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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生覺)’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生覺)이란 말을 유독 많이 쓴다.
생각이 많은 민족이라서 그런지, 생각이 깊은 민족이라서 그런지,
생각이란 말을 많이 쓴다.
어릴 때 많이 듣던 고향 생각으로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는 사람,
생각만 해도 좋은 사람, 이름만 생각해도 느낌이 오는 사람,
그리하여 그리운 마음 따라 생각이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생각하게 된다.
‘생각(生覺)한다’는 건 생(生)을 깨닫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생각하면 할수록 생(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첩첩산중이다.
그러니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생각을 하면 어느 새 걱정이 뒤 따라온다.
하루도 쉴 날 없이 만 가지 걱정, 천 가지 걱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사랑하는 것도 걱정이고, 행복 하려는 것도 걱정이다.
크게는 나라 사정도 걱정, 기후 변화도 걱정, 세계 질서도 걱정이 된다.
이런 걱정도 다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데,
생각이 우리를 벼랑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하고, 혹은 생각을 버리면 안 된다고도 한다.
이렇게 생각,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또 생각이 꼬리를 문다.
생각이 번뇌가 아닐까? 부처님은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은
분별 번뇌를 일으키는 망상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꼬리를 무는 많은 생각이지만,
사실은 그 생각을 인간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세 가지 생각을 못한다.
그 대신 한 가지 생각은 다음 한 가지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앞생각과 뒷생각이 인(因)과 연(緣)이 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불교에서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등무간연으로 앞생각이 없어지면서
뒷생각을 발생시키므로 뒷생각의 뿌리가 앞생각이 된다.
즉, 연속하는 마음 활동에서 뒷생각은 앞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
결과가 되는 것을 증상과(增上果)라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흔히 쓰는 ‘생각’이란 말이
15세기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순 우리말이라고 한다.
한자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生覺)’이라는 한자말은
일본에서 창작된 말로서, 일제 강점기 때 도입된 것이란다.
허긴 서구의 근대 문명이 유입되면서
새로운 문물에 이름 붙여지는 단어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창작됐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다가 보니,
그들에 의해 새 단어들이 창작된 것인데,
일본 말 자체가 한자 용어이다가 보니,
그 새로이 창작되는 단어들이 또한 대부분 일본식 한자어였다.
그리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대개
일본을 통해 받아들이다가 보니 자연스레 일본식 한자어가
널리 쓰이게 되고, 심지어 한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조차
일본식 한자어를 수입해 쓰는 형편이 됐다.
그래서 ‘생각(生覺)’이란 한자어도 일본에서 유입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어원 자체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흔히 ‘생각(生覺)’이라고 한자어를 병기하는데,
이것은 다만 발음에 맞추어 한자로 ‘生覺’이라고 쓰지만,
우리말 국어사전에는 ‘생각(生覺)’이라고 한자를 병기한 말은 없다.
국어학계에서는 ‘生覺(생각)’이라는 단어를 부정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한자어라는 명확한 근거가 없으므로 사전에서는 한자를 병기하지 않고
한글로 ‘생각’이란 단어만 있다.
그리고 이 고유어 ‘생각’의 어원을 한자어 ‘生覺’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단순한 취음자(取音字)일 가능성이 높다. '취음자'란 본래 한자어가 아닌 낱말에
그 음만 비슷하게 나는 한자로 적은 글자를 말한다.
우리나라 전통 악기에 ‘날라리’라는 악기가 있다.
이것을 일본 사람들이 태평소(太平簫)라고 고쳐 이름을 붙였다.
순수 우리말을 말살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교과서엔
여전히 태평소라고 나온다. 아직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왕개미를
일본인들이 ‘일본왕개미’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다.
한국 고유의 것을 말살하려던 술책으로
한반도에서 새로이 발견되는 생물들을 학술지에 소개하며,
그 이름 앞에 ‘일본’이라는 말을 붙여놓았다.
그래서 지금도 학술적으로 ‘일본왕개미’라고 그대로 부르고 있다.
일본에는 있지도 않은 토종 한국 왕개미를 ‘일본왕개미’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직 바로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독도만 우리 땅이라고 외치지 말고
이런 것도 하나하나 찾아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헌데 ‘생각’이 순수 우리말이 아닌 한자어라는 주장도 있다.
생각은 순수 우리말이 아닌 한자어로서 반드시 한자가 있다.
한자어는 우리말이 아니다. "생각(生覺)"이란 단어를 순 우리말로 해석하면,
"마음에서 떠오르는 느낌 = 깨닫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동물과 사람의 근본적 차이점은 바로 생각(生覺)이다.
동물과 사람은 모두 머리가 존재한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점은 머리가 ‘있고 없고’인데,
동물과 사람은 모두 머리가 존재하지만,
머리의 사용방향과 깊이에 따라 차이점이 있다.
특히 동물은 손을 사용하는 방법이 땅에 붙어있고,
사람은 손을 땅에서 분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
손을 통해 각종 도구를 만들면서 인류는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됐으며, 문자를 만들어서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말’의 발달도 다른 동물들과 매우 다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생각’일 것이다.
보통 ‘생각’을 순우리말로 착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한자어다.
생명(生命), 생활(生活), 생령(生靈), 생기(生氣), 생수(生水)… \
생동(生動) 등의 글자를 보면, 생각(生覺)이 한자어라는 것에
의문이 없을 것이다. 특히, 생동(生動)이 살아있는 움직임이듯
생각(生覺)은 살아있는 깨달음이다.』 - 장창훈
말은 널리 쓰이면 그에 따라 개념 정립이 돼야 할 것이다.
‘애매하다’와 ‘모호하다’는 두 말에서, 예전엔 이 두 말을
엄격히 구분해서 썼다. 애매하다는 ‘억울하게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모호하다는 ‘확실치 않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억울하게 뒤집어쓴다는 의미로
‘애매하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뭔지 확실치 않을 때 애매하다고 한다.
오히려 애매하다는 말이 모호하다는 말로 바뀐 것이다.
생각도 그렇다. 순수 우리말이라고 하지만
이미 ‘생각(生覺)’으로 일반화돼 있다.
특히 불교에서 널리 쓰이고 있어서 나름의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생각’은 산스크리트어 citta의 일종이다.
현재의 생각→사(思)-정사(正思)
미래의 생각→상(想)-예상(豫想)
시공을 초월한 생각→신념(信念)
생각은 주로 제6식(意識)의 활동을 의미한다.
머리를 써서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으로서,
의견, 인식, 지각, 자각, 판단, 사고, 사색, 분별, 의지, 상상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사고(思考), 사념(思念) 등을 대신해 생각이란 말을 많이 쓴다.
생각은 훈련하기에 따라서 인식에서 지각(知覺)으로,
지각에서 자각(自覺)으로, 자각은 통찰(洞察)로 성장 진화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생각은 대상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헤아리고 기억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상상의 힘을 가진다.
그러므로 생각은 살아있음이고, 순간순간 반응하는 깨어있음이고,
생각은 가슴속은 물론, 내 몸 전체를 기반으로 해서
머릿속에서 생겨난[生] 깨달음[覺]이다.
그리고 생각은 내적 욕구와 감정에 힘입어
이것을 외부로 표현하고 나아가서 창조하는 삶의 원동력이고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생각은 나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살면서 논리적 긍정적 이성적인 합리적 사고만이 아니라
명상적, 감성적 생각을 포함한 전반적인 생각이
습관적으로 많아지면 우리는 철학자가 돼간다.
한 생각 몹시 억울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렸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몹시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하면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기도 한다.
손을 대거나 접촉한 일이 없이 한 생각 일으킴에 따라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미소가 나오기도 하는 걸 보면
생각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게 확실하다.
만약 생각이 존재한다면 어딘가에 저장돼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장식(藏識-아뢰야식)이다.
장식에 저장된 업식(業識)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
그러니 생각이란 게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생겨났다가 사라지면서
생각은 끊임없이 흐른다. 고정돼 있는 생각은 없다. 시시각각 변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할 때,
거기에서의 모든 상(相)은 모양 있는 형상만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나는 생각도 꼭 같은 상(相)이라고 한다.
그래서 생각도 연기공성(緣起空性)인 것이다.
우리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산다.
그런데 생각을 많이 한다고 생각을 깊게 한다는 말은 아니다.
즉, 양이 많다고 해서 질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영화를 엄청나게 길게 만들었다고 해서
영화의 질도 높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무턱대고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질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방법으로 훈련을 해야 실력이 나아진다.
현명한 사람은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모니터링(monitoring-자기점검)한다.
자신의 생각의 잘못된 점을 스스로 찾는 훈련을 하다가 보면
질 높은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하기에 따라, 불행해질 수도 있고, 행복해질 수도 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생각하기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생각도 잘 해야 한다.
반면에 초보자 혹은 서툰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
초보자일 때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초보자 혹은 서툰 사람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부족해서,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용한 생각보다는 적절하지 못한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우리들은 생각을 일으킬 줄만 알지 내려놓을 줄을 모른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마음을 내려놓아라. - 방하착(放下着) 하라고 가르치신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생각을 비우고,
보다 나은 생을 위해서 생각을 내려놓아라.
사랑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없는 사람을 바보 취급한다.
때로는 생각이 모자란다고 나무라기도 한다.
비우라고 하는 것은 그 비운 곳에 좋은, 아름다운,
건설적인 생각을 넣으라는 말인데, 그냥 멍청하게 있으면 바보가 된다.
따지고 보면, 생각도 마음의 어느 한쪽일 것이다.
때문에 마음을 잘 써야 생각도 깊어진다.
수행이 부족한 사람은 쓸데없는 생각, 나쁜 생각, 지저분한 생각을 많이 한다.
대개 중생의 생각이라는 게 잡념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게 바로 번뇌다.
때문에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는 것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
즉 잡념-번뇌를 떨쳐내고 무념(無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선은 곧 생각을 떨쳐내는 작업이다.
생각을 잘 한다면 머리와 가슴이 모두 시원해져야 한다.
생각도 스스로 노력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통찰(洞察)로 전진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을 하는 질 높은 생각을 해야 한다.
상고(詳考), 사고(思考), 숙고(熟考)란 말에서 고(考) 역시 생각을 의미하는데,
불교에서 질 높은 생각을 숙고(熟考)라고 한다.
그리고 시념(信念), 일념삼천(一念三千), 사념처(四念處) 하는 말에서
염(念) 역시 생각을 의미한다.
남방불교에서 말하는 사마디(samadhi), 사마타(śamatha), 위빠사나(vipassana)라고 하는 것도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며,
선불교에서는 화두 참구를 하는 거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하는 것도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고,
그리하여 해오(解悟), 돈오(頓悟), 증오(證悟)를 넘어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것이 선(禪) 수행의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불교에서 생각의 극치는 각(覺)에 있을 것이다.
각(覺)이란 깨달음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며, 불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걸 한 단어로 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지니는 본래성품은 본래 청정하고 공한 것으로서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으나
우주에 상주하며,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인 것이다.
그 성품이 작용해 모든 만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본각(本覺), 즉 진여(眞如)라고도 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마음이며, 우리들의 본래 마음이기도 하다.
이것이 작용해 우주 삼라만상이 나투게 되는데,
이렇게 작용하는 이치를 진리 또는 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각(知覺), 자각(自覺) 하다가 드디어 구경각(究竟覺),
무상등정각(無上正等正覺)에 이르러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은 분별 번뇌를 일으키는 망상으로 규정했다.
비구 말룬캬풋타(Malunkyaputta)는 평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명상 수행을 하던 중에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일으켰다.
‘세존께서는 수많은 주제에 대해 설법하시지만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설법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은 항상 함이 있는가 없는가,
세계는 한정이 있는가 없는가,
목숨은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인가 등’
이런 생각을 일으켰다.
그는 또 이어서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궁금하다. 그런데도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주제들에 대해 설하시지 않는데,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한 다음 말룬캬풋타 비구는 세존을 찾아갔다.
그는 세존께 예배를 올린 다음 물러나 한쪽에 앉아
자신의 의문사항을 말씀드린 다음 답변해주실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세존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말룬캬풋타여! 내가 이전에 너에게 세상은 항상 함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를 쫓아 내 법을 배우고 닦는 것이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너는 ‘세상은 항상 됨이 없다,
세계는 한정이 있다, 세계는 한정이 없다,
목숨은 곧 몸이다, 목숨과 몸은 다르다,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다, 여래에게는 마침이 없다.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를 쫓아 내 법을 배우고 닦는 것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말룬캬풋타여, 네가 일으킨 그 의문들에 대해 나는 답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네가 일으킨 그 질문들에 대해 답하겠노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에 말룬캬풋타는 마음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머리를 숙인 채로 잠자코 앉아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무언가 더 물을 것이 있는 듯 보였다.
이에 세존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세상은 항상 됨이 있거나 없다는 데 대한
결론을 내린 다음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의문에 대답을 알기 전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며,
네가 제기한 다른 여러 질문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마치 독화살을 맞은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다.
어느 때 한 남자가 독화살을 맞아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이 의사를 청해 왔다.
의사가 화살을 뽑으려 하자 화살을 맞은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화살을 뽑지 마시오. 나는 그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소.
나는 화살을 쏜 사람에 대해, 그가 어떤 성을 가졌으며,
이름은 무엇인지, 신분은 어떤 계급이며, 키는 큰지 작은지,
살결은 거친지 고운지, 얼굴빛은 검은지 흰지,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지 등을 알고 싶소.’
이어서 그는 또 말했다.
‘나는 화살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슨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산뽕나무로 만들어졌는지, 뽕나무로 만들어졌는지,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는지, 또는 뿔로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소.
또한 나는 활에 대해서도 그 줄이 소의 힘줄로 만들었는지,
노루나 사슴의 힘줄로 만들었는지, 또는 실로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소.’
더 나아가 그는 화살과 화살촉과 화살통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그에 대해 알기 전에는 자신에게 박혀 있는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자, 어떠하냐?
이런 그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너는 생각하느냐?”
말룬캬풋타 비구는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그를 위해 다정히 말씀하셨다.
“말룬캬풋타여, 네가 제기한 그 질문들에 대해 나는 말하지 않겠다.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가. 그런 질문들은 이치에 맞지 않고,
법에 맞지 않으며, 청정한 행으로 인도하지 않고,
지혜로 인도하지 않으며,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룬캬풋타여, 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한결같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바 업에 대해서 말한다.
왜 그러한가. 이것들은 이치에도 맞고, 법에도 맞으며,
청정한 행으로 인도하고, 지혜로 인도하며,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이렇게 설하시자 말룬캬풋타는 세존이
말하는 바와 말하지 않는 바를 확실하게 알았고,
그에 기반 해 수행함으로써 큰 성취를 이루었다.
생각은 자신이 주체가 돼 일으키는 생각과
자신과는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나
첫 번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이어지고,
두 번째 생각이 세 번째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끝없이 전개되는 생각으로 구분된다.
전자의 생각은 팔정도의 정사(正思)에 해당되는 바람직한 생각이지만
후자의 생각은 분별과 번뇌의 일종으로서의 허망한 생각, 망상(妄想)이다.
그리고 생각에는,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철학적인 생각이다.
철학적인 생각은 좋은 생각일 경우 정사(正思)를 거쳐
바른 법(진실)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에 바람직한 생각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생각을 위한 생각,
즉 희론(戱論, 작난하는 논리)에 빠져버릴 위험성이 있는 생각이다.
말룬캬풋타는 희론의 위험에 빠져들었고, 세존께서는
희론하는 생각의 문제점을 ‘독화살의 비유’로써 설명하셨다.
닥쳐 있는 고통의 원인을 한 단계까지 밝히는 생각은
당연하고도 좋은 생각이다. 세존께서 늘 설하시는 사성제(四聖諦),
즉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과,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방법에서도
고통의 원인이 논의되고 있다.
문제는 고통의 원인 또한 다른 원인의 입장에서는 결과가 된다는 점이다.
어제는 오늘의 원인이지만, 어제는 그저께의 결과이기 때문에
어제의 원인을 밝히려 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제까지 원인을 밝히는 생각은 좋다.
그러나 그저께, 그그저께, 그그그저께…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원인을 밝히려 드는 생각은 합당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을 칭찬하는 제자에게 공자는 말했다.
“그가 두 번만 생각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세존 또한 공자와 같은 입장을 취하신다.
생각하라, 그러나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라.
그것이 바르게 생각하는 것, 즉 정사(正思)의 실제이다.
거듭되는 생각이 끝나야지만 실천이 가능해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삶은 생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 또는 실행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정빈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