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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역자 에바브로디도(빌2:25-30)-2017.10.22
주연은 좋은 조연이 있기에 탄생합니다. 성경에도 주연 곁에는 조연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빛나는 인물 곁에 좋은 동역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 곁에 여호수아 같은 인물이 있었고, 여호수아 곁에는 갈렙 같은 인물이 있었으며, 엘리야 곁에는 엘리사 같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독불장군은 없었습니다. 바울이 빛나는 사역자가 된 것은 바울 곁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동역자들이 누구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라는 큰 별 주변에 이름없이 빛도 없이 바울을 비추어주던 수많은 별들의 공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변호하던 바나바,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와 디도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함께 고통을 당했던 실라가 있었습니다. 바울을 위해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정도로 사랑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도 있었습니다(롬16:4). 특별히 바울을 비추어 주던 빛나는 동역자들의 명단이 로마서 16장에는 실명으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정말 천국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바울의 사역이 탄력을 받았고 빛을 발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아름다운 교회도 많았습니다.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바울을 사랑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갈4:15)도 있었고, 온갖 환난과 시련 가난한 중에도 바울을 위해 풍성하게 연보하던 마게도냐 성도들(고후8:1-5)도 있었으며, 바울의 부족함을 채워주던 고린도교회 성도들(고후9:12)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여름 냉수처럼 시원케 해 주던 교회와 성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모두 다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던 아름다운 동역자들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결코 외롭지 않은 복음의 사역자였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바울의 사역에 기쁨이 있었고,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주의 일은 외로운 일입니다. 하늘에서 상급은 크다할지라도 이 땅에서의 외로움과 고독함은 사역자만이 알고 있는 아픔입니다. 물론 바울 곁에 항상 좋은 동역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잠시나마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동역자들도 있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도 있었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기도 했습니다(딤후4:10).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 뜻이 맞지 않아 중도에 하차했던 동역자 마가도 있었습니다(행15:38).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인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복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꼭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있으나 마나한 사람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서로 섞여 살고 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복 중에 복이요, 덕 중에 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의 만남에 세 가지가 있다합니다. 첫째는 생선 같은 만남입니다. 생선 같은 만남은 만지기만하며 비린내가 나고 말에나 행동에 역한 냄새가 납니다. 만나면 좋지 않은 영향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비린내와 썩은 냄새를 풍기는 만남입니다.
둘째는 꽃과 같은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향기가 나는 만남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말에나 행동이 향기가 나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입니다. 이런 만남도 언젠가는 시들해집니다. 세 번째는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상대가 땀 흘리며 수고할 때 땀을 닦아주는 만남이요, 상대가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만남입니다. 이른바 음식물도 닦아주고, 허물도 닦아주며, 눈물과 콧물을 닦아주는 만남입니다. 들어보니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본문에 바울에게 잊을 수 없는 동역자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이 에바브로디도가 참으로 귀하고 대단한 인물입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인물입니다. 바울은 25절에서 에바브로디도를 자신의 형제, 함께 군사된 자, 사자, 자기 쓸 것을 돕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동역자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동역자라 함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을 함께 감당할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과 나를 구원하시는 일은 단독으로 하시지만, 대부분의 모든 사역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교회를 세우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 사역까지 모두 당신의 동역자와 함께 하십니다(고전3:5-9). 그러므로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나를 선택하사 함께 일하시기 원하심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동역하실 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시고, 주의 종들을 통하여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질서만큼은 절대 깨뜨리지 아니하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동역자요, 성령님의 동역자입니다. 가는 곳마다 세워진 교회의 동역자이며 함께 믿음의 지체된 형제들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런 바울과 함께 동역자가 된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신앙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로부터도 인정을 받은 하나님의 동역자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헌금을 하여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보냅니다(빌4:18). 에바브로디도는 교회에서 가장 신임 받는 성도요, 바울 편에서도 충성된 동역자였습니다. 과연 아름다운 동역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에바브로디도를 통하여 아름다운 동역자 모습을 찾아보고 은혜받기 원합니다.
(1) 그는 교회와 주의 종에게 인정받는 인물입니다(25절)
어느 곳에서든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있고,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으며, 있으나마나 한 사람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엄밀하게 분석하면 어느 조직이든지 머릿돌같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뿐 아니라, 걸림돌 같은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 눈에 필요치 않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머잖은 장래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요, 비록 지금은 있으나마나 한 사람일지라도 앞으로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을 믿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저런 사람이 다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가정이나 교회, 직장이나 사회 모든 곳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더욱 그러합니다. 특별히 교회 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기왕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느 곳에서든지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정말 필요한 인물이요, 빌립보 교회 속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물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동역자요, 교회의 동역자이며,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그는 교회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요, 주의 종 바울로부터도 신뢰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교회와 주의 종에게 정말 아름다운 동역자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역한다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동역자는 먼저 동역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동역자 의식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함께 부르심을 입었다는 지체의식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비록 역할은 달라도 목적은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교회의 목적은 무엇이며, 주의 종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면 반드시 공동체의식, 동역자의식, 지체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자는 자신의 필요성을 통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성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그 공동체 속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 속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어디서든지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필요로 했습니다. 당분간이라도 자기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바울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도 에바브로디도는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거액의 후원금을 가지고 로마의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전달하러 간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신뢰하고 인정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 입장에서도 에바브로디도를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안되는 형편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더욱 급히 저를 보내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28절). 그는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도 필요한 인물이요, 사도 바울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름다운 동역자입니다.
혹시 칠면조와 게의 차이를 아십니까? 칠면조는 자기 동료가 외부로부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공격을 받으면 한꺼번에 몰려들어 공격하며 도와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 내린답니다. 그래서 게를 바구니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열어놓아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두 마리만 넣어두면 끄떡없다고 합니다. 한 마리가 나오려고 하면 다른 한 마리가 다리를 끌어내려서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서로 돕고 필요를 채워주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십시오.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십시오.
(2)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성숙한 인물입니다(26-29절)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는 자는 매사가 자기중심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합니다.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 바울에게 심부름을 갔던 에바브로디도가 죽을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혹은 병세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추측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중병임에 틀림없습니다(27절). 그 병 때문에 바울도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의 중병을 빌립보 교회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 교회와 성도들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회와 바울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더 큰 근심을 하게 됩니다. 이유는 자기로 인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근심하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교회와 성도들의 아픈 마음 때문에 더 근심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 중에는 마음이 상실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주의 일을 하다가 당하는 아픔과 고통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심약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는 자신의 중병으로 인하여 혹시라도 교회의 영광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신의 중병으로 인하여 덕을 가리우지 않을까 근심한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와 성도들을 먼저 사랑하고 배려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보다는 남의 아픔을 먼저 아파하고 배려한 영적 신사였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동역자들의 특징은 먼저 교회를 위한 근심과 다른 지체를 위한 근심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근심을 거룩한 근심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입니다(고후7:10).
세상적인 근심은 사망을 이루지만 거룩한 근심은 약이 됩니다. 하나님은 에바브로디도의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긍휼히 여기사 근심을 덜어주셨습니다(27절). 에바브로디도의 근심을 덜어주시고, 바울의 근심을 덜어주시며, 빌립보 교회의 근심도 덜어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급히 교회로 보낸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걱정해주고 근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요, 남을 먼저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효자가 살았습니다. 어느 여름날 밤 바깥마당에서 자리를 펴고 아버지와 함께 잠을 자는데 모기가 지나칠 정도로 극성을 부리더랍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자기 몸을 물어뜯는 모기를 피하지도 않고, 쫓지도 않고 가만 내버려두더랍니다. 왜냐면 자기가 모기를 내어 쫓으면 그 모기가 아버지를 물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먼저 배려한 것입니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특히 믿음의 성도된 자는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름다운 동역자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인물입니다(30절)
아름다운 동역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구차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먼저 내 영혼을 구원하신 구세주이십니다. 물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행하신 일이지만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나에게서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신 일은 동역을 요구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역을 위해 동역하기를 꺼려합니다. 이해득실을 따지고 손익을 계산합니다. 가급적이면 힘들고 어려운 일에 동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칭찬과 영광을 받는 일에는 동역한다고 말하면서도 고난 받는 일에 동역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를 보십시오(30절). 요즘은 에바브로디도 같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성도들을 찾아보기가 정말 힘듭니다. 자기에게 소유된 시간이나 물질, 헌신이나 봉사마저도 인색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역자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동역자, 교회의 동역자, 주의 종의 동역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하는 자들입니다. 배고플 때나 배부를 때도 항상 함께 합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도 항상 함께 합니다. 한마디로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람이 진짜 동역자입니다. 지금 교회들마다 이런 동역자들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은 이런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30절). 그리스도의 일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입니다. 물론 작은 지체로서 성전 된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일이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일은 빌립보 교회 공동체의 일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상황으로 볼 때 빌립보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일이 그리스도의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감당했습니다.
바울을 섬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회의 부족함을 몸소 채우는데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일을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아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것입니다. 이 마음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자기 몸 된 교회를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이 없으면 교회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에바브로디도에게는 주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교회를 섬겼던 것입니다.
교회에 이런 동역자가 많은 것은 천금보다 귀한 축복입니다. 교회는 이런 아름다운 동역자들에 의해서 성숙되어 갑니다. 이런 자들에 의해 지금도 교회는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실한 동역자가 되십시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충성스런 동역자가 되십시오. 주의 종에게 힘이 되는 든든한 동역자가 되십시오. 에바브로디도 같은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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