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은 경기필 있는 방향은 쳐다보기 싫다고도 하고,
어떤 분은 구지휘자 없는 경기필은 이제 찾을 이유가 없다며 탈퇴도 하셨습니다.
저는 과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여러분들께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요...
분노한 팬들이 과거의 아름다운 하모니는 다 거짓이었냐며 떠나갈 때도
전 그 추억조차 부정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제가 존경하는 구자범 지휘자님이 외부에 나가 단원 여러분에 대해서도 '천사들'이라 표현한 만큼,
그 눈과 판단, 또한 2011년부터 경기필과 함께 해온 나의 경험과 추억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지휘자님의 영향력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손발이 맞는 좋은 짝이었던 경기필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므로...
얼마전 저는, 활동하고 있는 협동조합에서 문화예술제 사회를 맡았습니다.
그 자리에 조합원과 인연이 있는 전 국립오페라합창단원 분들이 오셔서 축하공연을 하면서
몇년간에 걸친 자신들의 투쟁상황과 처지를 간단히 설명하셨어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가 자연스러운 생협 안에서도
한동안 음악계를 시끄럽게 했던 그 사건에 대한 인지는 부족했던 것 같아
제가 몇가지 부연설명을 해드리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경험 또한 오늘 제가 경기도 문화의 전당으로 발걸음 하게 한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금 국립오페라단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국립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단체조차도 공중분해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요근래 미국이나 유럽에서 제법 규모 있는 연주단체들도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당할 도리가 없는지
해산하고 정리되고 있다는 소식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불황이 아니라도,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위정자가 집권할 때마다,
아니 그냥 정권이 교체되고 공무원이 바뀔 때마다
이 계통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생존의 위기를 겪어왔습니다.
의식주의 해결이 당면과제가 될 때, 문화예술은 사치품목으로 분류되어 늘 그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곤 합니다만,
그럴때 오히려 사람이 사람임을 잊지 않게 만드는 것도 문화예술입니다.
문제는 그 존재의 정당성을 어떻게 항변하고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겠지요.
음반으로 남겨진 수많은 명연주가 있고,
버튼만 몇번 누르면 세계적인 대가들의 연주를 즉시 즐길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저는 음악 또한 사람의 일이므로,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람을 통해 느끼게 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 장소, 그 사람들과 함께 한 현장의 살아있는 공감은, 다시 재생될 수 없는 귀한 경험이고
아직은 먼 얘기지만... 제 아이가 음악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보고 배우라고 데려갈 현장은 우리 땅에서 음악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공간인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 배우들이 완벽하게 멋있지만,
못났더라도 내 곁에서 살 부비고 사는 사람이 더 소중한 것처럼...저는 여러분들과의 관계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때 저 자신 예술가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그 어느 업종(?)보다 고학력자가 넘치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이상으로 꿈꾸는 재능과 현실의 능력,
밥벌이와 예술 그 사이 어디쯤 위치한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대한 애정은,
구자범과 경기필을 만나면서 이 발랄한 젊은이들이 계속 음악을 할 수 있게 지켜봐주어야겠다는 책임감으로까지 발전했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은 참 슬픈 날이었습니다.
연주회 전 홍보영상까지 틀며 '여러분의 곁에 다가가는 예술가가 되겠다'며 강조하는데...
제게는 오히려 여러분들이 그런 예술가가 되기를 포기한 듯 보였습니다.
전 세계에 범람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누구나 끄떡하면 들먹이는 그 놈의 '경쟁력' 타령을
어느새 여러분도 내면화시키셨군요.
미안하지만, 이제는 자신들을 도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단체에서 봉급을 받는
직장인 내지는 서비스업 종사자로서만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누군가 엄청 채근하였던지, 아니면 여러분 스스로 마음 한 구석 불편함을 느껴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외치는 말에 복창하듯 그 어느때보다도 관객과 약속을 지키겠다는 둥,
예술가임을 잊지 않겠다는 둥...반복되는 동영상 속 사진들은 아름답고 가깝게 느껴지기보다는
거리감을 확인시켜줄 뿐이었습니다.
이미 마음이 통하는 사이에는 그런 수식어들이 필요없잖아요.
새 단장한 로비며 그 어느 때보다 친절하고 밝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모습에서 '서비스'를 강화하기로 한 결심을 읽긴 했지만,
관객이 정말 원한 것이 무엇인지는 잊어버리신 듯 했습니다.
이윤 추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민간 단체 말고, 공공영역에서 예술단체를 운영할 때는
그런 민간 단체에서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담보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죠.
더군다나 여러분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손해 안보려고 쫓아낸 구지휘자님이 했던 중요 사업 중에 하나인
찾아가는 음악회. 교도소에서의 연주회 사진을 내보내며 '... (재소자들의) 슬픈 눈을 잊지 않겠습니다'란 자막이 나오는데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업에 대해 불만 가진 단원들이 많았다고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요?
시류에 편승하고 선정적인 황색 저널리즘에 야합하여 몰아낸 지휘자에게 사과라도 제대로 하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흉한 부분을 싹 가린 채 곱게 포장하여 내놓은 약속을 이제는 믿지 못하겠는 것은,
정부에 속고 살아온 국민이어서일수도 있지만,
예술가가 오롯이 자신의 정직한 노력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성취해야겠다는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버린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언필칭 '예술가'는 불편하기 짝이 없더군요.
그래서인지... 단말마 속 인간의 고뇌가 그려져야 할 R.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정화>는 풋내나고 겉돌았고,
협연자로 등장한 임현정 씨의 연주 스타일마저 경기필에서 '음악'이 실종된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뭐, '음악'에 대한 정의나 취향은 다 다르겠습니다만
1악장 도입부에서의 과한 페달링, 2악장에서 플룻은 플룻대로 해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하는
협연의 의미가 없는 기계적인 트릴-손목 스냅과 손가락 회전은 가공할만한 것이더군요- , 폭주하는 속도를 보면서
아무리 비르투오조 리스트의 곡이라지만 리스트의 악상은 사라지고
테크니션 임현정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강철 타건 피아니스트들 좋아합니다만, 오늘 임현정씨 무대는
나는 건반을 지배하고 희롱할 줄 안다는 나르시즘의 극치였습니다.
앵콜 첫 곡 드뷔시의 '달빛'이 그런 실망을 약간은 가라앉혀 주었습니다만
스스로 편곡했다는 '밀양 아리랑'마저도 '대화'가 상실된 음악을 마주한 참담함을 깊게 했어요.
예술가에게 적당한 나르시즘도 필요한 법입니다만,
이젠 프로그램에서도 연주에서도 관객에게 건네는 사려깊은 대화가 사라졌다는 것이
1부 끝난 후 인터미션 시간에 절 울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부 환상교향곡은 <죽음과 정화>보다 열 배쯤의 편차로 잘 연주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환상교향곡만 공들여 연습하셨는지요.
하필이면 작년 거의 이맘 때쯤 서울시향에서 성시연 씨가 이 곡을 지휘한 연주를 봤었기 때문에
지휘자가 밀어붙인 힘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드네요.
연주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열과 성을 다해 박수를 쳐주고픈 미덕이 이전의 경기필에서는 있었습니다만,
이젠 단원 여러분들도 미적지근하게 꼬리를 사리는 박수에만 만족하고 무대에서 퇴장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좁은 음악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서로를 위해가며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음악인들에 대한 지지자로 남고 싶었는데...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 속상한 마음에 잠이 오질 않습니다.
첫댓글 글 첫머리에서부터 상록수님의 깊은 마음들이 전해져 와 이 아침에 같은 마음으로 눈물흘립니다. 몇번을 되풀이 읽어보면서 주일날 아침에 그분을 그리워하며 기도하게 되네요.
지휘자님이 하셨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에 경기필 카페회원으로 지금껏 남아서 지켜보셨던 상록수님,
지휘자님과 경기필이 함께 했던 2년동안의 역사를 쉬이 버리지 못한 이유, 그마음을 저도 알기에 더불어 동일한 아픔으로 와 닫습니다. 애증이라고 할까요?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시며 그들의 음악을 공유하시면서 새로이 느끼게 되는 아픔들을 공유합니다.
들려오는 박수소리의 강도의 차이를...영혼없는 눈빛으로 하지만 독수리 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까요? 재능을 귀히 여겨 끝까지 음악팬심으로나마 지켜보겠노라 다짐하셨던 마음에 부디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지휘자님과의 2년동안의 역사속에서 그들이 얻은 것과 앞으로도 더 많이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그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순간에도 구지휘자님을 그리워하며 그분의 음악을 절실하게 간구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뿔뿔히 흩어져 있지만 그들이 다시 모이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속상하네요. 서로 위로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진짜 위로는 언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