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仁川)은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매소홀현이었는데
경덕왕때 소성으로 개칭, 율진군(시흥군)의 영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이 되었으며 1949년 인천시로 개칭되고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본래 가락국 수로왕자로서 모후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되었으나,
그 후손 기(奇)가 신라 경덕왕때 아찬으로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공을 세워 현종으로부터
이씨(李氏)의 성을 사성 받았다. 그후 그의 17세존 허겸(許謙)이 상서좌복야를 지내고
상주국에 올라 소성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받들고,
그가 식읍으로 하사받았던 인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연(子淵 :허겸의 손자)이 문종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공신에 올랐으며, 뒤에 개부의동삼사 태사 겸 중서령 감수국사상주국으로 경원군 개국공에
이르렀고, 그의 맏아들 호(顥)는 선종의 국구로 문종때 호부낭중을 지낸 후 경원백에 추봉되어
아우 정(문하시중으로 경원백에 추봉), 의(재상에 오름) 등과 함께 가세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때 형조참판과 함길도 도체찰사를 지낸 관(灌)과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거쳐 참찬의정부사에 이르러 영의정에 추증된 문화(文和)가 유명했으며,
효상(孝常)은 지돈령부사에 올라 학문과 충효로 명망이 높았다.
참판 중손(仲孫)의 손자인 성동(成童)은 직제학과 대사간을 지내고 중종때 형조참의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때 파직되기도 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 인(寅)의 아들 휴복(休復)이 곽재우와 함께 왜병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이괄의 난 때는 관군의 별장으로 안현에서 공을세워 진무3등공신으로 인원군에
봉해져서 무명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며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남한에 총 14,605가구, 61,0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