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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2일
말씀: 마태복음 5:14
제목: 우리는 빛입니다.
악은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물론 사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악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창조로 말미암아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의 부재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멍이 나면 그 구멍을 누가 만들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구멍이 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니까 그것이 생길만한 다른 존재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에는 박테리아로부터 구멍이 생길 수 있고, 흙에는 홍수가 나서 구멍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악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이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에 만족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악이 있느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 한 가지는 선한 것을 선택할 자유를 가진 피조물이었습니다. 진정한 선택을 가지기 위해서는 선한 것 이외에 선택할 다른 것을 허락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것을 유지하는데, 선함을 증명하는데, 그 증명과 유지를 어떻게 하느냐하면 선한 것을 선택해하는 것으로 증명하고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들이나 사람이 선한 것이나 선하지 않은 것 (악)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차가운 것이 존재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답은 틀린 것입니다. 차가운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의 부재가 차가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둠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입니다. 악은 선한 것 부재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말한다면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단지 선한 것의 부재를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면 악을 없애기 위해 자유권, 자유의지를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섬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없어서 자녀를 기계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무슨 감정이 있고 감동이 있고 웃음이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강아지를 키우더라도 그 강아지가 선택해서 꼬리를 흔들고 반기고 말도 잘 듣고 그런 것 때문에 키우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권에 의해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교통하며 자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선택권에 의해 악이 부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악이 세상에 들어왔고 고통과 죽음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그냥 내 버려두셨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을 이해한 것 같은데 하나님의 목적은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자주 말씀드린 부분이지만 우리교회 장소가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곳에서 건축을 하거나 건물을 매입하기 위해 무단히도 노력했습니다. 계약을 했는데,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되는 바람에 세종시 공약 때문에 땅값이 올라서 위약금 물어 줄 테니까 계약 해제하지고 연락이 오는가하면 땅을 계약하기 위해 주인을 만났는데 갑자기 욕심이 생겼는지 땅값을 올리는 경우고 있었고, 또 땅을 매입하기 위해 갔더니 다른 부동산에서 이미 계약이 되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이곳에 뜻이 있는 모양이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건축을 했습니다. 그른데 계약금을 주었을 때도, 땅주인과 구두 계약을 했을 때도, 이곳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이끄셨구나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교회를 짓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곳으로 이전해 올 때 하나님을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하나님이 떠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결정하고 또 그렇게 인도하신 거 같아서 그 길을 갔는데 결과는 엉뚱한 곳으로 이끌 때가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거룩하고 완벽하며 결국은 그분께 영광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자유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되어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악을 용납도 하시고, 방관도하시고, 사용도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악한 자들의 행위에 하나님은 용납하시는 상황으로 이해할 때가 현실적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첫째로, 용납하시고 방관하시는 것이 결국 죄인들을 심판하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성품을 다듬음으로 악을 사용하기도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욥기는 사탄이 욥과 그의 가정을 파괴했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욥이 얼마나 다듬어졌느냐하면 귀로 듣든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은혜로 성장했습니다.
사사시대를 보십시오.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서 꿀을 먹어야하고 젖을 먹어야하는데 그렇게 젖과 꿀을 먹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 분만을 경외하며 예배를 드려야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젖과 꿀을 먹고 배부르면, 그들이 부유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나 죄악 된 삶을 살고 우상을 섬기며 자기가 주인이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나라가 이스라엘을 침입해서 잔인하게 이스라엘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끌고 가고 하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젖과 꿀이 있는 땅에서 젖과 꿀을 먹지 못하는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지요. 그러다가 또 젖과 꿀로 배부르면 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죄악 된 삶을 선택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웃나라가 또 쳐들어 와서 그들을 무참히 짓밟고 노예로 삼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또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에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이렇게 사이클이 6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데 이웃나라를 사용했고 악을 동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나타나지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으로 또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영역으로 이끌기 위해서 악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 말은 악을 지배하는 사탄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고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결국 선의 부재가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악이 찾아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지구촌은 IS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연쇄테러가 저번 주 금요일에 발생했는데 이어서 어제는 서아프리카 말리 수도의 고급호텔에 20일(현지시간) 알카에다 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슬람 무장단체가 난입해 외국인 투숙객과 호텔 직원 등 21명을 사살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고생 두 명을 30대 남자가 살해했습니다. 요즘은 이유가 있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죽이며, 또한 이유 없이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런 악하고 잔인한 삶을 왜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가? 왜 하나님은 이렇게 악을 창조하셨는가? 악을 창조한 하나님이면 하나님도 악하다는 뜻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을 믿는 우리는 명확히 보아야합니다.
세상은 자꾸 악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죄악을 선택하고, 악을 공유하고 세상을 악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악한 세력사탄이 하는 모든 계획은 바로 파괴입니다. 가정의 파괴, 인간 생존의 파괴, 그리고 국가의 전복은 사탄의 목적입니다. 이런 현실적 상황에서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될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세상이 악하면, 왜 악하게 되었느냐하는 질문을 그리스도인들은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악은 빛의 부재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빛 되신 고난의 종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빛으로의 삶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 빛 된 삶은 세상에서 드러나는 삶이요, 구별된 삶입니다. 그리고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 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감추어질 수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추어져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빛 된 삶을 살지 않고 있다는 증거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이 득세하는 상황이 된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여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지를 아셔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언제나 악이 존재하며 그 죄악이 늘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두 번째로, 이 악을 하나님이 용납하거나 방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데에는 고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고통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났기 때문에 고통의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고 이제는 하나님의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살아가되 하나님은 심판의 결과 아래 인간을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율 안에 심판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바울이 서신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5:12-19까지입니다 그런데 19절만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는 죄인 된 삶을 살아가며 결국은 심판에 이릅니다. 로마서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이것은 타락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고 그 길을 걸어 걸어가는 자는, 즉 순종하는 삶 가운데 구원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자율성 안에서 끊임없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자기 안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육체의 소욕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면역성을 키워야합니다.
여러분 면역성을 키위기 위해 즉,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고 그 방법에 여러분들이 순종해야합니다. 수요예배, 새벽기도, 중보기도 등의 영적인 모임은 면역성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악에 물들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라에 앉지 않기 위한 면역성이 얼마자 중요한지 아셔야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빛 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면역성을 키우는 일에 자기 삶의 가장 중심에 두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이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주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 바깥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모였습니다. 누가는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의 모임이 구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 구절의 ‘집에서’가 헬라어는 ‘카트 오이콘’인데요 전치사 ‘카타’는 ‘다른 집으로’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의미로서 어떤 집들 중에 한 집에서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런 모임이 초대교회성도들에게 면역성을 증강시키는 핵심 된 신앙의 자세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모이고 집에서 가정교회를 통해 강대상에서 선포된 말씀을 가정에서 온 가족이 모여 그 말씀을 적용시키고 그리고 이 말씀이 세상에 흘러가는 중보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적 면역성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죄악 된 세상에서 승리를 위한 것이며, 어두움의 세상에 빛의 삶을 살아가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으며 그 분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필요를 채워나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세상에는 생명의 길이 있고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신 길, 그 길을 걸어감으로 빛 된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저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합니다.
세 번째로, 이 악한 세상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을 용납하고 반관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심판을 보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보류하고 있습니까? 아직 생명을 구원할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서입니다. 믿습니까?
세상에서 악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은 영적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며,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를 보내셔서 감당해야할 목적된 삶을 그리스도인들이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그 사역을 왜 하는지에 대해 침례요한의 제자에게 설명하면서 당신의 사역을 분명히 했습니다. 마태복음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지금 어두움이 물러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악한 세력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이 떠나가고, 악한 것이 떠나가는 증거가 바로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는 것으로 지금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있음으로 악한세력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는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지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해 어두움이 물러가고 악한 것이 물러가고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야하는 사명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저번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해 느끼는 것이 바로 ‘상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향한 기대가 있습니다. 사랑하며, 용서하며, 이웃을 섬기며, 이 세상 것으로 준비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그 나라를 준비하는 자로 서야 되는데, 사실 여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의 이미지가 이미 상실된 상황에 이르러 이제 오히려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마는 의사가 볼 때 목사나 장로들이 죽음에 이르러 살려고 몸부림치며 안달을 하는 모습을 보는데, 어떤 기독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 갑니다.’ 이런 말을 믿을까요? 법원에서 비리와 사기와 불법을 자행하고 재판을 할 때면 그렇게 자기변명으로 포장을 잘 하는 기독인들을 보는 법원 종사자들에게 ‘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 말이 저들에게 파고들 수 있을까요? 구청 직원이 기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지역아동센타, 노인대학, 어린이집 등에 비리와 불법이 성행하는 상황을 보고 있는데,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얼마나 진실히 받아들일까요? 이웃이 볼 때 맨 날 싸우는데, 동네에 협조도 하지 않고, 약삭빠르게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 말에 얼마나 호응을 할까요? 직장에서 맨 날 지각하면서 출석부에는 정시 출근으로 도장을 찍고, 행사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지고 동료 사원에게 불친절하고,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점심시간에 기도모임을 한다고 하면 그들이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볼까요? 바로 ‘상실’입니다. 기대에 대한 상실, 기독교 이미지에 대한 상실, 그래서 기독교는 이기적이며 자기들만 알며 끼리끼리 모여 자기들의 복을 구하는 종교집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역할을 못하면 기독교가 사명의 삶을 살지 못하면,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에서 떠나면 악이 성행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서구율럽에서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아니 전 세계가 이렇게 잔인하고 추악한 범죄가 난무하는 것은 기독교가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악과 함께 어떤 일도 도모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온전히 찾고 구하고 갈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당당하게 구하고 그 구하는 삶을 통해 다윗이 승리하는 삶을 살았음을 우리는 새벽마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직함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악과 함께 도모하는 일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청문회를 봐도 우리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고 생명에서 떠나 악이 점점 이 세상을 덮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가난한 삶에 기독교의 해답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는 가난한자에게 복을 달라는 말이 많습니다. 왜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채워주시지 않으면 살 수없는 존재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가난은 히브리어 '아나임'('anaim)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깁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시 37:14; 40:17; 69:29; 잠 16:19)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출 22:25-27; 23:11; 레 19:9-15)
그래서 가난함이란 첫째, 가난함이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의 세력과 목표를 도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나의 필요를 채우겠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그 가난함이 거룩함으로의 삶이요, 겸손함으로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삶이 빛 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함이 거룩함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가난함이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채워나가며 모든 삶의 영역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적 인식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마태복음은 표현하고 있지요. 거짓과 욕심과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가난함은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이며 그 채움이 세상에서 악을 이기는 무기가 될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는데, 유리컵이 보여요. 그 안에 여러 가지 잡다한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것을 담으려고 하는데 그 컵이 너무 잡다한 것으로 채워져 있어서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보고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난함은 세상의 허망하고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신비한 은혜를 채우는 그릇이라고 믿습니다. 네 번째, 가난함은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갈망하면 세상 것은 내려놓게 되어있고, 검소한 삶, 소박한 삶,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으로 빛으로의 삶이 이어지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가는 중보자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선이 악을 이기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웃에서 나타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