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하교회에 전하는
사도행전 7장 1–43절
스테반의 설교: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서 있는 예수
(통일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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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7장, 스테반의 긴 설교 전반부를 살펴봅니다.
스테반은 공의회 앞에서 고발당한 상태입니다.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 “성전을 헐고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는 두 가지 혐의입니다.
대제사장이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스테반은 “사실입니다”라고 바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말합니다.
(행 7:2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 이스라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셰마》 신명기 6:4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의 형식을 빌려, 권위 있는 말씀을 선포하듯 시작합니다.)
이 한 마디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예수”를 들고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요셉을 거쳐 모세까지,
그들이 가장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차근차근 쌓아 올립니다(build-up).
예수님은 그 역사의 돌발적인 이방인이 아니라,
그 구원 역사의 최종 열매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 떠남의 신앙, 취약함의 신앙 (Vulnerable Faith)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창 12:1 — 익숙하고 안전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익숙한 장소, 사람, 문화를 떠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곧 취약한 존재(vulnerable) 가 되는 것입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문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떠나게 하셨을까요?
익숙한 세계만 붙들고 있으면, 그것이 세계 전체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떠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타자의 환대(hospitality)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됩니다.
스스로 취약해보지 않으면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자손이 많아질 것과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창 12:2–3, 15:5, 17:8)
그러나 그 약속은 즉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75세에 부르심을 받고 100세에 이삭을 얻었으니 25년이 걸렸고,
땅을 약속받았지만 아내 사라를 묻을 땅조차 없어 막벨라 굴을 은을 주고 샀습니다.
(창 23장 — 그 작은 굴이 약속의 첫 단초가 됩니다.)
스테반은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눈앞의 일들은 의미가 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 궤적을 이끌어가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과 내가 함께 써 가는 이야기입니다.
2. 요셉과 애굽의 압제
아브라함에서 이삭, 야곱은 간략히 지나고 요셉으로 건너뜁니다.
형제들의 시기심 때문에 애굽에 팔려갔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행 7:9–10, 창 39:2,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흉년 때 가족들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시간이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게 하고 아이들을 죽입니다.
(출 1:8–22)
이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권력이 사람을 수단(means)으로 취급할 때,
약하고 작은 생명들을 쉽게 제거하려 합니다.
스테반은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비춥니다.
3. 모세와 떨기나무: 보잘것없는 것을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
마침내 모세가 태어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였기에 석 달 동안 숨겨 키우다가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웁니다.
바로의 딸이 건져 “모세(물에서 건진 자)”라 부릅니다.
(출 2:1–10)
버려진 아이가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시한폭탄”이었습니다.
40세가 되어 동족이 압제받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입니다.
다음날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려다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는 말을 듣습니다.
(출 2:14, 행 7:27–28)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모세는 진짜 관원과 재판장이 됩니다.
미디안으로 도망가 나그네(sojourner)가 됩니다.
첫째 아들 이름을 “게르솜(나그네)”이라 지어
자신의 쓸쓸함을 담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엘리에셀(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도우셨다)”이라 부릅니다.
(출 2:22, 18:3–4)
쓸쓸함과 고독을 지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는 고백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운명의 날,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출 3:1–10)
떨기나무는 보잘것없는 관목입니다.
그늘도 못 주고, 재목도 안 됩니다.
쓸모없음, 대체 가능한 존재,
곧 사물로 취급당하는 사람들 — 노예들 —의 상징입니다.
바로의 체제는 그런 사람들을 태워버립니다.
수단이니까 제거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떨기나무 가운데 임하시되
태우지 않으시고 빛나게 하셨습니다.
(출 3:2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무는 사라지지 아니하더라”)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목적 아닌 존재는 없고,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내가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는 것을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라.
이제 너를 보내리라.”
(출 3:7–10, 행 7:34)
4. 결론: 예수님은 그 구원 역사의 열매
스테반은 모세를 통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신 18:15, 행 7:37)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도 불순종했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아모스가 지적한 대로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습니다.
(출 32장, 암 5:25–27, 행 7:42–43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버려두셨으니”)
스테반은 말합니다.
우상숭배는 마치 유전자처럼 그들과 함께 흘러왔고,
그 결과 그들은 “나와 같은 선지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스테반은 온유하면서도 단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말랑말랑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말은 칼날처럼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을 보고 있는가?
익숙한 세계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믿고 있는가?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써 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메인 작가이시고, 우리도 함께 써 내려가는 공동 작가입니다.
한 주간,
떠남의 신앙,
취약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보잘것없는 것을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