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두 번째로, 동양대학을 설립하여 미국인들에게 동양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을 계획했다. 그는 동양대학을 동양의 철학과 사상, 한국어를 가르치는 문리대와 한의대, 동양화를 가르치는 미술대학 등에 역점을 두어 키우겠다는 포부를 펼쳤다. 뉴욕 원각사는 몇 십만 에이커의 방대한 부지를 소유하고 있어 그 모두를 시설하는 데 있어 장소가 비좁지 않았다. 호수도 있고, 드넓은 잔디밭과 아름드리 수목이 우거져 있어 캠퍼스와 도량을 한꺼번에 두어도 공터가 너무 많아 탈일 지경이었다.
그가 그런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밀행제일에 버금하는 승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노후에 안락한 가정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뜻있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기 위해 더욱 출가를 고집했는지도 모른다. 한 가정의 아버지보다 만인의 아버지가 되려고 했을까. 어쨌거나 그는 68세라는 나이에 비장한 결심을 했다. 나는 수계식이 끝났을 때 그에게 조용히 말해 주었다.
"동생은 늦깎이야. 스님들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거야. 모쪼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해요. 절 시집살이가 얼마나 매서운지 알아?"
그는 나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며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생각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 카멜의 삼보사로 갔다 귀국하기 전에 상좌 흥림을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일당의 전화를 받은 것이 삼보사에 머물고 있을 때이니 그가 머리를 깎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누님, 접니다."
나는 반가워서 외쳤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별일 없겠지?"
말끝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그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답답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무슨 일이야?"
그는 자기가 처한 입장을 설명했다.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 보니 자기 방의 전화를 끊어 놓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절에 있지 말고 떠나라는 의미였다. 뉴욕에 전통 사찰을 짓고, 동양대학을 건설하기 위해 설계도를 만들고, 그에 따른 자본금까지 조성하고 있던 그에게 이같이 호된 시집살이를 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이유라는 것이 더욱 맹랑했다.
그는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일본인들로부터 후원을 받기로 내약이 되어 있었는데, 왜놈들 돈으로 전통 사찰을 짓고, 동양 대학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에게 핍박을 가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으려니 자연 그들에게 부지를 보여 줄 수밖에 없었고, 조용하던 산중에 일본인들이 몰려와 떠들어 대니 그곳에 스님들이나 지도급 신도들이 이맛살을 찌푸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묵은 민족 감정을 앞세워 인로왕보살의 후신 같은 일당이 노년의 마지막 남은 정열을 모두 쏟아 부어 이루고자 했던 꿈을 짓밟아 버리다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일당을 위로했다. "내가 뭐랬어. 절 시집살이가 세다고 했잖아. 절밥 먹은 그릇 수를 얼마나 따지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나이든 생각만 하고 설쳤으니 대중들의 미움을 산거야. 너무 실망하지 말고 잘 견뎌요. 고비를 넘기면 모든 것이 좋아지고 견딜 만해질 거야."
그러나 일당은 결국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원각사의 일부 승려와 이사들이 심한 말로 왜놈들 돈은 필요 없다며 물러가라고 궐기를 하니, 꿈을 펴는 것은 고사하고 일신을 의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은사 관응 큰스님이 계시는 직지사 중암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면서 정진에 몰두하고 있다. 일당은 서울에 오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성라암에 머문다. 나는 그의 상처가 가라앉았을 때 쯤 해서 말했다.
"뉴욕에다 전통 사찰을 짓고 동양대학을 세우는 일만이 밀행제일이 되는 길은 아니야. 그것 말고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많아." "" "미국 사람들에게 동양을 가르쳐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나라의 노인들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뜻있는 일이 될 거야. 동양대학보다 노인대학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어?"
나는 그에게 내가 꿈꾸는 노인천국의 건설에 관해 차근차근 설명한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양대학을 세운다고 할 때 자금을 대주기로 했던 일본 사람들 중에서 우리 노인천국을 만드는 데 투자할 사람이 없을까?"
그는 어머니 일엽 스님의 성을 따고 한국으로 귀한 했지만 아버지는 일본인이었다. 그것도 명문가 사람이었다. 동경제국 미술학교를 졸업한 다음 전후 일본 화단을 주도해 오며 일본에서 살았던 그는 일본의 정치인, 재벌, 사회 저명인사들과 두루 친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일본인 친구들 중에서 나의 노인 천국을 건설하는 데 도와줄 사람이 없겠느냐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한두 명쯤 동생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직도 있을지 모르잖아. 다음에 일본에 가면 한번 알아봐 줘요." "한번 생각해 보죠."
일년에 서너 번은 일본에 다녀오는 그가 내 부탁을 듣고 일본에 다녀와서 말했다.
"누님 부탁을 받고 누구에게 상의를 해볼까 궁리하다가 가키누마 센싱이라는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는 일한불교복지협회장이라고 했다. 일본 승려인 가키누마 센싱이 일한불교복지협회를 결성한 이유를 들어 보니 장했다. 오늘날의 한일 관계가 선리우호 관계라고 하기에는 한국인들의 대일민족 감정이 결코 원활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반감을 정치인들이, 또는 경제인들이 희석시키리라고 기대할 수가 없어 종교인인 자신이 나섰다는 것이었다.
분명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에서 근세 36년 동안 식민통치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을 무참하게 유린해 왔다. 그러나 21세기를 향한 이 시점에서 언제까지나 묵은 민족 감정을 들먹이며 증오만을 되풀이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일당만 해도 그렇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양국의 우호증진에 무엇인가 이바지하려고 평생을 노력해 왔지만, 한국에서는 그를 일본인 취급하고, 일본에서는 또 한국인 취급을 당해야 했었다. 그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보건대 일당은 나의 은사 일엽 스님이 남긴 사리 같은 보배로운 존재다. 그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생각하면 내 가슴이 저려 온다. 양국인이 서로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동반자적인 관계를 이루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일한복지협회의 가카누마 센싱 회장은 복지재단을 발족한 이래 교토'동경'의 귀 무덤(이강)을 한국으로 이장시키는 문제라든지, 시베리아 억류 희생자에 대한 위령법회, 안중근 의사 추모비 건립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업을 한 사람이었다. 과거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저질렀던 가혹 행위에 대하여 이런 식의 속죄 행사를 계속 추진해 나가는 종교인이 있는 이상 양국 관계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의 초청으로 가키누마 센싱 회장과 일한복지협회 이사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복지법인 성라원과 자매결연 하자는 데 동의했다. 동시에 나의 노인천국 건설사업에 일조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가평에 노인 천국이 건설되면 일본에서 귀국하여 말년을 고국에서 보내고 싶어 하는 재일교포 노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할 예정이다.
나는 이제 내 자전적 기록의 대미 부분을 쓰고 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힘껏 산 흔적을 남기고자 했는데,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재주도 부족하고, 내가 겪었던 일이라 하여 모두 글로 옮겨 놓을 수도 없다는 것을 쓰면서 알았다. 수좌로서 생멸이 끊어진 법계의 진여를 구하시어 하시는 말씀이 곧 불음이고, 하시는 일이 불행이고, 하시는 생각이 불심이 되는 큰스님들이야 따로 유적을 둘 필요가 없겠지만 나는 은사 일엽 스님이 "청춘을 불사르고"를 집필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때, 속으로 나도 회향 때가 되면 자서전이나 한 권 남기고 가자고 생각한 바가 있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겨 본 것이다.
또한 나중에 자서전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부터 좋은 자서전을 남기기 위해서는 견성을 해야 하고 훌륭한 일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았다. 그러나 역시 글을 쓰고 난 느낌으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는 회한이 남는다.
그저 노인천국을 건설하겠다는 뜻만 온전히 이룰 수 있다면 다른 회환일랑은 접어 두고 때가 되면 훌훌 이승을 떠날 수 있을 텐데. 노인천국 건설의 권선문을 여기에 적는 것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불보살님을 우러러 찬탄하고 부처님 법을 등불로 삼아온 지 3천년이 지난 지금 시방을 두루 하여 영원무궁한 지혜의 광명이 온 누리에 충만하건만, 우매한 중생들은 미로에 방황하여 무시겁 내로 쌓인 업에 따라 생로병사 우비고뇌의 윤회 속에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무명을 밝히고 번뇌의 구름을 헤쳐 주는 부처님이 계시기에 그 위대한 자비광명의 가피로써 평화와 행복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에 소승은 무법력 함을 무릅쓰고 부처님의 유지를 받들어 진력하다가 보니 부처님의 심오한 경지를 어렴풋하나마 알 것도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웃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야 되겠다는 벅찬 사명과 의무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우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을 힘껏 보살피기 위해서는 양로원과 노인대학, 선원이 들어선 지상천국 이생극락을 빨리 이룩하여야겠다는 마음이나 노쇠한 소승으로서는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여러 사부 대중이 뜻을 모을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도와주시옵고, 세세생생 빛날 인연공덕을 쌓게 하여 무량대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영원한 전법도량에서 목마른 중생에게는 감로수가 되고 크나 큰 고통을 받은 자들에게는 지혜의 광명을 전하여 빛을 받게 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는 구도자가 되겠습니다. 이에 동참하여 선근종자를 심고 선심공덕을 맺는 이들에게 금생에는 수명장수하고 복덕구족 자손창성 사업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
세세생생 영원히 빛나는 복전이 되게 하옵시고, 내세에는 자타일시 왕생극락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7 년 봄 성라원에서 법성 합장
|
첫댓글 법성스님의 인생역정은 여기까지 입니다. 법우님들께 조금이나마 불심을 다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옛날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내용은 다 까먹었네요.
아고~~ 감사합니다. 업둥이 자는시간에 짬을 내서 들어왔습니다. 저번편에 이어서 읽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