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약사암
일 시 : 2023.05.25(목)
참 가 : 강공수 김재일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이용환 장휘부 정원길 등 9명
불 참 : 김상문(통신대 시험공부) 김영부(함평 농사) 윤정남(부인 병원 입원) 등 3명
회 비 : 90,000원
식 대 : 63,000원(애호박찌개 1, 김치찌개 2, 장어탕 6 의 72,000원 중 리정훈 선배의 막걸리 3병 9,000원 공제)
금일 잔액 : 27,000원
이월 잔액 : 498,000원
총 잔액 : 525,000원
부곡정에는 나종만과 박남용이 먼저 와 있었다. 이어서 강공수 윤상윤 이용환 김재일 등이 도착하여 7명이 모였다.
윤상윤으로부터 그의 내자의 경과를 들었다. 다리에서 철심을 빼내버려서 철심으로 인한 아픔은 진정되었는데, 확실한 원인을 알 수 없는 후유증으로 통증이 가시지 않아 걱정이라고 하였다.
10시에 부곡정을 나와 산행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윤정남이 헐레벌떡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들고 온 비닐봉지를 강공수에게 건네주고 되짚어 다시 아내의 병실로 돌아갔다. 지금 아내의 병세가 매우 급박한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공수가 아침에 전남대병원에 입원해 있는 윤정남 아내의 병실을 방문하였는데 그 답례로 윤정남이 빙그레 회사의 아이스크림 떡붕어 <싸만코> 10개를 사 온 것이다. 7명이 한 개씩 먹고 3개가 남아서 올라가다가 13회 선배들이 눈에 보여서 그들에게 주었다고 나중에 이야기 하였다. 13회 선배 중에 리정훈 선배는 같은 식당인 부곡정에서 식사하고 나가면서, 간혹 막걸리 2~3병을 우리에게 주고 간 적이 있는데 그렇게라도 조그만 보답을 하였으니 참 잘 된 일이라 생각되었다.
나종만이 오늘 일찍 집에서 나오게 된 것은, 요즘 레바논으로 선교활동을 갔던 막내딸 4식구가 집에 와 있는데, 그들이 외출을 하게 되면서 자기도 같이 집에서 나온 것이 일찍 오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딸네 시댁이 유가(儒家) 집안이었는데 의사였던 3째 아들이 선교사가 되어 외국으로 의료선교를 다니니까 사돈네가 기독교에 귀의하였는데, 딸네 친정아버지인 나종만은 전혀 기독교에 눈길에 주지 않으니까 딸네가 서운해 하지만 자기는 지금도 전혀 교회에 다닐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나 역시 철저한 유가(儒家)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내 스스로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서 사서(四書 : 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일독(一讀)하면서, 나의 학습 방법이 먼저 예습(豫習)을 한 다음 강독(講讀)을 하였으니, 실제로는 이독(二讀)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삼경(三經) 중에 시경(詩經)과 서경(書經)도 거의 읽었기 때문에 나 역시 유학(儒學)에 경도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내 부모형제들이 기독교를 종교로 삼고 있지만 나는 기독교에 귀의할 마음이 전혀 없다. 내 부모님께서 기독교를 종교로 삼아 사시다가 돌아가셨고, 내 형제들 대부분이 기독교를 종교로 삼아 살고 있지만, 나는 전혀 기독교에 귀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군(軍)에 입대하기 전, 2년 반 동안 벌어들인 수입과 군 제대 후 5년 동안의 월급 등 총 7년 반 동안의 모든 내 수입은 내 어머니가 관리하시다가,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사이비)에 고스란히 바쳐졌다. 그렇게 하여 교회는 내 인생의 물꼬를 확 바꿔놓았다. 종교가 인간의 삶에 안식을 주고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미덕(美德)으로 역할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악덕(惡德)으로 작용하였다.
1961년 사범학교 졸업으로부터 1971년 2월까지 만 10년 동안 삶을 영위해 오면서, 꿈꾸고 목표로 삼았던 모든 것이 거기에서 정리되어 버리고, 나는 1971년 3월 전라남도 교육청, 교원 정기 인사이동 때, 전남 보성에서 광주시내로 발령을 받아, <광주광천국민학교>에서 내 인생을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인생은 제2의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대학교 법정대 2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여 경제학사가 되고,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일반사회과를 수료하여 교육학 석사가 되었다. 그리고 1978년 중등학교(보성 회천중학교) 교사로 진출하여 2005년 2월 정년퇴임(운림중학교)을 하고 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와는 완전히 유리된 삶을 살아왔다.
나의 사범학교 동창생 중에 임득순(任得淳)이란 친구가 있다. 그는 모태(母胎) 신앙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일찍 홀로 되어 청춘 과수댁이 되신 어머니께서 남편을 잃은 후 실의의 세월을 보내시다가 사전(私錢)으로 <오산마을>(광산군 하남면 오산3리)에 교회를 세우고 목사님을 모셔다가 독실한 신앙생활을 해 오셨는데, 내 친구 임득순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고 술 마시고 담배피고 오만 잡스런 삶을 살다가 퇴직 무렵 어느 날엔가 장발장이 참회의 순간을 맞은 것처럼, 그에게도 참회의 순간이 닥쳤는데, 어느 날 저녁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면서 온몸이 떨리더니 순간적으로 기독교인으로 변화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교회를 가면 어느 교회를 다닐 것인가? 탐색하려고 몇 달 동안 여러 교회를 섭렵한 결과 마음에 드는 설교를 하는 김유수(金流水) 목사의 <월광교회>(광주 서구 화정 4동 소재)를 선택하여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퇴직을 한 상태인 그는 그 때부터 교회의 일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찬양대에 들어가 찬송가를 부르고, 더 나아가 찬양대를 지휘하더니, 교회업무를 돕는 등 목회자도 아니면서 목회의 일에 올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루는 나를 방문하여 같이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하였다. 찬송가집과 성경책도 새로 구입하여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나는 그와 함께 월광교회에 직접 가서 일일 체험도 하였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친구들 중에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내 대답은 만약에 교회를 나가게 된다면 자네의 권유를 받아들이겠지만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약사암은 모래(5월 27일)가 석가탄일이어서 준비를 하느라 스님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불사에 사용할 기와를 실은 트럭이 기와를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석간수를 바가지에 받아 크게 한 모금 마셨다.
내려오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5월 22일부터 시작한 <맨발 걷기>를 해 보자고 제안 하였더니 이구동성으로 모두 찬동하였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이 아닌, 흙을 밟으면서 걸을 수 있는 <새인봉 오르는 능선길>과 <편백나무 숲길>을 번갈아 다니기로 하였다. 듣고 있던 윤상윤이, 맨발 걷기의 선험자(先驗者) 들이 당부한 파상풍 예방주사를 먼저 맞아야 한다고 경고(警告)를 하였다. 그는 친절하게도 예방주사를 맞들 수 있는 병원(건강관리 협회, 가정의학과 의원)과 비용(23,000원 내외)까지도 미리 파악하여 알려 주었다.
음악 정자에 도착하였더니 김재일과 정원길이 미리 와서 자리 잡고 있었다. 기습곡(旣習曲)으로 <모래성>을 불렀다. 오늘은 최순이 작사 박태준 작곡의 <오빠 생각>을 배우기로 하였다. 당시 작사가 최순이는 12살의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었고, 방정환이 발간하던 《어린이》잡지에 <오빠생각>을 투고하여 입선한 동시였다. 최순이는 지금 수원성의 화홍문(華虹門)의 아래 동네에 살았는데 8살 연상의 오빠였던 최영주(본명 최신복)와의 애틋한 약속을 동시로 썼다고 한다. 집을 떠났던 오빠 최영주는 서울에서 방정환 마해송 윤석중 등과 <색동회>를 만들어 아동문학 활동으로 일제에 저항하였으므로 요시찰인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였던 것인데, 여동생은 그것을 알 수 없었으니 오빠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서 이 동시가 태어난 것이다. 가수 이선희가 불렀던 노래에 맞추어 우리도 <오빠생각>을 따라 불러 보았다. 이 노래는 첫 소절의 둘째 마디(뜸북새)와 둘째 소절 둘째 마디(뻐꾹새)를 주의 깊게 불러야 하는데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부르는 사람이 많다. 지도하는 사람도 그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강공수가 윤정남에게 연락하더니 그 동안 생사의 기로를 오락가락하던 부인이 운명(殞命)하였다는 부음(訃音)을 알렸다. 우리는 내일 저녁 5시에 <스카이장례식장>에 모여 합동 조문을 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만사(輓詞)
꽃다운 나이에 윤씨 가문의 한 살 연하의 신랑에게 시집와서
철없는 남편에 9남매의 종부로 특이한 시집살이를 하시더니
늘그막에 지병을 얻어 하루도 병원 신세를 안 진 날이 없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시더니
이제야 편안하게 발 뻗고 기약 없는 잠을 이룰 수 있게 되어나 봅니다.
당신께서는 나와 함께 이야기 하며 밥을 먹었던 몇 안 되는 친구의 부인이었습니다.
이백 명이 넘는 동창생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지 않으니
애통하는 마음 어찌 크지 않을 수 있겠나요!
집안 살림 걱정, 자식 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부디 편히 잠드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
최신자 여사님!
안녕히 가셔요!
첫댓글 밝메 선생님은 나의 대부님이시고, 사모님이신 최신자 여사님은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척(외손)으로 국민학교 후배,.
중학교동창. 친구의 아내. 집안의 대모님으로 한 생애를 멀리서 바라보며 살아 오신 분이셨습니다.
어릴 적엔 국가 보훈 대상으로 연금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 또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집에서 또 남다른 인연을 맺고 살아 오셨는데
10여년동안을 지병으로 고생을 하시더니 이렇게 갑자기 영원한 작별의 소식을 들으니 지나쳤던 많은 추억들이 파노마처럼 떠오르는 군요
살아실제 옛정담 나누며 한 자리 마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속에 애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평생을 9남매 시댁 식구들고 3남매 친정 가족들을 위하여 헌신하시고 이제 고통없는 세상으로 가시었으니 이제 모든 걸 다 잊고 편한 마음으로 영면하시기를 기원하며 삼가 명복을 간절히 비옵니다.
아석,월전 두분들, 글 잘쓰셨네. 큰 감동일세.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