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수성당에 좌정해 있는 칠산바다의 여신.
칠산바다의 주요 해신(海神)은 개양할미와 그가
낳은 여덟 딸들이라 할 수 있다. 개양할미는 칠산바다의 여신을 총 지휘하는 으뜸 신격에
해당되며 어부들의 뱃길 안전과 풍어를 돕는 기능을 한다.
내용
격포리의 적벽강 절벽에 있는 수성당은 개양할미와 그의 여덟 딸이 좌정해 있는 당집이다.
변산반도 일대에서는 개양할미에 관한 신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다.
이 신화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개양할미는 수성당 옆의 여울굴에서 나와 딸 여덟 명을 낳은 뒤 일곱 딸은 각 도나
섬에 한 명씩 시집보내고, 자신은 막내딸과 함께 수성당에서 살았다.
수성당은 아홉 여신이 좌정해 있다 하여 구낭사라고 하였다.
그 후 구낭사는 어민들이 개양할미를 바다의 성인 같은 존재로 받들어 모셨다 하여 수성당(水聖堂)이라
하고 개양할미를 수성할미라 부르기도 하였다.
개양할미는 키가 어찌나 큰지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면서 깊은 곳을 메우고
위험한 곳을 표시하여 어부들의 안전을 돌보면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였다고 한다.
개양할미가 곰소 앞 바다의 ‘게란여’에 이르렀을 때 이곳이 어찌나 깊은지 개양할미의 치맛자락이
약간 물에 젖은 적이 있었다. 이에 화가 난 개양할미가 육지에서 흙과 돌을 치마에 담아 ‘게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도 깊어서 이 지방의 속담에 깊은 곳을 비유하여 말할 때는 “곰소 둠벙 속같이 깊다”라고 한다.
이 신화에 따르면 개양할미는 선원들의 뱃길 안전과 고기잡이를 돕는 칠산바다의 해신임을 알 수 있다.
개양할미는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면서 위험한 곳을 표시하기도 하고, ‘게란여’와 같이
깊은 물을 흙과 돌로 메우면서 선원들의 안전을 보살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신화의 내용처럼 개양할미가 낳은 딸들이 전국 각 도에 배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러나 개양할미의 딸들이 칠산어장의 해안·도서 지역으로 시집보내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죽막동 마을을 비롯한 변산반도 주민들은 개양할미의 딸들이 위도의 당집, 모항(띠목) 당집, 곰소 당집,
고창군 동호리 영신당,계화도 당집, 돈지 당집, 조포(새포) 당집에 좌정해 있다고 한다.
이들 여신은 칠산바다를 총괄하는 개양할미의 지시를 받는다고 한다.
지역사례
개양할미 신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은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의 죽막동 마을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수성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개양할미와 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수성당은 건축면적 13㎡ 단칸 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며, 1974년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이 당집은 1804년(순조 4)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지만 원형이 소실돼 정확한 건립 시기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수성당 상량문에 “도광 삼십년 경술 사월이십팔일 오시 이차상량(道光 三拾年 庚戌 四月二十八日
午時 二次上樑)”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수성당은 1850년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수성당 근처인 죽막동 제사 유적에서는 백제시대 이후부터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해양제사 관련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개양할미에 대한 제의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1950년 전까지만 해도 수성당제는 많은 선주의 시주로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성대하게 모셔졌다.
수성당제는 1960년대 중반에 중단되었다가 2004년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최근에 복원된 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모셔지며, 제사는 유교식 방식과 무속식 방식이 혼합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마을 대표자로 선정된 제관들이 당집 안에서 축문과 함께 유교식으로 제사를 올리고 나면 외지에서
초빙된 강신무와 민속예술연구원 소속 예술단이 당집 바깥 공터에서 바다를 마주보며 용왕굿을 연행한다.
적벽강 절벽 위에 있는 수성당은 부안군 위도면 대리마을의 당젯봉 꼭대기에 있는 원당과 일직선으로 마주
보고 있다. 과거에는 이들 지역에서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풍어와 안전을 비는 당제가 많은 선주의 참여
속에 단골의 주관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이처럼 당제가 활발하게 연행된 것은 위도와 변산반도 사이의 해역이 조기잡이 어업의 중심 해역이기 때문이었다.
부안군 줄포만 일대와 위도면은 일제강점기 때 조기 파시가 설 정도로 대단한 조기 산지(産地)였다.
특히 위도는 그물코마다 조기가 가득 잡힌다는 황금어장으로 유명하였다.
이런 까닭에 전국 각지의 어선들이 앞을 다투어 위도 지역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도와 격포항 사이에 있는 임수도는 조류가 심하고 물의 흐름이 매우 복잡하여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위험 지역이었다.
격포항은 조선시대 때부터 격포와 위도 사이로 배가 항해하는 중요한 관문이었으며, 고기잡이 어선은 반드시
이 해문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칠산어장 어민들은 수성당의 개양할미에게 절대적으로 의탁하여
풍어와 뱃길 안전을 기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업이 성한 당시에는 외지의 어선들조차도 격포 수성당에 이르면 선원들이 바닷물에 목욕을 하고 수성당을
향해 고사를 올렸다고 한다.
격포 수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위도면 대리마을의 원당도 개양할미와 그녀의 딸이 좌정해 있는 당집으로 추정된다.
당집 내부 정면 벽에는 원당(元堂) 마누라, 본당(本堂) 마누라, 옥저부인, 애기씨 등의 당화가 걸려 있다, 이 가운데
원당 마누라는 개양할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본당 마누라는 개양할미가 시집보낸 딸이고, 옥저부인과 애기씨는
개양할미 딸의 후손인 것으로 추정된다.
개양할미가 여덟 딸들과 함께 수성당에 좌정하였듯이 위도면 대리마을의 원당에서도 개양할미의 딸들이
다시 가족을 이루어 해신으로 좌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위도면 대리는 정통 세습무의주관으로 당제가 전승되고 있는 칠산어장의 유일한 마을에 해당된다.
당집은 마을 뒷산인 당젯봉에 위치하며, 대상 신격은 대부분 여신이다.
198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3호’로 지정된 이 마을의 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모셔진다.
당굿과 용왕굿은 이 마을 단골인 조금례가 주도해 왔으나 현재는 신안군 비금도 단골인 유점자가 초빙되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기타
격포 수성당은 칠산어장에서 가장 많은 여신을 모신 당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수성당 내부 벽면에는 용왕, 개양할미와 여덟 딸들, 산신, 여덟 아가씨들, 장군신 등 5점의 당화(堂畵)가
걸려 있다. 이러한 당화는 김동식에 의해 2004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수성당이 구낭사(九娘祠)라 불린 점으로 보아 과거에는 개양할미와 여덟 딸만을 그린 당화가 전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많은 신격이 첨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개양할미와 딸들을 그린 당화는 개양할미가 막내딸을
안은 채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앞과 양옆으로 일곱 딸들이 앉아 있는 형태이다.
마치 가족사진을 찍어 벽에 걸어 놓은 것처럼 개양할미와 여덟 딸들을 그린 당화가 수성당내부 정면에 붙어 있는 것이다.
현재 주민들은 수성당(水聖堂)을 구낭사라 부르고 있고, 또 실제 당화에는 아홉 여신이 그려져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성당에 좌정해 있는 해신은 아홉 여신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화에는 개양할미와 막내딸의 모습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인다.
덩치 큰 거구의 개양할미가 그림 중앙에 앉아 있고 그 품속에 막내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양할미와 막내딸이 수성당에 거주하는 주요 신격임을 시사한다.
수성당은 칠산어장의 당집에 좌정한 여신들의 본가(本家)이자 원당이라 할 수 있다.
수성당의 주요 신격이 개양할미와 막내딸임에도 불구하고, 수성당에 개양할미 가족을 모두 좌정시킨 것은 수성당이
시집간 딸들의 본가이자 원당임을 암시해 준다.
개양할미가 딸네 집을 왕래하고 딸들이 개양할미의 지시를 받는다고 보기 때문에 개양할미는 시집간 딸들을 총 관리
하는 으뜸 신격이고, 개양할미가 거주하는 수성당은 칠산어장 당집의 총 본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서해안조기잡이와 어업생산풍습 (주강현, 역사민속학 1, 역사민속학회, 1991)
서해안 해신 신앙 연구 (송화섭, 도서문화 23,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4전라북도 전설지)
-글 출처:한국민속신앙백과사전
복원된 수성당과 안쪽의 무신도
그리고 수성당 옆의 제단들.
- 비교할만한 마고신화. 지리산 노고단의 마고할미
지리산 노고단은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다.
노고단이라는 명칭도 지리산 신령인 선도성모를 마고할미로 존칭하며 부르게 된 데에서
유래했다.
마고할미는 원래 반야봉에 얽혀 있는 전설과 관계가 있다.
지리산 산신 중 여신(女神)이자 천신(天神)의 딸이었던 천왕봉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며 8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
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말았다.
그렇게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그것이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고 말했다.
또한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소백산 단군성전 약사암 에서~~~~~~~~~~~~~~~~~~~~~산중:올림
첫댓글 옛날엔 바다가에 한많은 여인들이 만이있언나봐요 감사합니다
성불하소사
뎃글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저녁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