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대로 -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 등정
지난해 5월, 고향 친구와 함께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지인 일행과 어울려 서울과 경기도 고양, 양주, 의정부에 폭넓게 걸쳐 있는 ‘북한산둘레길’을 걸은 적이 있다. 북한산둘레길 13구간인 ‘송추마을길’부터 14구간인 ‘산너미길’, 15구간인 ‘안골길’, 16구간인 ‘보루길’, 17구간인 ‘다락원길’을 거쳐 18구간인 ‘도봉옛길’까지 하루에 약 18km를 걸었다. 그런데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 때문인지 계곡과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50여 리에 가까운 산길을 걷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둘레길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향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나이에도 한라산 백록담에 오를 수 있을까?” 말이 끝낼 새 없이 “그야 성판악에서 백록담을 거쳐 관음사 입구까지의 거리가 19km이니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하고 쉽게 말을 받았다. 쓸데없는 자신감이 용기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젊은 사람들에겐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이 일흔을 넘긴 사람들은 50여 리에 해당하는 거리는 평지를 걷는 것조차 힘에 버거운 일이다. 요즘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다리의 힘이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힘으로 하는 일에는 자꾸만 자신감이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북한산둘레길을 걷고 난 뒤부터 백록담에 오르는 게 우리에게 하나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가 되고 말았다. 우리 나이에는 힘이 달려 늦으면 늦을수록 산에 오르기가 더더욱 어려워진다. 따라서 계획을 세웠다면 뒤로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몇 달 전, 올해 안으로 백록담에 오르기로 말을 맞춘 뒤 6월 11일에 떠나는 것으로 부랴부랴 날을 잡았다. 6월 중순 이후에는 무더위와 장마가 시작돼 산행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당일치기 산행 계획을 세웠기에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성판악으로 이동하여 아침 8시 30분부터 한라산 산행을 시작했다. 조금 흐린 데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등산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산길에는 산죽이 무성하고, 이곳저곳 함초롬히 피어 있는 천남성과 앵초의 꽃이 우리를 반겼다. 성판악에서 출발하여 ‘속밭대피소’에 이르는 산길은 무척 부드러워 발길이 가벼웠다. 그리고 속밭대피소를 지날 땐 라벤더향 비슷한 보리수나무 꽃향기가 코끝에 은근했다. ‘사라오름’ 입구를 지나자 산길이 가팔라지면서 들숨날숨이 거칠어지고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진달래밭대피소’에 이르렀을 땐 등산객이 다쳤는지 119구급헬기가 굉음을 내며 대피소 근처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1,700m 고지를 지나니 우뚝하게 솟은 한라산 정상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한라산(漢拏山)은 신생대 제3기 말에서 제4기 초 화산폭발과 용암분출로 생긴 산이며, 해발 1,947m의 높이로 남한에서 가장 높다. 산의 이름은 은하수(漢)를 당긴다(拏)는 뜻으로 손으로 은하수를 잡을 수 있을 만큼매우 높은 산을 의미한다. 산정에는 지름이 약 600m, 둘레가 약 3km쯤 되는 넓고 깊은 분화구가 있다. 그리고 분화구에는 물이 고인 연못이 있는데 성스러운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 하여 백록담(白鹿潭)이라 불렀다. 백록담 둘레에는 기암괴석들이 병풍을 친 듯이 둘려 있으며 순상화산의 원지형이 잘 보존되어 학술 가치가 크고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화산지형이다. 그리고 산에는 눈향나무, 구상나무, 철쭉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백록담은 오래전에는 항시 물이 고여 있었으나 지금은 큰비가 내렸을 때만이 물이 고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라산국립공원은 전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무들의 키가 낮아져 제주도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산길에는 붉은병꽃나무와 산목련 꽃이 피어 있었으며, 하얗게 뼈대를 드러낸 구상나무, 주목, 가문비나무의 고사목이 고산지대의 색다른 풍경을 자아냈다. 마지막 힘을 쏟아 가파른 산길을 기어오르다시피 정상에 올라 두 손을 하늘로 뻗으며 “야호!” 소리를 질렀다. 그래, 섣부른 자신감으로 시작한 산행이었지만 기어코 해냈다는 성취감에 마음이 뿌듯했다. 분화구를 내려다보니 이틀 전에 내린 비로 백록담에 적잖은 물이 고여 있어 신비감을 더했다. 정상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삼각봉대피소를 거쳐 관음사 쪽으로 하산했다. 삼각봉대피소에서 관음사지구 탐방지원센터에 이르는 길은 끊임없이 돌길이 이어져 산에 오를 때보다도 더 많은 주의가 필요했다. 산행을 마친 때가 오후 5시, 산행하는데 모두 8시간 30분이 소요됐다.