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세미인 / 오탁번
2006년 3월 21일 오후 3시 조선시대 다식판 하나 사려고 앙성면 골동품 가게에 들렀는데 늙은 주인은 어디 가고 갓 스물 된 아가씨가 손님을 맞는다 볼우물이 고운 복숭아빛 빰과 몽실몽실한 가슴을 보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희고 미끈한 종아리는 왜무처럼 한입 베어먹고 싶었다 다식판은 보는 둥 마는 둥 가슴이 콩닥 콩닥 뛰었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4시 반 천등산 손두부집에 들렀는데 삼원색 요란한 월남치마에 발목 다 보이는 나일론 양말 신은 젊은 아낙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한다 브래지어 한쪽 컵이 망가졌는지 짝짝이 가슴이 봉긋봉곳한 주근깨도 예쁜 아낙의 얼굴을 보며 식사주문도 잊은 채 정신이 휑하니 아득해졌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6시 반 늙은 느티나무가 새잎을 피우고 저녁놀이 서녘 하늘 물들일 때 내내 방망이질한 가슴 진정시키려고 솔잎술 한잔 마시며 옛 사진첩을 그냥 뒤적거렸다 내가 서른 여섯 살 되던 가을 서른한 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술잔을 엎질렀다 골동품 가게 아가씨보다도 손두부집 젊은 아낙보다도 몇곱절 예쁜 젊은날의 아내가 방긋 웃으며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날부터 지갑 속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며 아침저녁 새새틈틈 보고 또 본다 어느날 다따가 절세미인(絶世美人)이 된 줄도 모르는 아내는 달팽이관이 고장 나서 메슥메슥 입덧하듯 토하고 있다 아아 아득히 흘러간 젊은 시절 아내가 아기 배고 입덧할 때 귤 하나 사다줄 생각 못했던 나를 호되게 벌주고 있다
2007년 1월 12일 오전 9시 새해들어 입덧 더 심해진 절세미인(絶世美人)의 손을 꼭 잡고 영하 12도 눈보라 치는 날 춘천 성심병원 이비인후과로 간다
장모님 / 오탁번
거실에서 자정까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침대위에 스탠드 전등을 켜고 잡지를 읽는 안경 낀 장모님이 계셨다.
아니 장모님 어쩐 일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 온 말을 황급히 삼키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모님이라니 장모님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천안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데 장모님이라니 아뿔싸
잡지를 읽고 있던 아내는 나의 착각이 대수롭잖다는 듯 웃고 말았지만 그날부터 우리집에는 참으로 이상한 평화가 도래했다. 아내와 다툴 일도 없고 깨 쏟아질 일도 없게 되었다 장모님 모시고 사는 사위의 예절만 있으니까 남편과 아내로서의 비장의 무기도 탄약이 다 떨어졌다.
아내가 스물 한살 처녀일 때 부산까지 가서 당신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주 난감해 하시던 스물 다섯해 전 장모님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 아내의 모습과 이토록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들의 가난한 사랑을 근심하는 어른들의 뜻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해운대 해변을 손잡고 거닐던 그 시절의 바닷물결이 어느 날 자정 무렵에 나의 집 안방 침대 위에까지 밀려와서 나를 벌주는 것인가
낯모르는 사람끼리 저녁 이슬 내리듯 새벽 안개 걷히듯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고 울고 웃고 비장의 무기 꺼내어 첩보전 국지전 전면전 치르면서 휴전 종전 항복 탈주를 밥먹듯 하면서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의 사회는 중성자 망원경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전자파들의 폭풍우일까 모든 시간과 공간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는 블랙홀의 무서운 운명일까
아내여 장모님이 된 나의 아내여 이제는 흰 뼈로 흔적만 남아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워진 그 옛날의 장모님이여 오늘 밤 나를 울리는 미운 아내여
할아버지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말복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달려오던 빨간색 자동차가 끽 멈춰 섰다 운전석 차창이 쏙 열리더니 마흔 살 될까 말까 한 아줌마가 고개도 까딱하지 않고
-할아버지! 진소천 가는 길이 어디죠?
꼬나보며 묻는다 부채를 탁 접으면서 나는 말했다
-쭉 내려가면 돼요. 할머니!
내 말을 듣고는 앗, 뜨거! 놀란 듯 자동차가 달아났다
우리나라에는 단군할아버지 말고는 '할아버지' 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유관순 누나 생각하면 나는 어린이집에도 아직 못간 앱솔루트 분유 먹는 절대적인 갓난애야!
'할아버지' 라니?
고얀년 같으니라구!
솔 잎 / 오탁번
추석 송편 솥에 넣을 솔잎을 따려고 떵거미가 질때 발소리 죽이고 뒷산에 올라가는 할머니 얼굴은 손자놈 콧물보다 진한 생의때 잿빛 머리칼은 한줌도 안되지만 소나무의 아픔은 옛짐작으로도 안다
해 넘어가고 첫잠든 소나무가 은하수 멀리까지 단꿈 꿀때 살며시 솔잎 따야 아프지 않다고 솥에 들어가도 뜨거운지 모른다 말없이 솔잎이 숨을 거둘때마다 젊은날의 사랑처럼 송편이 익는다
소나무의 슬픔과 솔잎의 아픔을 헤아리며 발소리 죽이시는 할머니는 그 옛날 단군 할아버지의 예쁜 애인 노루피 조금 마시고도 시셈만 하여 큰 꿈 이루는 단군 할아버지 애태우다가 이제는 훨훨 타는 마음도 식은 재 되어
수숫대처럼 가벼운 사랑만 남아서 당신의 옛날 애인 제사상에 올릴 손가락 자국 선명한 그리움 빚는다 가만가만 발소리 죽이며 솔잎이나 따는 다 저문 가을 들녁 홀로 바람에 흔들리는 수숫대 같은 서러움의 눈빛에는
푸르고 싱싱한 까칠까칠한 솔잎이 할아버지 한창때의 수염과도 같고 골이나서 일어서던 비밀의 가장자리 서로 맞부비며 엉킨 그것과도 같아
요즘의 연구과제 / 오탁번
요즘 나의 연구과제는 오탁번이다 오탁번의 역사인식과정에 대한 고찰 오탁번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물론 지금 다른 글을 쓰는 낯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풀도 아니다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작은 곤충으로 아주 희귀하게 발견된다 천둥산 박달재 오리나무 가지 끝이나 치악산 산매미 울음소리 사이에서 실잠자리 겹눈에나 잠깐 뜨인다 너무 희귀해서 곤충도감에 수록된 적이 없다 채집할 가치가 없으므로 곤충학자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눈깔과 뿔과 주둥이의 모양이 잠자리 같고 하늘소 같고 쇠똥구리 같다 다리가 땅을 파고 뛰기를 하는 데 알맞은 건 딱정벌레와 비슷하지만 갑옷과 고운 날개가 없는 걸 보면 동물 중에서 가장 종류가 많은 딱정벌레는 아니다
성충이 되어서도 유충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고 어둠이 풀섶에 내리면 화학적인 에너지를 완전히 빛으로 바꾸어 같은 종의 짝을 찾는 신호를 보내는 개똥벌레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불빛이 너무나 작아서 어느 여자도 어떤 학자도 눈치채지 못한다 쇠똥을 떼어내어 둥글게 다진 다음 식량으로 갈무리하면서 그 속에 알을 낳고 싶어한다 아 오탁번은 아직 채집되지 않은 너무나 작고 눈에 안띄는 벌레다 쇠똥 속에 집을 짓고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역사인식의 눈빛 개똥 같고 쇠똥 같은 불빛을 발산한다 내가 오탁번의 성충으로 직접 변태하기 전에는 그놈의 역사인식과정을 명쾌히 밝힐 실험도구가 나에겐 아직 없다
연애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받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 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다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싯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 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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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
첫댓글 거침없는 시인의 구사가 시원시원하고 일침을 주는것도 있고 가려운곳 긁어주는 느낌도 있고 읽으며 웃고 생각하고
조용한 아침시간 마음정화하고 갑니다.
장모님과 산다는 작가의 말처럼다른데한배속의 사람들만 닮을수있다는 신기한 예술작품인것 같거든요
지난번 시동생을 봤을때 제가 처음 시어머님을 봤을때의 모습이더군요
어찌나 어머님과 똑같던지 친지분들도 어머님같다며
세월이 많이 흘렀네 하였답니다
60억인구의 사람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