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5:10]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 이 두번째 인용문은 신 32:43의 모세 노래의 마지막 절 내용으로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특히 본문은 70인역의 문자적 인용으로 헬라어로는 '유프란데테, 에드네'이며 '즐거워하라, 이방인들이여'라는 의미이다.
즉 이방인들의 회심을 예언한 말씀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방인들의 지위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참할 수 있을 만큼 높아진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맛소라 사본은 70인역과는 약간 다르다. 맛소라 사본에는 "그의 백성을 찬양하라,
오 너희 열방들아"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히브리어 '암모'가 원문 그대로인가는 의문이다. 아무튼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력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과 함께'(투 라우 아우투)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매우 적대적이고
감정적인 히브리어의 의미를 보다 완화시켜 이방인도 수용하는 우주적인 의미로 변화시켜 주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헬라어의 의미를 자기 자신의 신학에 적용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과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지금은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된다는 그런 신학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즐거워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롬 15: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 세번째 찬송시는 시 117:1의 인용 구절로서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열방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송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열방들아'란 말은 모든 이방 민족들을 지칭하고 '모든 백성들아'란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된 은혜를 입은 모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는 이방인들이 유대 전통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대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주를 찬송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오늘날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예배 드리고 있는 사실에서 넉넉히 입증되고 있다.
[롬 15:12]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 - 이 구절은 사 11:10 말씀의 인용이다. '이새의 뿌리'(해 리자 투 옛사이)는 왕적 메시야를 가리키는 칭호로서 곧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성경은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날 것을 예언하였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의 육적 계보를 형성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하고 계획해 놓으신 것이었기 때문이.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유대고을 중 가장 작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지만, 그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약간의 차이를 두어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소망을 두리라' 대신에 '돌아오리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에 있어서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그에게 소망을 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소망'은 헬라어 '엘피우신'으로 본절에서는 기쁨과 확신으로 구원을 소망하며 기다린다는 뜻을 가진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두 번이나 확증하고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서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다스릴 분이시라는 점과 또다른 하나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의 하나님 - 하나님은 믿는 자의 소망의 근원이시고 소망의 유일한 대상이시다. 성경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허락하신 미래를 확신한 가운데서 기다리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진다. 그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이루어지는데, 단지 구약과 신약에서의 차이점은 구약은 앞으로 오실 자를 소망하고, 신약은 오신 자에 대한 소망,
그리고 다시 오실 자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본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기쁘고도 확실한 기대와 간절한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다.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 본절은 바울의 기원과 권고가 포함된 축도 형식으로서 미래에 대한 소원을 나타내는 희구법이 사용되었다. '
기쁨과 평강'의 헬라어는 '카라스 카이 에이레네스'로서 기쁨은 주 안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결과이며, 성령의 열매이고 '평강'은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되어지는데 실제로 생명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평강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는 그의 구원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내적인 평온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믿음 안에서'의 '믿음'은 교회의 조화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토대가 되면 모든 인간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절은 앞에 나온 구약 인용문들의 요약이다. 기쁨과 평강의 근거가 믿음 안에서 시작된다면 소망 역시 믿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과 소망을 충만케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이다. 여기서 '~으로'라는 전치사 엔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라는 위치와 장소를 나타내는 처격임과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라는 도구적 의미를 지닌다. '능력'은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힘, 권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성령께서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소망을 일으키는 경이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롬 15: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내 형제들아 -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좀더 부드럽고 다정한 호칭을 사용하여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다. 로마 교인을 향한 애정어린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 당시 로마의 성도들에게 약간의 불화와 갈등은 있었지만(14장) 전체적으로 볼 때 로마 교회는 신앙의 성숙한 면모가 가득했다.
'가득하고'는 충분히 가득찼다는 말로서 1:29에서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찼다는 말을 했을 때도 사용된 단어다. '선함'의 헬라어는 '아가도쉬네스'로 여기서는 선천적 기질로서의 '선함, 착함'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새사람의 인격의 덕성 및 도덕적인 성숙함'을 의미한다.
'모든 지식'은 로마의 성도들이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로서저희에게 필요한 구원의 지식이 다 있어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고전 8:1, 7, 10, 11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구원에 관한 지식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나타내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했지만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과 계획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 로마의 성도들이 갖춘 성숙한 신앙의 또다른 면을 말하고 있다. '서로'는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즉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킨다.
저희가 이렇게 서로 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선한 마음과 충분한 지식이 있어서 저희 믿음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직 방문하지 않은 로마 교회는 목회자들이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항상 피차 권면하여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확신하노라 - 헬라어 성경에는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가 삽입되어 '나 자신도 확신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증거와 평가를 떠나서 바울 자신의 깊은 확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2) 어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확증하고 확신한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여기서 위의 두 견해가 다 작용한 가운데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대한 확신을 선언했다고 보아도 크게 잘못됨은 없겠으나 두번째 견해가 좀더 자연스런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확신하노라'가 수동 완료형이므로 자신의 추측에서라기 보다는 로마 교회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확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선언이 믿을 만한 증거에 바탕을 둔 확신이 아니라면 이것은 마음에 없는 칭찬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말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