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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강혜란
관심
더 헤리티지: 번외편① 문화유산 파워라이터 유홍준
이 사람을 무어라 부를까. 문화재청장(2004년 9월~2008년 2월)을 지냈어도 ‘500만 부의 사나이’ ‘문화유산 전도사’ 쪽이 어울린다. 필력·입담·안목, 무엇보다 발품으로 써낸 단독 저서가 40여 권이다. 공동 저술 수십권을 빼고도 1년에 한 권꼴로 책을 냈다. 역사와 평론까지 곁들여 우리나라 미술과 문화유산을 종횡무진 누비고 전도해온 유홍준(74·미술사학과) 명지대 석좌교수 말이다.
올해는 그의 출세작이자 스테디셀러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하 『답사기』) 출간 30주년. 기자도 그해 여름 책을 들고 ‘남도답사 1번지’ 강진·해남 등을 찾은 50만 명 중 하나다. 스마트폰이나 카카오택시가 없던 시절이라 도착하면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 지도가 담긴 팸플릿부터 구했다. 답사기를 숙독하고 갔는데도 절에 놓인 석등이며 탱화가 ‘아는 만큼 보이지 않아’ 좌절도 했다. 실은 책을 읽고 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붉은 황톳길을 걸으며 산바람과 대나무 숲에 취하는 게 좋았다. 그런 ‘신도’들을 무수히 만들어낸 30년이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 징역형 받은 게 복권이 안 돼서 1983년 건국대 전임강사에 채용되고도 하루 만에 취소됐어요. 그전까지 일한 ‘계간미술’ 기자로 다시 오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나 길바닥에서 백수로, 미술평론가로 살겠소’ 했죠. 당시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한국미술사가 굉장히 부실했어요. 91년까지 7년 동안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식으로 오픈 강좌를 많이 했습니다. 한 기수가 끝나면 수강생들 데리고 2박3일 답사를 다녔는데, 재수강은 못해도 답사는 꼭 가려고들 해요. 그렇게 월례 답사회가 시작된 겁니다. 내 이력의 처음부터 미술사와 답사는 늘 붙어있던 거죠.”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배경 삼아 포즈를 취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최근 복원을 마친 광화문 월대는 그가 청장 시절 역점을 기울인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이다. 전민규 기자
그렇게 시작한 길을 그는 평생 걸었다. 요즘도 부여의 주말 거처 ‘휴휴당’을 거점으로 ‘5도2촌’(5일은 도시, 2일은 시골)을 추구하면서 연 4회 부여 일대 답사를 이끈다. 책도 부지런히 펴냈다. 집필에 13년 걸린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이하 『강의』)는 총 6권으로 최근 완간했고, 문화유산답사와 한국사를 엮어 안내하는 『국토박물관 순례』(이하 『순례』) 1·2권도 동시에 나왔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곳은 광화문 월대 앞. 알아본 시민들이 연신 인사하고 기념사진을 청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tvN) 등 예능 프로까지 출연해 문화예술을 앞장서 소개한 덕이 크다. “우리 문화유산을 현대적으로 알리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분”이라는, 어느 국립박물관장의 말이 실감 났다. 인터뷰는 최근 펴낸 그의 주요 저작과 학문적 보람까지 짚으며 진행됐다.
신간 『순례』도 답사기 형태이긴 한데, 시대 순(구석기/신석기/고구려/백제/신라 등)으로 쓰인 게 다르더군요. 『강의』와 연결되면서도 훨씬 대중적이랄까요.
사실 『강의』 같은 개론서가 널리 읽히면 답사기를 따로 쓰지 않아도 되죠. 『순례』에선 『강의』에서 못 담은 에피소드를, 예컨대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나 울주 반구대암각화를 훨씬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물을 보는 눈이 높아지고 지식이 풍부해지죠. 역사란 게 문화유산과 함께 그릴 때 실체감이 생기거든요.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잖아요. 앞서 『답사기』일본편 전 5권을 역사 순으로 펴낸 것도 일본 역사를 거의 모르는 국내 독자들에게 유적을 일방적으로 해설할 수 없어서였어요. 역사 공부에 이런 책을 같이 읽으면 여행하듯 와닿을 거라고 봅니다.
현장을 많이 다니면 구체적으로 어떤 게 달라 보입니까.
실물을 아니까, 문헌 자료만으로 책상에서 쓴 사람과 다른 지각이 생기죠. 유물이 나를 최고로 감동시킨 건 감은사탑(경주)이었어요. 답사기에도 썼지만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만 가지고 원고지를 다 메우고 싶을 정도죠. 사진만으론 그렇게 아름답거나 웅장하지 않은데 현장에서 보면 다르죠. 우리 도자기들도 최순우 선생, 정양모 선생이 쓴 책을 읽고 박물관에서 가서 색감과 라인·형태를 음미해야 제대로 보여요. 그렇게 변별력도 생기고 미감을 익혀갔던 것이 내 미술사 연구 방법론이고 수업이었죠. 난 미술품을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면서 유물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이를테면 어떤 유물이 그런가요.
강진 무위사가 미술사적으로는 극락보전(국보)하고 벽화(아미타여래삼존벽화, 국보) 정도죠. 하지만 강진에서 영랑생가(시인 김영랑의 생가), 다산초당(정약용의 유배 거처), 백련사가 가진 의미는 엄청나거든요. 특히 백련사는 미술사엔 안 나오겠지만 문화사적으로는 다산 정약용의 흔적뿐만 아니라 원교 이광사(조선 후기 명필)의 현판, 가람 배치, 동백나무 숲, 숲속의 승탑까지 엄청나요. 나는 명품미술뿐 아니라 민속미술까지 다 살피는데, 무슨 방법론 때문이 아니고 내게 의미와 감동인 걸 해석해 글을 쓴 게 독자 공감을 샀죠. 문화유산이라고 해야 총체성이 잡혀요. 미술품과 문화유산이 다르듯 미술사 강의와 답사기는 달라요.
경주의 감은사터 전경.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쌍탑일금당형(雙塔一金堂型)의 정연한 가람배치로 이후 통일신라 절집의 한 모범이 되었다″고 소개했다. 사진 창비
1991년 학계 지인들이 창간한 잡지 ‘사회평론’ 요청으로 “딱딱한 사회과학 말고 재미난 소재로” 쓰게 된 게 답사기의 시작이다. 원고료도 안 챙겨줘 애초엔 3회만 쓰려 했는데, 첫 회부터 반응이 대단했다. 한번 펑크 냈을 땐 편집실에 항의 전화가 불티났고, 어느 재미(在美) 독자는 “필자가 죽었느냐”고 근심스레 물어보기도 했단다.
“당시 원고 받아준 편집자를 먼 훗날 만났을 때, ‘선생님 얼마나 못됐었는지 알아요?’ 이래요. 글 함부로 고치거나 토씨 하나 잘못 나가거나 하면 난리 쳤다고.(웃음) 당시 글쟁이로 깐깐했던 게 나하고 훗날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한 정운영, 그리고 고종석(기자 출신 에세이스트) 이렇게 셋인데 내가 제일 심했다고….”
그의 연구와 저술은 미술과 답사라는 두 바퀴로 굴러왔다. 이 가운데 『강의』를 두고선 “피부과의사가 의학개론을 쓰고, 민법학자가 법학개론을 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며 통사 집필의 난도를 고백했다. 대신에 “한 사람의 시각으로 본 통사를 가졌다는 건 믿고 의지할 선장이 있는 것”이라며 후학들의 연구를 기대했다. 특히 조선시대 공예를 왕실공예/선비공예/규방공예/민속공예로 구분한 것은 한국미술사에서 첫 시도라고 강조했다.
“공예란 게 기술과 예술의 결합인데 재료 중심일 땐 ‘어떻게 다루는가’가 주가 되지만 예술로 보면 만든 목적과 사용자의 취미까지 반영돼요. 금속공예라고 왕실에서 만든 국새·어보, 불교에서 만든 범종, 민간에서 쓰는 화로·촛대·놋그릇을 다 포함하면 미감이 안 드러나죠. 그런데 왕실공예라고 하면 아름다운 박스(함·궤)하며 실내를 장식한 화각(華角, 쇠뿔 재료로 공예)이나 나전칠기, 그리고 복식까지 얼마나 화려하고 장엄한지 보이잖아요. 반면, 선비공예는 검소하면서 실질적이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죠. 이런 주장에 영향 받아서 박물관 진열 방식도 바꾼 곳이 생겨났는데 학교 미술사도 점차 바뀌었으면 합니다.”
2017년 본지가 방문한 명지대 한국미술사연구소의 풍경. 유홍준(미술평론가)·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가 평생 모아온 책과 자료, 유물과 기념품이 빼곡히 들어찬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자 시대의 만물상이며 미술사 연구자들의 사랑방이다. 일러스트 안충기 기자·화가
그가 스스로 학문적 성취로 꼽는 건 『석농화원(石農畵苑)』 재조명과 『청죽화사(廳竹畵史)』 발굴이다. 『석농화원』은 조선 정조시대 수집가 석농 김광국(1727~97)이 평생 수집한 회화를 한데 모아 꾸민 화첩. 여기에 실린 당대 문장가 유한준(1732~1811)의 발문에서 그의 유명한 경구 ‘아는 만큼 보인다’가 비롯된 바 있다. 이 같은 인연으로 그는 석농화원 육필본 목록집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를 수년간 연구해 학자 김채식과 공동 번역으로 『김광국의 석농화원』(눌와)을 펴내기도 했다.
이보다 자부하는 게 남태응(1687~1740)의 『청죽화사』 원본을 발굴해 세상에 알린 것. 조선시대의 유명한 화론(畵論)인 『청죽화사』는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등을 통해 인용으로 접해질 뿐이었다. 유홍준은 1980년대 논문에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다며 그 가치를 강조했다. 어느 날 그 원본을 본 것 같다는 연락이 고서상에게서 왔다.
“알고 보니 (유명 고서점인) 통문관의 이겸로(2006년 작고) 대표가 소장 중인 거예요. 그가 육필본인 『청죽만록』(총 8권)을 6권까지 갖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세창 등이 인용한 『청죽화사』가 들어 있었죠. 통문관에 부탁해서 복사하고, 원본은 내가 잘 아는 컬렉터에게 좀 사라고 권했죠. 나중에 책을 통째 번역해 발표하고 그걸 기초로 해서 쓴 게 두 권짜리 『화인열전』입니다. 내가 답사기 말고 진짜 관심을 두는 건 바이오그래피(전기)거든요.”
미술사가로서 또 다른 보람이 있다면요.
우리 국학 전체에 기여한 거라면, 오늘(2023년 11월 26일)도 하고 온 건데 ‘한국고간찰연구회’죠. 동갑내기인 이광호(철학과) 연세대 교수, 김종진(한문학과) 동국대 교수랑 50세 때 ‘우리 같이 초서(草書)를 공부하자, 그리고 후배들을 키우자’며 만들었어요. 1999년 3월부터 25년째 매월 마지막 일요일에 모여요. 젊은 사람들도 합류해서 지금은 28명이죠. 옛 사람들의 지렁이 같은 편지 글씨를 탈초(脫草:초서 해독)하는데, 편지 내용이 얼마나 재미나게요. 이걸 번역·해제한 공동저술을 벌써 10여 권 냈습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대표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1993년 첫 출간돼 총 20권이 나왔다. 사진 창비
공부에다 답사에다 책도 많이 쓰시는데, 비결이 뭡니까.
백낙청 선생도 나한테 신기하다고 하던데(웃음). 백 선생님은 내 글이 반은 문학적, 반은 학술적이라고 했죠. 빨리 쓰는 건 집중해 써서 그래요. 글쓰기는 기자 하며 숙련됐죠. 나는 어렵게 쓰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해 쉽게 씁니다. 게다가 ‘계간미술’은 전문지라 나로선 7년 일하는 동안 현장 감각과 아카데미즘을 섞는 게 몸에 익었죠.
일하면서 계속 공부를 생각하셨군요.
내가 67학번인데 졸업을 80년에 하잖아요.(※서울대 미학과 3학년 때 3선개헌 반대 시위로 무기정학과 강제징집을 당했다. 1974년 복학 2개월 만에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징역 1년을 살았고 이후 ‘공간’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하다가 80년 복교해 14년 만에 졸업했다. 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이미 서른 둘이었지만 졸업장 받는 대로 대학원에 갈 생각이었죠. 2년 만에 홍익대 석사를 받았는데, 복권이 안 돼서 다시 백수가 됐으니(※건국대 임용 취소를 말함)…. 오픈 강좌로 어떻게든 벌어 먹고는 살았는데, 나중에 아내 말이 가장 불안한 게 의료보험이 없다는 거였대요(지역보험 도입 전). 그래도 미술사를 놓지 않았죠.
2019년 중앙일보 본사에서 인터뷰 중 포즈를 취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돼 수십억원 인세를 벌어준 『답사기』는 국내(북한 포함) 편 12권, 일본 편 5권, 중국 편 3권까지 총 20권 나왔다. 올 상반기엔 하이라이트 14편을 모은 『아는 만큼 보인다』가 나왔다. 인문학 출판계에서 보기 드문 브랜드 파워다.
앞서 『답사기』 마지막 권은 독도로 쓰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실은 1997년에 3권 서문에서 답사기는 그만 쓴다고 했어요. 연속극 재미있다고 늘리는 거 난 안 한다, 재충전한다 했죠. 다만 언급하지 못한 곳이 많고 혹시 북한에라도 가게 되면 더 쓰겠다 했는데, 중앙일보가 기회를 줬잖아요(※당시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와 함께 1997~98년 방북한 것을 토대로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를 연재했고, 이후 상·하권으로 출간했다). 그러고선 회화사 연구로 돌아와 『화인열전』 『완당평전』 등을 쓰고 문화재청장을 했죠. 이후에도 『강의』를 쓰면서 『국보순례』 『명작순례』 『안목』 등을 펴냈죠. 2011년에 답사기 타이틀로 제6권이 나왔는데, 5권 이후 세월이 많이 흘러 글쓴이가 달라졌다 할 수 있을 정도죠. 이제 『순례』를 시대순으로 4권까지 끝내면 5권째는 독도를 포함해 섬 이야기를 쓰려고요. 아직 쓸 게 많습니다.
1997년 북한 문화유산답사 당시 묘향산 보현사 13층 석탑 앞에 선 유홍준 교수. 중앙포토
그 가운데 구상 중인 게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연행길을 따라 『열하일기』를 그만의 답사기로 쓰는 것이다. “한국미술사, 다시 말해 한국 문화사를 동양 내지 세계 문화사적인 시각에서 봐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역사는 지난 2000년간 중국 영향을 받으면서 변하고 발전해온 주변부 문화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중심부 문화는 원론이 강하고 주변부 문화는 변화가 능숙하죠. 청자는 중국에서 만들어냈지만 상감청자로 변용한 것은 고려입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중국·한국·일본·베트남·몽골·티베트 등)에서 한국 문화는 당당한 지분율이 있어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아무리 뛰어나도 유럽의 르네상스를 말할 때 네덜란드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듯 한국 문화를 빼놓고 말하는 동아시아 문화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갤러리는 즐겨 가도 고미술엔 그만 한 관심을 안 보이는 듯합니다.
괴리가 있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현대미술을 좋아하면 고미술도 좋아하게 되고, 문화유산을 즐기다 보면 현대미술도 좋아하리라 봅니다. 저는 두 가지가 따로 놀지 않았어요. 작품 구매도 즐겨 했는데 지금은 다 부여문화원에 기증했습니다.
2006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 ‘휴휴당’을 지은 그는 부여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경주나 공주에 비해 옛 왕도로서 브랜드가 약한 게 안타까워 그간 수집한 유물도 다 기증했다. 서화 820여 점, 서적 1만여 권으로 고미술 감정평가액상 수십억원 규모라고 했다.
“부여군립미술관 설립에 도움을 주려고 일부러 모은 거죠. 부여 출신 서예가·화가 작품, 부여에 관계 되는 글씨, 그림, 민속품에다 그간 모은 간찰, 탁본까지 다 기증했어요. 늙으면 문화유산 안내하면서 살겠다 해서 간 곳이 부여고, 지금껏 유홍준과 함께하는 부여 답사를 50회 했어요. 봄과 가을에 각각 두 차례씩, 전국에서 사람들이 오죠.”
기자도 가고 싶다는 말에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서둘러야 할 걸요. 온라인 예약 뜨면 바로 매진이거든요.”
이 분야에서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유홍준 외에 또 나올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문화유산의 다채로운 분야에서 활약하는 이들을 ‘더 헤리티지: 번외편’으로 만납니다.
“청장 때 경복궁 입장료 3배로 올려…이제 5000원은 받아야”
광화문 월대에 놓인 서수상을 만지면서 감회를 밝히고 있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최근 복원을 마친 월대는 그가 청장 시절 역점을 기울인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이다. 전민규 기자
유홍준 교수가 노무현 정부 시절 제3대 문화재청 청장을 지내면서 앞장선 것 중 하나가 우리 궁과 능을 브랜드화하는 것이다. 지금도 “서울에 궁궐이 5개나 되는데 이런 독보적인 도시가 없다”면서 기회만 되면 궁·능 콘텐트 확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최근에 완료한 광화문 월대 복원은 그가 청장 시절 계획하고 단계적으로 추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때만 해도 경복궁이 지금과 차원이 달랐다. 서울의 상징성을 갖는데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하지 못 했다”고 돌아봤다. (1997년 5대 궁궐 중에 창덕궁만 유일하게 종묘와 함께 등재됐다.)
“당시에 광화문은 현재 위치보다 17m 안쪽에 있었고, 근전정과 일직선이 아니라 남산에 일제가 세웠던 조선 신궁과 마주하는, 3.8도 비틀어진 방향이었어요. 누각도 (1960년대 복원한) 시멘트 건물이었죠. 대로에 접해 있으니 궁궐의 정문이라는 권위도 없고, 기능을 못했죠. 이걸 바로 잡기까지 교통 문제, 광장 문제와 맞물려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이제 월대 복원까지 이뤄졌어요. 우리시대 문화 능력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에요. 이제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면 세계유산 규정 중에 그 영역을 확장하는 회의가 있어요. 그러니 창덕궁의 연장으로 서울의 5대 궁궐로 묶어 신청하거나 한양도성과 묶어서 해볼 수가 있죠.”
광화문 복원을 위해 2007년 철거된 당시 모습. 2010년 8월 목조 누각까지 복원해 현재 모습으로 공개됐다. 중앙포토
그러면서 경복궁 입장료 인상 비화를 털어놨다.
“경복궁 입장료가 그땐 1000원이었어요. 다른 나라 고궁 입장료를 조사해보니 대체로 영화 티켓값이랑 비슷해요. 그때로선 7000~8000원, 지금으로는 1만3000원 이상이죠.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입장료를 올리고 싶은데, 재경부(지금의 기획재정부)가 허가를 안 합니다’ 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이심전심 지원을 확인하고 재경부에다 ‘이거 5000원으로 올립시다’ 했더니 세상물정 모르는 학자가 와서 50%도 아니고 500%로 올린다고, 현실을 모른다고 난리가 났어요. 나는 되레 ‘1000원 받는 게 현실적이냐’고 받아쳤죠. 어쨌든 물밑에서 조율돼 인상하기로 했는데, 김광림 차관이 ‘제발 부탁이니 3000원으로 해달라’ 빌었어요. 사실 나도 5000원은 협상카드였지 본심은 3000원이었죠(웃음). 그때 경복궁·창덕궁만 올리고 덕수궁·창경궁은 시차를 둬 올리자고 했는데, 20년 가까이 그대로죠. 이젠 5000원 정도로 올려야죠. (물가 상승에 따른) 현실화도 있고, 외국인들이 한복 무료 입장을 더 활용하려고 할 테니 큰 관광 자원이 될 겁니다.”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