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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서문, 그리고 서문들
----세계의 사상가들
반경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문에는 “나의 저작은 정직과 공명을 이마에 써붙이고 쓴 것이라 칸트 이후 유명해진 세 사람의 궤변가의 저작과는 크게 다르다. 나의 입장은 언제나 사려, 즉 이성에 따르고 정직한 말로 일관되어 있으며 지적 직관이니 절대사유니 하는, 바른대로 말해서 허풍이나 사기와 같은 잘못된 영감을 주는 입장에는 서 있지 않다”라는 말이 들어 있고,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는 “나의 작품 중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나는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다 준 것이다. 앞으로 수 백 년 동안 퍼져나갈 목소리를 가진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책이며 그것은 바로 저 높은 산의 공기이며 인간에 대한 모든 사실이 고산의 저 아득한 밑바닥에 놓여져 있다”라는 말이 들어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정직과 공명을 이마에 써붙이고 자기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 책이고,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가져다가 준 책이다. 왜, 무엇 때문에,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이처럼 오만방자하게 소리 높여 자기 자신의 저서들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며, 왜, 또한 그들은 다같이 ‘언제나 겸손’이라는 도덕적인 미덕을 그처럼 사양하게 된 것일까? 아무튼 그들의 목소리에는 그들이 오랫동안 소외되고 박해를 받았다는 ‘원한 맺힌 분노’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어렵고 힘든 시절을 지나서,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의지의 표상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며, 니체는 또한, 언제나 이 땅에 두 발을 튼튼히 내린 짜라투스트라의 사상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최초의 진리(사상)의 창시자이며, 그들의 사상적 지위가 人神으로까지 올라간 세계적인 대사상가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의 창시자이고, 니체는 건강한 염세주의(초인 사상)의 창시자이다. 요켠대 그들의 서문에는 최초의 진리의 창시자로서의 하늘을 찌를듯한 환희에의 기쁨이 담겨 있는 것이고, 또한 그들의 목소리에는 모든 인간들을 지상낙원으로 인도하겠다는 구원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모든 사상은 행복에의 약속이며, 낙천주의가 양식화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서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서문이란 어떤 저서의 머리글이며, 자기 자신의 책을 모든 독자들에게 안내하는 머리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머리글은 가장 아름답고 예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머리글은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이상형으로서의 저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신세계로 우리 인간들을 인도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담겨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서문이란 언제, 어느 때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과 맞닿아 있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서문이란 언제, 어느 때나 모든 기적이 가능한 지상낙원의 입구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서문에는 저자의 집필의도와 그 목적이 담겨 있고, 그리고 그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과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의 감격과 기쁨과도 같은 그 소회가 짙게 묻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문을 보면 그가 삼류인지, 제일급인지 알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서문의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문장에는 새로운 사상과 이론의 전모가 가장 함축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문을 보면 그 책이 최고급의 사상과 이론서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 서문에는 전인미답의 세계를 탐험한 선구자의 감격과 그 기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역사의 무대에서 제 발로 걸어나가지 않으며, 따라서 공업에서 구현된 생산력을 전세계적으로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산업사회----그의 조국인 독일은 아직 산업사회가 미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를 오랫동안 고찰한 결과, ‘빈익빈/ 부익부’라는 구조적 문제를 발견하고, 따라서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사회(공산주의)를 꿈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경제학이 부르조아적인 한 ‘곧 자본주의적 질서를, 사회적 생산이 역사적으로 지나가는 발전단계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형태라고 이해하는 한’, 정치경제학이 과학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계급투쟁이 잠재적인 상태에 있거나 또는 고립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동안 뿐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서문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 사상의 완성자임과 동시에, 독일 관념철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가 있다.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은 그의 삼대 비판철학서이며, “현대는 바로 비판의 시대이며 모든 것이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교는 그 신성에 의하여, 그리고 입법은 그 존엄에 의하여 비판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종교이든 입법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을 당연히 초래할 것이며, 또한 이성이 그의 공명정대한 비판을 견디어 낸 것에만 허용하는 진정한 존경을 요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라는, 그의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정신이 각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은 칸트의 관념철학의 정신을 이어 받았고,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등은 그의 비판철학의 정신을 이어 받았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일체의 경험과 상관 없는’ ‘형이상학’과 ‘순수이성’에 대한 그의 비판정신과 함께, 새로운 형이상학의 체계(순수이성의 체계)를 완성해야겠다는 그의 인식론의 목표가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프러시아 삭손州 뢰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일생내내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으로, 모든 가치들의 전복을 기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라고 그가 부르짖었을 때, 바로 그 부르짖음 속에는 ‘신의 사망선고’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그의 반기독교주의와 반형이상학주의, 그리고 그의 반이상주의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것이다. 초인은 신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며, 하늘 나라의 이상적인 천국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초인은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인간이며, 그는 이 땅에 두 발을 튼튼히 내리고 있는 짜라투스트라이다. 짜라투스트라(니체)는 칸트 이후 비판철학의 완성자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의 옹호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프랑스의 상파뉴 지방의 소읍에서 태어났으며,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수학전공의 이학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 고등학교의 물리--화학교사와 철학교사를 거쳐서 43세 때 소르본느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소르본느의 과학철학의 교수가 되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인식론적 단절’, 혹은 ‘인식론적 장애물’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사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개념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과학철학의 반대방향에서, 너무나도 반데카르트적이고, 너무나도 반뉴턴적인 ‘시학 이론’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니체와 쇼펜하우어 이후, 가장 아름답고 멋진 서문을 쓴 철학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아름답고 멋진 ‘시학’을 정립한 철학자이다. “이처럼 몽상이 우리의 휴식을 강조하러 올 때는 온 우주가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러 오는 것이다. 잘 꿈꾸려는 자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선 행복하세요. 그러면 몽상이 자기의 진정한 운명을 답파한다. 그것은 시적 몽상이 된다. 그 시적 몽상을 통해, 그것 속에서 모든 것은 아름답게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은 인간의 이성과는 반대방향에서, ‘인간의 몽상’을 탐구한 시학이며, 진정한 몽상 속에서만이 우리 인간들은 행복하게 되어 있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몽상은 우주적인 몽상이며, 그것은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로의 초대가 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셸 푸코는 1948년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0년에는 심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리고 1952년 파리대학에서 정신병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탈현대 사상가이기도 하다.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의 저서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며, 그의 반이성적인 사유는 전세계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충격적인 전율과 그만큼의 새로운 사고의 진전을 가져다가 주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앎은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은 앎을 생산한다. 이처럼 지식과 권력의 복합체로서의 담론의 질서를 분석하고, ‘정상과 비정상은 권력의 조작이며’, 어느 누가 미쳤다고 하는 것은 ‘이성이 광기에게 하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언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준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11년 3월, 일본의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은 일찍이 미셸 푸코가 예언한 대로 인간의 사라짐, 혹은 인간의 최후의 종말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00년 전에는 인간의 숫자가 20억에 불과했지만, 지금 현재의 인간의 숫자는70억에 육박할 정도이다. 기껏해야 60전후의 인간수명을 80세 이상으로 늘려놓은 의학의 성과가 에너지의 낭비로 이어지고, 드디어, 마침내는 원자력이라는 극약처방으로 그 에너지 부족을 충당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사물의 질서에서 일종의 균열에 불과하다는 것, 아니, 인간의 사라짐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성중심주의의 횡포,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횡포에 대한 사망선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푸코의 반이성적인 사유는 그의 계보학적이고도 고고학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모든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폭로하는 탈현대 사상으로 완성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사상은 문학, 역사, 철학, 사회과학, 정신분석학 등, 그 모든 분야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가 있다.
마르크스, 칸트, 니체, 바슐라르, 미셸 푸코의 서문들에는 그 저서의 분명한 목적이 들어 있고, 그리고 그 서문들을 읽다가 보면, 그들이 제일급의 사상가인지, 아닌지를 단번에 알게 된다. “이 계급투쟁이 과학적 부르조아 경제학의 조종을 울렸다”라는 마르크스가 그렇고, “만일 정부가 학자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비판의 자유를 보호”하라는 칸트의 말이 그렇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정신으로 탐구했으며, 한편으로는 거짓과 사악이 널리 퍼지고 허풍(피히테와 셸링)이나 사기(헤겔)가 크게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하였다. 현대는 이 20년 동안 그 정신적 괴물 헤겔을 최대의 철학자로 떠들어대어 그 소리는 전유럽에 울려퍼지고 있다. 아마도 현대에는 사람에게 줄 월계관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찬미를 매음한 시대의 비난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라는 쇼펜하우어가 그렇고, “이 책에서 논하는 이른바 핵심적이고 체계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자연에 따르라’는 이 점이 바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할 것이다. 또, 이 때문에 사람들은 틀림없이 나를 공박할 것이다”라는 장 자크 루소가 그렇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탐욕 앞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밖에는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고, 칸트는, “만일 정부가 학자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비판의 자유를 보호”하라고 역설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언제, 어느 때나 철학자의 도덕성을 역설하고 있고, 장 자크 루소는 만인들의 반대방향에서, 자기 자신의 자연주의를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최고급의 사상과 이론을 완성한 세계적인 대철학자들은 그 감격과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현대는 바로 비판의 시대이며 모든 것이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교는 그 신성에 의하여, 그리고 입법은 그 존엄에 의하여 비판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종교이든 입법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을 당연히 초래할 것이며, 또한 이성이 그의 공명정대한 비판을 견디어 낸 것에만 허용하는 진정한 존경을 요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마뉴엘 칸트
나의 작품 중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나는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다 준 것이다. 앞으로 수 백년 동안 퍼져나갈 목소리를 가진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책이며 그것은바로 저 높은 산의 공기이며 인간에 대한 모든 사실이 고산의 저 아득한 밑바닥에 놓여져 있다. 그것은 또한 가장 심오하고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하였고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은 샘이며, 그 샘에 두레박을 내리면 황금과 선善이 가득 담겨져 올라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는 어떠한 예언자도 없으며, 종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질병과 권력에 대한 욕구, 이 양자가 합쳐진 소름끼치는 혼혈아도 없다. 이 책에 담긴 지혜의 뜻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가락을 똑똑히 들어 보아야 한다.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가장 조용한 말이다. 비둘기의 발로 오는 사고 思考만이 세계를 이끈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 시대의 시세계 속에 어떻게 들어갈까? 자유로운 상상력의 시대가 열렸다. 사방에서 이미지들이 대기를 침범하고,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가고 강대한 꿈에 혹은 귀를 혹은 눈을 부른다. 시인들이 넘쳐난다. ----대소시인, 유명한 시인,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 사랑받는 시인, 매혹하는 시인, 시를 위해 사는 자는 모든 걸 다 읽어야 한다. 하찮은 팜플렛에서도 나로서는 새로운 이미지의 빛이 얼마나 자주 솟구쳐 나왔던가! 새로운 이미지에 의해 활기를 얻는 걸 받아들인다면, 낡은 책의 이미지에서도 무지개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시의 세대는 생생한 기억 속에 통합된다. 새 세대가 옛 세대를 깨운다. 옛 세대가 새 세대 속에 다시 살아난다.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새 책들은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가! 정말 매일 새로운 이미지들에 대해 말해 주는 책들이 바구니 가득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이 誓願은 자연스럽다. 이 기적은 쉽다. 저기 하늘에서는, 천당이란 거대한 도서관이 아닐까 싶어서다.
----가스통 바슐라르
{행복의 깊이}는 나의 눈물, 나의 피와 땀, 그러나 이 {행복의 깊이}는 나의 사상의 신전의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또한 그만큼 비옥한 텃밭이다.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과 ‘삶의 의지’가 자라나고,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의 세목들’이 자라난다.
大철학예술가인 시간이 오늘도 무릎을 꿇고 무한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곳----.
시간은 영원한 시간이고 그 도취의 밀도는 무한히 황홀하고 경건하기만 하다.
나는 死神의 맏형님, 나는 그 死神에게 나의 사상의 신전에는 머리카락 한 올도 드러내지 않도록 명령을 내려둔 바가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가장 아름답고 멋진 삶과 가장 아름답고 멋진 죽음을 권한다.
아아, 낙천주의 사상이여!
아아, 행복의 깊이여!
----반경환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상과 이론의 완성이며, 이 사상과 이론만이 우리 인간들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덧없지만, 사상과 이론은 영원하고, 그 어떤 새로운 시대에도 그 죽음을 모른다. 사상과 이론은 이상적인 인간의 보증수표이며, 그 인간은 최초의 진리의 창시자로서 모든 인간들을 다스리게 된다. 부처와 예수처럼, 마르크스와 칸트처럼, 혹은 니체와 쇼펜하우어처럼, 사상가는 전제군주이며, 이 세상의 모든 도덕과 법률을 강제할 수 있는 입법권을 지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어떻게 그 최초의 진리의 창시자가 하늘을 찌를 듯한 환희에의 기쁨을 노래하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그 최초의 진리의 창시자가 모든 인간들의 행복을 약속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서문들은 너무나도 짧아서 그 가치가 없고, 몇몇 대가들의 서문은 그 명성에 비하여 일고의 가치도 없거나 지나치게 난해하여 오히려 자기 자신을 독자들로부터 소외시키는 아주 이상야릇한 현상을 유발시키고 있다. 이밖에도 대부분의 서문들은 헤겔의 {정신 현상학}의 경우에서처럼, 그 명성에 비하여 지나치게 짧거나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데카르트의 {성찰},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몽테뉴의 {수상록},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 {도덕의 계보}, {즐거운 지식}, {선악을 넘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공간의 시학},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반경환의 {행복의 깊이}, {반경환 명시감상} 등의 20여 편의 서문들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뛰어난 서문들이어서, 모든 서문들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어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서문은 수많은 좌절과 ‘지옥 속의 고통의 훈련과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서문은 모든 글쓰기의 최종적인 완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본문을 먼저 쓰고 서문을 쓰지, 서문을 쓰고 그 다음에, 본문을 쓰는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서문은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서문은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문장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서문은 언제, 어느 때나 젖과 꿀이 넘쳐 흐르는 약속의 땅을 지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혜(사상)의 열매들이 언제, 어느 때나 주렁주렁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서문에는 저자의 집필의도와 그 목적이 담겨 있고, 또한 그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론이 담겨 있다. 내가 이 서문을 쓰게 된 것은 계간시전문지 {애지}에 {서문, 서문, 그리고 서문들--세계의 사상가들}의 연재를 기획했기 때문이며, 우리 한국인들(우리 미래의 학자인 독자 여러분들)에게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서문의 예를 제시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젠가, 어느 때는 이 책을 계기로 ‘서문학’이 새로운 학문으로 정립될는지도 모른다.
사상과 이론을 정립한 민족은 고급문화인 되고,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지 못한 민족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노예민족이 될 수밖에 없다.
사상과 이론만이 고귀하고 위대하고, 사상과 이론만이 영원하고 영원불멸의 삶을 향유한다.
하루바삐 우리 한국인들은 마르크스,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미셸 푸코, 찰스 다윈 같은 세계적인 대상가들로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된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글들도 번역자의 지적 수준과 그 문장 실력이 형편없으면, 그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 아무튼 이 어렵고 힘든 책들을 되풀이 읽고, 번역--소개해준 번역자 선생님들께 무한한 경의를 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