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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역대(歷代)주요(主要)성씨(姓氏) 이야기
1. 삼한갑족(三韓甲族)
삼한갑족이라는 말의 삼한(三韓)은 신라, 고려, 조선의 삼조(三朝)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역사 전(全) 시대에 걸쳐 학문(學問) 및 관위(官位)에서 드러난 조상을 둔 집안을 삼한의 갑족, 벌족(閥族)이라 하였다.
2. 문묘(文廟) 배향(配享)과 동국 18현(東國十八賢)
이른바 사계(沙溪) 선생 자손들을 삼한 갑족 중 제1로 치는 이유는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 5성(五聖)과 민손(閔損) 등 공문10철(孔門十哲), 주돈이(周頓頤) 등 송조 6현(宋朝六賢) 기타와 함께 중앙의 성균관(成均館) 및 고을 향교(鄕校) 등에서 제향(祭享)을 받는 동국 18현 중 일문(一門)에 부자(父子) 곧 사계(沙溪), 신독재(愼獨齋, 金集)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문묘의 배향을 받는 조상이 난 씨족은 다음 표에서 보듯이 신라, 고려, 조선 3한을 통하여 16씨족뿐인데, 일문에서 두 사람이 배향된 예는 광산김씨와 은진송씨(恩津宋氏)였다.
문묘(文廟)는 공자 이래 2000여 년 유학(儒學)을 발전시켜 온 중국 및 우리 나라 대학자들의 위패(位牌)를 대성전(大成殿)에 봉안(奉安)하여 제향(祭享)하는 곳으로 우리 나라 문묘는 현재 서울 명륜동 3가에 소재한다.
우리 나라 문묘 제도는 중앙에 성균관이 있고, 각 고을에 향교가 있으며, ‘대성전’에서는 공자 이하 고대 중국 이래의 성(聖)․현(賢) 제위(諸位)와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를 하여 오는데, 중앙 ‘성균관’에서는 5성(五聖),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중국 역대제현(歷代諸賢) 94위 및 동국 18현 도합 133위를 향(奉享)한다.
그리고 각 고을 향교 중에서 주(州)․부(府)․군(郡) 곧 목사(牧使)․부사(府使)․군수(郡守)가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위 중설위(中設位)라 하여 ‘5성, 공문10철, 송조6현, 동국18현“등 39위를 봉향하며, 현(縣) 곧 현령(縣令)․현감(縣監)이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설위(小設位)로 ‘5성, 송조 4현(周濂溪, 程明道, 程伊川, 朱晦菴), 동국 18현’ 등 27위만 봉향한다.
성 명 | 관향 | 아호 | 관직 기타 | |
1 | 설 총薛 聰 | 경주 | 우당雨堂 | 신라 고승 元曉의 子로 神文王 때 翰林으로 弘儒侯로 追封 |
2 | 최치원崔致遠 | 경주 | 고운孤雲 | 신라 때 唐 나라로 가 修學하고 돌아와 翰林學士로 시호는文昌侯 |
3 | 안 유安 裕 | 순흥 | 회헌晦軒 | 고려 忠烈王 때 修文館太學士로 시호는 文成公 |
4 | 정몽주鄭夢周 | 연일 | 포은圃隱 | 고려 恭愍王 때 관이 門下侍中으로 시호는 文忠公 |
5 | 김굉필金宏弼 | 서흥 | 한훤당寒喧堂 | 刑曹佐郞이었고 조선 中宗 때 右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文敬公 |
6 | 정여창鄭汝昌 | 하동 | 일두一蠹 | 縣監이었고 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獻公 |
7 | 조광조趙光祖 | 한양 | 정암靜菴 | 大司憲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 |
8 | 이언적李彦迪 | 여주 | 회재晦齋 | 左贊成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元公 재 |
9 | 이 황李 滉 | 진성 | 퇴계退溪 | 大提學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純公 |
10 | 김인후金麟厚 | 울산 | 하서河西 | 弘文館校理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文正公 |
11 | 이 이李 珥 | 덕수 | 율곡栗谷 | 吏曹判書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成公 |
12 | 성 혼成 渾 | 창녕 | 우계牛溪 | 左參贊이었고 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簡公 |
13 | 김장생金長生 | 광산 | 사계沙溪 | 刑曹參判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元 |
14 | 조 헌趙 憲 | 배천 | 중봉重峰 | 僉正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敬 |
15 | 김 집金 集 | 광산 | 신독재愼獨齋 | 判中樞府事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敬公 |
16 | 송시열宋時烈 | 은진 | 우암尤菴 | 左議政이었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
17 | 송준길宋浚吉 | 은진 | 동춘당同春堂 | 吏曹判書였고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正公 |
18 | 박세채朴世采 | 반남 | 현석玄石 | 左議政이었고 시호는 文純公 |
< 참고> : 대성전에서 봉향하는 고대 중국 이래의 성현
1. 5성…孔子(丘, 仲尼), 顔子(回, 子淵), 曾子(參, 子輿), 子思(伋, 子思), 孟子(軻, 子車)
2. 공문10철…閔損(子騫), 冉耕(伯牛), 冉雍(仲弓), 宰予(子我), 端木賜(子貢), 冉求(子有), 仲由(子路), 言偃(子游), 卜商(子夏), 顓孫師(子張)
3. 송조6현…周敦頤(茂叔, 濂溪), 程顥(伯淳, 明道), 程頤(正淑, 伊川), 邵雍(堯夫, 安樂), 張載(子厚, 橫渠), 朱熹(仲晦, 晦菴)
4. 중국 역대 94현…澹臺滅明, 原憲, 南宮适, 商翟, 漆雕開, 公西赤, 樊須, 梁鱣(전), 기타
3. 대제학(八大提學)․문형(文衡)의 배출
자신의 문벌(門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높은 벼슬에 있었던 조상의 수를 헤아리고 혹은 대과급제자의 수가 많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환자(科宦者)의 수는 정치적 혁명기의 처신이나 혹시는 집안에 왕비가 나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한 결과로 얻은 덤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소위 ‘세상이 알아주는 집안’이라 할 때는 그 벼슬보다는 훌륭한 학자인 석학거유(碩學巨儒)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였는가를 첫손으로 꼽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삼한갑족의 높은 순위로 광김연리달서(光金延李達徐) 등을 손꼽는 까닭은 당대 학자로서 최고인 학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인 ‘대제학, 문형’이 7명, 6명 등으로 조선조 제1~3위였기 때문이다.
‘문형’은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대제학’의 별칭인데, 학문의 권위가 높다고만 해서 되는 관직이 아니었다.
‘문형’이 되자면 문과 급제자로서도 원칙적으로 호당(湖堂) 출신이라만 가능했다.
조선조에서 ‘호당’이란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으로 젊고 재주 있는 문신(文臣)으로서 임금의 특명(特命)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을 가리키며 그러한 특전으로 학문을 하는 것을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였다.
‘대제학’으로서도 ‘문형’의 별칭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한정되어 있었는데, 반드시 홍문관(弘文館) 대제학과 예문관(藝文館) 대제학 및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등 나라 전체의 학문 관련 세 가지 최고 직위를 모두 겸직하는 경우에 한하였다.
그리하여 ‘문형’은 위 삼관(三館)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위이므로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로 여겼으며 품계(品階)는 비록 판서와 동등한 정이품(正二品)이었지만 삼공(三公) 곧 삼정승이나 육조(六曹) 판서보다도 높이 대우하였다.
또 조선조의 벼슬들은 국법에 따라 모두 임기의 기한이 있었는데, ‘문형’은 본인 의사에 따라 종신직이었다.
참고로 우리 역사상 여러 벼슬에서 최연소의 기록을 세운 이는 광주이씨(廣州李氏)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었는데, 20세에 문과에 오르고 23세에 호당에 들었으며, 31세에 문형이 되었고,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이었다.
<참고> :
(1) 조선조의 ‘문형’은 도합 133명인데, 2명 이상을 배출한 씨족은 모두 29씨족이고, 5명 이상 배출한 씨족은 광산김씨 7명, 연안이씨 7명, 전주이씨 7명, 신안동김씨(장동김씨) 6명, 달성서씨 6명, 의령남씨 6명, 덕수이씨 5명 등 7씨족뿐이다.
(2) 일문7대제학…광산김씨의 대제학 7명이 모두 사계 한 사람의 자손임. 한 씨족에 7대제학이 난 집안은 광산김씨 외에도 전주이씨와 연안이씨가 있으나 연안이씨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자손은 6대제학으로 3대대제학, 부자대제학이 났으므로 한 사람의 자손으로 7대제학은 광산김씨 사계 가문이 유일하다. 광산김씨으로 양녕대군 장인이었던 김한로(金漢老)는 예문관대제학
4. 씨족별 주요 과환자(科宦者) 비교
자신의 문벌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높은 벼슬에 있었던 조상의 수를 헤아리고 혹은 대과급제자의 수가 많음을 자랑한다.
금관자가 서말(三斗)이니 [관자(貫子)는 조선조에서 正三品 이상 고관들의 망건줄에 꿰던 玉 혹은 金으로 만든 고리를 뜻하는데, 從一品 崇祿․崇政大夫 이상은 無刻 玉貫子, 從二品 正憲․資憲大夫는 彫刻 金貫子, 正二品 嘉義․嘉善大夫는 무각 金貫子, 正三品 通政大夫는 조각 옥관자를 달았음], 혹은 삼대 정승, 부자 영상(領相)이 났느니, 혹은 삼조(三朝)에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내었느니 등등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나 과환자(科宦者, 벼슬아치)의 수는 정치적 혁명기의 처신이나 혹시는 집안에 왕비가 나서 세도정치를 한 결과로 얻은 덤일 수도 있었다.
특히 상신이나 대과급제자가 많은 씨족은 국성(國姓) 왕족인 전주이씨인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관직에 오를 수 없는 학문 있는 왕손(王孫)들을 대접하는 방법으로 그 수가 많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 외에도 왕비가 여럿 나 세도한 집안이 또한 그러함을 알게 되는데, 그 때문에 왕비가 많이 난 집안을 이른바 ‘치마양반’이라 하여 문벌, 벌족의 등급을 낮추어 보는 것이 전통이었다.
5. 상신(相臣)과 대과급제자(大科及第者)
우선 관직으로 1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 했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3정승 지위에 오른 조상이 얼마나 되는가를 문벌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주요 씨족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연 번 | 성 씨 | 대과 급제 | 상 신 | 문 형 | 왕 비 | 생원 진사 | 연 번 | 성 씨 | 대과 급제 | 상 신 | 문 형 | 왕 비 | 생원 진사 |
1 | 전주李씨 | 876 | 22 | 7 | 2719 | 27 | 진주柳씨 | 132 | 2 | 1 | 243 | ||
2 | 안동權씨 | 359 | 8 | 3 | 1 | 909 | 28 | 풍산洪씨 | 129 | 8 | 1 | 298 | |
3 | 파평尹씨 | 331 | 11 | 2 | 4 | 934 | 29 | 문화柳씨 | 126 | 8 | 1 | 381 | |
4 | 남양洪씨 | 329 | 9 | 3 | 1 | 833 | 30 | 김해金씨 | 123 | 1 | 469 | ||
5 | 안동金씨 | 315 | 19 | 6 | 4 | 716 | 31 | 연일鄭씨 | 119 | 5 | 3 | 277 | |
6 | 청주韓씨 | 287 | 12 | 1 | 5 | 768 | 32 | 순흥安씨 | 116 | 2 | 325 | ||
7 | 광산金씨 | 265 | 5 | 8 | 1 | 689 | 33 | 창녕曺씨 | 113 | 1 | 202 | ||
8 | 밀양朴씨 | 261 | 1 | 1 | 755 | 34 | 청풍金씨 | 110 | 8 | 3 | 2 | 240 | |
9 | 연안李씨 | 250 | 8 | 7 | 614 | 35 | 해평尹씨 | 110 | 6 | 3 | 1 | 271 | |
10 | 여흥閔씨 | 233 | 12 | 3 | 4 | 459 | 36 | 전주崔씨 | 109 | 3 | 1 | 348 | |
11 | 청송沈씨 | 224 | 13 | 2 | 3 | 567 | 37 | 성주李씨 | 107 | 1 | 349 | ||
12 | 진주姜씨 | 219 | 5 | 1 | 510 | 38 | 여주李씨 | 107 | 240 | ||||
13 | 반남朴씨 | 215 | 7 | 2 | 2 | 282 | 39 | 여산宋씨 | 106 | 2 | 1 | 226 | |
14 | 경주金씨 | 202 | 6 | 3 | 535 | 40 | 덕수李씨 | 105 | 7 | 5 | 275 | ||
15 | 동래鄭씨 | 198 | 17 | 2 | 484 | 41 | 의성金씨 | 96 | 1 | 256 | |||
16 | 한산李씨 | 195 | 4 | 2 | 42 | 강릉金씨 | 96 | 1 | 207 | ||||
17 | 廣州李씨 | 188 | 5 | 2 | 376 | 43 | 양천許씨 | 93 | 5 | 231 | |||
18 | 풍양趙씨 | 182 | 7 | 4 | 2 | 391 | 44 | 전주柳씨 | 93 | 243 | |||
19 | 경주李씨 | 178 | 8 | 3 | 45 | 양주趙씨 | 90 | 8 | 3 | 1 | 247 | ||
20 | 평산申씨 | 172 | 7 | 2 | 561 | 46 | 해주吳씨 | 89 | 2 | 3 | 302 | ||
21 | 전의李씨 | 165 | 4 | 1 | 431 | 47 | 한양趙씨 | 89 | 2 | 2 | 286 | ||
22 | 연안金씨 | 163 | 6 | 2 | 1 | 271 | 48 | 기계兪씨 | 85 | 3 | 284 | ||
23 | 풍천任씨 | 144 | 1 | 303 | 49 | 고령申씨 | 83 | 3 | 3 | 189 | |||
24 | 달성徐씨 | 140 | 9 | 6 | 1 | 393 | 50 | 용인李씨 | 83 | 3 | 1 | 197 | |
25 | 의령南씨 | 138 | 6 | 6 | 376 | 51 | 은진宋씨 | 74 | 2 | 1 | 219 | ||
26 | 창녕成씨 | 134 | 5 | 2 | 317 |
<참고> : (1) 위 표는 문과(대과) 급제자 70명 이상을 배출한 씨족임.
(1) 위 표의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제2자인 김숙승(金叔承, 工部侍郞)을 시조로 하는 속칭 구안동(舊安東) 상락김씨(上洛金氏)와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속칭 신안동(新安東) 장동김씨(壯洞金氏) 두 씨족을 합한 숫자임. 대과급제자 315명을 ‘구안동’과 ‘신안동’으로 나누어 살피지 못하였으나, 상신 19명중 ‘구안동’이 4명, ‘신안동’이 15명이며, 문형 6명, 왕비 4명은 모두 ‘신안동’임.
(2) 남양홍씨 역시 고려 초기 본래 당(唐)나라 사람으로 문화 사절의 임무를 띠고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였다고 전하는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는 당홍(唐洪)과 이보다 300년 정도 늦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 홍선행(洪先幸, 金吾衛別將)을 시조로 하는 토홍(土洪) 등 두 씨족을 합친 숫자임. 대과급제자 329명을 ‘당홍’과 ‘토홍’으로 나누어보지는 못했으나 ‘당홍’은 상신 8명, 문형 2명, 왕비 1명이 나고, ‘토홍’에서 상신 2명, 문형 1명이 났음.
(3) 조선 역대의 문과 대과 급제자는 모두 15.574명임.
특기사항
(1) 씨족들 가운데에서 정승의 배출로 특출한 집안이 동래정씨(東萊鄭氏)였다.
세조조(世祖朝)에 좌의정 창손(昌孫)과 연산조 좌의정 괄(佸)이 부자간이었다.
중종조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를 구하고자 힘쓴 명신(名臣) 영의정 광필(光弼)이 있었는데, 손자 임당(林塘) 유길(惟吉)이 좌의정이었다.
유길(惟吉)의 독자(獨子) 창연(昌衍)이 또 좌의정, 광필(光弼)의 증손 지연(芝衍)이 우의정이었는데, 창연(昌衍)과는 재종간이었다.
창연(昌衍)의 손자인 영의정 태화(太和)와 좌의정 치화(致和)가 형제간인데, 창연(昌衍)의 다른 손자로 지화(知和)가 또 좌의정이었으니 태화(太和) 형제들과는 사촌간이었다.
그러므로 유길(惟吉)의 증손이며 창연(昌衍)의 손자는 나란히 3인이 정승(政丞)이었으므로 1가(一家) 삼정승(三政丞)이라 칭(稱)하였다.
다음 대에서 태화(太和)의 아들 재숭(載嵩)이 우의정이었으므로 광필(光弼) 이하 재숭(載嵩)까지 7세에 8정승이며, 유길(惟吉) 이하 재숭(載嵩)까지 5세(世)에 걸쳐 6정승이었다.
이후에도 유길(惟吉)의 6대손에서 좌의정 석오(錫五)가 났는데, 곧 치화(致和)의 증손이며, 7대손에서 우의정 홍순(弘淳), 8대손에서 영의정 존겸(存謙)이 났고, 9대손에서 영의정 원용(元容), 11대손에서 좌의정 범조(範朝)가 났으므로 결국 광필(光弼) 이하 13대에 걸쳐 13명의 정승, 유길(惟吉) 이하 11대에 걸쳐 11명의 정승이 났다.
(2) 조선조에 3대 정승이 난 집안으로는 청송심씨(좌의정 덕부德符―영의정 온溫―영의정 회澮), 청풍김씨(우의정 구構-영의정 재로在魯-영의정 치인致仁), 달성서씨(영의정 종태宗泰―좌의정 명균命均―영의정 지수志修) 등 3 씨족이 있었다.
(3) 부자(父子) 영상(領相)이 난 씨족으로는 청송심씨(온溫―회澮), 장수황씨(희喜―수신守身), 남양홍씨 토홍(土洪)의 '언필彦弼―섬暹', 해평윤씨의 '두수斗壽―방昉', 신안동김씨의 '수항壽恒―창집昌集', 연안김씨의 '익熤―재찬載瓚'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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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자 정승으로는 (1), (2) 외에 동래정씨 영의정 창손(昌孫)-좌의정 괄(佸), 경주이씨 우의정 인손(仁孫)-영의정 극배(克培) 및 좌의정 극균(克均), 동래정씨 좌의정 유길(惟吉)-좌의정 창연(昌衍), 동래정씨 영의정 태화(太和)-재숭(載嵩), 풍양조씨(豊壤趙氏) 좌의정 문명(文明)―우의정 재호(載浩), 여흥민씨 좌의정 정중(鼎重)―우의정 진장(鎭長), 경주이씨 좌의정 태좌(台佐)-영의정 종성(宗城), 문화유씨 영의정 상운(尙運)-좌의정 봉휘(鳳輝), 안동김씨의 영의정 흥근興根-좌의정 병덕炳德' 등이 있었다.
(5) 형제 영의정은 신안동김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아들로 '수흥壽興…수항壽恒' 형제, 평산신씨 '만晩…회晦' 형제가 있었다.
(6) 형제 정승으로는 위 (4) 외에 경주이씨 영의정 극배(克培)-좌의정 극균(克均), 덕수이씨 좌의정 행(荇)-영의정 기(芑), 청송심씨 영의정 연원(連源)- 좌의정 통원(通源), 동래정씨 영의정 태화(太和)-좌의정 치화(致和), 여흥민씨 좌의정 희(熙)-우의정 암(黯), 파평윤씨 좌의정 지선(趾善)-우의정 지완(趾完), 전주이씨 좌의정 관명(觀命)-좌의정 건명(健命), 전주최씨 영의정 석정(錫鼎)- 좌의정 석항(錫恒), 청풍김씨 좌의정 약로(若魯)-좌의정 상로(尙魯), 풍양조씨 좌의정 문명(文命)과 영의정 현명(顯命). 연일정씨 우의정 우량(羽良)-좌의정 휘량(翬良), 풍산홍씨 영의정 봉한(鳳漢)-우의정 인한(麟漢), 안동김씨 좌의정 홍근(弘根)-영의정 흥근(興根)이 또한 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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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상에 전하는 말로 일가4정승(一家四政丞)이란 것도 있는데, 세조 때 공신이던 청주한씨 '영의정 명회(明澮)-좌의정 확(確)-우의정 백륜(伯倫)-영의정 치형(致亨)'이 10촌 이내 당내(堂內)였고, 풍양조씨 좌의정 문명(文命)과 우의정 재호(載浩)는 부자간이고, 영의정 현명(顯命)은 문명(文命)의 아우인데, 종조부 상우(相愚)는 우의정이었다.
(8) 위 외에도 '조손간(祖孫間)이 정승인 경우도 많았는데, 동래정씨 영의정 광필(光弼)-좌의정 유길(惟吉), 동래정씨 좌의정 창연(昌衍)-영의정 태화(太和) 및 좌의정 치화(致和) 형제 및 사촌 지화(知和), 전주이씨 영의정 경여(敬輿)와 좌의정 관명(觀命), 좌의정 건명(健命)형제는 조손의 사이이며, 이명(頤命)이 또한 관명(觀命) 형제와 사촌(四寸)이므로 경여(敬輿)와는 조손간이었다. 그밖에도 전주최씨 영의정 명길(鳴吉)-영의정 석정(錫鼎)과 좌의정 석항(錫恒) 형제, 덕수이씨 좌의정 집(土+集)-영의정 은(溵), 동래정씨 영의정 원용(元容)-좌의정 범조(範祖) 등이 조손의 사이였다.
(9) 조선조의 상신은 모두 366명인데, 상신이 많이 난 씨족의 주요 순위를 보면 전주이씨 22명, 동래정씨 17명, 신안동김씨 15명, 청송심씨 13명, 여흥민씨 12명, 청주한씨 12명, 파평윤씨 11명, 달성서씨 9명, 남양홍씨 당홍(唐洪), 연안이씨, 경주이씨, 풍산홍씨, 문화유씨, 청풍김씨, 양주조씨 등이 각 8명, 반남박씨, 풍양조씨, 평산신씨, 덕수이씨 각 7명, 경주김씨, 연안김씨, 의령남씨, 해평윤씨 등이 각 6명, 그 다음이 광산김씨, 진주강씨, 광주이씨, 창녕성씨, 연일정씨, 양천허씨 등이 각각 5명, 상신 5명은 씨족별 순위로 보아 25위 이하가 된다.
(10) 참고로 대과급제자가 70명 미만이면서도 상신(相臣)을 2명 이상 배출한 씨족도 많은데, 능성구(具)씨, 순천김(金)씨, 온양정(鄭)씨, 장수황(黃)씨, 죽산박(朴)씨, 삭령최(崔)씨, 진주하(河)씨, 교하로(盧)씨, 광주로(盧)씨, 거창신(愼)씨, 풍산유(柳)씨, 청주정(鄭)씨, 풍산심(沈)씨, 원주김(金)씨, 원주원(元)씨 등이 그러하다.
(11) 왕비를 많이 배출한 씨족의 순위는 청주한씨 5명, 파평윤씨, 신안동김씨, 여흥민씨가 각 4명, 청송심씨, 경주김씨가 각 3명, 반남박씨, 풍양조씨, 청풍김씨 각 2명이었다.
6. 청백리(淸白吏)
청백리 제도는 조선조에 관리들 중에서 청렴결백한 사람만을 선발하여 후세에 길이 거울삼게 했던 관기숙정(官紀肅正)을 위한 제도였다. 여기에 선발되기 위하여는 엄격한 자격 심사의 심의를 거쳐 임금의 재가(裁可)를 얻어야 했다. 또 녹선(錄選)이 되면 그 자손들도 부조(父祖)의 음덕(蔭德)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그러다 숙종 이후로는 이들 청백리의 자손이 너무 불어나 삼상(三相)과 고관이 추천하여 대개 5명 정도가 특채 등용되었는데, 그럼으로써 청백리가 많이 난 씨족들은 그것을 큰 자랑으로 삼았다.
청백리는 총 44씨족에서 218명이 배출되었는데, 여러 기록들에서 본관별로 6명 이상을 배출한 집안은 전주이씨, 파평윤씨, 안동김씨, 연안이씨, 남양홍씨, 전의이씨 등 6씨족뿐이며, 그 다음 순위로 5명을 배출한 씨족은 광주이씨, 한산이씨, 양천허씨 등이었다.
7. 호당(湖堂)
이미 위에서 본 바 있듯이 ‘문형’이 되자면 문과 급제자로서도 원칙적으로 호당(湖堂) 출신이라만 가능했으며 조선조에서 ‘호당’이란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으로 젊고 재주 있는 문신(文臣)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을 가리키는데, 호당에 들 사람의 추천 선발은 문형의 책임이고 특권이었다.
조선조에 호당에 뽑힌 사람은 모두 257명인데, 씨족 중 남양홍씨 ‘당홍’의 경우 영의정을 지낸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은 그 조부 춘경(春卿), 부 천민(天民) 3대가 연거퍼 호당에 뽑힌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 또한 문벌의 조건으로는 중요한 것이었다.
8. 남대(南臺)와 경연관(經筵官)
조선조에서 학행(學行)이 높아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이나 지평(持平)의 관직에 추천된 사람을 특히 남대(南臺)라 하여 아주 명예로운 관직으로 인정하였으므로 이는 개인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씨족의 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그리고 국왕을 상대하여 글을 강론하고 사상을 토론하는 일을 맡은 관청인 경연청(經筵廳)의 영사(領事) 이하 참찬관(參贊官), 시강관(侍講官) 기타 관리를 경연관(經筵官)이라 하여 역시 학자 출신 관리의 큰 영예로 삼았다.
9. 부조묘(不祧廟)-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
옛날의 양반 사대부들의 집안에는 고조부 이하 부(父)까지의 위패(位牌)를 봉안하는 사당(祠堂)이 있었고 아래로 대수(代數)가 늘어나 4대를 넘어서는 5대조부터는 사당에서 그 위패를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는 영구히 사당에 봉안하여 모시도록 국가가 허락한 신위(神位)를 불천지위(不遷之位) 혹은 불천위(不遷位)라 하였고 그 불천지위를 모시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 하였다.
씨족 중 그러한 조상이 많은 것을 아주 큰 영예로 여겼다.
10. 몽시(蒙諡)-시호(諡號)를 받음
시호(諡號)란 조선조의 경우 국왕의 종친과 문․무관 중에서 정이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나라에서 내려주는 호(號)인데 뒤에는 범위가 차츰 확대되어 제학(提學)이나 유현(儒賢), 절신(節臣) 등은 정이품이 못 되어도 시호를 주었다.
그 시호를 정하는 절차는 해당자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이 죽은 이의 행장(行狀)을 적은 시장(諡狀)을 예조(禮曹)에 제출하면 예조에서 이를 심의한 뒤 봉상시(奉常寺)를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보내어 시호를 정하게 된다.
시호를 정하는 법으로는 옛부터 주공시법(周公諡法)이니 춘추시법(春秋諡法)이라 하여 중국 고대 이래의 시법을 원용(援用)하였는데, 시호에 많이 쓰는 글자로는 문文․충忠․정貞․공恭․양襄․정靖․효孝․장莊․안安․경景․익翼․무武․경敬 등 120자이며 한 자 한 자마다 정의(定義)가 있어서 생전의 행적에 알맞는 글자를 조합하여 두 자로 만들고 그 시호 아래는 공(公)자를 붙이어 불렀다.
나라가 시호를 내려주는 일을 증시(贈諡)라 하고 그 시호를 받음을 몽시(蒙諡)라 하는데, 그 중 특히 세상 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글자가 ‘文’자 시호였다.
시법(諡法)에서 ‘文’자를 쓰는 분의 생전(生前) 행적은 ‘경천위지(經天緯地), 도덕박문(道德博問), 민이호학(敏而好學), 박학호문(博學好文), 근학호문(勤學好問), 박학다식(博學多識)’ 등등 조건에 맞아야 했다.
그러므로 문벌, 벌족을 자랑할 경우 위와 같이 나라로부터 시호(諡號)를 받은 조상이 몇 분이나 있었는가 역시 주요한 잣대가 되었다.
11. 봉군(封君)과 공신(功臣)
나라에 큰 공(功)을 세운 이에게는 국왕이 공신(功臣)이란 훈호(勳號)가 내려 ‘○○君’으로 봉군(封君) 또는 봉호(封號하게 되는데, 옛부터 그러한 선조를 많이 배출한 것을 씨족의 큰 영예로 여겼다.
딸이 왕비로 간택되어 국구(國舅)가 되었을 경우나 1품의 공신일 때 예를 들어 광산김씨일 경우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등으로 봉작(封爵)하는 예와 같다.
그 중에 특히 공신(功臣)이란 왕조의 창업, 신왕(新王)의 즉위, 전란(戰亂)의 평정(平征) 등 왕실과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예를 들어 개국공신(開國功臣), 정사공신(定社功臣) 등의 칭호(稱號)를 주고 아울러 군호(君號)를 받도록 하였다.
이들 공신은 왕과 회맹(會盟)하므로 국가 최대의 특권을 입어 영작(榮爵), 토지(土地), 노비(奴婢) 등을 받고 그 자손들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도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조선조에서는 모두 28차례의 공신 봉호가 있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는 그것을 너무 남발하여 이른바 ‘안방功臣’까지 생겨나게 되었고 이를 위훈(僞勳)이라 하여 삭훈(削勳)의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으나 예나 지금이나 씨족 역사 인물 중 공신의 훈호를 받은 분의 수는 문벌을 따지는 중요한 잣대 중의 하나였다.
<참고> : 조선조 주요 공신록(功臣錄) 일람
1. 태조조, 개국공신(開國功臣), 태조 원년(1392)의 국가 창업 에 세운 공
2. 정종조, 정사공신(定社功臣), 정종 즉위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에 세운 공
3. 태종조, 좌명공신(佐命功臣), 태종 원년(1401) 제2차 왕자의 난에 세운공
4. 단종조, 정난공신(靖難功臣), 단종 원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세종 총신寵臣 제거>에 세운 공
5. 세조조, 좌익공신(左翼功臣), 세조 원년(1455) 세조의 즉위에 세운 공
6. 세조조, 적개공신(敵愾功臣), 세조 13년(1467) 이시애란(李施愛亂)을 토벌한 공
7. 예종조, 익대공신(翊戴功臣), 예종 원년(1468) 강순(康純),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
8. 성종조, 좌리공신(佐理功臣), 성종 2년(1471) 성종의 즉위에 세운 공
9. 중종조,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종 원년(1506)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세운 공
10. 중종조, 정난공신(定難功臣), 중종 2년(1507) 이과(李顆)의 옥사를 다스린 공
11. 명종조, 위사공신(衛社功臣), 명종 원년(1545) 대윤(大尹)을 제거하고 명종의 즉위에 세운 공,선조 10년 폐삭
12. 선조조, 평난공신(平難功臣),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
13. 선조조, 광국공신(光國功臣), 선조 23년(1590)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
14. 선조조, 선무공신(宣武功臣), 임란 후 선조 37년(1604) 임진왜란에 세운 공을 책록(冊錄)
15. 선조조, 호성공신(扈聖功臣), 임란(1592)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 선조 37년(1604)에 책록
16. 선조조, 청란공신(淸難功臣), 선조 29년(1596) 이몽학(李夢鶴)의 반란 토벌의 공
17. 광해군조, 위성공신(衛聖功臣), 1613(광해5) 병란 중에 광해군을 수종한 공으로 책록,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삭
18. 광해군조, 익사공신(翼社功臣), 1613(광해5) 이이첨, 정인홍 등이 모해하여 임해군, 영창대군, 김제남 등을 살해한 공으로 내린 훈명,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삭
19. 광해군조, 정운공신(定運功臣), 1613(광해5) 정인홍, 이이첨 등이 소북의 영수인 유영경의 옥사에서 세운 공으로 책록함,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삭
20. 광해군조, 형난공신(亨難功臣), 1613(광해5), 대북파가 소북파의 세력을 없애려고 일으킨 옥사로 직재 등을 모반혐으로 처형시킨 공으로 책록됨,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삭
21. 인조조, 정사공신(靖社功臣),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에 인조를 추대(推戴)한 공
22. 인조조, 진무공신(振武功臣),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을 토평(討平)한 공
23. 인조조, 소무공신(昭武功臣), 인조 5년(1627) 이인거(李仁居)의 모반(謀叛)을 적발(摘發)한 공
24. 인조조, 영사공신(寧社功臣), 인조 6년(1628)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을 적발한 공
25. 인조조, 영국공신(寧國功臣), 인조 22년(1644) 심기원(沈器遠) 역모(逆謀) 사건을 적발한 공
26. 숙종조, 보사공신(保社功臣),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삼복(三福)의 역모를 고변(告變)한 공
27. 경종조, 부사공신(扶社功臣), 1723(경종3) 임인옥사를 일으켜 노론을 제거한 공으로 내린 훈명
28. 영조조, 분무공신(奮武功臣),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 토벌의 공으로 오명항 등에게 내린 훈명
씨족별로 공신의 봉작(封爵)이 많았던 가문으로는 전주이씨 38, 청주한씨 24, 남양홍씨 16<당홍10, 토홍6>, 파평윤씨 16, 안동권씨 16, 한산이씨 12, 문화유씨 12, 경주이씨 11, 연안이씨 10, 안동김씨 10, 능성구씨 9 명 등이 유명했다.
[출처] 한국(韓國)역대(歷代)주요(主要)성씨(姓氏)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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