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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정글의 유혹
정글의 숲을 걷노라면 숲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이 끝도 없는 정글을 또 찾는 이유는 정글의 유혹 때문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나라하게 이루어지는 곳! 그래서 기계처럼 정확하고 예외가 없는 곳! 그곳이 정글이다.
정글은 항상 승자에게 면류관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패자에게는 처참한 피흘림과 버려짐과 죽음과 다시는 소생할 수 없는 절망이 주어진다. 지옥의 문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라고 씌여 있다지 않는가? 정글의 패자가 당하는 고통은 더 이상 소망이 없도록 절망하는 것이다.
정글에서 죄인이 되는 것은 옳고 그른 것에 따라 판단되지 않는다. 패자가 되는 것은 바로 정글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자는 그의 불법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의로운 자가 된다.
사자가 항상 아프리카에서 부러움이 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그래서 정글은 승자가 되기 위한 힘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항상 아무리 넓고 빽빽한 정글이라 하여도 정글 가득히 생명의 호흡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정글의 힘은 약육강식의 원칙 때문이다.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하여, 남보다 더 지혜롭기 위하여, 남보다 더 튼튼하기 위하여 정글을 사는 모든 것들이 숨을 휙휙 몰아 내쉬기 때문이다.
승자가 되기 위하여 더 많은 땀을 흘리는 모습은 숭고하기 까지 하다. 더 많은 훈련을 한 선수가 더 많은 능력을 갖고 당당하게 경기하여 승리의 주인공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은 경기를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선수의 땀과 눈물이 감동을 만들어 감격을 갖게 하는 것도 정글의 법칙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글의 힘은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파괴하는 힘이다.
맨하탄 정글에서 밤을 세워가며 일하는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는 빌딩의 불빛들!
밤을 새워 공부하며 시험을 준비한 청소년들의 야망들!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 시대를 변화 시키고 젊은이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새 시대를 향한 소리들!
젊음이 발산하는 산란한 비트가 가득한 전자음이 쏟아지고, 힘이 튀고, 성욕이든, 죽음을 부르는 자살이든, 마약을 찬양하는 미친 마음이든, 본능이라면 자유라며 마음껏 발산시키는 록 콘써트 무대들!
컴퓨터 안에서 조작되는 실제와 같은 허상들!
그들이 만든 예술들!
경기장이 만드는 마술 같은 장면 장면들! 그 장면에 환호하는 함성의 웅장함!
이 정글의 호흡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가!
그러나 정글에서는 사실 아무도 승자가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흘렸던 모든 노력과 간구와 소망과 사랑 그리고 가까스레 얻은 평안까지, 남의 것을 빼앗고 비로소 승자가 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영원히 누리지 못한다.
최후의 승자를 지도자라 부르지만 정글의 지도자는 항상 외롭고 두렵고 불안하다. 아무도 승리를 오래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승리를 빼앗길 때는 영혼까지 빼앗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글의 유혹은 은총을 거부한다.
은총은 항상 공평해야 하는 경기장의 원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비록 은총이 절대적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은총이 있는 이상 승리의 쾌감은 절감 될 수 밖에 없다.
승리자의 영광도 사실은 신에게 빼앗기고 마는 결과를 갖게 한다.
그래서 정글의 유혹은 신과 신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정글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 항상 은총을 찾는 자들을 핍박했고 진정한 신을 거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글의 유혹에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알고 구분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거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을 알아야 자신을 의인으로 만들 수 있고 경쟁자를 죄인으로 만들어 처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알아서 선과 악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 사람이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법이다.'라고 말했던 황제들. 정당을 만들어 자기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 그 법으로 유익을 노리는 사람들. 교묘한 운영으로 법의 사슬을 피해가며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이들은 선과 악을 조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세상의 권력을 갖으며 부를 누리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선과 악에 묶인 체 위선과 거짓으로 선과 악을 속이고 있다.
성경은 인류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선과 악을 알므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바로 인류가 스스로가 만드는 인류파멸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는 것이며 인간 스스로 행복을 상실하고 파괴된 영혼이 되는 원인이라고 경고한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남을 비판 하는 것에 불과하며 결코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면서부터 사실은 이미 죽은 자들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계속 선과 악을 알고자 하는 속이는 영의 본능을 좇아 신의 은총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사랑을 떠나 경쟁의 정글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은총, 또한 정글의 유혹을 본질적으로 대항한다.
은총은 자격이 없고 공로가 없는데 절대자의 사랑 때문에 무조건 받는 것이다.
정글의 법칙과 정글의 유혹으로 본다면 은총이란 우선 불공평한 것이다. 은총은 절대자의 편애와 불합리성으로 생겨진 것으로 보인다. 노력과 실력과 힘이 인정되어야 정의가 세워지는 법인데 인간의 모든 노력이 무시되고 허사가 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은총은 네로황제와 같은 죄인이라도 어느 날 갑자기 용서를 받고 의인이 되어 천사처럼 인정을 받게 하는 넌센스이므로 인간 사회에 혼란과 무질서를 조성하고 인간에게 게으름과 악한 생각을 갖게 하는 원인처럼 보인다.
더우기 은총은 승리와 성공을 결코 영광스러운 것으로 만들지를 않는다.
은총은 자격도 없이 거저 받은 것이므로 승리의 영광을 실패한 자들을 위하여 실패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공을 거두어도 그 성공은 성공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의 은총 때문이므로 성공은 신의 것이라며 빼앗아 가버리고 만다.
그래서 인간의 성공을 위한 열망을 감소시키고 땀을 흘리는 노력보다는 운명을 따라 살게 하는 피동적 인간이 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은총은 사람들의 본능적 자유를 억압하고 뺐는다.
은총을 받으면 은총의 주인에게 종이 되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은 항상 행복을 만든다. 은총이 있는 곳에 생명이 숨을 쉰다. 은총이 임하면 누구나 희망을 갖게 되고 겨울의 동토를 뚫고 봄의 새싹이 돋아나듯이 감사의 마음을 부활시킨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은 사랑을 알게 한다.
은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은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경험되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이론일 뿐이다. 아무리 미사어귀로 장식되어 있어도 실천될 수 없는 사랑이다.
진실한 사랑의 생명은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경험은 은총인 것이다.
성경은 이 이치를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이 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의 시작은 은총이다.
은총이 없는 사랑은 거짓이다.
은총만이 사랑을 진실한 사랑이 되게 한다.
사랑이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은총을 받아드리기까지 신이 오래 참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온유한 이유는 신이 강압이 아닌 온유함으로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시기하지 않는 것도 신이 우리를 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랑하지 않는 것도 은총을 주는 신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며 그것 때문에 더 높아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사랑하지만 결코 사랑의 댓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또 신은 은총을 주며 그것을 이유로 우리를 종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은총을 받아드리도록 인간에게 간청하신다. 은총을 준 신이 어떤 자기의 유익을 취하려는 숨은 의도를 품은 적도 없었다. 은총은 거저 주어지고 받아지는 것만을 목적으로 다가 온 것이다.
그래서 은총은 항상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믿어 주었고, 한계가 없이 무한 무한히 참아 주었고,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하며 바라며 우리에게 희망을 준 것이다.
사랑이 진정한 생명으로 가득 차는 길은 바로 은총을 아는 것이다.
아잔 박이 라후사람을 알게 된 것은 1988년 여름이었다.
당시 그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찾아서 태국을 여행했다.
한국에서도 그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생의 시작을 열었다.
처음에는 노인들과 꿈을 잃은 어린이들을 위해서 산골을 택했다. 거문리라는 강원도 산골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을 다 쏟을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에게 맡겨지는 운명적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대도시의 한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다. 밤을 새우며 최선을 다했다. 사무실 구석이 그의 숙소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 대도시는 그의 운명적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다음은 청소년들이 모인 학교에서 그 푸른 꿈들을 사랑했다.
분명 사랑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곳도 운명적 사랑은 아니었다.
자기가 꼭 사랑해야 할, 그가 사랑하도록 맺어져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랑 할수록 고통이 따라왔다.
사랑의 결과를 자꾸 세며 따지게 되었다. 그 결과에 따라 교만해지고 자랑하고 만족해하는 오염된 성공이란 정글의 안개가 그의 마음을 덮었다.
사랑을 사랑이게 하는 인내와 희생보다는 결과를 위한 효율적인 투자를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었다. 성공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과 별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사랑은 사랑인데 진실하지 못했고 진실이 없는 곳에 능력이 있을 수 없었다. 가시적 효과만 있을 뿐, 인격적인 변화와 창조되는 생명이 나타나질 않았다.
드디어 그는 그의 운명적 사랑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특별한 어떤 이유에서 보다 여러 여건으로 인하여 불가피 태국을 여행하게 됐다. 또 딱히 마음에 둔 지역도 없었으므로 밀려오는 여건을 거부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태국의 구석 구석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방콕을 중심으로 태국의 동북부, 남부, 서부....어느덧 여행은 한 달을 채웠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운명적 사랑을 만날 수 없었다. 마지막 여행지로 태국의 북부가 남아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이미 운명적 사랑을 찾는 여행을 포기하고 있었다.
대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갖는 생각으로 마음을 기우리고 있었다.
'일생을 거는 운명적 사랑은 없다.'
'그럭저럭 성실히 살고 의롭게 살면 되는 거다.'
'나만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도 많지는 않다.'
'한국에서 주어진 삶에도 살만한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지 않은가?'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생각에 기우는 그에게 사랑은 포기 되고 있었고 사랑이 포기된 생각에는 인생의 의미와 그에 따른 행복은 절대로 존재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인생의 정글로 그는 끌려가고 있었다.
운명적 사랑을 위하여 주어진 신의 은총은 결국 의미도 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며 그에게 주어진 신의 은총은 그 자신만의 인생을 위한 이기적 범주에 갇혀지게 되었다.
그도 운명적 사랑을 포기하므로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존재하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덫에 걸린 것이다.
신이 주신, 의미가 담긴 삶을 찾지 못하고 산다는 것!
은총의 의미를 상실하고 사는 것!
매일을 살지만 사실 의미가 없는 매일이 되는 것!
그는 당시 태국 방콕에서 외로운 눈물을 흘리며 진리가 세상에 패배하는 고통을 느꼈다.
그가 마음의 절망을 이기고 태국 북쪽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한 선교사의 충고 때문이었다.
"그 절망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의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인도하심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는 치앙다오 일대의 라후부족을 소개했다.
치앙다오는 방콕에서 무려 일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산을 오르는 길은 원시림과 같았다. 작은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짚차 한 대 겨우 갈 수 있는 오솔길 마저 끊기고 통나무 두 개가 놓여 있곤 하였다. 차는 겨우 십미터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앞으로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길은 또 열리고 차는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며 가는 것처럼 그렇게 전진했다.
안내자를 따라 다섯시간 이상을 산으로 오르니 차는 산 능선에 다달랐고 산 능선은 십여채의 라후부족 집들을 내어 주었다.
오두막이라고 말해야 할 집들이었다.
짚으로 엮어서 만든 지붕은 한국의 초가지붕 같아서 정이 갔다.
그러나 땅에서 일미터 정도씩 떠 있는 집들은 과수원 원두막처럼 보이는 것이 왠지 위태로워 보였고 집 밑을 헤집고 다니는 돼지와 개, 그리고 닭들의 어수선함은 돼지우리와 함께 지어진 사람의 우리라는 생각을 주었다.
돼지 똥 냄새인지 더럽혀진 대지의 냄새인지 아니면 산 냄새인지 사람냄새인지....역겨운 냄새가 가슴을 뚫고 배속까지 들어왔다.
겨우 집으로 올라가는 통나무에 홈을 판 원시계단을 올랐다.
집은 완전히 대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우선 바닥이 대나무 송판이었다. 울렁거리면서도 빠지지 않는 바닥이 신기했다. 벽도 대나무 송판이었다. 창문이 없는 작은 움막에 그래도 대나무 송판 갈라진 틈이 공기가 통하는 숨구멍처럼 느껴졌다.
집안 구조는 원룸 구조였다. 집 삼분지이 지점에 일미터 일미터 정도의 크기로 십센티정도 높이의 흙을 개서 만든 화덕이 있고 그 화덕을 중심으로 안쪽은 침실이고 바같쪽은 둘로 나눠서 출입문쪽은 손님 접대실 벽쪽은 부엌이었다. 화덕 위로는 굴뚝이 없이 불길이 지붕에 닿지 못하도록 막는 칸막이가 줄에 달려 허공에 매달렸고 연기는 칸막이를 피해 처마밑 구멍으로 사방 팔방 자유롭게 빠져 나갔다. 연기가 많이 빠져 나가는 구멍에는 대나무들이 진을 내어서 짙은 쵸코렛색을 띄고 반질거렸다. 그 위로 작은 바퀴벌래들이 같은 색으로 붙어있었다.
안내인 태국인과 키만 멀대처럼 큰 한국사람을 맞이 한 라후사람은 짜모씨였다. 사실 아짠 박이라는 사람은 한국인으로는 중간 키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짜모씨는 아짠 박의 가슴에 그의 머리가 닿았다. 그는 안짱 다리였다. 더욱이 손가락 열 개가 마디부분부터 잘려 있었다. 한쪽 눈이 찌그러져 움푹 들어가 있어서 얼른 보면 한 쪽 눈알이 빠져 나간듯이 보였다. 턱은 한쪽으로 올라가서 눈이 찌끄러진 쪽으로 붙어있었다. 얼굴의 반은 썪은 적이 있었던지 특히 찌그러진 눈 쪽으로 시꺼먼 색이었다.
그는 사실 한센병 환자였다. 문둥병에 걸린 것 때문에 그는 치앙마이 시내까지 끌려 내려갔다. 그리고 기독교 선교사님을 만나서 수용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또 기독교 믿음을 갖게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예수인데 그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고 그 죽음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는 증거라는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찡하게 들어왔다. 왜냐하면 라후족의 신 으그샤도 바로 은총과 사랑을 주는 신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바로 라후족의 으그샤였다.
그는 병에 차도가 있자 약병을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 선교사의 간곡한 만류가 있었지만 자기만 으그샤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자기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면 으그샤의 은총을 받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산마을로 내 몰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짠 박이라는 한국인이 산마을을 찾은 날 그는 정성을 다해 접대를 했다. 주전자를 화덕에 올려서 물을 끓이고 한편으로는 차 나무에서 막 딴 차잎 라흐를 불에 구웠다. 그리고 그 구운 잎을 뜨거운 물 주전자에 넣어서 차를 끓였다. 찻잔은 대나무 마디 윗 부분을 잘라서 만든 잔이었다. 까만 떼가 낄대로 끼어 까만 떼의 집합소 같았다. 그 잔을 닦는 뭉퉁한 그의 손마디는 그 나무잔 보다 더 까막했다. 그래도 차향은 그윽했다. 통나무 가운데를 파서 만든 통나무 밥통에 쌀을 넣어서 또 다른 통나무 물통에 넣고 한참이나 끓이더니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밥을 해냈다. 밥의 분량은 안내인과 아짠 박 두 사람이 먹고 조금 남을 만큼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양식이었다. 그는 반찬도 만들었다. 맑은 액체에 산 오이를 잘게 썰어 넣은 것이었다. 태국 안내인은 그것을 절대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짠 박은 짜모씨 옆에서 밤을 새웠다.
운명적 사랑은 절대 아니라며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쓰인 경비며, 고생이며 두려웠던 순간들이며 이런 것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모험담을 멋지게 만들어 봐야지 하는 영웅적 사특함도 떠올랐다. 이런 곳에 올 때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선물 이런 것을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하는 체면치레도 생각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음성이 가득 했던 그 귀한 밤을 보냈다.
라후족의 닭은 새벽 두시가 되기 전에 울기 시작했다.
닭은 목이 쉴 때까지 목을 뽑아 울어댔지만 날을 밝게 하지는 못했다. 날을 밝게 못하는 닭의 울음이 슬픈 생각들을 가지고 왔다.
그 밤, 날이 새도록 아잔 박의 머리를 꽉 채운 생각은 운명적 사랑이란 남녀간에 혹간 있을 수는 있어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있을 수 없다는 회의감이었다.
그럴듯하게 대화도 되고 사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사람들은 이미 풍요를 누리고 있으니 사랑이 필요 없는 사람들로 보였고, 반면 라후부족처럼 비참하도록 던져진 사람들은 사랑해 주어도 소용이 없고 또한 사랑할 수도 없는, 또 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그날 밤, 아짠 박의 모든 생각이었다.
아짠 박은 몇 번이나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잘못된 현대인의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양심을 통하여 내면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부름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태양은 어느 곳에서나 공평히 뜬다.
그러나 태양을 맞이하는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짜모씨의 집에 날이 밝아 태양을 맞이한다는 것은 슬픈 생각들이 슬픈 일들이 되어서 눈으로 확인된다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없었다.
아짠 박이 방문했던 그 산마을에서는 태양이 떠서 생명의 활동을 부추켜도 사람들이 할 일이 없는 것은 밤이나 아침이나 또 점심이나 저녁이나 똑 같은 현상이었다.
그 할 일없는 아침이 밝아왔다.
아잔 박과 안내인도 할 일이 없었다.
인생을 보람되게 보내기 위해서는 그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별 의견을 나눌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은 짐을 챙겼다.
안내인이 시동을 거는 것을 보고 짜모씨에게 인사를 건냈다.
"I'm going back to Korea. I'd like to help you. How can I help you? What do you need?"(*아잔 박 영어)
"폼짜 그랍 빠이 뿌라테 까오리 크랍. 폼 약자 츄와이 쿤 아라이 크랍. 츄와이 아라이 디 크랍?"(*안내인 태국어 통역)
"라우 마이미 스아파 크랍. 마이미 응언 크랍. 마이미 야 두웨이 크랍. 떼와 라우 마이떵 양니 크랍. 라우 미 떵간 콘능, 콘티 츄와이 라우 랍 우와이폰 컹 프라짜우 다이. 커 츄와이 쏭 콘 능 크랍. 푸아 라우 랍 우와이폰 컹 프라짜우 다이 크랍"(*짜모씨 태국어)
"We don't have any cloth, any money, any medicine! But we don't need these kines of things. Really, only one thing we need is one man who can help us get the blessings and love of God. Please send one man who can help us to have God's blessing."(*태국 안내인 통역)
(*우리에겐 옷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돈도 없습니다. 또 약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으그샤의 은총과 사랑을 받도록 해 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으그샤의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사실 아잔 박은 터무니 없는 요청이라고 생각했다. 늘 이렇게 궁핍하게 살았으니 이렇게 사는 것도 익숙해 지는가 보다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금방 요청하라고 말해 놓고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Yes!"
"크랍. 폼 짜 송 콘 능 크랍"
(*그러지요)
짧은 말만 남겨 놓고 차는 긴 시동을 걸고 떠났다. 산마을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차가 떠난 이후 산마을은 소동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따라 온 것은 적막이었다.
적막 중에서 짜모씨는 으그샤를 찾았다. 은총을 보내달라는 기도를 남겼다.
아짠 박은 산길을 내려오며 '올라갈 때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내려오는 길은 멀지 않다'라고 느껴졌다. 올라갈 때 느꼈던 원시림도 익숙해 보이는 것 같았다. 아직 숲을 채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라후족 마을은 딴 곳 이야기로 착각되었다. 역시 그와 라후족은 운명적 사랑이기에는 너무도 달랐다.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짜모씨의 음성을 떨쳐 보려고 애를 썼다. 혹시라도 그가 라후족 마을에 와서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마을! 그가 왜 이곳에 와야 한단 말인가? 그의 아내는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의 세 딸들은? 벌거벗고 흙에서 돼지를 따라다니는 딸아이 모습이 상상되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라후니족은 나의 운명적 사랑이 아니라고 스스로 결정해 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항상 밤 12시에 방콕을 떠났다.
태국의 정취를 마지막 시간까지 즐기라는 단체 관광을 주선하는 여행사측의 배려였는지....
몇 한국여행객들이 공항 대기실에서 고스톱을 친다. 아마도 그들은 관광하는 몇 일간 내내 고스톱을 쳤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이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기실 한 가운데서 고스톱판을 벌렸겠지...
"인생아 고스톱 처럼만 재밌어라"
"그렇지 인생은 죽이고 먹고 싹쓸이 하고 그 재미에 사는 거야"
"내 인생은 전00고스톱이다. 내 것은 영원히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고 광주 땅에 그 많은 억울한 피를 뿌려도 내 것만 만들면 되는 거다."
몇 명이 목소리를 높이며 소란을 부리자 키가 작은 태국 공항 직원이 와서 제지를 한다. 그러나 한참 판이 오른 그들이 쉽사리 정글을 사는 인생의 재미를 거두겠는가?
"에이 계속 고다"
"좋지 계속 고다 인생은 고다 고"
"포기 할 수 없다. 포기하면 끝이다. 인생은 정글이야!"
정글의 유혹은 사람들에게 항상 매력적인 것이다.
정글이 깊을 수록 싸움은 치열하고 판돈이 높아 간다. 판돈이 높을 수록 쾌감이 있다. 내가 죽는 일은 차후의 문제다.
아잔 박의 귀에 인생은 정글이라는 말이 깊숙이 들어왔다.
'혹시 짜모씨의 요청을 운명적 사랑으로 받아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나 역시 정글이 되어 낮은 곳으로는 갈 수 없다는 성공주의 때문은 아닌가?
나도 정글의 쾌감을 포기 하지 못한 체 고 고를 외치는 것은 아닐까?'
'포기하는 것이 없다면 인생을 정글 같은 고스톱 판에 버리는 것이다.'
'은총을 간절히 요청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은총을 포기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아잔 박은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아내에게 진지하게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수렸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바쁜 스튜디어스들의 발걸음 사이 사이로 밤하늘의 수 많은 별들이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인간들이 사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짜모씨의 이야기였다고 작은 별이 아짠 박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한센 병으로 쫓겨났던 그가 한센병으로 죽어 가면서 천신만고 끝에 얻은 행복의 은총을 그의 산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자 뭉퉁이 손으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간청했다고...
그는 정말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일년 후, 아짠 박, 그가 치앙마이로 돌아와서 라후부족 사람들을 찾아 다니게 된 것은 그의 아내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여보, 편한 생활이 마음의 평안까지는 아니에요. 지금의 생활이 편하면 편할수록 우리가 남산 돌계단에서 나누었던 은총을 나누는 인생은 허물어져 가는 기분이에요. 그들이 은총을 간구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은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닐까요. 우리가 갑시다. 아이들이요? 또 다른 은총이 있을 거에요. 우리가 숨을 쉬는 것도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어느날 아쟌 박은 이렇게 노래 글을 썼다.
하늘이 내려
하늘이 내려
세상을 고요케 합니다.
고요는 은총이 내리는 길입니다.
하늘이 내려
세상을 비로 적십니다.
젖음이 은총 스며드는 샘터입니다.
하늘이 내려
세상을 맑게 씻으십니다.
청결함이 은총 담는 그릇입니다.
하늘이 내려
세상에 무지개를 걸었습니다.
무지개는 은총의 약속입니다.
하늘이 내려
아! 나의 사람들에게 닿았습니다.
가난의 기도가 은총을 만들었습니다.
하늘이 내려
험한 하루 살아 온 마음에
노을도 아름답게
그림자도 길게 만드십니다.
나도
아내도,
그리고 아이들도
하늘이 내려 닿은 곳에서
그저 엎드렸습니다.
1992. 7월 어느날/ 박윤식 제목: 하늘이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