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 작품을 관람하는 방문객들.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은 대영박물관 못지않게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장식과 디자인 박물관으로도 명성이 높다.
이 박물관은 19세기 유럽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1851년의 ‘만국 산업 박람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행사는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이면서 산업과 미술의 결합을 시도했던 앨버트 공의 주도로 열려 큰 관심을 끌었다. 이 만국 박람회 성공을 기념하며 상설 전시를 위해 1852년에 박물관을 설립, 1857년 사우스 켄싱턴(South Kensington) 지역에 개관했다. 이후 박물관 건물은 여러 건축가들에 의해 르네상스식과 로마네스크식을 절충한 여러 양식으로 계속 증축돼 오늘에 이른다.
이곳에는 기원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400여 만점의 유물들이 소장돼 있으며, 그중의 일부가 전시돼 있다.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다양한 예술품들, 회화와 조각, 보석과 장신구, 도자기와 직물, 가구와 철물, 의상과 장난감, 프린트와 사진 등 소장품의 폭은 매우 넓다. 특히 이 박물관은 장식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예술학교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유물을 연구하며 현대인들의 마음에 들 디자인을 찾느라 분주하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의 소장품과 전시품의 폭은 매우 넓어 하루 이틀 만에 다 볼 수도 없다. 그 중 사람들의 눈을 유독 사로잡는 곳은 거대한 모형 작품들이 전시된 특별한 공간이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유럽의 유명한 기념물이나 조각품들을 실물에서 똑같이 본뜬 것이다. 로마의 거대한 승전 기념비인 트라야누스 원주(Trajan's colum)와 스페인 산티아고 성 야고보 대성당 입구 영광의 문 등이 웅장하게 전시돼 있다. 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등도 똑같이 전시돼 있다.
이렇듯 한 자리에서 고개만 돌리면 유럽 각국의 유명한 예술조각품을 다 볼 수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어떤 모형 작품은 원형이 서 있는 현장에서보다 더 상세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런 모형은 바깥에서 원형이 비바람에 훼손됐을 때, 복원 자료로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 또 전쟁이나 지진 등으로 원형이 파손되었을 때는 모형이 원형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형을 만들어 전시한데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 요즘에는 외국 여행이 일반적이지만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소수의 사람만이 해외여행을 하면서 예술작품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뛰어난 예술품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었다. 박물관 측은 이처럼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목적으로 모형을 만들어 전시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문화를 접하고 즐김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삶을 가꾸며 나아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모형 전시관을 만들었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는 일반 장식품만이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값진 유물들이 많이 소장돼 있는데 그 가운데 극히 일부 작품만 전시 중이다. 성상과 유리화, 십자가와 전례용품, 창문의 철제 장식물 등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가운데 상아로 제작된 손바닥 크기의 ‘예수님 고상’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1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어느 성당이나 가정에 걸렸을 십자고상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십자가와 예수님의 팔 다리까지 분실돼 지금의 모습처럼 되어버렸다. 위아래로 갈라진 상아의 틈은 마치 예수님의 몸에 남긴 채찍의 흔적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그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 사랑을 전해주는 손발이 되어 달라고 애타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박물관의 내부 마당과 정원.
이 박물관에서 직사각형 건물에 둘러싸인 내부 마당은 전시실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다. 마당 중앙에는 둥글고 얕은 연못을 만들고, 그 둘레를 계단으로 꾸며 사람들이 쉴 수 있게 배려했다. 주변에는 잔디를 심고 화분을 갖다 놓아 삭막한 건물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이곳은 전시 공간의 연장으로서, 특별한 행사나 조각 전시회도 자주 열리는 장소다.
이 마당은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봄에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어린이들의 즐거운 물놀이장이 된다. 주변의 푸른빛과 연분홍 수국은 사람들의 마음도 시원하게 해 준다. 가을에는 오렌지와 레몬 나무의 노란 열매들이 마당을 장식해 주고 사람들은 따사로운 빛을 쬐며 게으른 시간을 보낸다. 겨울에는 아이들이 얼어붙은 연못에 들어가 재잘거리며 즐거워한다. 박물관 안의 유물들이 늘 새롭게 전시되듯이 마당도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며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대부분의 성당이나 교회 기관에는 크고 작은 마당이 있다. 그곳을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의 마당처럼 모든 계층의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공간으로 꾸밀 수는 없을까? 성당은 하느님의 말씀만 듣는 곳이 아니라, 그분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통해서도 다가오시며 당신의 뜻을 은밀히 알려주신다. 때로는 성당의 좁은 정원에 핀 작은 꽃이 강론보다도 사람들의 심금을 더욱 잘 울리는 일도 있을 것이다.
정웅모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유물 담당)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87년 사제품을 받았다. 홍익대와 영국 뉴캐슬대에서 미술사·박물관학을 전공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장과 성미술 감독, 종로본당 주임, 장안동본당 주임 등을 역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