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회 여수 해양문학상 당선작
여자도 홍련 / 윤경예
꼬막 캐는 여자 몸에서 자란다는 홍련이 있다
홍련의 꽃대 위에서 달의 언덕이 자랐다
빛보다 어둠에 먼저 가닿은 별자리로 왔다는
꼬막들, 아랫도리 다 젖는 것도 모른 채
달을 숨기고 꽃을 들키려고
여자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포말로 흩뿌려진 남편은 잊은 지 오래됐다고
그녀를 벗은 뻘배가 파도 쪽으로 머리를 둘 때
갯뻘 해안선은 눈부시게 깊어졌다
깊어진다는 것은 주름이 많다는 것이 아니다
꼬막 골처럼 눈을 슬쩍 감아주는 것이다
오늘도 물길을 놔버린 수평선처럼
서로 넘어뜨리며 한 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꼬막 캐고 돌아온 자리, 개흙 뒤집어써도
밀물은 갯뻘 냄새마저 말갛게 씻어준다
홍련 오는 동안, 추위가 발등을 뒤덮어도
뒤꿈치는 가벼워지고 발톱은 갈라지지 않았다
홍련이 피었다 진다 저 노을이
뻘에 빛을 처바르는 일
해안선을 친친 감고 나오는 큰 꼬막이 있다
2012여수해양문학상당선작>문패를 단 의자
경남 아파트 뒷뜨락엔
사과나무 그 여자 살고 있다는데요
댓 그루 벚꽃이 팡파레 울리며 꽃비 흥건할 때쯤
발치마다 연푸른 눈 치켜뜨는 풀잎들도
이슬 받아 연두빛 척척 널어 놓는다는데요
비파나무 측백나무 동백나무들마다
누가 굴뚝을 푸르게 세워 놓았을까요
동그란 초록 굴뚝마다 회색직박구리 드나들구요
그 원시의 날개마다 웬 잿빛 투성이래요
아마도 남향으로 난 그대 체온을 나르나 봐요
꽃불 지피며 동박새도 한나절 신나게 드나들다가
하얀 박석들을 층층이 깔아 놓은 이 비탈진 이니스프리
철쭉 봉오리마다 바람꽃빨강 초인종을 달았는지
향기 한 줌 딩동딩동딩동
아기대나무 단풍나무도 바람 한 줌 종소리를 내는데요
사람들은 아기사과나무 그늘이 사는 법을 모르는 게 틀림없어요
햇살마저 그대 체온으로 포도에 번지네요
사과나무, 그늘을 쌔근쌔근 내려 놓네요
밤새 칭얼거리던 가로등도 순한 눈빛인데요
가까이 다가서 보면
아기사과나무 그늘이라는 문패하나 달아놓은
머, 저 해맑은 긴 의자 하나 보이네요.
제18회 여수해양문학상 시 부문 대상작
숨이 붉어지는 방
황종권
붉은 여우가 왔다 일출이 절벽을 딛고 오기 전에 왔다 목덜미 가진 것들을 파헤치고 왔는지 주둥이가 붉었다
마을에서는 볏이 붉은 것들 몇 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붕에 발자국이 찍힌 것으로 보아 수컷은 아니고 암컷이라고 했다 붉음과 어둠의 경계에 산다는 동백이라는 소문만 들렸다
여우는 향일암 염주를 물고 천년을 내딛고자 했다 그러나 물고기들 풍경 속에서 헤엄칠 때마다 짓뭉그러진 입술과 타다만 향기가 절벽을 키우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해일에도 더렵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절벽의 힘으로 몸에 붉은 기운을 밀어 넣는 것들이 있다
제 배설물을 꽃잎으로 바꿔놓는 붉은 여우, 그늘에 들 듯 제 영혼을 동백으로 씻고 있다 저건 그냥 막막한 나무일뿐인데, 봄밤이 들어가는 문이다 들어가면 숨이 붉어지는 방이다.
[제17회 여수해양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대상 >
여수항 멸치잡이배
이병일
어질어질한 물 그늘이 스며오듯이
꽃나무들같이 번져오는 것들이 있다네
흰빛으로 밝게 저무는 것들이
멀리서 뒤척이며 떠밀린 멀미를 부른다지
그 희끗한 것들이
그 희끗한 것들이
바다의 색채마저 바꿔놓을 때
멸치잡이배는 푸른 고래의 입이 되어
아가리 가득 반짝이는 빛을 담고 있다네
무늬가 희고 푸르고 희고
그러나 고래의 눈엔 빛처럼 꿈틀거리는
섬세한 잔가시나무를 가진 것들을
바다로부터 잡아 올리고 있다네
해질녘부터 그날 새벽까지
꺼끌꺼끌 잠을 털고
더러운 손으로 그물을 길어 올리는, 그러나 고래의 탈을 쓴
여수항이 멸치잡이배를 오밀조밀 풀어놓고 있다네.
2017년 제19회<여수해양문학상> 시부문 대상작
고래의 혈통
태동철
고래좌에서 족보로 대물림 된 혈통이다 가훈을 거역하며 먼 거리를
맹목으로 연 항해, 성년이 된 지문으로 지느러미를 펼치고 윤슬 이는
부럭을 타넘으며 청색시대의 비린내를 파도에 풀어나간다 바다에선
용골을 엮은 등뼈를 낮춰 겸손한 가슴으로 물살을 품고 심장의 마력
에서 혈기로 피를 달궈 생을 탕진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망각한다 방
탕한 방황으로 점점 거칠어지는 파랑에 좌표를 잃는다 난바다에서
표류하는 세월이다 해류가 소용돌이치는 암초에 부딪쳐 이물이 파손
되고 고물로 유서를 쓰듯 물이랑을 뻗친다 심연 아래로 침몰하는 순
간 고래가 예인선으로 떠오른다 태풍에도 끊어지지 않는 수평선으로
힘줄을 풀어 구명줄을 단단히 묶는다 고래 힘줄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파도 끝에서 아득히 추락하는 아뜩한 공포에 속죄하는 마음을 감싸듯
품는다 사랑의 징표로 등에서 분수공을 활짝 열어 비산하는 물보라로
오색무지개를 띄워 올린다 온몸에 벅찬 용서의 울림을 퍼뜨린다 생명
선을 끌어당기는 거룩한 핏줄에 이끌려 닻별이 뜬 항구에 닿는다 아버
지가 심해 속 무덤으로 돌아간 자리에 오동도가 언약의 등대불빛을 밝
혀 심장 동맥에서 동백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