게 하는 분들은 자기 공부가 얼만치 됐는가 점검을 못합니다. 우리가 다행히 숙세에 선근善根이 깊어 가지고서 금생에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대오철저大悟徹底라.(말) 한 마디에 다 대오大悟, 크게 깨달아 버리면 문제가 안되겠지만 우리 중생은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치는 좀 안다 하더라도 역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습기를 녹일 때는 사비돈제事非頓除라. 우리 사혹思惑이라 하는 것은 문득 돼기가(없애기) 쉽지가 않으니까 그러니까 두고두고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고두고 닦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교에 의지해서 내 공부가 얼마만치 올라갔는가 가령 우리가 화엄경, 화엄경 십지경론十地經論에서 화엄십지(보살십지菩薩十地)를 들어보면은 아, 초지에 있어서 견성오도 하고 이지에 이구지離垢地라. 이지二地는 번뇌망상이라든가 욕심을 다 떼고 말입니다. 이렇게 삼지, 사지 올라갈 때마다 여러가지 그 법상法相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초지에 올라가고 이지에 올라가고 해서 마땅히 부처님 말씀마따나 우리 공부를 부처님 경전에 비추어서 자기 공부를 점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예 교教를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그런 한계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지금 견성見性을 했는가 못했는가 또는 얼만치 올라갔는가 그런 분별을 못 합니다.
저는 일본서 좀 살아놔서 일본 불교에 대해서는 제가 애착을 가지고서 공부를 좀 했습니다. 일본 임제종臨濟宗 중흥조가 백은白隱혜학慧鶴 스님 백은혜학白隱慧鶴선사 이 분이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입니다 그런데 그분 자기 그 수례手例를 좀 보니까 대오십팔번大悟十八番하니 소오부지수小悟不知數라. 큰 깨달음은 18번이고 또 작은 깨달음은 그때는 부지수不知數라수없이 많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 저는 화엄경이라든가 능엄경을 좀 봤기 때문에, 이 양반이 공부는 많이 있을랑가 모르겠지만 경에 대해서는 소홀하구나 그냥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큰 깨달음이 18번이나 되고 작은 깨달음은 부지수가 인제 되겠습니까. 역시 공부하고 나아가는그런 하나의 차선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에 오늘날 우리 불가가 혼란스럽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대부터 육조혜능선사까지는 충실하게 선교일치禪教一致를 택했습니다. 육조단경을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법화경을 인용도 하고 열반경 인용도 하고 다 했습니다 금강경도 인용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공경스럽게 인용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말씀이 그런 경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정보란 것이 갖가지 그런 부정적인 퇴폐적인 정보가 많이 있는데 하물며 진리의 본가인 우리 불교에서 마저 여러가지 여러가지 그런 교설이 있다고 생각할 적에 우리 후학들이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말입니다. 마땅히 이런 때는 꼭 이 권위있는 권위있는 정통 조사의 가르침을 우리가 따라야 됩니다. 부처님 때부터서 그야말로 24대 달마대사 아닙니까 28대 혜능대사까지 이러한 전통 조사의 가르침을 우리가 증거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느낍니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가 자기가 잘났다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바로 알면은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말입니다. 왜 나올 수가 없는 것인가. 우리의 생명의 본체인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불성을 자기가 온전히 지금 깨달았는가 못 깨달았는가 자기 스스로 반조返照해보면 알 것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에 갖추고 있는 무한공덕이 무한 공덕이 분명히 자기를 통해서 발휘가 돼야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근본 경전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아라한도를 성취하면 누구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통했습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하는 것은 과거에 막힘이 없고 미래에 막힘이 없고 또는 자기 번뇌를 몽땅 떼는 것이 삼명이고 말입니다. 자기 몸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삼명육통이란 이런 말씀이 사아함경四阿含經 가운데 수십 군데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절대로 과장해서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금강경에서 말씀과 같이 부처님 말씀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고 또는 중생을 속이기 위해서 말씀한 데가 없습니다
우리 진여불성은 우리 인생과 우주의 본래면목 자리인 불성은 그냥 보통 말로만 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실질적으로 모든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갖춰있는 자리입니다. 저는 원자력 시대에 있어서 지금 원자핵이란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항시 우리 여러분하고 같이 되새겨서 말씀합니다. 원자력이 지금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그 원자력의 그 원자의 기본은 무엇인가. 원자력을 구성하는 소립자의 기본은 무엇인가. 이른바 전자 양자 또는 중성자 같은 그런 기본적인 기본 힘은 무엇인가. 기본적인 순수 에너지. 물질이 아닌 순수 에너지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입니다. 음양을 초월한 태극 자리 태극太極 무극無極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자리입니다. 동서 모든 천인들은 대체로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똑같은 것을 표현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소크라테스도 먼저 그대 자신을 알아라. 그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면은 자신을 알으라고 했겠습니까. 자기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그 독배를 마실 정도로 소신이 확실하니까 인제 그와 같이 말했단 말입니다. 그 자신이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무한공덕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기에 공덕장功德藏이라. 공덕장功德藏이란 말입니다. 공덕의 곳집이란 말입니다.
경을 인용해서 부처님 공덕을 헤아려 보면은 가장 간추려서 말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법화경에서 말한 상락아정이라. 그것이 불성공덕입니다. 상常이라. 영생불멸해서 그야말로 상주부동常住不動하는 그런 자리란 말입니다. 항상 상자 상常이라. 락樂이라. 조금도 조금도 그런 불행이나 고통이 없는 안락무원 자리란 말입니다. 또는 '아我'라 나 아我자 아라. 이 아我는 대아大我입니다. 진아眞我입니다. 진아공덕 이것은 불경에 보면은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 모두를 다 자재롭게 할 수 있는 아我라 말입니다. 부처님 경전에 쓰인 바와같이 자기 몸을. 자기 몸을 삼천대천세계에 순식간에 꽉 채울 수 있다 말입니다 또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마음대로 공중에 올라가서 십팔신변十八神變이라. 이것 다 불경에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 말이 아닙니다. 저는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할 뿐입니다 공중에 올라가 십팔신변十八神變을 다 한다 말입니다. 한 말로 말씀드리면은 우리 불성佛性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 이것은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심佛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성은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같이 우리가 화두를 참구하고 또는 묵조선을 하고 주문을 외이고 기도를 모신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 가지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가 굉장히 속빠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토경(정토삼부경)에 보면은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한 생각, 한 생각으로 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한단 말입니다 이것도 원래 납득이 안 가시겠지요. 업장이 많은 우리 중생들이 어떻게 해서 한 생각 동안에 극락세계라 하는 청정세계에 갈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의단을 품으시겠지요.
그러나 비록 우리 중생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우리 차원에서 상대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오염이 됐겠지만 그 본래의 자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오염이 된 그대로 조금도 오염이 안 돼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본래면목의 자리로 볼 때에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본래성불이라. 우리 닦아 가지고 석가모니같이 그와 같이 난행고행 끝의 성불이 아니라 본래성불이라 이 말씀은 본래에서 본 참입니다. 본래 원리에서 원리에서 보는 것이 참다운 실상實相입니다. 실상實相의 견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 청정미묘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의 화신化身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 자체입니다
여기에 지금 몇천 명 우리 불자님들이 계십니다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옆에 사람하고 자기하고 뿔뿔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적으로만 본다 하더라도 지금 뿔뿔이가 아닙니다. 이 공간 속안에 탄소나 질소나 산소나 그런 지금 공기가 꽉 차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도 내내 탄소 질소 산소 수소라는 그러한 사대로 구성되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 공기도 이 공간의 공기도 역시 각 산소로 구성되어 있고 말입니다 각 탄소나 산소나 그런 각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자기 옆에 사람도 그러는 것이고 자기 몸도 그러는 것이고 따라서 사실은 물리학 차원에서만 봐도 자기와 남과는 모두가 하나로 지금 다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영국이나 저 독일이나 그런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나라 사람도 우리하고 딱 지금 붙어 있습니다. 이 대류권對流圈에서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탄소나 그런 것이 없는 공간은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그런 걸로 해서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로 지금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부처님 몸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중생들은 그 물리학 차원도 생각을 잘 못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모든 물리현상의 근본 자리 근본 순수 에너지가 바로 불성인데 불성佛性 그것이 바로 우주의 참다운 성품입니다 그 자리로 부터서 전자가 나오고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서 전자가 나오고 양자가 나오고 중성자가 나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적당히 모여서 산소요 수소요 각 원소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에 빈틈도 없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 불성의 하나의 인연 따라서 잠시간 거품 같은 그림자 같은 모양을 나툰 것이 나요 너요 내 것이요 네 것이요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까지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이렇게 또 아주 난해상을 어려운 생각을 가지십니다. 그러나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대로 오염이 본래로는 안 되어 있다 말입니다. 우리가 봐서 오염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지 청정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대로 그대로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고 부처님의 화신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만 돌이키면은 앞서 말씀드린 바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돌이키면은 그때는 바로 한 생각 그걸로 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한단 말입니다 정토경(정토삼부경)에 보면은 우리가 평소에 잘 살지 못해가지고서 여러가지 업業을 많이 짓습니다. 그러다가 어언간에 임종때가 다다라 온다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임종때 선지식이나 좋은 그런 선우 자기 좋은 선지식 벗을 만나서 우리 참다운 성품은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고 진여불성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는 곳은 청정한 극락세계極樂世界다. 극락세계極樂世界는 항시, 항시(항상) 우리를 초대한다 말입니다 초대한다고 그러면은 조금 이상이 생각이 드시겠지요. 우리 인간의 본성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 진여불성은 이것은 언제나 모든 존재를 다시 온전히 본래의 진여불성으로 다 이끌려고 하는 무서운 인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느낀 인력引力도 역시 그런 인력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우주의 본질은 우주의 본질이라 하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본래 부처의 자리로 본래 불성의 자리로 이끄는 그러한 무서운 인력引力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우주관에서는 이른바 텅텅 빈 공간에서 이 우주의 형체가 이루어지는 그런 성겁成劫이 있고 또는 중생이 사는 살 주住자 주겁住劫이 있고 말입니다. 다시 이것이 각 불협화에너지, 엔트로피가 증장되어 가지고서 파괴가 되어가는 그런 괴겁壞劫이 있습니다. 또는 다 파괴가 돼서 텅텅 비어버리는 공겁空劫이 있다 말입니다. 공겁때는 모두가 다 불성으로 다 화현되는 것입니다. 불성으로 화현된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말 것인가 그대로 더 그냥 텅텅 빈 공겁空劫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무색계無色界라. 무색계無色界 중생은 그때는 몸뚱이는 없고 식識만, 아직 성불이 못된 우주의 순수한 생명과 하나가 못된 그러한 존재가 무색계에 있단 말입니다 그런 중생들은 또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싫어하는 좋아하는 그 마음이 그 마음이 공업이 되어서 공업共業이 되어서 또 태양이고 또는 지구고 뭐다 만드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본래 물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오직 있는 것은 진여불성뿐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훤히 본 그런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모두가 다 공이라. 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물질이 하나도 없다. 이 몸 있는 채로 바로 공이라. 우리가 색즉공色卽空이라는 것도 역시 물질로 분석한 뒤에 공(석공析空)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색色이라는 물질 그대로 그대로 바로 공(즉공卽空)이란 말입니다. 다만 견해가 우리 중생의 때묻은 눈으로 보는 것이니까 있다고 보는 것이지 참다운 청정 법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역시 이 몸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관념도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고집을 부릴 아무것도(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만 안다고 생각할때는 세상 살기 참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달마스님께서 말씀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그래야 비로소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된다 말입니다. 참다운 진리를 몰라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못됩니다. 알아도 반가통半可通이라. 확실하게 몰라서는 우리가 그걸로 해서는 우리 생활을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어째 제일 쉬운 것인고 하면은 바로 우주의 본연의 도리에 따라 있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종당에는 꼭 부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빨리 닦고 게으름 부리고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어짜피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한테로 지금 끌려갑니다 진여불성이 돕고자 합니다. 진여불성이 되고자 하는 그런 우리의 오랜 나그네길에서 오랜 윤회의 길에서 우리 인간이 굉장히 소중한 도장입니다 더구나 우리 인간 세상에서 불법을 만났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불법을 모르고 지나가면은 그야말로 역풍에 거슬러 가는 거슬러가는 돛단배나 같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내 자성自性이 내 본래면목이 불성이고 우주가 불성이 아님이 없다 우리네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충만해 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정말로 순풍에 돛단배입니다.
싸움을... 우선 쉽게 말해서 싸움을 하기보다도 싸움을 않고 화합하기가 훨썩 쉽습니다. 욕을 하기보다도 좋은 말로 자비로운 말로 유연스러운 말로 하기가 훨썩 쉽습니다. 계행을 파계하기보다도 계행을 지키기가 훨씬 쉽습니다 부처님 계율은 모두가 다 우리 인간의 지켜야 할 도덕적인 이것은 기본 기본 규율입니다 도인들은 법성法性 그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때는 마치 공자가 나는 지금 칠십이 넘어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넘음이 없다 이렇게 말하듯이 도공계道共戒라. 도를 깨달으면 그때는 끝에는 도체道體와 더불어서 불성이 자기의 몸이니까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해도 그때는 조금도 계율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 나쁜 습관성이 많아서 우리가 의지를 쓰고 계율을 지켜야 그래야 불성에 따라간다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지금도 고기를 자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요 저는 동정을 합니다. 동정를 허나 저는 용납은 저는 못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것은 고기를 자시는(먹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에 절대로 이로운 길이 아닙니다 생명이 하나거니 생명이 하나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독사까지도 과거에 업장이 많은 독사까지도 똑같은 생명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어느 어느 생명도 우리가 죽일 만한 아무런 권리도, 권리도 이유도 없습니다 다른 생명을 죽인다고 생각할 적에 앞서 말씀드린 바 같이 하나로 연결된 우리 생명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다른 생명을 해친만치 우리한테 그 보복을 주는 것입니다. 또는 돼지나 또는 소나 닭이나 또 그런 것이 어떻습니까. 업장業障이 많아서 돼지가 되고 닭이 되고 소가 되고 했지 않습니까 업장이 많은 그러한 세포 그러한 고기가 그래도 조금은 더 업장이 가벼운 우리 인간의 몸에 들어온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좋을 수가 있습니까. 부처님한테 우리가 향을 사르고 기도를 모시고 참선도 하고 보고 있는 우리 불자님들 아닙니까 불자님들이 자기 색신色身을 앞으로 금강신金剛이 돼야 할 자기 색신을 그런 업장이 무거운 중생의 그런 고기로 해서 세포로 해서 오염시킬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현대 모든 병 가운데서 70% 이상이 이른바 동맥경화증이라고 지금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고기에서 취하는 그런 단백질 또는 지방 이런 것이 동맥 경화증에는 가장 큰 그런 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도 멀리 돌아가실 분도 계시고 하니까 제가 장황한 말씀을 될 수록 줄여가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기를 자시지 말으십시오. 부처님의 부처님의 소중한 그런 부촉입니다 부처님께서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고기를 먹으면 어떤 해가 있는 것인가 우리 손자비損慈悲라. 우리 자비심을 손상을 시킨다 말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극도로 우리가 증장을 시켜야지 그래야 본래 부처인 성불이 되지 않겠습니까. 헌데 우리가 먹는 그런 음식으로 해서 더구나 우리 몸도 마음도 해치는 음식으로 해서 우리 자비를 손상을 시켜서야 되겠습니까. 나찰습기羅刹習氣라. 동물 고기 이것은 오염된 것인지라 거기에는 나쁜 그런 악귀들, 나쁜 악귀들은 그런 냄새를 좋아합니다 그런 나쁜 그냥 악귀들 나찰이 거기 달라붙기 때문에 그런 고기를 먹음으로 해서 단백질이 많아서 비리한다든가 그런 것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나쁜 그런 귀병 말입니다 우리 아픈 것은 귀신병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귀병에 걸릴 수도 있다 말입니다. 또는 천성원리天聖遠離라. 신선이나 또는 선신이나 그런 선신은 우리 곁에서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냄새를 싫어하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학도불성學道不成이라. 마음 닦는 공부는 더디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타악도死墮惡道라. 죽어지면 그때는 악도에 떨어진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서 명문으로 있습니다. 명문으로. 소승경에 서는 아픈 사람들에 한해서 삼정육三淨肉이라. 세가지 정도의 정육, 자기가 그 동물을 죽이는데 보지 않고 또는 듣지 않고 또는 의심도 않고 그런 것을 먹어도 아픈 사람 먹어도 무방하다. 또는 오종정육五種淨肉이라. 그런 등등의 그때그때 그런 사정따라서 잠시간 청허한 법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살계를 다 받으셨지요. 보살계를 하는 대승계에서는 그때는 엄격히 금했단 말입니다. 가장 청정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을 따르는 우리 불자의 그런 생활 태도가 되어야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길은, 이것은 천지우주의 바로 우주가 지향하는 길입니다 우리 생명이 돌아갈 하나의 고향자리입니다 어느 땐가는 성불해야 됩니다. 그러나 한번 사람 몸을 버리면은 다시 사람 몸 받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부처님 법 받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따라서 금생에 사람 몸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났을 적에 또는 이와 같이 공부하기 쉬운 때 말입니다 또는 현대라는 사회가 부처님 법을 믿지 않으면은 자기도 항시 불안스러워서 안온하는 때가 없습니다. 마음에 갈등이 되고 그러니 안온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는 다른 가르침도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른 힌두교나 다른 가르침도 비록 더디게는 따라온다 하더라도 종단에는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자기들 교조의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하고 별로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또는 그네들도 똑같이 모두가 다 우리와 더불어서 진여불성으로 됐다 말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다른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과 약간의 지엽적인 문제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너무 지나치게 비방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설득을 시키기 위해서는 비방해서는 더욱 더 거리가 멀어져 갑니다. 그네들 좋은 점을 될 수록 찾아서 우리가 공통 분모를 발견해서 대화를 해야 됩니다. 우리 불자란 것은 다른 사람의 단점을 봐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 장점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다 진여불성의 화신化身이란 말입니다. 참말로 장점은 다른 사람을 부처님으로 본다 말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근대의 사학가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그야말로 참 불교도 공부하고 인도에 가서 연구를 많이 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 분께서 이 원자력시대에 우리시대에 있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를 갈파한 그런 말이 있는데 제가 인용하겠습니다. '이 원자력 시대에 있어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석존이 이루어 놓은 그런 진리의 수준 석존이 이루어 놓은 그런 진리의 수준까지 우리 인류가 올라가지 않고서는 올라가지 않고서는 전 인류가 자칫 자멸할 수 밖에는 없다' 이렇게 말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명심하십시다.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서는 가정적으로 갈등이 계시는 분도 있겠지요. 또는 우리 스님네 가운데서는 하나의 종단적으로 하나의 문중적으로 갈등이 계신 분도 있겠지요. 이런 때는 이런 때는 선선히 선선히 자기가 바보가 되는 길이 제일 좋습니다 무슨 일로 경합할 때는 자기가 물러나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우리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같이 칠순이 넘은 이가 역시 오래 됐지만은 저도 지금 이 한국 들어와서 올 겨울에 선방가서 한 철을 다시 공부할 셈입니다. 공부가 미숙해서 그럽니다. 칠십 넘은 노승老僧이 무슨 청승으로 무슨 청승으로 그러는가 아 비웃은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제 지처를 제가 가장 잘 압니다. 부처님 정상까지는 지금도 천리만리란 말입니다 금생에 제가 할 것은 무엇인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우주의 그런 공변(공편) 고향자리, 거기에, 금생에 다만 한 발이라도 더 다가서기 위함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바로 생명의 광명光明 자리입니다. 하나의 우리가 원자력, 원자력 단계도 역시 다 모두가 다 방사선 그런 광명光明 이 있습니다. 헌데 그러한 각 원자의 가장 기본되는 생명의 본질, 본질인 진여불성 자리는 우주에 충만한, 우주에 충만한 광명 자리입니다. 그러게 대일여래大日如來라 대일여래는 바로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입니다. 비로자나불은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변조라. 광명도 이 태양광선 같이 전기 빛같이 이와 같이 그런 눈부신 광명이 아닙니다 청정적광입니다.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은 자기 공부에 따라서 그 광명을 광명을 조금 보기도 하고 많이 보기도 하고 드디어는 그 광명과 하나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광명하고 광명과 접근되면은 자기 존재가 어떻게 변화가 되는 것인가. 광명과 접근 돼가면 돼 갈수록 자기 몸에는 변화가 옵니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가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세계는 모두가 다 광명의 척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욕계가 가장 어두운 세계고 말입니다 색계부터서는 광명 뿐입니다 색계는 천상이니까 인제 광명입니다. 무색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처님 세계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신불 세계라. 비로자나불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정토경(정토삼부경) 보면은 청정부처님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런 별명이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또는 상대가 없다고 그래서 무대광불無對光佛이란 말입니다. 또는 거리낌이 없다고 해서 무애광불無碍光佛이라. 또는 그 생명이 영생불멸한다고 그래서 목숨 수壽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말입니다. 이렇게 가지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의 공덕功德 이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성自性 우리 자성, 우리 불성의 이것이 본래 다 공덕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신통, 부처님 공덕은 아라한도를 성취한 무수한 성자가 무수한 세월동안에 세월동안 부처님 공덕을 자비도 많다 지혜도 많다 뭣도 많다 이렇게 다 헤아려도 무수한 세월동안도 능히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알고서 법신부처님을 모르면 그때는 소승에 불과합니다. 진여불성이나 또는 그야말로 불심이나 그런 자리는 소승권의 소승불교에서는 없습니다 그러게 스리랑카에서 나온 그런 스님들을 만나보면 참 딱딱합니다. 우리는 한국이라 하는 정말로 축복된 나라입니다 축복된 나라입니다. 지금 고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분단의 고통도 얼마나 심각합니까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런 고생 저런 고생 경험한 모두를 다 감안하더라도 우리 한국은 가장 축복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신라 800년의 그런 불교시대 고려 500년의 불교시대 말입니다. 이조 500년 동안에는 비록 핍박은 받았다 하더라도 그래도 산중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우리 잠재력을 많이 키웠습니다. 저는 여러나라 불교를 다 경험을 다 했습니다. 일본 불교도 미국 들어가서 그 정토종 정토진종 같은 것은 훌륭한 그런 대학도 있습니다. 그 임제종 조동종 모두가 다 그 큰 선원이 여러 군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는 그런 사람들 불교는 좋기는 좋은데 허우대는 좋은데 기가 빠져 있단 말입니다. 우리 한국 불교는 기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 젊은 스님네들 보면은 구참납자나 그런 분들을 보면은 저는 굉장히 존경심을 냅니다.
틀림없이 틀림없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 때부터 육조혜능까지 순선시대純禪時代 순선시대의 수행법은 자성선自性禪입니다 자성선自性禪이라 바로 불성선佛性禪입니다. 또는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참선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에서 보면은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말이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단경 부촉품付囑品에 가서 보면은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 일체종지를 얻을라고 하면은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공부할지니라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사조 도신스님께서는 달마 때부터 육조혜능까지 내려 올적에 사조 도신스님 때의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거기에도 일행삼매一行三昧 말씀이 있습니다. 일행삼매를 어디서 말했는고 하면은 문수설반야경文殊設般若經이라. 그 문수설반야경을 다 들먹이면서 사조 도신스님이 역설을 했습니다. 내 선법은 딴 것이 아니라 오직 달마때부터 말해 온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이라. 모두가 다 진여眞如가 다 불성佛性뿐이다 하는 그것과 또는 문수설반야경에서 말하는 일상삼매 일행삼매라 이렇게 말씀해서 그 방법까지도 구체적으로 말씀했습니다. 천지우주가 불성뿐이거니 화두도 역시 불성을 찾는데 하나의 방편에 불과합니다. 천지우주가 불성뿐이다 모두가 불성 아님이 없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새삼스럽게 의심 할 아무런꺼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불자님들은 굉장히 지금 총명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웬만한 분들은 다 고등학교 이상 나오고 또는 고등교육을 받은 분들이기 때문에 논리학 체계도 다 갖춘 것이고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으면 납득이 안갑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은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합법적이고 합니다 바로 우주의 도리이니까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순풍의 돛단배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쉬운 것인데 너무나 잘나고 똑똑한 분들이 중간에들 많이 그냥 계셔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서 자기들 나름대로 고집도 부리고 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 우주의 도리로 해서 순탄하게 갈 수 있는 그런 탄탄대로를 좀 어렵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그런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또 재차 분발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로 생각하면은 모두가 다 고마울 뿐이고 감사의 합장만 우리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지금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외길입니다. 또 우리 생명은 바람 가운데 등불이나 똑같습니다. 내일 갈 지 모래 갈 지 모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도 역시 6년 전에, 6년 전에 이 자리에 제가 올 때도 다시 이 자리에 올 것인가 마치 루터가 그렇듯이 (Luther, Martin 1483∼1546) 저도 역시 마지막 설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때도 말씀했습니다마는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다행히 6년 뒤에도 이 자리에 와서 말씀드리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6년 동안에는 저 가까운 도반들이 벌써 저하고 어금지금 나이가 드는 도반 스님들이 두분이나 가셔 버리셨습니다. 저도 70이 넘었거니 뭐 진작 저도 가버렸다 하더라도 미련을 둘만 하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마는 그와 같이 인생무상을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절감이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내 생명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절대로 말으십시오. 우리 생명은 죽음이라 하는 것이 노소부정老小不定이라. (우리 생명은) 젊다고 해서 그야말로 뒤에 하고 늙다고 그래서 빨리 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정말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머리에 (붙은) 불탄 불을 끄듯이 꼭 서둘러서 부처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다 그래서 꼭 저희같이 출가사문이 돼야만이 공부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처소는 어디가 있든지 간에 장사를 하시던 또는 무슨 사업을 하시든 또는 무슨 소임을 보시든 말입니다. 어떤 처소에 있다 하더라도 자기 주변 사람들 자기 주변 모두를, 모두를 부처님같이 생각을 꼭 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화합적으로 보나 또는 사업이나 어떤 그런 일의 능률을 위해서나 가장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하셔서 금생에 마지막 길에 절대로 후회를 말으시고 저같이 칠십이 넘어서 청승맞다는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여러분은 아주 소장의 나이에 부처님 대사를 마치시기를 간절히 기원해서 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나무극락세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녹취 2023.8 무주선원 카페 황금님
|
첫댓글 유튜브 영상의 자막작업으로 카페의 황금님께서 녹취작업을 하시고 제가 일부 교정작업을 하였습니다.
황금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근념하시였습니다
부처님 법은 심심미묘하고 부사의한 우주의 大法이다.
불이법문은
부처님 가르침을 포함하여 우주 모든 진리의 근본원리로써 진리가 둘이 아닌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이라는 법문이고
눈에 보이는 상대유한적인 형이하학적인 세계와 보이지 않는 초월적 형이상학적인 세계는 절대 따로 있지 않고
둘이 아닌 오직 하나의 심심미묘한 진리라는 것이다.
부처님 법 따지고 보면 무아 무소유,
무아는 나를 포함하여 천지우주 모두가 다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로 제법 공이며,
천지우주에 본래 물질은 하나도 없다는 본래무일물인 것,
오직 있는 것은 진여불성 하나의 진리로 충만해 있는, 우주자체가 바로 부처님인 것이다, 우리의 자성 본래면목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합법적인 부처님 말씀
바로 우주의 도리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