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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체에서 주선한 여행에 참여하여 청남대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언젠가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하고 함께 청남대를 견학하고 온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와보니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활기가 넘쳐보였다
대통령기록관실에 들러 여러 대통령들의 생활모습을 보면서 참 인생이 잠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권세와 영화와 근심도 나이 앞에서는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
나라를 위하여 많은 공을 들이지만 일부 국민들에게는 환영을 못 받고 쓸쓸히 물러나는 경우도 있다.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대통령이 안 되었으면 더 행복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본다
세습왕조 때 왕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하늘을 두려워하였어야 하는데...
“청남대”는 충청북도 청주시 대청댐 부근 1,844,843㎡ 의 면적에 지어진 대통령 전용별장으로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의미이며 '83년 조성당시에는 봄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빈관 개념으로 '영춘재'란 이름으로 준공되었다. 이후 '86년도 7월 전두환대통령에 의해 청남대로 개칭된 것이다. 청남대는 1980년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했던 전두환 대통령이 이곳 풍광에 반하자 당시 장세동 경호실장의 주도로 1983년 6월 군사작전 하듯 착공, 그해 12월 완공한 대통령 전용별장이다. 경호실 경비대가 4중의 철책을 두고 물샐틈없이 경비했던 치외법권지역으로 개방 전까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매년 4~5회, 많게는 7~8회씩 총 89회 472일 간 머물렀던 곳이다. 삶터를 빼앗긴 실향민과 생활제약을 받던 문의지역 주민들의 원성을 위무코자 2003년 4월 18일 취임 2개월도 안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이원종 충북지사에게 관리권을 이양했고 충북도는 청남대관리사업소를 설치하여 그해 8월부터 개방했다 대통령이 거처했던 본관 위주의 초기 관광은 대통령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통령과 가족들은 어떤 가재도구를 썼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궁금해하던 국민들로 인해 반짝 인기를 끌었으나 이내 시들해지고 말았다. 접근성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다녀간 사람들로부터 ‘별게 아니네, 볼게 없어’ 란 입소문 탓이었다.그런 청남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충북도가 스토리가 있는 청남대, 웰빙과 볼거리가 있는 청남대로 관광패턴을 바꾸어 나갔기 때문이다. 청남대의 아름다운 지형을 활용해 역대 대통령길을 조성해 초입에 해당 대통령 동상을 세우고, 대통령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볼거리도 보강하고, 수시로 이벤트를 열어 관광객들의 만족도를 높여갔다.
충북도는 2017년 2월 17일 오전 청남대 1000만번째 관람객이 입장했다고 밝혔다.
축구, 골프, 조깅, 산책을 할 수 있는 청남대에는 330필지 184만㎡에 건물만 46동이 있다. 이런 곳에 어떻게 이 공간이 들어섰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반송·백송·금송 등 나무 124종 11만6천그루, 무화과·인동초·벌개미취 등 들꽃 143종 35만포기, 멧돼지·고라니·너구리 등 야생동물까지 서식하고 있는 자연 박물관이다. 군인들이 그야말로 ‘칼같이’ 관리한 데다 외부의 손을 타지 않은 탓이다
청남대는 휴양 중에도 항상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완벽한 시설을 갖춤은 물론 대청호 상수원 보호를 위해 최고의 수질정화시스템을 구축, 운영하였다. 또한, 청남대는 국가 1급 경호시설로 청와대에서 관리하고 4중의 경계철책과 경호실338경비대가 경비를 수행하다 2003. 4. 18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양되고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 대통령에게는 커다란 결단이 요구될 때가 많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국정운영의 중대한 고비에서 청남대에 머물며 정국에 대한 구상을 하였고, 이때 내린 결단들은 역사를 뒤바꿔왔다. 이것이 바로『청남대 구상』이다. 그 밖에 청남대에서 국빈을 맞이하기도 했다.
정문과 본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대통령기록관실이 보인다 대통령관에는 대한민국의 역사, 취임식 영상, 대통령 수결과 휘호 등 역대 대통령을 소개하는 코너와 대통령 외교순방사진, 대통령 외교선물, 대통령 집무체험장 포토존 등이 있고 청남대관에는 한눈에 보는 청남대 소개, 청남대에서 대통령과 가족들이 사용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세미나실, 회의실, 기획전시실이 지하에는 강당이 있다 별관 한편에서는 각 대통령들이 이곳 청남대에서 묵을 때 사용했던 생활도구들이 전시되고 있다.장기, 바둑에서부터 크게는 보트까지 전시해 놓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
전 대통령은 생도 시절 축구를 좋아하다가 장교 때는 테니스를, 장군이 된 이후부터 골프를 섭렵했다. 생도시절 축구를 할 때는 포워드, 풀백, 골키퍼 등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부대장으로 있을 때도 운동경기 때마다 사병들과 어울려 뛰면서 사기를 북돋았다. 재임 시절 경호원들과 함께 축구·수영·낚시 등을 즐기며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골프도 좋아하여 다른 대통령에 비하면 재임 기간 중 골프를 자주 친 편 이다. 전성기 때는 드라이버로 240야드를 날리는 장타를 자랑했으며, 핸디캡은 12 안팎이었다. 청남대에 퍼블릭 골프장을 만들라고 한 것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유망한 미래 산업” 이라며 기업인들에게 골프장 건설을 적극 권유했다. 전국의 골프장을 골고루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육식과 시래깃국을 즐겼다. 운동선수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은 고기를 좋아했다. 회는 싫어했다. 대신 소고기 갈비를 주로 먹었다. 그는 요리를 먹을 때 강된장을 넣었는데, 특히 시래깃국에 강된장을 풀고 끓인 음식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추억하곤 했다
전직 대통령을 함부로 대하는 우리나라의 정치 풍토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의 일화를 적어보았다
평생동안 자기를 욕하고 발목잡았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죽었을 때 예의를 갖춰서 조문을 하였다. 그리고 유가족들한테 전부 깍뜻하게 고개 숙여서 인사하고 일일이 챙겨주었다 한다
김대중 대통령때 초청받아 갔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계속 비난의 말을 하니 전두환 대통령이 예의를 갖추라고 말하였다.
노무현 대통령때 초청받아 갔으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당신은 직선제 대통령도 아닌데 여기 왜 왔냐고 했을 때 그냥 아무 대답없이 노무현을 바라보면서 취임하신 것 축하드리고 꼭 성공하시기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 5공 첨문회 때 노대통령은 전두환한데 소리지르고 명패를 던진 사람이었다.
어느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 때 전 전 대통령 이름이 적힌 비석을 자랑삼아 밟고 지나갔다. 기자들은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노태우 대통령
거리보다는 정확성을 즐김 꼼꼼하고 조용한 성격인 노태우 대통령은 재임중에도 소문없이 골프를 쳤다
100미터 달리기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육상선수 수준의 달리기 솜씨를 비롯하여 운동이라면 못하는 운동이 없을 만큼 재능이 있었다재임시절에도 운동을 꾸준히 한 데 건강 비결이 있는 듯하다. “운동은 집에서는 기구를 이용한 체력단련을 하고, 1주일에 2~3번은 테니스나 골프를 합니다.” 테니스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함께 즐긴다고 한다. “아내 역시 칠순을 넘겼는데도 건강이 좋아 테니스를 자주 합니다.” 운동외에도 군가를 작사·작곡했을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퇴임 직전에는 기념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콩나물 국밥과 아욱국을 즐겼다. 그는 평소 콩나물 국밥에 숭숭 썰은 김치와 흰떡을 넣어 먹었고, 소화가 잘되고 속이 든든하다는 이유로 아욱국을 자주 찾았다. 가끔씩 부드러운 돼지고기와 잘게 다진 떡갈비를 먹었다.
김영삼 - 모든게 권력 투쟁… 그를 오판했다
김대중 - 대단한 인물… 점차 총명함 흐려져
전두환 - 강한 우정… 생각 차이 어쩔 수 없어
김종필 - 30년 가까이 국정 몸 담아… 관록이 믿음직스러운 인물
이승만 - 54년 육사 방문했을 때 "여기가 어디지" 정신 흐려
고르바초프 - 머리가 영민하고 순발력… 착했지만 경제 너무 몰라
노태우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현대사의 주역들과의 비화(秘話)와 함께 인물평을 솔직하게 내놓았다. 다음은 그 요약이다.
청하기
이승만 대통령
1954년 9월 이 대통령이 육사를 방문했다. 이 대통령은 옆의 국방장관에게 "여기가 어디지?"라고 묻는 등 정신이 맑지 못한 상태였다. 어린 마음에도 아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활동적 인물이었다. 우리는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다. 그러나 우정을 국가보다 상위에 놓을 수 없게 됐다. 인식의 차이로 해서 전임자는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을 쓰면서 여러 번 자문했던 것은 '나는 왜 그(YS)의 인간됨과 역사관을 오판했을까' 하는 것들이었다. 취임 전 만나보니 그는 정치에서 쌍방 간에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1987년)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그는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YS는) 2년간 매주 만나다시피 했고 내 옆에서 국가 경영을 봐오기는 했지만 진지한 면보다는 피상적으로 접근한다는 인상이었다. 권력을 향해 하나에서 열까지 투쟁하는 자세가 변함없이 엿보이곤 했다. 그의 취임연설에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6공화국의 민주성마저 부인하고 있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한 자책감을 느꼈다.
김대중 대통령
'다른 야당 지도자들과는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없는 난경(難境)을 겪어 오면서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다. 관찰력이 예리한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한 대목도 놓치지 않았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총명함이 많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92년 대선 때) 김 총재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연민의 정마저 일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율곡사업과 관련해 이회창 당시 감사원장 역시 당당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조사 결과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의식해서인지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
정 전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와 "아파트를 평당 60만원에 지을 수 있다"고 했다는데 그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 전 전 대통령을 만났더니 "내가 그 영감한테 속았다"고 하기에 나는 "빨리 아셔서 다행입니다" 하면서 그의 인간됨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고록 출처 : http://news.chosun.com/2011/08/10
김영삼 대통령
미국을 공식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 클린턴대통령과 1995년 7월 23일 운동을 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70년대 초반부터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거의 매일 아침 4km 가까이 조깅을 했다. 재임 시절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함께 청와대 경내를 달리는 모습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의원 시절에는 야구와 축구에도 소질이 있어 실력을 발휘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 밀로 만든 칼국수를 워낙 좋아했다. 칼국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주요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일이다. 그가 칼국수를 너무 빨리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는 바람에 나머지 사람들은 맛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청와대를 나와 밥집에 갔다는 뒷얘기가 있다. 금융실명제 시행과 군 하나회 척결을 순식간에 단행한 점은 '후루룩 칼국수'를 먹는 모습과 닮았다. 군사정권 시절 청와대의 호사스러운 이미지를 희석하기 위해, 군사정권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은 서민적인 음식인 칼국수를 즐겼다.
김영삼(YS) 대통령은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직설화법은 YS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지난 2010년 8·15 때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자신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함께 초대하자 전 전 대통령에게 다 들리도록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본인이 처벌했기 때문에)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고 해서 청와대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어진 오찬에서 전 전 대통령이 "와인 더 없느냐"고 했더니 YS는 "청와대에 술 먹으러 왔나"라고 소리쳤고, 그런 YS의 말을 듣다 화가 난 전 전 대통령이 일찍 자리를 떴다고 한다. 측근들에게는 '다짜고짜 화법(話法)'을 많이 썼다. YS 비서로 정치를 시작한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은 "YS는 측근들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니 그거 알재?'라고 물어보곤 했다. 우물쭈물하면 '한심한 놈'이라며 전화를 끊었다"고 회상했다. '픽션 같은 논픽션'도 적지 않게 만들어 냈다. 1992년 대선 유세차 속초를 방문했을 때 참모들이 써준 연설 원고에 "속초에는 함경도 분들이 많다"고 쓰여 있었다. 월남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YS는 실제 연설에서 "속초에는…속초에는…"이라며 몇 차례 머뭇거리다 "강원도 사람이 많습니다"라고 했고, 참모들은 거의 '기절'했다. '함경도'가 잘못 쓰인 것이라 생각하고 망설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말한 것이다. 대통령 취임 후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일 교사로 수업을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수업이 끝난 뒤 한 여학생이 "할아버지는 어릴 때 무슨 꿈을 꾸셨기에 대통령이 되셨나요?"라고 물었다.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 꿈을 꿨다"는 정답을 기다리던 학생들에게 김 전 대통령은 "저는 숙면을 취하기 때문에 꿈을 꾸지 않는데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기자의 '우루과이 라운드' 질문에 "우루과이 사태?"라고 되물은 적도 있다. 그의 승부욕은 대통령 취임 후 외국 정상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어졌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외국 원수들, 특히 미국 대통령 만나고 오면 '기 싸움' 한 얘기를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며 "(한번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만나고 나서 '내가 꽉 눌러줬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조깅을 할 때 지기 싫어 전력 질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YS는 남다른 승부욕의 소유자였다. 특히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경쟁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겼다. 측근들에 따르면 YS는 언론사 카메라가 DJ 쪽으로 향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럴 때 즐겨 사용한 방법이 비서진을 불러 귓속말을 주고받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카메라 기자들은 다시 YS 쪽을 향하며 플래시를 터뜨렸다. 1980년대 당시 YS와 귓속말을 주고받는 장면이 카메라에 자주 찍혔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뒷날 '무슨 얘기를 하시더냐'는 기자 질문에 "별 얘기 없었어. '덥다. 문 좀 열어라'고만 하더라"라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
김대중 대통령
충북 청주 소재 청남대 농장에서 오리에게 모이를 주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과 부인 이희호 여사.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유전적으로 건강체질이자 이른바 '장사 타입'이다. DJ는 1971년 대선 유세 때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고관절을 다쳤다. 이로 인해 다리를 꼬지 못하는 등 남은 생애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불편한 다리로 과격하고 움직임이 많은 운동을 하지 못했으나 맨손체조와 정원 가꾸기, 농장 관리로 건강과 스트레스를 다스렸다. 또 이따금 수영도 즐긴 것으로 전해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식가'다. 무엇보다 그는 홍어회와 홍어 삼합을 좋아했다. 김 대통령이 영국에 머물던 시절엔 측근들이 흑산도 홍어를 항공기로 보낼 정도였다. 절대 미각을 자랑하던 김대중 대통령은 홍어를 상당히 좋아했지만 막상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홍어를 많이 먹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소 상당한 독서가로 알려져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세가 악화될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그가 손에서 책을 놓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총재시절에는 하루에 접대하는 인사가 많을 때는 600명 선, 적을 때에도 200명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나서도 그의 2층 서재는 매일 어김없이 밤 1시가 되어서야 불이 꺼졌다.
그의 학구열은 영어공부에도 이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은 1974년 무렵 그의 나이 50세가 넘어서였다 한다 당시 김 대통령은 일본어는 유창했지만 영어는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과 기자들이 매일 수십 명씩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한편 홀로 영어공부를 꾸준히 한 결과 나중엔 기자회견을 영어로 할 정도까지 되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재임 시절 일찍 기상해 30분 이상 스트레칭을 했다. 스스로 개발한 요가를 곁들인 스트레칭이었다고 한다. 일과 후나 주말에는 경내 체력 단련실에서 수시로 운동을 했다. 임기 초반에는 2~3주에 한 번 꼴로 북악산에 올랐다. 청남대에서 휴가를 보낼 때나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는 자전거를 즐기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좋아한 음식은 삼계탕이었다. 쫄깃함을 넘어 질긴 토종닭도 알뜰하게 즐겼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상도 시골장터에서 만든 쇠고기 국밥을 좋아했다. 얼큰한 쇠고기 국물에 다양한 채소를 넣어 칼칼하고 시원한 맛을 내는 음식을 즐겨 먹었다. 또 마늘을 넣고 달걀 노른자위를 입혀 구운 굴과 삼계탕도 별식으로 즐겼다
예전 부산상고 동기가 집무실을 찾았습니다. 아무리 오랜 친구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하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높였다고 합니다. 집무실에서 어색하게 서로 말을 높여서 말을 하던 두 사람... 갑자기 노무현이 따라오라며 작은 방으로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담배 하나 달라면서 이러다가 혀 깨물겠다며 말 놓고 얘기하자고 했답니다. 격식과 허식이 체질적으로 몸에 맞지 않는 인간 노무현이었습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병역의 의무를 회피한 것과 달리 노무현은 육군 출신입니다. 군을 제대하고 예비군 훈련에도 빠지지 않았던 노무현인데, 당시 예비군 훈련을 함께 받았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도 사법연수원 출신의 판검사가 될 예비역들이 꽤 있었는데, 중간에 빠지거나 술을 마시고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무현은 항상 일반 병사처럼 성실하게 구호를 외치며 훈련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으로, 보통 사람처럼 성실하게 살았던 인간 노무현이었습니다. 출처: http://kiss7.tistory.com/489 [키스세븐]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또한 테니스를 좋아했다. 휴가지에서도 테니스를 즐겼다. 낚시와 골프도 이 대통령의 운동 취미에 속한다. 기업인답게 독학으로 골프 실력을 익혀 현대그룹 재직 시절 라운딩 때마다 기량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유독 쌀밥에 애착이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좋아하는 별식도 간장 비빔밥이다. 뜨거운 쌀밥에 계란과 간장을 넣고 비빈 간장 비빔밥. 몸이 안 좋거나 기운이 없을 때에는 김윤옥 여사에게 특별히 이 별식을 부탁한다고 한다. 외식을 하면 냉면과 왕만두를 즐겼다. 이명박 대통령과 냉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역대 대통령 중 최고령으로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생으로 73세가 되던 1997년에 취임했다. ‘처음으로 대통령된 ’이라는 조건을 빼면, ‘최고령’타이틀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1892년 생인 이승만 전 대통령이 72세로 대한민국 1대(1948~1952) 대통령을 시작했지만, 2대(1952~1956) , 3대(1956~1960)걸쳐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69세에 대통령에 오른 최규하 전 대통령과 67의 이명박 대통령, 66세의 김영삼 대통령, 63세의 윤보선 대통령이 그 뒤를 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61세에 대통령이 됐다. 최연소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군사쿠테타로 제 5대 대통령이 된 박 전 대통령은 취임 당시 나이가 46세였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6·7·8·9대 대통령을 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 10명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윤보선 대통령이다. 1897년부터 1990년까지 93년을 살았고, 이승만 대통령은 90세까지 장수했다. 이들이 집권한 1960년대 한국인 평균 기대수명은 52세였다. 이들을 포함해 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은 모두 6명이다. 이 가운데 사고를 당해 천수를 누리지 못한 박정희·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한 4명의 평균 수명은 88세다. 최규하 대통령은 87세, 김대중 대통령은 83세에 별세했다. 역대 대통령들은 현재 한국인 평균 기대수명(81세)과 비교해도 장수하는 편이다. 지금보다 위생 환경, 영양 상태, 의료 기술이 부족했던 1940~60년대에도 대통령은 일반인보다 오래 살았다. 전·현직 대통령들의 장수 이유도 부지런한 생활, 소식, 운동 등이 일반적인 장수 비결과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던 것을 감안하면 역대 대통령의 수명은 거의 두 배에 이른다. 그러나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고구려 태왕들은 조선 임금들에 비해 훨씬 오래 살았다. 고구려는 28명의 왕이 705년을 통치했고, 조선은 27명의 왕이 519년을 통치했다는 데서도 왕들의 수명차가 드러난다. 궁궐에만 머문 조선 임금들의 단명은 운동 부족이 가장 큰 이유인 듯싶다.
청남대를 관람하고 돌아오다 저녁식사로 막국수집에 들렀다. 주변에 공장이 많이 생겨서 이렇게 맛있느 막국수 식당이 생겼다. 조용한 마을에 아파트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집으로 오던 중 급한 환자를 이송하는 119 헬리콥터의 이륙장면을 사진에 담았다. 이송되는 환자를 보면서 하루속히 회복되기를 바랬다. 한편으로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저 환자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평화로울 때가 있었냐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불안할 때가 있었냐 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는 흐른다고도 하고 반복된 다고도 한다. 나오는 대통령마다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 보지만 해아래 새로운 것이 없나니 다 과거에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가 보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만 그 평화를 어떻게 지탱해 나가야 하느냐가 풀어야 할 숙제인가 보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국민의 요구를 다 충족시켜 줄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나면 국민들의 지지율에 정책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실망한다. 대통령의 업적은 시대적 상황속에서 그가 행하였던 역할로 빛나는 것 같다. 국가의 초석을 놓은 때에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이승만 대통령이나 경제발전이 절실할 때 공장을 세운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가 그렇다. 한때의 민심이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억할을 잘 수행할 때에만 그런 것 같다.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은 이렇게 역할의 중요성을 잘 알고 겸허히 국정을 수행해 나가는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찾아 볼 수없는 유일한 분단국이다. 언제 전쟁이 이 땅에 일어날 지 모르는 긴장감에 싸여 있다. 이 점이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이다. 안일한 생각은 평화를 점점 멀어지게 할 뿐이다. 평화는 국력이 강할 때에만 보장된다는 점을 지도자와 국민은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지난 대통령들의 업적을 기리며 좋은 점을 선양하는 교육이 학교현장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