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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는 레지오가 필요 없다
새로운 지역에서 레지오 마리애을 시작해 보려고
열실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지역에는 레지오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레지오 마리애는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사업을
하는 단체가 아니라 가톨릭의 열성과 정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경우에 쓰일 수 있도록
육성시켜 주는 단체이다. 따라서 어떤 지역에 레지오 마리애가
필요 없다는 말은 그 지역에 가톨릭의 열의와 봉사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게 되므로
그러한 주장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쁠뤼(Pere Raoul plus) 신부의 정의대로,
"그리스도 신자란 자신의 이웃을 돌보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힘찬 사도직은 어느 곳에서나 에외 없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할 능력을 지닌 신자들에게 마땅히
사도직 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둘째, 오늘날 종교가 타성에 젖거나 물질 만능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도직 활동을 통하여 일반 대중을 일깨워야 한다.
셋째 인생의 좌절을 겪고 있거나 죄의 길로 빠지기 쉬운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열성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도직 일꾼들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들이 돌보아 주어야 할 사람들의 영성적 자질을 바르게 개발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 안에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인품을 형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도직 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닌가?
이를 위하여 우선 사람들을 사도직에 참여하도록 불러들여야 한다.
그러나 사도직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지도 않고
막연히 사도직을 수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부르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사람들 중에 스스로 사도직 활동의 방법을 찾아낼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도직 활동을
조직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2. 단원이 될 만한 사람이 없다
이러한 반대 의견은 대개 단원의 자격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나온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무실이나 가게 또는 일터에는 레지오 단원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많이 배운 사람이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 노동 일을 하는 사람,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등
어느 누구라도 레지오 단원이 될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레지오는 어느 특정 피부색이나 인종 또는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레지오는 이러한 발굴되지 않은 숨은 인재를 끌어들여 그들 안에 잠재해 있는
사랑의 능력을 개발하여 교회의 사업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알프레드 오래힐리 몬시뇰(Mgr. Alfred O'Rahillly)은 한때 레지오 활동을 연구한 일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감동되어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나는 위대한 것을 발견했다. 아니 오히려 위대한 것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남성과 여성들 안에 영웅적인 정신이 숨어 있으며
어딘가 확실히 알수 없는 것으로 부터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단원의 자격 기준은 역대 교황님들이 생각했던 범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즉 교황님들은 어떠한 계층의 신자라도 뛰어난 인재로 만들 수 있고
훈련을 통해서 훌륭한 사도로 양성할 수 있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31장 [레지오 확장과 단원 모집] 3절(나)항과
제 40장 7절 '선교사의 도구로서의 레지오'를 자세히 읽어 보기 바란다.
특히 '선교사의 도구로서의 레지오'에서는 새로 태어나는
교회 공동체는 레지오 단원을 많이 늘려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있다.
레지오 단원으로 이끌어 들일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은
그 고장의 영적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런 곳이야말로
활동이 필요치 않은 곳이 아니라 오히려 레지오의 지단 하나를 세워서
좋은 누룩의 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누룩은 우리 주님께서 영적 수준을 높이는데 쓰시는
처방약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새겨 두기 바란다(마태13, 33참조)
또한 쁘레시디움은 네 다섯 명 정도의 적은 단원으로도 설립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그리하여 먼저 활동에 착수한 몇 안 되는 단원들이 더 많은 단원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될 때
이들은 합당한 미래의 단원들을 찾아 나서서 레지오를 알리고 그들을 이끌어 들이게 될 것이다.
3.레지오 단원의 방문을 꺼려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발생한다면, 단원들과 지역 사회에 도움이되는
많은 가능성을 지닌 레지오의 이상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방문 이외의 다른 활동거리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느 고장에서도 레지오의 방문 활동이 심각한 방해나 극심한
어려움을 겪은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한다
레지오 사도직의 참된 정신으로 방문 활동을 해보면,
신앙에 무관심 하거나 무지한 사람일수록 방문 활동을 하는
레지오 단원들에 더욱 냉담한 태도를 보이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레지오 단원들이 찾아오는 것을 가장 꺼리는 곳이야 말로
단원들이 더욱더 힘을 쏟아야 하는 곳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 방문 때에 어려움을 겪었다 해서 방문 활동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얼어붙은 장벽에 용감하게 맞섰던 단원들은 한결같이 그 장벽을 녹일 수 있었고
레지오를 배척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까지도 제거할 수 있었다.
각 가정이야말로 영신적인 전략의 거점이라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가정을 정복해야 사회를 정복할 수 있다.
그런데 가정을 정복하려면 그 가정으로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4. 젊은이들은 낮 동안 열심히 일하므로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이 말이 지켜졌다면
세상은 이미 종교적 황무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교회 사업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자유시간을 순수하게 휴식을 위해 쓰기 보다는 대개 무절제한 오락으로 소모하지 않겠는가?
낮에는 고되게 일하고 저녁이 되어 쾌락을 즐기는 생활이 서로 교차 반복되다 보면
누구라도 물질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런 생활이 여러해 계속되면 젊은이들은 이상이 없는 텅 빈 가슴만 남게되고
훌쩍 지나가 버릴 젊음을 위해 자신을 소모하며 그 동안 소중하다고 배워 온
모든 가치들도 젊음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어쩌면 이보다 훨씬 불행한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 (St. John Chrysostom)은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겠느냐?" 고 묻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레지오 단원으로서
그 자유 시간의 첫 열매를 주님께 바치도록 권유하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이다.
첫 열매는 그들의 일생에 감동을 주고 마음과 얼굴까지도 맑고 싱싱하게 지켜 줄 것이다.
그런 다음에도 휴식의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며
두 가지 일을 함께 하였으므로 기쁨도 두 배가 될 것이다.
5. 레지오는 같은 이념과 사업 계획을 가진 여러 단체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단체들마다 나름대로 이념이 있고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그럴듯한 사업 계획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레지오가 영혼을 구하기 위한 숭고한 싸움과 사업을 계획하여
제시하는 여러 단체중 하나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레지오야말로 사도직을 조금 더 확실하게 실천하는 몇 안되는
단체들 중의 하나이다. 막연한 이념만을 내걸고 소속원들로 하여금
각자 처한 주변 환경에서 좋은 일을 하라고 부르짖는다면
활동에 임하는소속원들의 태도도 결국 막연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레지오는 뚜렷한 영성과 정해진 기도 주간 활동 의무와
이에 따른 보고의 의무화 등으로 명확한 틀을 제공하기 때문에 막연한 이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수고를 덜어 주어 확실한 성공을 거두도록 이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과 활동의 체계는
성모 마리아와의 일치라는 살아 있는 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6.레지오가 펴는 사업들은 이미 다른 단체들이 하고 있으므로 서로 충돌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말은 대개 주민의 태반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거나
가톨릭 신자가 아니거나 또는 영신적인 발전이 거의 없는 고장에서 들려오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는 마치 헤로데(Herod)로 하여금 왕좌를 차지하게 하면서도
주님과 어머니는 초라한 마구간으로 쫓겨난 채 사시도록 해야 한다는 말과 같으니
우리가 이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레지오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는 이러한 말들은 실질적인 활동도 없이
이름만 내걸고 있는 단체를 두둔하는 셈이다.
그러한 단체들은 존재하기는 하나 결국 한번도 적을 제대로 찔러 보지 못한 군대와 같다.
그뿐만 아니라 활동이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한 것만 못한 것이 된다.
수백 명 혹은 수천명을 필요로 하는 사도직 활동에 단지 몇 십명의 사람만이 참여한다면
활동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러한 경우를 흔히 보게된다.
또한 그처럼 적은 인원수가 말해 주듯이 어느 단체이든지 튼튼한 조직을 갖추지 못하면
그 단체의 사도직 정신과 활동 방법도 자연히 불충분해지고 만다.
레지오에게 작은 활동거리라도 맡겨서 시험해 보라.
그러면 그 성과를 보고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몇 명 안 되는 단원이,
마치 보리빵 다섯 덩어리가 수천 개로 불어났던 것처럼 (마태14, 16-21 참조),
필요한 것을 모두 채우고도 넘쳐 나게 만들 것이다.
레지오는 특정한 활동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전혀 새로운 활동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그동안 해 왔던 활동 중에서 짜임새 없이 이루어졌던 활동들을
새롭게 계획하고 다듬어서 짜임새 있는 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전에 손으로 하던 일를 전력을 이용하여 효과를 높이는 것과 같다
7. 단체들이 이미 너무 많다, 그러므로 레지오를 새로 설비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단체를 활성화하여
레지오가 계획하는 활동을 맡기는 것이 옳은 일이다.
이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주장이다. 우리 주변의 대분분의 것들이 사실상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이 나왔을 때 그것이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하지는
않으며 때로는새로운 것이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단체들이 너무 많다고 할 것이 아니라 레지오에게
스스로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주야 한다.
만약 레지오가 '그저 그런 또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런 단체를 문 앞에서 돌려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가!
또한 위의 주장은 현재 그 고장에서는 문제의 활동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고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새로운 단체를 거부하는 것은
지혜로운 판단도 아니요 통상적인 관례에도 어긋난다
만일 어떤 지역에 비행기를 도입하는 문제에 대해
'이 곳은 이미 자동차가 많이 있기 때문에 비행기는 필요 없다.
그 대신 자동차를 하늘에 날 수 있도록 개발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한다면 이 얼마나 괴상한 논리인가!
8. 여기는 작은 고장이므로 레지오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런 반대는 대개 지역이 크지는 않으나 그리 달갑지 않은 소문이 난 곳에서 들려온다.
간혹 어떤 마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좋은 풍습을 가지고는 있으나
여러 면에서 침체되어 있는 경우를 본다 이런 곳은 풍습이나 도덕성이
약화되어 주민 상호간의 관심마저 점차 사라지게 되므로 젊은이들은 생활의 재미를 잃고
그 고장을 떠나 도덕적 지주도 없이 사람들만 북적대는 도시로 가 버린다.
이러한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종교적인 바탕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데
이 경우 사람들은 단순히 기본적으로 주어진 의무만 할 뿐 더 이상은 나서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으로 변한다. 종교적 이상이 사라지면 신앙의 사막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앙의 사막으로 변하는 것이 비단 젊은이 들이 떠난 시골 마을들 뿐만은 아니다.
이제 이 사막에 다시 꽃을 피우려면 반대 과정을 밟아야 한다.
즉 조그마한 사도직 모임을 만들어 그 정신을 주민들 안에 널리 펴고 새로운 행동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이로써 그 고장에 적합한 활동이 시작되고 생활은 밝아지며 빠져 나가려는
사람들의 발길은 멈추게 될 것이다.
9 레지오 활동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영신적인 것이므로 그 성질상 사제의 직분에 속한다.
다만 성직자가 손댈 수 없을 때에만 평신도에게 배당해야 한다.
사실 나는 일년에 몇 차례씩 신자들을 방문하는데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있다.
이러한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제10장 [레지오 사도직 ]에서 전반적으로 대답을 하고 있으나
여기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미리 지적하여 둘 점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아예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거룩한 도시라 해도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죄악과 타락이라는 병을 앓고 있으며 현대의 물질문명이 가져온 심각한 문제로 들끓고 있다.
그러므로 방문의 성과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일 년에 서너 번의 방문만으로 안심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만일 본당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할 때
많은 신자들이 매일 미사에 참례할 것이고 그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 또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미사 참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주일에 네 다섯 시간 정도의 고해성사에 참여하는 극히 제한되는
신자의 숫자와 미사에 참례하는 전체 신자의 숫자를 비교해 보자,
과연 충분한 사목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처럼 심한 불균형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사제가 자신에게 맡겨진 각자의 영혼에 대해 사목적 의무를 다하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친말감이나 개별적인 접촉이 필요할까?
성 가를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 주교는 하나의 영혼은 자신이 맡고
있는 교구 전체에 비교 될 만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잠깐 계산해 보아도 사제가 한 영혼에게 쓰는 시간은 일 년에 반 시간도 채 안 된다.
이 반 시간만으로 충분히 돌볼 수 있는가? 막달레나 소피 바라 성녀(St. Madeleine Sophie Barat)는
어려움에 처한 어떤 한 영혼을 돌보기 위해 그 영혼을 수없이 만났을 뿐만 아니라
300여 통이나 되는 많은 편지를 보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 수십 년 간 레지오는 수없이 많은 활동을 수행해 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레지오의 활동은 계속 되고 있다.
만일 일에 지친 사제가 그 반 시간조차도 영혼에게 할애하지 못할 때
레지오가 열성에 찬 대리자를 보내 사제를 돕는다면 사제는 하나이지만 대리자는 많아지며,
대리자들은 사제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순명하고 사제의 도움으로
뚜렷한 분별력을 지니게 되어 개인이나 가족을 접촉한 일에 사제만큼 능숙해지게 된다.
또한 대리자들은 영혼을 고상하게 만드는 능력까지 허락받게 되며
사제가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열성으로 영혼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이러한 도움을 마다하는 사제가 있다면
자신의 직무나 그 사제 자신에게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는가?
"레지오 마리애는 사제에게 두 가지 은총을 가져다준다
이 두 은총은 서로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첫 번째 은총은 레지오는 성령의 권능을 드러내는 표지가 찍힌 승리의 무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찌 이 신성한 무기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지 자문해 본다.
둘째는 레지오 마리애가 우리의 내적 생활을 온통 새롭게 해줄 능력이 있는 생명수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맑고 깊은 생명의 샘을 주시니,이 물을 마시는 것이 나의 의무가 아닌가!"( 뀌이노 신부/ Fr. canon Guyont)
10. 단원들이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는 실상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 말은 마치 벼를 베다가 혹시 잘못해서 벼 이삭 몇 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벼 베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위험에 처한 영혼들을 지금 당장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하며 힘없고 눈멀고 절름거리는영혼들 이들의 숫자는 너무도 많아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자칫 포기할 위험마저 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며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루카 14, 21-23) 영혼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렇게 방대한 추수를 위해서는 사실상 평신도들을 동원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일이다.
과정에서 혹시 무분별한 행동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열정과 활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일 따름이다.
무분별한 행위를 막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수치스럽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엄격한 규율 밑에서 일을 하게 하는 방법이다.
병든 영혼들에 대해 주님께서 품으셨던 애절한 마음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고통중에 있는 영혼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에 자신의 몸을 던져 모든 힘을 쏟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레지오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중대한 시행착오가 발생한 일도 없었고 일부 무분별한 행위가 빈번히 발생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그와 같은 심각한 착오는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적어도 레지오 마리애에는 엄격한 규율이 서 있기 때문이다.
11. 시작하는데는 언제나 어려움이 따른다.
이 점은 레지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어느 정도 굳은 각오가 필요한 것을 보면
시작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알수 있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이는 마치 숲과 같아서 멀리서 볼 때
견고해서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가까이 다가가면 들어가기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음과 같은 말을 마음에 새겨 두자.
즉 "표적은 겨누고만 있으면 결코 맞출 수가 없으며 모험 없이는 성공도 없다
늘 안전하기만을 바란다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바르게 할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겪은 숱한 실패의 대가로
얻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뉴만 추기경/Cardinal Newman)
하느님의 은총을 펴는 사업을 의논할 때 지속적으로 지나치게 계산만 하다가
결국 은총의 존재를 소홀히 다루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반대 의견이나 예상되는 어려움만을 말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가져다주는
여러가지 도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레지오는 기도와 영혼들에 대한 봉사 활동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전적으로 성모님께 속해 있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레지오에 대해서 의논할 때에는
인간의 잣대를 가지고 말 할 것이 아나라 하느님의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
"성모님은 독특하시고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동정녀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인간의 잣대로 말하지 말고
하느님의 잣대로 이야기하십시오"(보쉬에/Bowwu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