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군(文城君) 유수(柳洙)가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전례와 같이 하였다. 유수의 자(字)는 노택(魯澤)이고, 문화인(文化人)이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유은지(柳殷之)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처음으로 세자 익위사 좌시직(世子翊衛司左侍直)에 제수(除授)되었고, 그 후 내금위(內禁衛)에 충원(充員)되었다. 경태(景泰) 계유년에 세조(世祖)가 정난(靖難)하는 데에 참여한 공으로, 추충 협책 정난 공신(推忠協策靖難功臣)의 호(號)가 내려졌다. 을해년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陞進)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옮겨졌다. 병자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승진되고, 천순(川順) 정축년에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 호조(戶曹)ㆍ공조(工曹)ㆍ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역임(歷任)하였다. 경진년에 가정 대부(嘉靖大夫)에 승진되고, 신사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으며, 성화(成化) 정해년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승진되었다. 기축년에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승진되고 다시 문성군(文城君)으로 봉(封)해졌으며,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하고는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가 내려졌고, 이 때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는 67세 였다. 시호(諡號)는 안양(安襄)인데, 너그럽고 화평함이 안(安)이고, 일로 인해 공(功)이 있음이 양(襄)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유수는 배우지 아니하여 학술(學術)이 없으며, 다만 활 쏘고 말타는 재주만 있을 뿐인데, 참찬(參贊)까지 이르게 된 것은 과분한 것이다. 어느 날 송골매[鶻]를 길들이는 법을 진헌(進獻)하기를, ‘모름지기 정존(鄭存)이 살았을 때에 총명하고 민첩한 환관(宦官)으로 하여금 전습(傳習)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그의 무식함이 이러하였다. 정존은 선조(先朝) 때 응방(鷹坊)의 늙은 환관이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