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방동 삼층석탑 보문면 간방리
높이 4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하층기단은 여러 매의 석재로 조립되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개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새겨져 있다.
하층기단 갑석(甲石)은 파손되었는데, 상면을 경사지게 처리하여 네 모퉁이의 합각선이 표시되어 있다. 상면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은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1개의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기단 갑석은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갑석의 하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상면에는 호각형 2단의 초층탑신 받침을 조출하였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2층과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탑신석에는 매층 양 우주가 정연히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의 하면에는 매층 4단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각출되어 있다.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轉角)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으며, 정상에는 보주가 놓여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구성이나, 탑신과 옥개석의 수법으로보아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망향제 보문면 신월리
망향탑은 전체높이가 13m이고, 이북5도를 상징하는 5개의 석주를 십장생 그림으로 조각한 청동 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이북5도의 단합을 뜻하며, 탑 주위 5단 계단도 이북5도를 상징한 것이
다.
1987년 3월 30일에 망향탑 부지 임야 417평 무상 대여 권리를 이북5도충남사무소장 명의로 결정 받은 후, 1988년 12월 20일 건설부장관의 승인을 받고 1989년 5월 15일 기공식을 거친 후에 1990년 6월 20일 망향탑 건립 준공을 하였다.
망향탑의 설계는 그 당시 목원대학교 이왕기 건축학과장이 했고, ‘망향탑’이라는 글씨는 故 윤길중 전 국회부의장이 썼다.
문래실녹색체험마을 보문면 우래리
학가산 아래 내성천의 맑은 물줄기를 따라 은빛 모래가 유난히 빛나는 이곳에 부지 3,000㎡와 주변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리고자 향토와 목재 재료로 건축된 다목적 체험관 132㎡와 30명 정도가 묶을 수 있는 펜션형 숙박시설 66㎡를 갖추고 있어 도시민들의 농사체험 활용은 물론 각종 동창회 및 워크숍 장소로 활용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내성천의 은빛 모래와 맑고 물을 소재로 한 야외물놀이장 및 물고기잡이 체험장 198㎡와 사워장ㆍ탈의실을 구비하는 등 물놀이 체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 마을 특산품인 학가산 수박농가의 농장을 체험농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가을에는 송이체험 등 다채로운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보문사 극락전 보문면 수계리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예천군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1185년(고려 명종 15) 보조국사 지눌이 극락전을 비롯한 7동의 건물을 재건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고 극락전과 반학루(伴鶴樓), 염불당(요사채) 등만 남았다.
경내에는 극락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03호), 염불당, 삼성각, 나한전, 적묵당, 응진전,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86호), 보문사 사적비 등이 배치되어 있다. 염불당은 ㅁ자 모양의 2층 한옥 구조로 되어 있으며 '보문사(普門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적묵당은 툇마루가 있는 일반 기와집 구조로서 동종이 놓여 있고 보조국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극락전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주심포 양식과 익공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조선 중, 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절 입구에는 맷돌 1개가 놓여 있는데, 그 위로 약수가 흘러 오른쪽에 있는 연못으로 들어간다. 1780년(정조 4)에 정약용이 이곳에서 1년 동안 머물며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보문사 삼층석탑 보문면 수계리
높이 3.7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6호. 넓직한 자연 암반을 지대석(地臺石)으로 삼아 2층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하층기단의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하나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새겨져 있다.
하층기단 갑석(甲石)은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면은 평박하게 처리하였다. 깁석 상면의 중앙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은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하나의 탱주가 정연히 새겨졌다.
상층기단 갑석 역시 일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상면에는 호각형 2단의 초층탑신 받침을 조출하고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조성되었다.
탑신석의 각 면에는 양 우주가 정연히 새겨졌는데, 1층탑신의 높이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어 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매층 각형 4단의 옥개받침과 낙수홈이 마련되어 있고, 상면에는 아무런 받침 없이 탑신을 받고 있다.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나, 길이가 짧아 둔중감을 주고 있다.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轉角)에 이르러 낮은 반전을 보이고 있다. 정상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 등의 부재로 상륜부(相輪部)를 구성하고 있으나, 앙화와 복발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다.
이 석탑은 1185년(명종 15)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보문사를 재건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석재의 조립수법과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움정 보문면 옥천리 443-2
새움정은 폐교된 옥천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자연의 식재료를 소재로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윤별동 묘 보문면 미호리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문신 윤상(尹祥, 1373~)을 제향하는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으로 1456년(세조 2)에 건립하였다. 수량은 2동이다. 1995년 12월 1일 예천군 시도유형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되었다.
자연석을 낮게 쌓아 기단을 만들고 기단 윗면은 모르타르로 마감하였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어간은 원기둥을, 양옆에는 각진 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서 사당 외벽은 외부 뒷면을 제외하고 안팎을 모두 회벽으로 마감하였고, 바닥은 시멘트 모르타르를 발랐다. 툇간 윗부분은 긴 판재를 놓아서 천장을 구성하였고, 박공 아랫부분에는 풍판을 달았다. 남쪽 대문은 박공지붕의 사주문(四柱門)으로 중대문(中大門)을 달았다.
윤상은 본관 예천,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이다. 예천의 군리(郡吏)로 일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여 성리학과·역학에 밝았다.
1393년(태조 2) 생원이 되었고, 139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산 ·상주 교수(敎授)를 거쳐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영주 대구 등의 수령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이어 예문관제학 ·성균관박사를 지냈다. 낙향한 뒤에는 학문에 전념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의병대장 장윤덕장군 묘지 보문면 수계리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로 있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 직을 사임하고 민중의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또 1907년 고종의 헤이그특사파견을 계기로 일제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자, 구국 항일운동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 해 7월에 각처의 의사(義士)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강년(李康秊)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의 휘하에 들어가 풍기·봉화·예천·용궁·문경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헌병분파소·일본군사기지·일본경찰분서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소각하거나 순검·경찰보조원 또는 친일반역분자 등을 사살하였다.
특히 1907년 9월중에는 이강년·민긍호(閔肯鎬)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의병 1,000여명을 이끌고 문경읍 갈평리에서 일본경찰과 군인이 인솔하는 일본경찰대 및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경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또 같은달 16일에도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상주읍을 습격하여 대구수비대 소속 다나카[田中]대위가 거느린 1개중대의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이 크게 패하고 장윤덕도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수비대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의병에 관한 정보를 밝히지 않았으며, 총살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학 가 산
해발 882m로 예천군 보문면에 있는 예천의 산이며, 동쪽에는 안동시 서후면日月山), 서남쪽으로 팔공산(八空山), 멀리 북쪽으로 소백산맥을 볼 수 있는 등 영남 북부 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남쪽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쌓았다는 학가산성터가 남아 있다.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지명은 그 흔적을 보여준다. 학가산성은 서후면 자품리에서 산성리로 이어지는 느르치 고개 마루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헌에는 느르치 고개를 산성현(山城峴)으로 표시하였다.
동국여지승람(안동)에 "학가산(鶴駕山)은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하는데, 본부의 서쪽 20리에 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지금의 명칭 그대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안동문화대전에 영주에서는 부자봉으로, 안동에서는 문둥이봉으로, 예천에서는 선비봉으로 각각 부르기도
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일설에는 학이 앉았다 날아가는 형상 같아서 학가산(鶴駕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서학가산성 보문면 산성리
학가산에는 3개의 산ㅅ성이 있는대 학가산성, 동학가산성, 서학가산성이 있으며 서학가산은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하여 쌓은지는 알 수 없지만 공민왕이 1361년 11월 19일 홍건적의 2차 침입을 피해 몽진을 시작하여 12월 15일 안동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 시대에 쌓은 것이라고 추리를 할 수도 있다. 이 산성은 다느리티 뒷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돌과 흙으로 쌓여져 있으며 성내에는 무수한 기와조각이 있는 것을 보면 기와 집이 있었던 큰 산성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곳 지명이 서학가산성으로 인해 산성이 되었을 것이다.
암자터 보문면 산성리
학가산에는 8방에 9암자가 있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 하듯 광흥사, 애련사, 석탑사 등이 현존하며, 산자락 곳곳에는 ‘절터’로 지목되는 곳이 사방에 널려 있다.
자연 휴양림 보문면 휴양림길 210
학가산은 해발 882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예천군 보문면과 안동시 북후면의 접경 지역 깊숙한 곳에 위치한 덕에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청정지역이다. 학가산 북쪽계곡에 위치한 우래자연휴양림은 중앙고속도로 예천IC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가는 길 또한 백사장이 보이는 강변을 따라 이어지므로 호젓한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도 좋은 곳이다.
자연휴양림에 들어서면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은 통나무집들이 주위 나무들과 계곡, 바위와 너무도 잘 어울려, 마치 드라마 속에 나오는 고급 별장에 온 듯하고, 통나무 집 안으로 들어서면 편백나무의 테르펜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하며,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이 내부 분위기를 안락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