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할리우드 클래식 영화가 된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1958년에 개봉한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의 포스터 ©1958 Loew's Incorpor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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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 윌리엄스의 원작을 리처드 브룩스 감독이 영화로 만든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958)는 초반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뇌쇄적인 각선미로 사람들의 눈길을 잡 아챈다. 그녀는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폴 뉴먼의 시선 속에서 스타킹을 갈아입는다. 영화는 매기(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목 없는 악마no neck devil’라 불리는 남편 브릭(폴 뉴먼)의 조카에게 아이스크림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뒤 무려 10분 가까이 테일러와 뉴먼은 지독한 말싸움을 벌인다. 카메라는 오직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유영遊泳한다. 다른 장식은 하나도 없다. 카메라는 오로지 두 사람만을 비추며 이들의 ‘미친’ 메소드 연기만을 담아낸다.
이 강렬한 초반 장면은 감독의 뚝심 있는 연출력과 ‘위대한’ 두 배우의 연기에 철저하게 기대고 있다. 빠른 커트와 짧은 쇼트로 이루어진 현대영화와 비교하면 이 영화는 순전히 롱 테이크 감각을 익힌 배우들의 ‘대사력’에 의존한다. 바로 이 점이 할리우드 클래식 영화가 지닌 미덕이다. 1950~1960년대 영화들은 철저하게 배우의 연기력과 스토리(대사 구성)로 밀어붙였다. 편집 없이 길게 이어지는 롱 테이크는 역설적으로 숨 가쁜 호흡으로 보는 사람들을 쥐락펴락했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는 그 시대, 이러한 특징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영화인 셈이다.
1950년대 미국 내 만연한 거짓의 이데올로기
영화 속 브릭(좌)과 매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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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복선에 복선을 까는 것처럼 이야기의 속내를 선뜻 풀어헤치지 않고 자꾸만 뒤로 보낸다. 그것 역시 이 영화의 매력이다. 이 집안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브릭은 끝없이 매달리는 아내 매기를 내치려고만 한다. 언뜻 보면 매기는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브릭에게서는 이상한 열패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마치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멀리한다는 태도 같은 것인데, 이러한 모순적 태도를 보이는 건 매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부부에게는 서로 툭 터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깊은 비밀이 있다. 집안 전체가 그렇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 부부의 갈등은 남편의 동성애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양성애에 관한 이야기다. 브릭과 매기 사이에는 스키퍼라는 남편의 자살한 친구가 등장하는데, 영화는 이들 셋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다룬다. 하지만 희곡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가 나왔던 시기, 그리고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때가 1950년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같은 기이한 태도를 금세 이해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미국 전역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시기로, 이런 문제를 속 시원하게 드러내서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매카시즘은 미국 사회 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추방할 목적으로 생겨난 반공사상이었다. 당시 동성애자들은 공산주의자들과 동음이의어처럼 취급받았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한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순수한 욕망을 억압하는 정치적 기제機制를 추적한다. 그는 미국 내 만연한 거짓의 이데올로기를 한 집안의 소동극으로 끌어들인다. 맥락 없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던 한 가정의 작은 싸움은 점점 더 큰, 세상의 비극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점층 구조는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예컨대 브릭과 매기는 친구 스키퍼의 죽음, 스키퍼와 매기의 혼외정사를 놓고 끝없는 말싸움을 이어 간다. 브릭의 아버지 빅대디는 자신이 말기 암인 줄도 모른 채 새롭고 신나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하고, 큰아들 구퍼와 그의 아내 메이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 재산을 온전히 자신들이 차지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오랫동안 거짓말을 일삼고 위선으로 살아온 브릭 부부와 집안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이제는 도통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스키퍼의 죽음을 둘러싸고 브릭과 매기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매기는 정말 스키퍼와 섹스를 한 것일까. 그녀는 왜 굳이 남편의 남자를 유혹하려 했던 것일까. 영화는 마치 한 편의 추리극처럼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리처드 브룩스 감독은 영화의 배경을 미시시피 구석의 한 저택으로 한정함으로써 인물 간의 심리전을 더욱 정교하게 부각시켰다. 연극의 평면적 무대를 영화의 입체적 공간으로 전환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연극의 막과 막 사이와 영화의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그 차이가 무시되면 연극과 영화가 구별되지 않는 법이다. 리처드 브룩스의 영화가 브로드웨이 연극의 인기를 뛰어넘을 수 있던 묘법이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재해석이 빈번하게 시도될 법한 작품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가 리메이크된 것은 1985년 토미 리 존스와 제시카 랭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한 편뿐이다. 이 작품에서는 동성애 코드가 비교적 전면에 내세워져 있다. 리메이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는 원작이 가진 뛰어난 함의含意를 표현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전히 1958년의 작품을 명화名畵로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7년 10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 ZUM 허브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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