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6월 28일 주일예배 설교
이사야 40:25-31
하나님께서 맞바꿔주시는 힘: 비판적 물음 끝에 돋아나는 일상의 새 힘
“잘 지내십니까?”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대개 “잘 지냅니다”라고 대답합니다만, 마음속에서는 이런 말이 메아리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피곤해요.” “지쳤어요.” “힘이 없어요.” “이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참 막막해요.”
직장에서, 가정에서, 관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진되고 탈진되기를 반복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듯싶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 빠지게 하는 것은, 내 힘으로는 이 상황을 바꿀 수 없을 것 같을 때입니다. 내가 너무 초라해 보여서일 수도 있고, 상황이나 현실이 너무 커 보여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력감에 빠지게 되고, 이 무력감은 현실을 더 비관하게 만들고, 점차 절망의 심연 쪽으로 빠지게끔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여기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아니, 그전에 우리를 소진과 탈진 그리고 무력감과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힘이 있을까요?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멸망합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3번에 걸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BC 605, 597, 586년) 포로로 끌려간 지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변하지 않는 일상 때문에, 매일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현실 때문에, 내가 노력한다 한들 바뀌거나 나아질 수 없는 거대한 벽 같은 상황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싶지 않을까요? ‘정도(正道)?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살래.’라며 자포자기하며, 되는대로 살려는 분위기가 득세하고 만연해지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이사야 40장의 시대적 배경은 550-540년 경으로 추정합니다. 유대 왕국과 그 성전이 파괴된 지 36-46년이 흐른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힘내자, 희망은 있다, 쥐구멍에도 볕은 들고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고 말하면 어떤 취급을 받을까요? “오, 선각자”라며 치켜세우며 기운을 얻고 차릴까요? 아니면 “사기꾼, 괜히 헛바람 넣지 말고 너나 잘살아.”라며 무시와 멸시를 받을까요?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한탄을 반영하는 본문 구절이 있습니다. 27절입니다.
“나의 길이 숨겨졌구나, 주님으로부터. 또한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권리가 지나가 버리는구나.”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아, 내 인생은 주님의 레이더에서 완전히 사라졌구나, 하나님께선 내 고통과 힘듦을 들으시지도 보시지도 않고 외면하시는구나.’
이사야 40장은 이 탄식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대로 영원히 살아야 하는가? 나아질 순 없는가?’하는 인생의 탈진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알고 계시며 돌보시는가?’하는 신앙적 소진에 대해 2500여 년 전에 물음을 던지고 숙고한 흔적입니다.
25절에서 거룩하신 분이 먼저 물으십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이것은 당시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물음입니다.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신들은 역할과 영역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늘의 신, 대지의 신, 바다와 강의 신이 각각의 영역을 창조하고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그 신들은 인간의 손에 의해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을 꼬집는 게 본문 앞 18-20절의 묘사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과연 신이겠는가?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존재가 진정한 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단순히 우상숭배를 풍자하는 것을 넘어,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물음입니다. 그리고 이 비판적 물음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를 묻고 물은 끝에 이런 답을 내립니다.
“‘나’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형상으로도 담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거룩하신 분’이다.” 당시 거룩은 구별됨, 근본적 다름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야웨, 주님)은 사람이 만든 모든 신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거룩한 분이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어지는 26절과 28절에서 그 하나님의 성격이 우주적으로 드러나는데, 이 또한 비판적 물음이 깔려 있습니다.
“눈을 높이 들어 바라보아라. 이것들을 누가 창조하였느냐? 그것들을 수대로 이끌어 내시고, 모두를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의 풍성한 생명력과 강한 힘으로 인해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
26절은 하늘의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의 신이 따로 없습니다. 그분께선 별들을 모두 수대로 이끌어 내시고,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존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하늘의 수많은 별 하나하나와 연결되어 계십니다. 그러니 포로민 한 사람 한 사람 그의 이름을 비롯한 모든 사정과 애환을 모르실 리도 없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끌어내실 수도 있습니다.
28절은 “하나님은 땅의 끝들까지 창조하신 분. 따라서 땅의 끝들에서도 계시며 다스리시는 영원하신(광대하신) 하나님”입니다.
당시 많은 신들이 그러했듯, 바벨론의 최고 신 마르둑은 바벨론이라는 특정 지역에만 묶여 있는 수호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영토를 넓혀가는 것은 신의 영토 곧 통치 영역과 활동무대가 넓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계관 속에서 영토를 잃고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아, 우리 하나님도 예루살렘을 벗어나니 힘을 못 쓰시는구나. 하나님의 시대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비판적 물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 그의 영토, 이스라엘과 유대, 예루살렘에서만 활동하시며 역사하시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을 묻고 물은 끝에, “하나님은 땅의 끝들까지 모두 창조하신 하나님. 고로 영원하신, 광대하신 하나님. 고로 지역에,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활동하시며 역사하시며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답을 찾아갑니다.
또한, 바벨론의 최고 신 마르둑은 반역한 신을 죽이고 그의 피로 인간을 만듭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창조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리고 이유도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마르둑이 인간을 만든 이유는 ‘신들의 노역, 수고를 떠맡겨서 신들이 편안히 쉬려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는,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개간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들과 하늘의 새들과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또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숙고한 끝에 나온 답일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당시 신들은 지치고 피곤한 신들입니다. 일하기 싫어서 인간을 창조하는 신, 그 인간들에게 봉양 받으며 살아가길 바라는 신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신들과 달리 “피곤해지지도, 지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의 논거가 쌓이며 계속됩니다. 사람이 만든 신 → 진정한 신이 아니다. 피곤해지는 신 → 진정한 신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과 수고를 착취하는 신 → 신이 아니다. 배고파하는 신 → 진정한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은 누구인가? 스스로 충만하시고, 영원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그래서 지치지도 피곤하지도 않으시는 분. 인간의 제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 다만 인간과 한결같은 사랑으로 관계 맺기 위해 자신의 영원함을 스스로 언약에 구속하며 얽매이시는 분. 그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 그 정도로 인간과 한결같은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 그 무궁한 통찰은 우리가 아무리 파헤쳐도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분. 그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비판적인 사고와 물음을 통해 상기합니다.
29절 역시 이 비판적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시는 분이시다, 소진된 자에게 힘을. 그리고 생명력이 아예 없는 자에게 권능을 배가시키신다.”
사고 및 논리의 방향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진되지 않으시기에, 소진된 자에게 힘을 주실 수 있습니다. 또한, 탈진되지 않으시기에, 생명력·활력·정력이 없는 자에게 권능을 단지 주시는 게 아니라 증폭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28-29절의 헬라어 번역(LXX, 70인역)이 히브리 성경과 꽤 차이가 납니다.
‘피곤해지지 않으신다’를 ‘배고파하지 않으신다(οὐ πεινάσει, 우 페이나세이)’로 번역하고, “주시는 분, 굶주린 자들에게는 힘을, 그리고 고통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슬픔을.”으로 번역합니다. 이 또한, 비판적 숙고 끝에 나왔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이 그러했듯, 헬라의 신들 역시 배고파했습니다.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먹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기도 하고, 축제를 열기도 합니다. 기원전 200년대 나라를 잃고 흩어져 헬라 지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 역시 이를 비판적으로 질문하며 ‘하나님은 그처럼 배고파하시는 분일까?’ ‘인간에게 무언가를 받아야만 힘을 얻고 채워지는 분일까?’ 물음과 숙고를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고통받지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슬픔을’이라는 번역은, 원래 모음이 없던 히브리어 낱말체계 때문에 자음이 같은 다른 단어로 잘못 보고 번역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한편으론 기원전 3세기 헬라 유대인들의 신앙관과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타 신들과 달리 배고파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다른 신들과 달리 힘없고 약하고 겸손한 자를 아끼시고 도우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굶주린 자들에게 힘을 주신다. 그리고 스스로 강하다고 믿으며 주위 현실에 애통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심판 곧 슬픔을 주신다.”
나라를 잃고 흩어져 사는 자신들의 애통한 현실 가운데 주도적인 비판적 사고로 이렇게 해석했다는 의미입니다.
30절과 31절도 70인역이 말한 역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조차 탈진하고 소진되고, 장정들마저 비틀거리며 비틀거린다.”
여기서 젊은이들(נְעָרִים, 느아림)과 장정들(בַחוּרִים, 바후림)은 말 그대로 건장한 사람들, 육체적으로 젊고 생명력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군인들(어쩌면 바벨론의 젊고 강한 군대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 곳곳에서 젊은이들과 장정들이 군인을 가리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됐든, 어떤 인간적 힘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습니다.(31절) 이것 역시 포로 생활의 현실과 당시 세계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계속해서 묻고 숙고하는 가운데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새번역을 비롯한 우리말 성경 대부분은 ‘새 힘을 얻을 것’이라고 번역했는데, 저는 다르게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힘을 맞바꿀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가 이사야 9:10에서 똑같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경고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멸망하더라도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고 여기며 무시하는 모습입니다. “돌무화과 나무 잘려나갔네, 그럼 백향목으로 대신합시다, 바꿉시다, 교환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해주시겠지’라며 손 놓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과 신뢰를 유지하고 붙드는 능동적 소망의 긴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런지 70인역은 이를 ‘그 자리 아래에서 끝까지 머물다, 버티다, 견디다, 인내하다(휘포메노, ὑπομένω)’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능동적으로 주도적으로 비관적인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물음을 던지며 그 아래에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힘을 맞바꾼다는 통찰입니다. 바로 인간의 유한한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 아무리 젊고 건장하고 활력이 넘치더라도 소진하고 탈진되는 힘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시고 홀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땅의 끝들과 바다 그리고 바다 저편의 모든 섬들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의 힘으로요. 그렇게 하나님을 끈기 있게 대망하는 사람은 소진되고 탈진되는 자신의 힘을, 소진되지도 탈진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교환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가 말한 ‘즐거운 교환(fröhlicher Wechsel)’이 생각납니다. 루터 역시 인문학과 성서를 통해 ‘공로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사고와 물음을 던졌습니다. 당시 교회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공로, 선행의 업적을 가져가야 한다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공로를 가져가기 위해 정말 쉬지 않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그래도 선행보다는 죄가 더 많다는 것에 크게 낙심하고 좌절하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성서학 교수로 임명되어 성서를 연구하면서 당시 세계관에 비판적 물음을 가지게 됐고, 고민하고 숙고하고 연구한 끝에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선 우리의 죄를 당신과 그 십자가에 가지고 나가면, 사함과 용서 그리고 위로와 평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요. 그래서 ‘즐거운 교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죄송하지만 부족한 모습 그대로 그분의 자애로우심을 신뢰하며 가지고 나아가면, 나무라지 않으시고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심과 걱정, 고민과 염려, 고통과 슬픔, 불안과 낙심 그리고 죄 등 안 좋은 것들을 가지고 나아가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선 그것들을 자신의 위로와 치유, 힘과 능력, 믿음과 신뢰, 존재와 자유, 풍성함과 평화로 맞바꿔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역시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겐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진되지도 않고 탈진되지도 않는 힘으로 교환해주신다는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하나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삶과 존재, 모든 것을 묶어서 버티는 사람에게 맞바꿔주시는 힘을요. 아니 어쩌면,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에 더 하나님께 매달리고 버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여기서도 비판적 물음을 제기합니다. 개인적으론 가장 백미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힘을 교환 받은 사람은 마치 독수리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까? 늘 날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점차 더 비상하게 되는 것일까?”
31절의 순서가 다소 이상합니다. 지치지도 피곤하지도 않은 하나님의 힘으로 교환 받았으니, 걷기 → 달리기 → 비상 순으로 점차 상승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앙에 흔히 기대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솟아오르듯 올라가다 → 달리다 → 걷다 순으로, 가장 극적인 것에서 가장 평범한 것으로 점차 하강합니다.
실은 우리의 현실과 일상이 그렇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신비와 은혜를 강렬하게 느끼고 경험합니다. 그러면 그때는 힘이 마구 샘솟고 넘칩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열정과 의욕이 하강합니다. 느끼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신비와 은혜가 잔잔해지기 때문입니다. 느끼는 그 은혜가 잔잔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경험하는 그 신비가 점차 익숙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점차 나의 존재와 삶에 일부, 한 몸이 되다 보니, 편해져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걷다’라는 히브리어 ‘할라크(הָלַךְ)’는 삶의 일상적 행보를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사입니다. 이 구절 및 단락의 절정이 ‘비상’이 아니라 ‘걷기’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환해주시는 힘은 일상의 지속적인 것을 버티고 견디고 감당하게 하신다는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속적인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면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하나님과 그 가르침으로 인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극적인 변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이익에 따라 흔들리고 움직이던 내가 묵묵히 하나님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니까요.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당시 바벨론으로 끌려가 한 세대가 넘도록 정착한 포로민들에게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것이 매일의 일상일 수는 없습니다. 달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걷기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일하고, 저녁을 맞이하는 것. 그래도 포로인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포로의 일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포로처럼 보일 수 있으나, 속은 포로가 아닙니다. 주도적, 능동적, 비판적 사고와 물음을 통해 자신의 일상과 그 삶을 개척하고 개혁하며 갱신하는 자유인입니다. 비록 현실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 현실 너머에 계셔서 다스리시는 거룩하시며 영원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대망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셔서 소진되지도 탈진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묶어서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이름과 삶, 존재, 일상, 그 고단함과 수고, 고통과 애환을 전부 다 아시고 거기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분이심을 신뢰하며 힘과 용기, 희망과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교환해주신 그 힘을 자발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며 위로하고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라는 표현에도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올라가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알라, עָלָה)는 ‘새로 돋아나게 하다, 움트게 하다, 자라나게 하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포로기에 활동한 예레미야나 에스겔에서 여러 번 이런 의미로 사용됩니다.(렘 8:22, 30:17, 33:6, 겔 37:6) 그 중 30:17입니다.
“진정 내가 너를 고쳐 주고, 네 상처를 치료하여 주겠다.”(새번역)
내가 너한테서 새살이 오르게 해 주고, 네가 얻어맞은 데를 낫게 해 주겠다.(새한글성경)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개역개정),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 등 고대 번역본들은 “독수리처럼 깃털이 자라나게 할 것이다, 깃털이 새로 돋아나게 할 것이다”로 번역합니다. 오늘 기도문으로 기도드린 시편 103:5 역시 “평생을 좋은 것으로 흡족히 채워 주시는 분, 네 젊음을 독수리처럼 늘 새롭게 해주시는 분이시다.”라며 독수리를 ‘비상’이 아니라, ‘새롭게 되는 것’에 연결시켜 표현합니다. 이처럼 본문을 ‘새로 돋아나게 하는’ 힘으로 해석하면, ‘힘을 교환하는 것’과 ‘새 깃털이 돋아남’이 정확히 상응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마냥 솟구쳐 날아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자리에 새살이 돋고, 메마른 가지에 새싹이 자라는 것처럼, 조용하고 지속적으로 힘이 돋아나는 지속적인 새 갱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판적 사고, 비판적 물음, 능동적 주도적 질문은 예배의 말씀으로 낭독한 엘리야의 이야기에도 드러납니다. 이 이전까지는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신앙관 및 세계관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거대하고 강력한 자연 현상 속에서 현현하신다고 여겨왔습니다. 다른 신들과 비슷하게요.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였지만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죽임을 당하려 하자, 낙심하고 지치고 소진되고 탈진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깨뜨리십니다. 엘리야는 크고 강한 바람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도 따라서 말씀하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가느다란 고요함의 소리가 들리자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갑니다. 이는 그 소리 가운데 하나님의 현현을 보게 되어 황급히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 그렇게 전의 세계관, 사고관, 이해와 달리 세미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심을 보게 되자 이전과 달리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대하고 강력한 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신다는 그동안의 세계관, 가치관, 사고방식이 맞는지 비판적으로 다시 살펴보게끔 힘을 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 때문에 소진되고 탈진되는 가운데서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기다리면서 현실을 타개해나갈 방법은 없는지 대안을 찾는 가운데 새로이 알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힘을 교환해주신 동시에, 기존의 방법에서 개선되고 새로워져야 할 것은 없는지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물음이 가져다준 힘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반드시 극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물음을 가지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항상 반드시 비상으로 나타나고 지속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기대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이 물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예언자들 그리고 신앙인들은 당시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으로 물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신이 진정한 신인가? 그의 영토와 백성들 사이라는 활동무대가 제한된 신이 진정한 신인가? 인간의 섬김과 제물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신이 신인가? 그 물음들의 끝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시기에 소진되고 탈진되는 우리에게 당신의 힘을 교환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요. 그렇게 당신의 힘을 모든 존재의 걱정과 염려, 불안과 낙심, 지침과 피곤과 맞바꾸어도 하나님은 소진되지도 탈진되지도 않으시는 무궁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요.
그 비판적 사고의 끝에 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겐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으로 교환해주신다. 그래서 걸어도 지치지 않는다. 새 깃털이 조용히 돋아나듯, 오늘도 그 힘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암담해 보이는 하루하루일지라도 쓰러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과 신뢰를 잃지 않으며 그분께서 교환해주시는 힘을 매일 받으면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 힘을 바탕으로, 비판적 사고와 물음과 질문과 숙고를 통해 능동적으로 주도적으로 현실의 힘듦을 버티고 개선해나가는 우리의 걸음 곧 일상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무리 전개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설교를 너무 성경공부처럼 한 것에 대해, 그것도 여러 가지를 나열하고 열거하며 어렵게 했다는 것에 저 스스로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