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가야(伽倻), 우리는 가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시,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韓國)에 대해서는 또 스스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역사(歷史)인데도 정작 우리 국민(國民)과 우리 민족(民族)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엉뚱하게 서양(西洋)에 대해서는 그들의 언어, 그들의 나라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꿰뚫고 있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와 언어에 대해서는 정작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문제중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100년이고 대부분은 80년이 못되어 대부분 저승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흔한 삶이기도 한데, 정작 죽을 때까지 외래의 자본주의(capitalism) 체제에 순응하여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사실상, 돈버는 기계가 되어 일생을 허비(虛費)하다 사망(死亡)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가정(假定)한다면, 과연 인간들을 위해 가축(家畜)들이 10년도 안되는 짧은 삶속에서 오직 먹이가 되기 위해 살을 찌우고 영양분을 배양시키다가 잡아먹히거나, 마치 구워 먹히기도 하는 가축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지 여러분은 한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과거보다 조금 문화생활(文化生活)을 더 많이 하고, 또 직업의 수준 높아졌으며, 과거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하여 과연, 과거보다 인간이 되어 동물과 대비되는 행복감(幸福感)과 존엄성(尊嚴性),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지는 순수한 가치(價値)의 큰 변화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이 동물과 구분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신(神)은 무엇일까?
단군교(檀君敎)의 경전(經典)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가치와 본성(本性), 그리고 존엄(尊嚴)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學習)과 수행 정신(修行精神)이 곧 동물(動物)과 대비되는 신이 될 수 있는 요건(要件) 즉, 영생불멸(永生不滅)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명분(名分)과 명예(名譽)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대한제국 재건회(大韓帝國 再建會)는 카페(cafe)를 통해 많은 글들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울특별시의 송파구청(松坡區廳)처럼 우리가 우리의 살아온 과정과 모습을 깡그리 무시한 채 우리 역사를 철저히 일본인들보다 부정(否定)하고 또,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고유의 DNA(deoxyribonucleic acid)가 가지는 정체성(正體性) 및 대화혼(大和魂)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는 조선혼(朝鮮魂)을 통째로 뜯어버리고 산다면 과연 우리의 두뇌(頭腦)는 누구의 것이며, 인간으로서 인생(人生)을 산다는 의미는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멍청함에도 정도(程度)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어(鰱魚)는 강에서 태어나서 바다에서 일생을 살다가 죽을 때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올라와서 죽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연어같은 물고기만도 정말 못하게 산다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금일, 가야에 대해 글을 쓰기 전 많은 회한(悔恨)과 많은 고민(苦悶), 그리고 많은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마음 가누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것은, 가야를 넘어서 일본(日本)에 대한 우리 민족의 입장, 견해이기도 하며, 일본 자체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존재일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또 다른 역사였던 백제에 대해서 비단, 지난 4월 18일, 백제의 시조 대왕(始祖大王)이신 온조대왕(溫祚大王)의 사당, 숭렬전(崇烈殿)에 대한 글을 쓰면서 느꼈던 고뇌(苦惱)와 안타까움보다 더 큰 슬픔이 몰려오는 것 같고, 특히 백제의 정신과 문화의 정수(精髓)가 모두 응축(凝縮)되고 녹아있어서 서울의 백제구(百濟區)라고 할 수 있는 송파구(松坡區)에서 과거의 아파트(apartment) 건설 과정에서도 겨우 살아 남아있던 순수(純粹)하고 고유하며, 소중했던 우리의 백제 문화 유적지(百濟文化遺跡地)를 송파구청에서 또다시 엉뚱하게 유적지가 아니라며, 아예 확인 사살(確認射殺)하듯 무참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있는 송파구청의 서울 지역 백제 유적지(百濟遺跡地)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글을 이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가야 유적 역시 오랜 세월 자연 지형의 변화와 도시화 과정(都市化過程)을 거치며 많은 유적지가 사라졌고, 매장 문화재(埋葬文化財)의 경우 특성상 부식과 부패의 문제로 원래 상태의 유물을 발견하기 어려운 문제, 그리고 역사서의 자체 부재(不在)로 당시의 실상이나 진실을 알기가 너무 어려운 점 등이 그저 과거의 마치 남의 나라 역사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저희 재건회만의 입장이겠습니까?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와 다르게 가야는 더욱 우리 역사이고 문화라고 하기에는 괴리감(乖離感)까지 느껴집니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소위 기본적인 개념조차 없는 대한민국 공화국(Republic of Korea)의 문화 정책(文化政策)이 문화보다는 개발(exploitation)과 자본 우선주의(capital firsterism)에 입각하여 자신의 순수 문화(純粹文化)를 소멸시키는데 일본인들보다 스스로 앞장서고 있는데 본질적 문제가 있습니다. 이른바, 개천절 행사(開天節 行事)에 대통령(president)이 종교적 문제(religious issues)를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 예만 봐도 우리는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대한민국 공화국의 어리벙벙한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조상을 무시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정상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대한민국 공화국 대통령들의 칠칠하지 못한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죄(罪)와 벌(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공화국 국민은 망국적인 대통령제(presidential system)를 유지해야 할까?
하기는, 소위 한배검을 모신다는 대종교의 지금 가짜 대표도 법도 무시하고 대종교 총본사(大倧敎總本司)를 무단 점령하고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루빨리 타도(打倒)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일본의 문화와 유래, 역사를 본다면 가장 큰 영향과 전수(傳受)한 문화가 많은 것은 가야가 너무나 확실함에도 정작 우리 스스로 가야에 대해 많은 부분 모르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2023년 9월 17일 유네스코(the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에서 가야의 7개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 목록에 등재하기로 결정된 것은 매우 큰 경사중의 경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다 체계적인 연구와 보존, 전수가 전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며 기타 추가적으로 나오는 가야 관련 유적도 온전하게 오롯이 보전될 수 있도록 정부의 각별한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우선 지목된 7개의 고분군은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全北 南原 酉谷里 斗洛里 古墳群),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慶北 高靈 池山洞 古墳群),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慶南 金海 大城洞 古墳群),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慶南 咸安 末伊山 古墳群),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慶南 昌寧 校洞 松峴洞 古墳群),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慶南 固城 松鶴洞 古墳群),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慶南 陜川 玉田 古墳群)입니다.
다만, 권고사항으로 구성요소인 7개의 고분군내 민간소유 부지(民間所有 敷地)를 확보하여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유산과 완충구역(緩衝區域), 특히 경남 창녕의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사이로 난 도로로 인한 영향을 완화하도록 하고, 구성요소 7개 고분군 전 지역에 대한 홍보 전략 개발(弘報戰略開發)과 통합 점검 체계 구축(統合點檢體系構築), 지역공동체 참여 확대(地域共同體參與擴大)에 대한 사항 등을 권고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고분군에 대한 매우 세심한 보존 관리에 대한 상세한 지침을 언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입니다.
오천년(五千年)의 찬란한 우리의 문화와 유적은 한반도 전체가 박물관이고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민족의 숙적(宿敵)이나 반동분자(反動分子)도 아닐텐데 대한민국 공화국은 유독 과거 악랄했던 일본제국(日本帝國)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철저하게 한국의 역사 흔적을 지우고 있는 것일까. 외래 공화주의(foreign republicanism)의 발로(發露)일까?
반드시 멸절되어야 할 역사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영광스럽고 찬란했던 대한제국으로의 복원과 재건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오천년의 역사를 만들어갈 유일하고 확고부동(確固不動)한 민족의 자산이며 진정한 국가(國家)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금일은 특별히 재건회(再建會)에서 숭선전(崇善殿)을 통해 대한제국의 영토(領土) 또는 강토(疆土)에 대한 견해에 대해 밝히고자 합니다.
우리 조상들께서 단군조선(檀君朝鮮) 이래 대한제국은 멸망하는 1910년까지 오천년이라는 오랜 역사속에서 줄기차게 국가의 영토와 민족의 번영 장소로 주목하며 오랫동안 민족 강토에 대한 논의를 한 결과는, 바로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는 엄연히 우리 동이족의 순수 고유 영토였다라는 점을 밝히셨습니다. 과연 만주대륙(滿洲大陸)과 한반도(韓半島), 일본열도(日本列島)의 소속된 국민들은 과연 다른 민족이고 종족일까.
관련하여 하나의 중요하게 주목(注目)해야 할 예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주국(滿洲國)입니다.
만주국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지 정확히 13년 후인, 1932년 3월 1일 건국되면서 주장했던 국가표어(國家標語)는 바로 오족협화적왕도낙토(五族協和的王道樂土)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오족(五族)이란 바로 만주족(滿洲族), 몽고족(蒙古族), 한족(漢族), 일본족(日本族), 조선족(朝鮮族)의 다섯 민족을 일컫고 있는데, 입헌군주국(立憲君主國)으로 동이족의 모든 오족이 함께 모두 합심하여 왕도(王道)가 흥(興)하는 낙원(樂園)의 국가로 만들자는 이상을 담고 있는 가장 숭고하고 이상적인 표어라고 할 수 있는데, 저희 대한제국 재건회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국의 복원(復原)은 바로 이러한 만주국의 이상을 동북아시아(Northeast Asia)에 실현하여 만주와 한반도, 일본이 모두 한 국가로 통일하여 국호(國號)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도(首都)는 한성(漢城)으로 재건시키자는 바로 대한제국 재건회의 대망(大望)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의 영토적 개념과 국민적 감정만 가지고 단순하게 논의할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학문적, 인종적, 연구적 개념으로 정의를 내리고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먼저 전제(前提)하며, 함께 전체 동이족이라는 큰 개념에서 먼저 인종적 연구를 하기를 충언드리는 바입니다. 먼저 역사적으로도 만주는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영토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륙이고, 일본 열도는 바로 금일 숭선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야의 역사, 백제의 역사가 일본의 역사에 대한 증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열도 역시 원초적으로 일본 스스로의 나라라기 보다는 동이족의 한 뿌리이며 같은 종족으로서 우리 조상들이 오랜 세월 가꾸고 다듬어온 우리 조상의 영혼이며 영토입니다.
이러한 것을 전제하지 않고 단순히 과거 일본제국의 36년간의 기간에 대해서만 감정적인 기분으로 부정하고 무시한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국적(終局的)으로 대한제국도 없으며, 궁극적(窮極的)으로는 우리 동이족의 역사 역시, 마치 망국적인 송파구청의 횡포처럼 없어진다는 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분명하게 대한제국의 대한정신(大韓精神)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최종적인 정의를 확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단체나 사회단체에서 절대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 단군교와 재건회만 유일하게 천명(闡明)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황당하고 웃긴 것은 바로 개판된 대종교(大倧敎) 단체입니다.
본인들이 본인들의 일본제국 시대 당시 대종교 역사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면서, 일본 얘기만 나오면 이상한 히스테리(hysterics) 반응을 보이고 마치 자신들만 혼자 독립운동을 한 것 같이 행동하는 것은 황당하여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고, 매우 상식적이지 않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는 바이며 자신들의 역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몰지각(沒知覺)을 대변(代辯)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부터 건국된 단군조선(檀君朝鮮) 이래 매우 광범위하고 매우 포괄적으로 민족적 개념을 가지고 동이족의 개념을 탄생시킨 것은 대종교가 아닌 바로 단군교(檀君敎)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교가 유교(儒敎)와 도교(道敎), 불교(佛敎)까지 아우르는 이상적 종교(理想的 宗敎)를 통해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의 여러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만주족(滿洲族)과 몽고족(蒙古族)까지 포괄하는 대동이(大東夷) 개념을 성립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족중 한 종족에 의해 과거에 안좋은 과거가 있었다고 하여 전체의 민족적 개념을 부정하고 무시한다면 우리 국민이 스스로 위대했던 대동이의 동이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 편협된 사고는 결국 현재 중화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China)측에서 언급하는 단순 소수민족(少數民族)인 조선족(朝鮮族)만 될 뿐입니다.
그것이, 과연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에서 말하는 대한정신(大韓精神)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제국이 복원된다면, 지금의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과 일본 열도는 대한제국의 강토라는 점을 확실하게 하고 영토 편입에 대한 노력과 협력이 절실하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하기는 북한조차 통일하지 못하고 있는 열등(劣等)한 대한민국 공화국에게 무슨 대안(對案)이 있겠습니까.
일본에 대해 대다수 한국 학계에서 언급하는 내용을 보면, 과거 삼국시대부터 발전된 일본과의 관계와 혈통적 관계에 대해 매우 단편적이고 단순한 접근만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국가 차원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면밀한 검토와 역사적 규명이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대해 물론 지금은 부정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임나일본부설이야말로 바로 조선과 일본이 하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일본측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신들의 임나일본부설은 말 그대로 억측(臆測)이 매우 강하고, 또한 매우 비상식적(非常識的)인 논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나 지역(任那地域)과 일본 지역(日本地域)이 원래 하나였다는 근본 논리(根本論理)는 유물과 고고학적인 자료가 많은 부분에서 증명한다는 점에서 한국측에서 논리의 역제안(逆提案)과 같은 재검토(再檢討)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 배경이 모두 가야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가야는 한반도에만 존재했던 연맹체(聯盟體)가 아니라, 일본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구성되어 있던 말 그대로 거대한 연맹체였습니다. 현재 중국 영토내에 남아있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서 언급되고 있는 임나(任那)가 바로 지금의 가야와 일본을 함께 아우르는 명칭으로 지칭되었음을 우리는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결국 가야와 일본이 서로 다른 지역과 나라가 아니라 한 지역이고 긴밀한 나라이며 연맹체였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지금 한국 학계에서는 가야가 연맹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수로왕(首露王)과 관련한 신화가 현재 존재하고 있고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변한(弁韓)과 가야에 대한 연구를 한다면, 지금 단순히 한국 학계에서 주장하는 연맹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편협하고 조금 모자란 사람들의 일견이라고 견지(堅持)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숭선전에서 모시고 있는 수릉왕(首陵王)인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시조 수로왕과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은 신라 유리왕(新羅 儒理王) 재위(在位)기인 19년에 금관가야(金官伽倻)인 가락국(駕洛國)의 북쪽 구지봉(龜旨峯)에서 하늘로부터 떨어진 6개의 금란(金卵)이 모두 변하여 육가야국(六伽倻國)의 왕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김수로왕은 그 가운데 하나이며, 변한에서 왕을 간(干)이라고 불렀던 시기 구간(九干)들이 김수로를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 이름을 가락국이라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바로 구간이라고 하는 아홉 명의 간들은 바로 가야로 발전하기 전 변한의 나라 임금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고, 여섯 개의 금란은 바로 변한에서 가야로 발전하여 남게 되는 육가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한이 발전하여 가야가 된 국가를 연맹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명확하게 전하고 있는 신화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지금의 가야 고분군들이 어떻게 현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실로, 어처구니 없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에 의하면 김수로왕에 대해서 천신인 이비가지(夷毗訶之)와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의 두 아들 중, 아버지를 닮은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大伽倻)의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고 어머니를 닮은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의 시조이신 김수로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야는 대한제국의 중심 단어인 한(韓)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즉, 원래 한의 상고음(上古音)은 gar로 재구(再構)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래 대한(大韓)이라는 이름이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명칭으로 대한(大韓)을 만든 것에서도 원래는 고대 가야가 한이라는 이름, 즉 바로 한국의 기원이 되는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허황옥의 출생지라고 알려져 있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경우에도 불교가 국교(國敎)가 되는 삼국시대(三國時代)와 삼국유사가 만들어졌던 고려왕조(高麗王朝) 시기까지 매우 강력한 불교의 영향으로 허황옥을 원래 일본이 아닌 불교의 원산지였던 인디아(India)로 지나치게 비정(比定)하고 지정(指定)하면서 마치 불교의 전래가 굉장히 오래된 것처럼 각색(脚色)하는데 이용한 측면이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22년에 연구된 바에 의하면,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의 고대인(古代人) DNA를 분석한 결과에, 지금의 가야 지역 특히 김해 지역의 조몬인(繩文人)의 혈통으로 여겨지는 조몬계(繩文人系) DNA가 다수 발견되고 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본다면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아유타국은 바로 일본의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이라고 보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고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시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 등의 차이로 인해,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문제 제기(問題提起)를 할 수 있지만, 일본의 야마타이국 기록도 가야와 마찬가지로 자체 기록보다는 간접적으로 전해진 기록을 그것도 훨씬 후대에 남겨진 것이 대부분인 점을 감안한다면, 후대에 남겨진 시기적 기록이 정확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으로 사료(思料)되며, 따라서 사료(史料)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시대적 배경의 의미로 참고하면 좋을 것 같고, 참고하여 시대적인 인과 관계와 고대 유물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판단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국가라는 것을 별도로 순수하게 존재했던 사실상 국가라고 일컫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고, 오히려 일본을 비롯한 가야시대에는 혈통적 관계를 보아도 가야의 국가 특히 금관가야라고 하는 큰 세력이 일본까지 진출하여 국가 경영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맞는 추론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갖게 합니다.
즉, 유전적으로 서로 같은 유전자 형질(the genetic signature)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같은 종족이며 민족이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배경에는 후에 백제, 신라와의 전쟁에서 가야가 가야 자체적인 힘으로 양국과 전쟁을 벌이고 진행한 기록보다는 오히려 일본 지역의 군대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은 점이 이러한 추론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당시의 전투에 참여했던 군인들의 실제 갑옷과 투구, 사용하는 무기 등을 보면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물론, 이러한 추론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가야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러한 견해는 지나친 억지에 가깝다는 견해다라는 것을 저희 재건회는 밝히는 바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대(古代)부터 비교적 중세(中世)와 근대(近代)까지 남겨진 수많은 동아시아 전쟁(East Asian War)을 봐도 단순히 전쟁을 돈 때문에 하였다는 추론은 지금 21세기(the twenty-first century)의 전시기였던 20세기(the 20th century)에 해외의 사례에서도 매우 쉽게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이 바로 해당 근거입니다. 하물며, 고대에 상대국으로부터 아직 화폐 단위(monetary unit)조차 정해지지 않은 시기에 돈 받으려고 전쟁을 했다는 추론이 어떻게 가능한지 쉽게 납득하기가 매우 어렵고, 무엇보다 중국(中國)과 한국(韓國), 일본(日本)의 고대 역사적 기록을 봐도 돈을 받기 위해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은 극히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국내 학자들은 떠드는 것일까? 너무 지나칠 정도로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는 소위, 용병(hired soldier)의 개념으로 보는 것 같은데, 순전히 억지(抑止)에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러한 사례는 백제 멸망기,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백강 전투(白江戰鬪)의 경우에 일본에서 지원하여 온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 지원병들이 용병으로 왔다는 기록은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백제와 일본이 서로 혈연관계에 의한 인척관계(姻戚關係)에 의한 지원이 더 정확하다고 보는 것이 정설(定說) 아닙니까?
지금까지 고대부터 전해지고 있는 목숨을 걸고 하는 전쟁의 경우, 특히 대동아지역(大東亞地域)에서의 역사에서는 민족적(民族的)인 관념(觀念)에서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특히, 혈연적(血緣的)으로 상호 깊이 연관(聯關)이 있을 때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제로 연구 결과에서도 보면, 가야인과 당시의 조몬인간 유전적 차이(遺傳的 差異)는 거의 없을 만큼 같은 종족의 개념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야의 전쟁에 일본인들이 참전한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적 관념을 넘어서는 매우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매우 직접적인 증거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며, 이러한 견해는 후에 가야가 신라에게 완전히 병합될 때 대다수 가야인들이 일본 열도로 도해(渡海)하게 되는 결정적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가야가 한반도에만 존재했다고 하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가야에 대한 연구와 논의도 매우 제한적이고 제대로 된 연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먼저 언급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일본 문화는 가야에서 발전된 것이 토대(土臺)가 되고 있고 여기에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까지 역사의 영향하에 지금의 일본이 점차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지금처럼 국내 공화국 학자들이 한국의 역사를 한반도에만 국한시켜서 정의하려고 하면 한계는 분명히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정확하고 사실적인 역사를 복원하는데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시작(始作)에 대해서도 명확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점을 우리 독자들께서는 깊은 이해를 해주시길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대한제국을 복원하고 재건하여 지금의 망국적인 공화국내 혼란을 극복하고 모든 국민이 신민(臣民)으로서 혜택을 받고 만주와 한반도, 일본을 아우르는 대제국(大帝國) 복원의 꿈을 하루빨리 건국(建國)의 기치(旗幟)로 높일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모든 백성이 함께 협력하고 합심하여 지리멸렬한 공화국 체제를 극복하여, 입헌군주국(立憲君主國)으로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데 함께 일조(一助)하시길 바랍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