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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려는 사람이 없다?
권정희
팬데믹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이상현상이 하나 나타났다. 인력난이다.
“구인광고를 내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직원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사업주들의 하소연은
한인타운에서도 얼마 전부터 들려왔다. 연방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4월 통계에 따르면
4월 구인 건수는 930만 건, 이중 고용건수는 610만 건. 320만개의 일자리가 채워지지 않았으니
“구인난!” 아우성이 터질만하다.
엄혹했던 코비드-19 규제가 풀리고 경제 전면재개가 눈앞인데, 생각지도 못한 걸림돌이 나타난 것이다.
고용주들은 임금을 올리기도 하고 보너스를 제안하기도 하며 사람 구하느라 애를 쓰고 있다.
팬데믹으로 경제가 얼어붙어 재정적 벼랑 끝을 경험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지금쯤이면 집안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라도 일하러 나가고 싶을 텐데,
왜 선뜻 일터로 돌아가지 않는 걸까.
“너무 후한 실업수당 때문”이라는 것이 많은 고용주들의 생각, 그리고 공화당의 주장이다.
주정부 수당에 더해 연방정부가 매주 300달러씩 추가로 얹어주니 누가 힘들게 일하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폐단을 없애겠다며 알래스카, 아이오와, 미시시피 등 공화당이 주지사인 25개 주는
연방 실업수당 지원을 안 받겠다고 공표했다.
경제전문가들의 진단은 보다 복합적이다. 아직도 불안한 감염위험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자녀들을 돌봐야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나은 커리어를 준비하느라
취업을 미루는 케이스들이 많다는 것이다.
공돈 받는 맛에 일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상당수에 달할 것이다.
이래저래 사람 구하기 힘든 이때에 전혀 다른 주장이 있다.
온라인 크레딧카드 결제회사인 그래비티 페이먼츠의 댄 프라이스 대표는 최근
“우리 회사는 일자리마다 300명씩 구직자가 몰린다”고 트윗을 했다.
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최저생활도 안 되는 저임금 받고 일할 사람이 부족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지난 2015년 직원 최저연봉을 7만 달러로 인상해 박수와 야유를 받았던 30대 기업인이다.
연봉인상 결정은 비즈니스 전략이 아니라 도덕적 책임이라는 그에 대해 극우진영은
‘사회주의자’라며 조만간 필히 망할 것이라고 조롱했었다.
창업 후 처음에는 그 역시 경비절감에 집중하느라 직원들 봉급에 인색했다.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은 친한 친구가 렌트비 200달러가 올랐다며 멘붕 상태가 되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엄마로서 아들 키우며 살아가려면 연봉 7만 달러는 필요하다고 그 친구는 말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직원들의 처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100만 달러이던 자신의 연봉을 90% 삭감하고,
130명 전 직원의 연봉을 최소 7만 달러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6년, 직원은 200명으로 늘고 회사 수익은 두 배로 뛰었다.
봉급이 배 이상 오른 하위직 직원들은 삶의 격이 달라졌다. 회사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후한 실업수당 때문에 일을 안 한다는 것은 봉급이 그만 못하다는 말이 된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평균 실업수당은 주당 300달러가 좀 못된다. 연방 지원 300달러를 합치면 600달러 정도.
시급 15달러로 주 40시간 일해서 버는 액수이다. 가주 최저임금이 14달러(직원 25명 이하 13달러)이니
실업수당 받는 게 사실이지 더 낫다.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종업원 최저임금 14~15달러는 허리가 휘는 부담이다.
그렇기는 해도 미국의 노동자 보수는 1970년대 이후 거의 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하면 남자 혼자 벌어도 부부가 아이들 키우며 편안하게 살던 것이 과거의 미국이었다.
노동자 형편이 지금처럼 팍팍해진 것은 성장의 과실이 한쪽으로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더 많은 돈이 가야 투자가 더 많이 이뤄지면서 경제가 더 많이 성장한다는 낙수이론의 결과이다.
80년대부터 미국에서는 대기업의 경영풍토가 바뀌었다.
낙수경제와 더불어 주주가치 극대화 원칙이 들어서면서 CEO는 임금삭감, 인원감축 등으로
무자비하게 비용을 깎아냈다. 이렇게 만든 수익으로 주주의 이익을 챙기자 CEO의 보수도 덩달아 올랐다.
1970년대 노동자 보수의 30~40배였던 CEO의 보수는 90년대 100배,
2000년대부터는 300~400배가 되었다.
한쪽에서는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갇혀 미래 없는 삶을 살고 반대쪽에서는 주주들과 CEO에게
돈더미가 안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정책연구소(IPS)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S&P 500 기업 중 상당수가 저임금 노동자들이 고전하는 동안 CEO에게는 거액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1985년 이후 월스트릿의 보너스 인상률로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갔다면
오늘날 최저임금은 시간당 44달러가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연봉으로 9만 여 달러이다.
팬데믹이 휩쓸고 간 자리에 민낯을 드러낸 것은 너무 낮은 임금이다.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지르는 이 기회에 저임금 노동자들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바란다.
수많은 가족들이 행복할 것이다.
<美洲한국일보 논설위원, 전 주필/서울본사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한국일보 견습31기) 역임/
숙명여고~서울대 사대 불어교육과 졸/LA거주>
"이보게 방장, 잘있지?"
천양곡
겨울이어 봄오고 봄가니 또 여름이 왔구먼.
이곳 택사스 어스틴(Austin)은 매일 화씨 95도에 습도까지 겹쳐 몹씨 무더워.
코로나 19 때문에 오랜동안 집콕하다 이제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데 더위가 찾아와 다시 집콕 신세가 됬어.
편히 지내던 시카고 떠나 어스틴으로 짐 싸가지고 온게 벌써 일년이 넘었군.
택사스, 좀 이상한 주(State)야. 유일하게 Lone Star 주기(State flag)를 펄럭이며
연방정부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아. 이번 겨울 한파로 인해 정전, 식수펼핍 사태가 일어난 이유도
그런 이유 중 하나지. 지금도 전기, 에너지, 식수 문제는 주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큰 소리치고 있지.
더구나 멕시코 국경 장벽도 주 예산으로 쌓겠다는 거야.
택사스는 알라스카 다음으로 면적이 넓지. 휴스턴, 달라스, 어스틴, 센 안토니오 도시를 제외하고는
시골마을에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이 짙고 교육을 덜 받은 Redneck들이 대부분이야.
그래서 조심해야 되. 특히 중범죄 기록이 없으면 총기소지 면허 필요 없이 권총을 구매할 수 있으니까.
요새는 중국이 너무 일찍 설쳐대는 바람에 아시아 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그러데도 복덕방 아줌마 말에 의하면 작년에 어스틴으로 이사온 대기업, 중소기업들의 수가
200개가 넘는다는군. State Tax가 없고 친기업 정책을 쓰고 있어서 그래.
Booming Town이란 별명이 붙었어. 젊은 이들이 너무 많아.
어쨌든 자네도 더 늙기 전에 한 번 내집에 들려보지.
글 하나 보낸다.
양곡이가
.........................
부러진 심장(Broken Heart)
오랫동안 데스크 탑 콜푸터 홈 페이지에 죠지(강아지 이름) 사진이 떠있었다.
손자, 손녀들이 태어났지만 누구를 콤퓨터 화면에 실기가 뭐해서 강아지를 그대로 두었다.
작년에 먼 곳으로 이사 할 때 짐이 많아 데스크 탑을 버리고 온 후로는 죠지를 자주 볼 수 없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류가 지구촌에 모습을 나타낸게 700만년 전인데
돌로 기구를 만들어 사용한 석기시대는 대략 300만년 전 부터 8000년 전까지 계속됬다.
석기시대의 대부분은 구석기 시대로 인류역사의 98-99%를 차지한다.
고대 인류가 개를 가축화 한 때가 구석기 끝자락인 1만 5000년 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늑대가 무리지어 사냥을 하고 서로 경계를 하는 기술을 관찰한 인간이 늑대의 한 종류를 골라
집에서 키워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고대 인간의 뇌 크기는 10만년 전에 나타난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
뇌와 별 차이가 없어 개를 가축화하는지혜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후 개는 인간과 함께 지구촌을 이동하면서 계속 살아왔다.
개는 옛적엔 사냥을 돕고 맹수의 칩입을 알려주고 먹거리가 부족하면 주인에게 좋은 영양제였다.
지금은 우리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주고 덜 불안하게 도와주는 애완과 뱐려 목적으로 키운다.
그래서 사람과 개 사이의 애착관계는 어느 동물보다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
애착이 고착되는 민감한 시기는 종(Species)에 따라 다르다.
사람은 6개월에서 1년, 조류는 생후 16시간 이내, 개는 3주 부터 6주 사이다.
개는 이 시기에 사람들과의 접촉이 많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피하고 야생동물처럼 행동한다.
내가 죠지를 데려올 때는 죠지는 이미 사람과의 애착이 형성되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를 키우며 점 점 더 진하게 애착관계는 굳어졌다.
아내 말에 의하면 내가 죠지와 시간을 보낼 때 가장 많이 웃었다고 한다.
죠지는 둘째 딸한테 가서 여러 해를 함께 살다가 14 살에 되자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죠지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는 현실의 진통제 역활을 하는 방어기전의 일종인 부정이다.
의식상태에서 받아드리기 괴로운 것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넣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꾸려는 심리기전이다.
부정은 단기간 효과는 있지만 습관적으로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시키는 위험도 있다.
죠지와 내가 형성한 애착관계 호르몬 옥시토신이 너무 강해 아직도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금년 초 인기가수 ‘레이디 ‘가가’가 의 반려견, 불독(Bulldog) 두마리를 누군가 낚아채어 사라졌다.
가가는 아무런 조건없이 반력견을 돌려주면 500,00 불을 주겠다고 제인했다.
이 기사를 읽었을 때 오래된 환자가 생각났다.
그는 20대 후반 남성으로 건장한 불독을 가지고 있었다. 맥(Mac)이란 이름을 가진 불독으로
강아지 때부터 기른 5살 배기다. 그는 가끔 맥 사진을 보여주며 겉으론 사나워보여도 싸움을 할 줄 모르는 싸움개라며 자랑했다.
독신인 그에게 맥은 반려자였고 우울증 보조 치료제였다.
하루는 그가 아주 지치고 우울한 표정으로 클리닉에 왔다.
가슴이 깨어질 듯 아프다며 피투성이가 된 맥 사진을 내보이며 우는 것이 아닌가.
들려주는 얘기는 대충 이렇다.
개 싸움 노름을 전문으로 하는 갱들이 맥을 훔쳐가 싸움판에 집어 넣었다.
그런데 맥이 보기에 딱할정도로 싸움을 못해 갱들이 돈을 잃었다.
화가난 갱들로부터 환자에게 3000불을 가져오면 개를 돌려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만약 경찰에 알리면 맥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환자는 그만한 돈이 없어
여지친구에게 사정 사정하여 천 불, 친적들에게도 천불, 이천불은 모았다.
나머지 천불이 더 필요하다며 맥이 없으면 세상에서 살 맛이 없단다.
공개적으로 그를 도울 수 없어 클리닉 몇 사람과 상의하여 조용히 도와주었다.
어떻게 도움을 주었냐는 상상에 맡긴다.
정신과에서 부러진 심장 증세를 가진 사람들을 심심챦게 만난다.
부러진 심장증은 실연, 실직, 사랑하는 이의 죽음, 공황장애, 심한 학대, 고문,
노름판의 횡재나 큰 손실 등 극심한 정서적스트레스나 격렬한 운동, 대 수술 후에 찾아온다.
최근에는 반려견의 죽음 후에도 볼수있다.
증상은 일시적으로 가슴이 째질 듯 아프고 호흡곤란을 느끼는 등 심장마비와 같다.
심전도를 찍으면 실제로 죄심방의 혈류 펌프작용이 비정상으로 나오는 심장질환의 증거다.
반면 정신질환인 공황장애는 심전도가 정상이다. 진짜 삼장마비와 다른 점은 혈관이 막힌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혈류가 적어져 발생하는 증세다.
원인은 잘 모르지만 아마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노올에피레프린의 갑작스런 변화에서 생긴다는 추축이다.
치료는 별다른게 없고 환자를 안심시키고 가끔 교감신경의 활성화를 줄이는 메타 차단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만약에 죠지가 인질로 붙잡혀 몸값을 요구 당했다면 얼마를 주었을까,
또 부러진 심장증세를 느꼈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유명가수의 돈 만큼, 내 환자가 경험한 부러진 심장병은 없었겠지만 죠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들의 반려견에 대한 사랑과 별로 다를게 없었을 것 같다.
<정신신경과 전문의/일리노이 주립정신병원 Chief Psychiatrist, 시카고大 의대
정신과 임상강사 역임/텍서스 오스틴 거주/전주고~서울대 의대 졸/전주 産>
3년전 오늘(2018.6.14)
글방에 실린 글 셋 쪽
#1 내 '버킷리스트(Bucket List)' 1호…아라랏山
김나미
완주敎育長을 퇴임하는 김나미
미자야!
걱정많이 했지? 지금 이곳은 아침6시야.
걱정많이 해줘서 고마워. 지금은 좋아졌어.
맑은공기 덕인지 감기도 나가고...
이번 여행의 첫코스는 아르메니아의 신비한 영산(靈山) 아라랏山이었어.
꼭 죽기전에 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꿈을 이룬 셈이지...
흰눈에 덮힌 설산(雪山)이었고, 지금은 산을 터키에게 빼앗겼지만
아르메니아에서 봐야 그 산을 제대로 볼수있대.
참 지난 번 이원창 씨가 만든 '완우만' 그룹채팅이 있는데,
6월11일 또 만들어 2개가 되었네? 이곳은 버스안에서도 카톡이 되니까
어제는 트럼프와 김정은의 세기의 만남을 읽느라고 종일 스마트폰을 봤더니
눈이 아프네. 오늘은 선거날이니까 휴일이겠구나.
잘 지내.♥
아르메니아에서
나미가
<前완주교육장/전주시내 초등학교 교장, 교감, 남원군 주생초등학교 교사 역임/
방장의 전주완산초등 졸업동기>
#2 "사진 앵글보니 전문가 수준이군요!"
이원창
의원시절 對정부질문 중인 이원창
나미 씨,
윗 사진 보니 앵글이 전문가 수준이군요.
마냥 평회로운 풍경입니다. 즐건 여행 기대합니다.
원창이가
<코바코(KOBACO/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사장, 국회의원 역임, 경향신문 부국장 겸 사회
부장, 同논설위원 역임/동경대 대학원 연수/전주完山초등~전주北中~고대 정외과 졸>
#3 벗~~^^
이호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향기로운 일일까요?
보고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요?
세상을 휘돌아
멀어저 가는 시간들
속에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일까요?
그로 인하여
비어가는 인생길에
그리움 가득 채워가며
살아갈수 있다는 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일일까요?
가까이 멀리
그리고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라도
생각나고 아롱거리는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직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기쁜 일이
아닐까요?
아! 그러한 당신이
있다는 건
또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인가요?
언제나 힘이되어 주는
그리운 벗이여!
그대가 있음에
나의 노을길이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다는 걸
잘 알고 있답니다
고맙고 그리운 벗들이여
오늘 하루도 그대를
사랑합니다. ♡♡♡^^^
호순이가
<(봉평)허브나라 園長/三星전자 방계사장 역임/전주완산~北中·전주고~
서울대 공대 조선항공과 졸/전주 産>
..................
*호순 씨,
위의 '벗'이라는 글은 조병화 시인의
'늘 혹은 때때로'의 시를 인용해서 자기 맘대로
만들었네요.
나미
- 이상, 최근 '완우만'(김나미, 김승웅, 온미자, 이오연,
이원창, 이호순 등 여섯으로 구성된 전주완산 졸업
42회 졸업모임) 카톡에서 轉載/방장
#2 일본을 다시 생각해봅니다②
김준길
큐슈에 가려니까 80년대 마이니찌(每日) 서울특파원
나가모리 요시다까(永守良孝) 씨가 떠올랐습니다.
30년 전 내가 만난 일본인 친구였지요.
1987년 해외공보관 외보부장을 맡으면서 나는 당시 서울에 상주하던
일본인 특파원들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해방세대로서 생애 처음으로
일본인을, 그것도 엘리트 일본 언론인들을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는 더 없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80년대부터 일본말이 안 통하는 한글세대가 사회주류를 이루니까
그 무렵 일본특파원들은 서울 근무 발령을 받으면 일단 1년 동안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 연수를 필수로 마친 후부터 정식 특파원
업무를 시작했어요.
덕분에 나는 한국말 잘 하는 상께이(産經)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雄) 씨 등
몇 몇 특파원들과 자주 만나서 깊은 얘기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가모리 씨는 저와 남다른 친분을 쌓았지요.
동경대 법대를 나온 학벌을 드러내지 않고, 온화하면서도 언제나 친절한 그의 性品에
끌렸습니다.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그와 한국문화를 토론하는 재미도 있었구요.
파리와 스톡홀름에서 공보관을 지낸 경험을 살려서
언젠가 나가모리 내외를 그 때 내가 살던 목동아파트로 저녁 초대를 한 일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아내가 개발했던 간장 샐러드, 브로콜리 수프와 바게트 빵,
훈제 연어 앙트레(애피타이저), 소고기 안심 쁠라(메인 디쉬),
그리고 케이크 디저트 샐러드와 앙트레 때 백포도주, 쁠라 때 적포도주를 서브하는
파리 식 풀코스 디너였지요.
그러자 나가모리의 리턴 초청을 받고 일본 특파원들이 모여 살았던
동부이촌동 아파트에 갔습니다. 나가모리의 부인께서 손수 준비한 일본식 전통요리는
나와 아내가 난생 처음 먹어보는 데이쇼꾸(定食)였지요.
노랑 가루 파랑 가루로 튀겨낸 생선, 닭고기와 돼지고기들이 계속해서 서브되었는데
지금은 그 요리 이름들 다 잊어먹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일본식당에서는 아예 구경도 할 수 없는 메뉴들이니까요.
부인이 도쿠가와 막부(德川家康 幕府) 직할 영지였던 가나가와(金川)의
하급 무사 출신 집안이어서 그런 전통음식을 할 줄 안다는 남편의 자랑이었습니다.
나가모리와의 에피소드 하나.
1988년 어느 날 최병렬 장관으로부터 일본 언론사의 노조현황을
알아봐달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였습니다. 당시 민주화 물결을 타고 등장한 언론 노조를
대처하는데 일본의 예를 참고하기 위함이었지요.
곧바로 나와 허물없는 정도로 가깝다고 생각한 나가모리에게 전화했습니다.
“당신네 회사 노조 현황을 아는 대로 알려다오. 당신 자신은 노조원인가?” 등등.
“알겠는데 내가 다시 전화 하겠다”고 말하는 나가모리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는 그가 손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고 리턴 콜을 기다렸지요.
한 15분 쯤 지나서야 전화가 왔습니다.
손님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 동안 도쿄본사에 국제전화를 걸어
마이니찌 신문사 언론 노조 현황을 파악하여 거의 완벽한 리포트를 내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한국식으로 대충 아는 대로의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한 방 먹은 기분이었지요.
그 후 1990년 내가 뉴욕문화원장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6월 20일 일본 특파원단의 송별회가 있었습니다. 신문 방송 통신 등 총 15명의 일본 특파원단은
그 때 처음 개관한 홍제동 스위스 그랜드호텔의 비싼 프랑스 식당으로 나를 초대했지요.
그 분들에게 내가 파리에서 놀던 얘기를 꽤나 떠벌렸었던지,
프랑스 식당을 정한 것은 나를 배려한 선택이었지요.
식사를 하면서 특파원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를 만난 첫 인상부터
그 동안 나와 얽힌 에피소드를 하나씩 털어 놓는 것입니다.
대부분 나를 격려하는 덕담이 많았지만 어떤 얘기들은 그동안 공직을 수행하면서
나 자신 미처 깨닫지 못했던 행동의 아쉬움을 혼자 느끼게 해주기도 했어요.
내가 처음 만난 일본인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1990년 6월 25일 아침 뉴욕 행 대한항공을 타려고 김포공항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생애 처음으로 늦은 나이에 미국 땅을 밟아 본다는 흥분을 삭이고
있었을 때였지요. 뜻밖에 나가모리 상이 거기 나타난 겁니다.
공식적인 송별회 때 이미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 또 미오꾸리(見送り·傳送/방장 註))까지.
그렇게 헤어진 후 우리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간혹 마이니찌 특파원을 만나면 언제나 나가모리 요시다까 씨
근황을 묻곤 했지요. 내가 미국으로, 스톡홀름으로, 마닐라로 떠도는 동안 그는 마이니찌 신문
한 곳에서 외길을 걸었습니다. 마이니찌 신문 후쿠오까 본사 편집국장을 거쳐
사장까지 지내고, 마이니찌 계열 후쿠오까 RKB 방송사 사장을 거쳐
금년부터 회장으로 물러 앉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지요.
지난 4월 나가모리 씨의 이메일 주소를 확인하려고
마이니찌 서울지국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 거시는 분이 누구냐 되묻는 거예요.
김 아무개라고 하자마자, "아 옛날 해외공보관 외보부장님 아니십니까?"
80년대 현지 직원 金宣希씨가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한 직장에 입사하면 평생 직원이 되는 일본 문화의 한 단면이지요.
과연 김선희 씨는 30년전 해외공보관 외보부장까지 기억하는 마이니찌 서울지국의
institutional memory라고 하겠습니다.
김선희 씨 지시대로 나의 이메일 주소를 주었더니 며칠 뒤 다음과 같은
나가모리의 일본어 이메일 편지가 내게 왔습니다.
金俊吉様 ご無沙汰いたしております。
毎日新聞の金宣希さんからメールをもらい、金俊吉さんのアドレスと
日本訪問の予定があるとの連絡をもらいました。
福岡にお出での機会がございましたら、このアドレス宛にご連絡ください。
お待ちしております。金さんから日本語でメールが届く、
とのことでしたので日本語で メールいたしました。
ご返事は韓国語で結構ですのでよろしくお願い申し上げます。
永守拝。
그때부터 나가모리는 일본어로 나는 한국어로 이메일 소통을 하면서
우리 부부의 큐슈 여행을 짜나갔습니다. 큐슈에서 일본의 서구화 근대화 현장을
보고 싶다는 내 뜻을 따라 나가모리 씨는 6월 4일부터 7일까지 후쿠오까,
나가사끼, 가고시마에서 각각 1박 씩 3박 4일의 일정을 짜고
호텔과 열차편을 예약해주더군요.
뿐만 아니라 큐슈 근대화 유적지를 소개한 일본어 책자와 한국어로 된 관광 자료까지
한 보따리를 우편으로 미리 보내주었습니다.
.
드디어 6월 4일 후쿠오까 공항에 내린 우리는 마중 나온 나가모리 씨 내외를
만났습니다. 나보다 네 살이 더 젊은 나이어서 그런지 김포공항 미오꾸리 후 정확히
28년 만에 본 나가모리 씨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
“일본 제일의 해변 타워”라는 Fukuoka Tower에 올라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왼쪽부터 나가모리 씨, 내 아내, 나가모리 부인, 그리고 나.
내 뒤로 나가모리 씨가 회장으로 있는 RKB방송사 건물이 보입니다
자신의 낡은 도요타 컴팩트 승용차를 직접 몰고 그 날은 우리 부부를 위해
후쿠오까 안내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번 달부터 회사 차를 반납하고
집의 차를 직접 운전하여 출퇴근한다는 부인의 변명과 함께. (계속)
<서울대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필리핀 아시아태평양大 한국학 프로그램 주임교수,
駐美공사 역임 /경기고~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 同대학원 졸>
5년 전 오늘(2016.6.14)
글방에 실린 글 再錄
李陸史의 ‘광야(曠野)’에 부쳐
구대열
방장님,
하태형 교수님의 글을 받고 몇 자 감상을 붙입니다.
구대열
...............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하태형 교수님이 보내주신 이육사(1904.5.18.-1944.1.16.)에 관한
도진순 교수(창원대 사학과)의 논문 두 편 잘 읽었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주제이고
유익했고 많은 걸 배웠습니다. 도 교수는 저도 잘 아는 근/현대사 전공학자인데
이런 문학적인 논문을 썼다는 게 놀랍군요.
‘광야’는 ‘청포도’와 함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것으로 일찍부터 좋아했던
시입니다. 두 글을 통해 육사의 삶과 성장과장, 지적배경 등을 알게 되어
시의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의 글은 논문의 내용을 두고 왈가왈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글방에는 문학도들이 많고 고등학교 때 문예반장도 몇 분 계시지요.
이 분들과 술자리에서 아마추어로서 시의 감상에 대해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벼운 기분으로 시를 대합니다.
한번 읽어보고 ‘야, 이거 좋다.’고 생각되면 몇 번 다시 읽고,
그래도 좋으면 50번 100번 읽어 외우게 됩니다. 그러면 단순한 단어 하나도
새로운 의미도 다가옵니다. 나는 시를 전문으로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典據를 찾고 주석이 붙는 시는 ‘가급적’ 피하려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intellectual poem들입니다.
주변에 T. S. Eliot을 공부하던 사람이 있어 같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각주가 수없이 나오죠. 이걸 보고나니 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서 시를 읽기는 싫습니다.
중국 시들은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이전 세대의 글에서 무엇을 찾고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시가 아니더라도 공자의 글 5자를 해석한 주석이
2만자에 이른다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주석을 다 읽고 나면 이미 60이 넘어 과거볼 나이가 지난다나요?
조선시대에 우리 문인들 사이에도 이같은 ‘놀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의 시에는
'步古韻贈友人 以道惜別之意(보고운증우인 이도석별지의- 옛 사람의 운을 본받아
친구에게 주면서 석별의 뜻을 표하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고경명의 시를 인용할 필요는 없지만 기-승-전-결이 이와 유사한 시들을 볼 수 있지요.
이건 자유로운 정신의 감흥에서 시가 나온 것이 아니라
낑낑거리며 논문 쓰는 기분으로 시를 짓는 게 아닐까요?
그러면 육사의 ‘광야’를 제 나름대로 읽어볼까요?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아주 옛날, 천지가 개벽했을 때(천지창조가 되었을 때) 닭이 있었겠나?
아니면 (조금 역사성을 붙여) 닭이 우니 새벽이 열리 듯 이제 식민지 조선에도
새 세상이 시작되려나?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이 부분을 읽다보면 자연히 한반도 지형을 떠올립니다.
남북으로 뻗은 백두대간에서 동에서 서로 작은 산맥들이 가지를 치면서 바다로 향해
뻗쳐 나오지만 이 ‘광야’ 혹은 평야는 고스란히 남겨두었구나.
넓은 김제 평야를 상상합니다.
끊임없는 광음을/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그리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 산맥들 사이에 한강이 생기고 금강이 생겼구나.
지금 눈 나리고/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 부분이 약간 혼란스럽습니다.
‘백설이 자자진 골에....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났고’,
‘매화 옛 등걸에...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와 같이 눈이 그치고
겨울이 지나야 매화가 피는데, 여긴 왜 눈 내리는 가운데 매화가 피었단 말인가?
‘홀로 아득하니’는 저 멀리서 매화만이 냄새가 풍겨온다는 말인가요?
최근까지도 집에 제법 큰 매화나무가 있어 초봄에 꽃이 만발했는데
저는 매실주나 매실의 향은 맞지만 코가 나빠서인지 ‘매화(꽃)’향은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여튼 약간 혼란스러운(disturbing) 부분이지만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시절(세상)을 맞아 조그마한(가난한) 씨앗을 뿌린다는 건
육사 류(類)의 저항의 몸부림이라 믿습니다.
굳이 애국이니 항일정신 같은 표현을 쓸 필요는 없겠지요.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것도 육사 류(類)의 레토릭(rhetoric)이라 봅니다.
먼 훗날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라... 나폴레옹의 말 ‘마렌고’는 백마지만
알렉산더의 ‘부체팔러스(Bucephalus)’나 동양에서 항우의 오초마,
여포-관우의 적토마 등은 모두 백마가 아니죠. 그러나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1930-45년 사이
군대를 사열할 때 탄 말은 백마더군요.
또 ‘백마 타고 나타난 왕자’와 같이 백마는 환상적인 등장을 상징하겠지요.
그 다음 ‘초인’은 육사가 니체의 초인을 알았을까요?
그 의미를 정확히 알기보다는 들어는 보았을 겁니다.
세속적 인간을 뛰어넘어 이상과 지적능력, 고귀한 목표를 향한 정열을 가진 인간
혹은 수난의 예수(니체는 싫어하겠지만)와 같은 초인을 육사가 상상했을까요?
아니면 두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철부지 지크프리트 같이 한번 휘둘러 주변을 제압하는
오늘날 마초 식 초인을 생각했을까요? 저는 후자일 것 같습니다.
이건 1930-40년대 우리의 문인들이 서양의 문학이론을 겉핥기만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서양 이론을 가장 많이 수용하고 소개한 김기림이 대표적입니다.
마지막으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넓은 들’이 아니라 거친 땅(wildness)이죠.
모택동이 말한 ‘하나의 불침이 광야를 태우는 큰 불길을 만든다(星星之火, 可以燎原/
A single spark can start a prairie fire)’의 들판입니다. 광야가 꼭 만주벌판과 같이 넓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국의 중부나 북-중부 유럽 평원, 혹은 만주나 양자강 유역 등
잘 정돈된 농지는 아무리 넓어도 ‘광야’라는 기분은 쬐끔도 들지 않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산자락을 몇 년 방치하면 갈대가 무성해지는데
날이 흐리고 눈이 쏟아지면 이런 곳을 지날 때 ‘광야’라는 기분이 듭니다.
대학 때 이런 경험을 했는데, ‘와, 이제,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엄습하더군요.
광야는 이같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두려움을 안겨주는 땅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구절은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 백마를 타고 ‘짠’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하여
(이 광야에서)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크게 한번 외치면
모든 것이 제압되고 이루어지리라는 육사의 희망과 예언이 아닐까요?
두서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2016.6.14.)
<梨大정외과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박사(런던정치경제대/LSE)/著書:"삼국통일의
정치학"정치학"치학", "제국주의와 언론"/前한국일보 기자/부산고~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고성 産>
10년전 오늘(2011.6.14)
글방에 실린 글 再錄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하태형
저는 개인적으로 강원도 봉평을 좋아합니다.
강원도를 갈 때면 항상 봉평을 들러, 이효석 생가도 둘러보고,
메밀로 만든 국수도 먹고, 그리고 또한 꼭 들리는 곳이 바로 ‘허브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허브나라’의 주인공께서 글방의 일원이시란 점이 놀랍고도 새삼스럽습니다.
‘허브나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떠오른 글이,
바로 위진(魏晉)시대 대문호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란 글입니다.
사실, 은퇴를 앞둔 사람치고 귀원전거(歸園田居)를 한 번씩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호순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적인 <귀거래(歸去來)>를
이루신 분으로 오랜동안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한편, <귀거래사(歸去來辭)>란 글은, 훗날 송(宋)대,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인 구양수(歐陽修)가
“동진시대에는 <귀거래사> 한편 이외에는 문장이 없다(東晉無文,惟《歸去來兮辭》
一篇而已。)”라고 극찬한 문장중의 문장입니다.
오늘은 이 유명한 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도연명(陶淵明)은 몰락한 가문의 출신으로, 매우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세 번 벼슬살이를 나갔다가,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세번 귀전(歸田)합니다.
이 글은 그가 마지막으로 벼슬살이를 나간 팽택령(彭澤令) 벼슬을 80일 만에 관두고
귀전(歸田)함에 따른 기쁨과 전원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한 명문입니다.
<宋書(송서) 隱逸傳(은일전)>에 의하면, 그가 팽택령(彭澤令)을 하고 있을때
심양군 장관의 독우(督郵: 순찰관)가 순찰 온다 하여, 자신을 보좌하는 향리(鄕吏)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배알 하십시오" 라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鄕里)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돌아가면서 이 글을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郡遣督郵至縣,吏白應束帶見之,潛嘆曰:“我不能為五斗米,<wbr />折腰向鄉里小人!”
即日解印綬去職,賦《歸去來》).
그러나 이러한 것은 기실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당시 기울어가는 진조(晉朝)의
어지러운 정세 하에서, 난국을 수습할 길은 막연하고 그렇다고 시류(時流)에 휩쓸리는 것은
더욱 마음이 내키지 않아,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 은거함으로서 평소의 소박한 뜻에
충실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라 합니다(박삼수(朴三洙) 논문, <도연명 귀전(歸田)후의 심경>)
歸去來兮(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전원장무호불귀) (고향집)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기자이심위형역) 이미 스스로 마음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괴롭혔거늘),
奚惆悵而獨悲(해추창이독비) 어찌 서러워하며 홀로 슬퍼하여 (마음을 더 괴롭혀야)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오이왕지불간) 어차피 이미 지난 일 탓한들 소용없음을 깨달았으니,
知來者之可追(지래자지가추) 앞으로는 바른 길을 좇을 수 있음도 알았노라.
實迷塗其未遠(실미도기미원) 사실 길을 잘못 들었으나 그리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니,
覺今是而昨非(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 그릇된 것임을 알았도다.
이 글은 중국발음으로 읽어보면 바로 노래가 될 정도로 아름다운 운율을 가지고 있는데,
6언씩 나오는 문장부분은 우리말 발음으로 읽어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워낙 빼어난 문장이라, 한 글자 한글 자를 자세히 소개드려야 마땅하나 그렇지 못함이
이 명문(名文)에 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만, 전체적인 윤곽을 소개드리는데
목적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간략히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의 첫머리는 벼슬살이란 잘못된 길을 선택하였다가,
비로소 늦었지만 귀전(歸田)이란 옳은 결정을 한 소회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두 단어는 세 번째 구(句)의 ‘心爲形役(심위형역)’과
마지막 구(句)의 ‘今是昨非(금시작비)’란 단어입니다.
먼저, ‘心爲形役(심위형역)’이란 단어의 뜻은, ‘마음(心)이 육신(形)으로 말미암아
고생했다(役), 즉 먹고살기 위해 마음에 내키지 않는 벼슬살이를 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뜻의 축약된 표현인데,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구절을 전고(典故)한 것입니다.
이 글 이후, 수많은 후대시인들이 ‘마음고생’이란 뜻으로, 이 ‘形役(형역)’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매월당(梅月堂)의 시(詩)와 다산(茶山)의 시(詩)에
다음과 같이 이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김시습(金時習) <무제(無題)>
終日芒鞋信脚行(종일망혜신각행) : 종일토록 짚신 신고 내키는 대로 걸어,
一山行盡一山靑(일산행진일산청) : 산을 다 걸으면 또 푸른 산....
心非有想奚形役(심비유상해형역) : 잡념이 없는데 어찌 마음이 육체의 노예가 되며,
道本無名豈假成(도본무명기가성) : 진리는 이름이 없거늘 어찌 위선을 행하리오?
정약용(丁若鏞) <타맥행(打麥行:보리타작)>
觀其氣色樂莫樂(관기기색낙막낙)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了不以心爲形役(료불이심위형역)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樂園樂郊不遠有(낙원낙교불원유)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何苦去作風塵客(하고거작풍진객)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오?
그 다음, ‘今是昨非(금시작비)’는 <莊子(장자)> <寓言(우언)>편에 나오는 글에서 따온 단어로,
‘지난날(昨)이 잘못되었고(非), 오늘에야(今) 바른길로 들어섰다(是)’는,
이 단락의 주제 같은 글귀입니다.
이 명문(名文)이후 ‘작비(昨非)’란 단어는, 과거를 부정하는 의미보다는
‘금시(今是)’의 긍정적인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매일매일 새롭게 발전 한다’는 미래지향적인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석(何石)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서당의 당호(堂號)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쁜 마음과,
한시 빨리 고향집에 도착하고 싶은 조급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舟遙遙以輕颺(주요요이경양) (집으로 돌아가는)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떠가고,
風飄飄而吹衣(풍표표이취의) 표표히 부는 바람 펄럭펄럭 옷자락을 나부끼누나.
問征夫以前路(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여정이 얼마나 남았느냐 묻기도 하고,
恨晨光之熹微(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 하기도 하였도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급한지, ‘恨晨光之熹微(한신광지희미: 새벽에 길을
나서매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 하기도 하였도다.)’라는 구절을 통해
선명히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세 번째 단락은 고향집에 도착한 후의 정겨운 정경이 펼쳐집니다.
乃瞻衡宇(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간다.
僮僕歡迎(동복환영) 머슴아이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치자후문) 어린 것들이 대문에서 나를 맞는구나.
三徑就荒(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휴유입실) 어린 놈 손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인호상이자작) 술 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기쁜 표정 짓는다.
倚南窓以寄傲(기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마음을 푸니,
審容膝之易安(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드릴만한 작은 집이지만 편안함을 알겠노라(審).
집에 도착해, 방에 들어간 후 술을 한잔 드리키니(自酌(자작)),
비로소 벼슬살이하느라 찡그렸던 얼굴이 펴지고(怡顔(이안)),
그다음 몸이 펴지고(倚南窓(기남창)), 마음이 펴지니(寄傲(기오)),
편안함을 알겠노라(審易安(심이안))라는 시인의 심리묘사가 단계적으로 전개되어
참으로 진솔하게 느껴지며, 글귀 또한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의 ‘기오(寄傲)’란 단어는,
원래 진(晉) 초기 육운(陸雲: 서진 최고의 문장가인 육기(陸機)의 동생)의
<일민부(逸民賦)>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만, <귀거래사>이후 널리 알려졌으며,
도연명을 평소 존경하던 송(宋)의 소동파는 바로 도연명의 이글에서 따
<기오헌(寄傲軒)>이란 시를 지었고, 조선시대 순조(純祖)대왕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뒷날 헌종 때 익종(翼宗) 칭호를 받음)는 이 단어를 따서,
창덕궁 후원에 기오헌(寄傲軒)이란 건물을 지었을 정도입니다.
그 다음 주목할 단어는 ‘무릎하나 들인다’는 뜻의 ‘용슬(容膝)’이란 단어입니다.
<고사전(高士傳)>〈진중자(陳仲子)>편에 보면, 진중자(陳仲子)는 제(齊)나라 사람으로,
그의 형이 제나라 경대부(卿大夫)의 벼슬을 해 봉록이 만종(萬鐘)에 달했는데,
진중자는 이를 옳다 생각하지 않아, 처자를 데리고 초나라로 가서
가난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았다 합니다.
초왕(楚王)이 그 어짐을 전해 듣고, 재상으로 삼고자하니,
처(妻)가 말리길, “그대는 좌측 손에는 금(琴)을, 우측 손에는 책을 끼고 살면서
가난하지만 그 속에서 낙(樂)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비록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기마행렬을 줄지어 붙이고 다녀도(結駟連騎),
편하게 쉴 장소는 고작 두 무릎을 들여놓을 만한 공간에 불과하며(所安不過容膝),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어도(食方丈於前) 맛있게 먹는 것은 고기 한 점에
불과합니다(所甘不過一肉).
지금 무릎을 들여놓을 만한 공간의 편암 함과(容膝之安) 고기 한 점의 맛(一肉之味) 때문에
초나라의 근심을 떠안게 된다면, 어지러운 세상에는 해로움이 많은지라
당신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하자,
진중자는 사신에게 사양의 뜻을 전하였다합니다.
(陳仲子者,齊人也。其兄戴為齊卿,食祿萬鐘,仲子以為不義,將妻子適楚,居於陵,自謂於陵仲子。
窮不苟求,不義之食不食。遭歲飢,乏糧三日,乃匍匐而食井上李實之蟲者,三咽而能視。
身自織履,妻擘纑以易衣食。楚王聞其賢,欲以為相,遣使持金百鎰,至於陵聘仲子。
仲子入謂妻曰:「楚王欲以我為相,今日為相,明日結駟連騎,食方丈於前,意可乎?」妻曰:「夫子左琴右書,樂在其中矣。
結駟連騎,所安不過容膝;食方丈於前,所甘不過一肉。今以容膝之安,一肉之味, 而懷楚國之憂,亂世多害,恐生不保命也。」
於是出謝使者,遂相與逃去,為人灌園。)
꾸밈없이 소박함으로 유명한 도연명(陶淵明)이란 시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가
바로 이 ‘용슬(容膝)’이란 단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태형/서예평론가/(주)소너지 대표이사/서울대 경영대 졸/
경제학박사(美뉴욕주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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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